.淸州韓門(청주한문) 韓宗愈(한종유):(1287~1354) 韓宗愈(한종유):(1287~1354)-(高麗末의 文臣, 漢陽府院君으로 致仕, 著書로 復齋集) 【姓 名】 韓宗愈(한종유) 【生歿年】忠烈王(충렬왕)13年(1287)∼恭愍王(공민왕)3年(1354) 【本 貫】 淸州(청주) 韓(한) 【字·號】 師古(사고),復齋(복재) 【諡 號】文節(문절) 【著書·作品】《復齋集(복재집)》,〈楮子島(저자도)〉 【時 代】 高麗 【性 格】 文臣 忠烈王(충렬왕) 13年(1287)∼恭愍王(공민왕) 3年(1354). 本貫(본관)은 淸州(청주), 字(자)는 師古(사고), 號(호)는 復齋(복재)이다. 아버지는 密直致仕(밀직치사) 韓英(한영)이며 漢陽(한양) 出身(출신)이다. 高麗末(고려말)의 文臣(문신)으로 忠烈王(충렬왕) 30年(1304)에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여 (藝文春秋館(예문춘추관)에 登用(등용)되었고,忠肅王初(충숙왕초)에 修撰(수찬)이 되었다. 忠肅王(충숙왕) 9年(1322)에 王位(왕위)를 엿보던 瀋王(심왕)暠(고)의 誣告(무고)로 忠肅王(충숙왕)이 元帝(원제)에게 불려가 國王印(국왕인)을 빼앗기자 李兆年(이조년)과 함께 元(원)나라에 가서 忠肅王(충숙왕)의 還國(환국)을 要請(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忠肅王(충숙왕) 11年(1324)에 王(왕)이 國王印(국왕인)을 다시 찾아 歸國(귀국)하자 그 功(공)으로 左副代言(좌부대언)이 되었다. 忠肅王(충숙왕) 14年(1327)에 王(왕)이 奸臣(간신)의 誣告(무고)를 믿고 瀋王(심왕) 暠(고)에게 禪位(선위)하려 하자“國家(국가)는 祖宗(조종)으로부터 傳(전)하는 것인데, 어찌 嫡(적)을 廢(폐)하고 旁支(방지)에게 주리오”하여 諫止(간지)하고 李兆年(이조년)과 함께 여러 大臣(대신)들과 꾀하여 奸臣(간신)을 잡아 물리치고 王(왕)의 禪位(선위)를 抵止(저지)하였다. 忠惠王(충혜왕) 卽位年(즉위년)(1330)에 知申事(지신사)가 되었고, 뒤이어 密直提學(밀직제학)이 되었으며, 이듬해 知貢擧(지공거)가 되어 同知貢擧(동지공거) 李君侅(이군해)와 함께 進士(진사)를 取(취)하여 周贇(주윤) 等(등) 33人을 及第(급제)케 하였다. 忠肅王(충숙왕) 復位(복위) 8年(1339)에 曺頔(조적)의 亂(난)을 政丞(정승) 金倫(김륜)과 함께 다스리다가 忠惠王(충혜왕)과 함께 元(원)나라에 불려가 刑部(형부)에 갇히었다. 이듬해 丞相(승상) 伯顔(백안)이 죽자 王(왕)과 함께 歸國(귀국)하여 忠惠王(충혜왕)이 復位(복위)하였으며, 忠惠王復位(충혜왕복위) 3年(1342)에 僉議評理(첨의평리)로서 앞서 曺頔(조적)의 亂(난)을 다스린 功(공)으로 1等功臣(일등공신)에 올라 漢陽君(한양군)에 封(봉)하여지고 壁上(벽상)에 圖形(도형)되었으며, 뒤이어 贊成事(찬성사)가 되었다. 이듬해 判密直事(판밀직사) 孫守卿(손수경)과 함께 進獻使(진헌사)로 元(원)나라에 갔다가 元帝(원제)의 附託(부탁)으로 元子[원자: 忠穆王(충목왕)]를 돌보게 되었고, 忠惠王復位(충혜왕복위) 5年(1344)에 忠穆王(충목왕)이 卽位(즉위)하자 王(왕)을 모시고 歸國(귀국)하여 左政丞(좌정승)이 되었다. 忠定王元年(충정왕원년)(1349)에 漢陽府院君(한양부원군)으로서 致仕(치사)하여 故鄕(고향)에 隱居(은거)하다가 恭愍王元年(공민왕원년)(1352)에 金承澤(김승택)等(등)과 함께 書筵官(서연관)이 되어 王(왕)의 極盡(극진)한 待遇(대우)를 받았고, 王(왕)이 다시 宰相(재상)을 삼으려 하였으나 病(병)을 얻어 죽었다. 어릴 때부터 바라다보는 것이 普通(보통)사람과 달랐고, 性品(성품)이 重厚(중후)하며 體軀(체구)가 魁偉(괴위)하여 宰相(재상)의 器量(기량)임을 알 수 있었다 하며, 詩文(시문)에 뛰어났고 談笑(담소)하기를 좋아하며 名士(명사)들과 서로 모여 술을 마시어 그들의 이름을 楊花徒(양화도)라 하였다. 그가 致仕(치사)한 後(후)에 머문 곳은 楮子島[저자도:現(현) 서울 江南區(강남구) 狎鷗亭洞(압구정동) 北(북)쪽 附近(부근) 漢江(한강)가운데 있던 섬)]로, 이곳에 別莊(별장)을 짓고 餘生(여생)을 보내면서〈楮子島(저자도)〉라는 題目(제목)으로 詩(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著書(저서)로《復齋集(복재집)》이 있고, 諡號(시호)는 文節(문절)이다. [출처] 歷史와 人物 [출처] 淸州韓門(청주한문) 韓宗愈(한종유):(1287~13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