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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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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실패한 개혁가 조광조와 사림의 계보도
이장희 추천 0 조회 132 16.04.20 13: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 9대 왕 성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이역(李?)은 진성대군(晉城大君)이라 불렸다.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낸 이복형 이융(李?)은 훗날 왕위에 올라 조선역사상 가장 혹독한 왕으로 남았다. 그가 바로 연산군이다.

1506년 음력 92일 성희안, 유순정, 박원종, 신윤무 등은 사전에 준비한 사병들로 거병하여, 신수근, 임사홍등 연산군의 측근들을 살해하고 궁을 완전 장악하였고, 반정군에 의해 연산군을 추출되었다.

 

반정에 성공한 반정군은 조선의 새 임금으로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을 추대하였다. 당시 진성대군은 자신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온 반정군을 적으로 여겼을 정도로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그때 나이가 18살이었다.

   

그리고 반정군에 의해 추대 제의를 여러 번 받을 때부터 그는 신하가 임금을 택한다는 택군(澤君)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반감의 시각을 가졌지만 들어내고 표현하지는 못했다. 반정군의 위세가 너무 막강하였기 때문이다.

 

반정군들은 우선 정현왕후(성종의 3번째 왕비이자 진성대군의 모후)에게 반정의 실상을 전하고 진성대군을 다음 왕으로 추대할 것을 허락을 받으로 왔다. 그녀는 처음에 주저하는 듯 하다가 바로 반정군의 요청을 수용하고, 자신의 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에 책봉한다.


두번째로 반정군은 진성대군을 찾아가서 조선의 다음 왕으로 추대하였디만, 진성대군은 한번에 허락하지는 않았다. 끈질긴 그들의 설득와 외압으로 진성대군은 그들에게 허락을 하고 조선의 11대 왕(중종)으로 즉위를 한다.

 

그러나 반정으로 추대된 이후 그는 이를(택군) 타개할 대안을 마련하는데 절치부심하게 된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반정세력의 정치적 의도로 국왕으로 등극한 중종은 혁명을 일으킨 공신들의 세력에 밀려 실질적인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나약한 국왕이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연산군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문란해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연산군이 폐지시켰던 모든 법제를 복귀시켰으며, 국왕의 자문을 담당하는 기관인 홍문관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고 신하들의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등을 시행했다.

 

또한 중종은 왕도정치를 앞세워 공신들의 세력 팽창을 억누르려고 시도했으나 공신들의 힘이 너무나도 막강하여 성공하지는 못했다.

 

박원종(큰어머니 월산대군부인의 친정 남동생이자, 경빈 박씨의 양아버지), 홍경주(희빈 홍씨의 친정아버지) 등의 공신 세력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려 하자 그는 타결 책으로 사림 세력을 다시 등용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남곤(南袞: 연산군때 갑자사화로 유배)을 불러드린다. 그는 박원종과 성희안 등 반정공신들의 월권행위가 심하다며 상소를 올려 반정공신과는 척을 둔자이기도 하다. 반정공신들을 견재키 위함이었다.

 

중종 재위 8년차에 접어들자 훈구 공신 3인방인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 자연사로 죽고, 훈구파가 주춤한 틈을 타 중종은 과거를 시행하여 새로운 인물들을 뽑아 훈구파 공신들에게 탈피하고자 하였다.

 

중종 재위 4년인 1510년 과거를 치렀다. 여기서 급제한 한 인물을 보고 중종은 그에 매력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1510년 과거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15년 성균관에서 치룬 알성시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그는 왕을 측근에서 보필하는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고, 3년 만에 종2품인 대사헌에 오르는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였다. 그가 바로 조광조(趙光祖)이다.

 

왕도정치를 꿈꾸는 중종과 성리학적 도덕사회(국가)를 꿈꾸는 조광조(趙光祖)의 만남이었다.

 

똘똘 뭉친 유학자(儒學子) 카리스마를 아낌없이 보여주며,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도덕정치가 구현되는 이상사회의 건설을 부르짖었던 인물 조광조.

 

그러나 그의 이상사회는 5년 만에 좌절되어 버린다. 그의 좌절은 기득권을 가진 보수와 현실정치의 벽이 얼마나 두터웠던 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광조(趙光祖)는 서울 출생으로 전형적인 조선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개국공신 조온(趙溫: 1347~1417)5대손으로 훈구가문 출신이지만 그의 인생은 사림파와의 인연으로 시작된다.

 

조광조(趙光祖)17세 되던 해에 어천찰방에 부임하는 아버지 조원강을 따라가 평안도 희천에 귀양 와 있던 김굉필에게 수학(受學)할 기회를 얻었다. 김굉필은 고려말 정몽주와 길재를 거쳐 김종직을 계승한 영남사림파의 핵심인물로서 1498년 무오사화로 유배 길에 있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에 글 그리고 무오사화 --> http://blog.daum.net/toyotaloom/13312778


고려말 ~ 조선 중기 때까지 사림의 계보도

 

영남과 서울을 기반으로 하여 전혀 이루어지지 못할 것 같았던 만남, 그러나 무오사화라는 정치적 사건은 이 둘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 만남은 개국공신의 후예 조광조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만큼 운명적인 것이었다. 영남사림파의 학맥이 기호사림파에게 접목되는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조광조는 어려서부터 행실이 바르고 아이답지 않게 근엄하며 남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엄격성을 보였다.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뜻을 높이 세우고 학문에 열중하는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미친사람(狂人)?이라거나 ?화의태반(禍胎)?이라고 할 정도였다.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으로 친구들과의 교유관계도 끊어질 정도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항상 의관을 단정히 하고 언행이 절제가 있어서 품행이 방정하다는 말이 꼭 들어맞았다. 어린시절 보였던 자신에 대한 철저함은 훗날 정치적으로도 엄격한 원칙주의자의 길을 걸어가는 바탕이 되었다.

 

조광조는 뜻한 바가 있어 1510년 과거 초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하고, 1515년 성균관에서 치룬 알성시에도 2등으로 급제하여 국왕인 중종의 주목을 받았다.

 

반정공신들의 득세 속에서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던 중종은 성균관을 찾아 새로운 인재를 구하려 했다.

 

이때 중종은 오늘날과 같이 어려운 시대를 당하여 옛 성인의 이상적인 정치를 다시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책문(策問)을 던졌고,

 

조광조는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明道), 항상 삼가는 태도(謹獨)로 나라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로 삼아 정치를 하시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 책문을 계기로 아직까지는 가능성만 있었던 학자 조광조는 중종의 파격적인 신임을 얻게 된다. 중종은 조광조를 정언, 대사헌 등 언관의 핵심 직책에 임명하면서 국왕의 든든한 후원군으로 삼았다.

 

중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조광조는 신진세력의 최선두에 서서 적극적으로 그가 구상하던 이상을 정치 현실에 실천하기 위한 개혁정책들을 시도하게 된다.

 

이러한 조광조의 파격적인 정치적 성장에는 젊은 피를 수혈하여 정치권의 면모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도도한 시대적 흐름이 있었다. 자신의 시대를 개혁의 시대로 냉철히 인식한 조광조는 시대의 부정과 모순을 극복해가는 다양한 정책들을 강력하고 급진적으로 추진해 갔다.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한마디로 말하면 유교적 이상정치, 도덕정치의 실현이다. 왕이 왕도정치를 수행하고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교화가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는 사회의 실현, 이것이 그가 추진한 개혁정치의 요체였다.

 

먼저 이를 위해 조광조는 그와 뜻을 같이하는 정치세력을 규합했다. 학문적 소양과 개혁의지가 있는 인재들을 고르게 발탁하기 위해 기존의 과거 시험 대신에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추진하였다.

 

추천제 시험인 현량과를 통해 신진인사를 대거 영입하여 자신과 뜻이 맞는 인물 중심으로 정치권의 물갈이를 시도한 것이다.

 

그 결과 개혁성향의 젊은 사림들이 대거 정계에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조광조의 지지기반이 형성되었다. 김식(金湜)김정(金淨)박상(朴祥)김구(金銶)기준(奇遵) 등이 조광조의 지원군이 되었다.

 

신진세력들은 왕에게 도덕적으로 완벽할 것을 요청하고, 신하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나갔다. 언론의 위상을 강화시켜 국왕의 독재를 견제하는 한편, 국왕과 신하가 국정을 논의하는 경연의 활성화를 통해 군주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또한 도교의 제천행사를 주관하던 관청인 소격서를 폐지함으로써 성리학이 아닌 이단 사상이 보급될 수 있는 길을 차단하였다. 소격서는 국가에 천재지변이 있을 때 일월성신(日月星辰)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조광조는 소격서의 존재를 유교적 정치이념을 저해하는 근본적인 태도의 문제로 해석함으로써 소격서 폐지를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조광조 일파는 소학(小學)과 향약의 보급에도 전력을 다했다. 지방 구석구석까지 성리학의 이념을 담은 소학과 같은 책자를 보급하고 사림들이 향촌을 주도할 수 있는 자치규약인 향약(鄕約)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향촌에서 사림파의 입지를 강화하는 한편 사림파가 주도하는 유교질서의 확산에 힘을 쏟았다.

 

소학은 특히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다. 김굉필은 업문(業文:문장에 힘씀)으로는 천기(天機)를 알 수 없었는데 소학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할 정도로 소학 예찬론자였다.

 

소학은 수신과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권력의 부정과 비리에서 비교적 자유러웠던 사림파 학자들의 정치, 사상 성향에 부합하는 점이 많았다. 삼강행실, 이륜행실, 주자가례와 같은 책을 널리 보급한 것도 유교적 도덕이념을 확산시키려 한 조처로서 소학의 보급과 그 맥락을 같이하였다.

 

조광조 일파는 민생을 위한 개혁에도 적극 착수하였다. 당시 농민을 가장 괴롭힌 공물(貢物:지방 특산물을 바치는 세금)의 폐단을 시정하였으며, 균전제를 실시하여 토지의 집중을 완화하고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정하여 부유층의 재산확대를 막으려 하였다.

 

조광조 일파의 이러한 개혁정책은 백성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인기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에게 큰 부담을 느꼈던 기득권 세력의 반발 또한 보다 조직화되고 확산되어 나갔다.

 

누구보다 조광조의 정책에 반대노선을 취한 것은 기성의 정치세력인 훈구파였다. 성종대 이후 기득권 세력으로 특권을 누리고 있던 훈구세력은 연산군대에 두 차례에 걸친 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축출하고 보다 보수화되어 갔다. 그러다가 중종이 파격적으로 등용한 조광조 일파에 의해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자 서서히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조광조 일파가 위훈삭제(僞勳削除)까지 들고 나오자 이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위훈삭제란 중종반정 때에 공을 세운 공신세력에게 준 훈작(勳爵) 중에 가짜로 받은 것을 색출하여 이를 박탈하자는 것이다. 공신의 친인척이나 연줄을 이용하여 훈작을 받은 사람들의 토지나 관직을 몰수함으로써 구세력을 제거하고 신진세력 중심으로 정치판을 재편하려 한 조치였다.

 

중종반정 때 박원종 등의 추천으로 확정된 공신은 무려 126명으로 이 숫자는 조선의 개국공신(45)이나 이후에 있게 되는 인조반정 때의 공신(53) 숫자를 훨씬 뛰어넘는다. 후에 중종도 공신에 대한 재조사를 명하였는데 그 숫자만도 70명이 넘었다.

 

조광조 일파는 가짜로 훈작을 받은 자들을 조사하여 이들에게 준 관직, 토지, 노비와 저택 등을 몰수할 것을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정치세력의 전면적인 물갈이를 구상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는 매우 긴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서로가 견제하고 갈등하는 위치에 있었다. 반정으로 즉위한 이래 불안정한 그의 왕위를 위협하는 사건이 계속 이어지던 시절, 중종은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한 조광조를 발탁하여 상당한 정치적 이익을 얻었다.

 

폐비 신씨의 복위 문제나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종사 문제에서 중종을 위협하던 반정세력들은 성리학의 원칙에 충실한 조광조의 등장과 함께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록 반정에 의해 추대된 왕이었지만 중종은 점차 자신의 왕권을 확대해가려는 생각을 갖게 되며 이러한 시점에서 성리학의 이상론에 입각하여 왕권을 견제하려는 조광조의 입장에 선뜻 동의하기 힘든 불편한 관계의 조짐들이 보인다.

 

, 중종의 왕권 강화냐? 조광조의 왕권 견제에 따른 성리학적 도덕국가 건설이냐?에 따른 갈등이 시작되었다.

 

정도전의 이상적 유교국가와 조광조의 이상이 비슷하다. 왕에게 끊임없이 경연과 성리학의 기본인 도덕적으로 완전무장하라고 압박을 한 것이다. 왕이라는 제도권 안에 가둬 선비들이 왕 주위에 머물고 가르치고, 왕의 행동범위를 축소시키며, 지금의 영국의 왕이나 일본의 왕 처럼 정치는 신하(내각)들이 하고, 왕은 다만 나라에 상징적인 것만 바라는 것이었다.

 

조광조 또한 중종이 세조나 연산군과 같은 극단의 길을 추구하는 군주가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군주의 도덕정치를 강조하고 경연을 통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중종에게 강하게 권유한 것도, 군주독재의 위험성을 사전에 방지하고 개혁세력인 사림파가 정치를 주도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복형인 연산군 때 처럼 패왕적 힘을 갖고 싶어했든 중종과 그것을 견재하고자 하는 조광조...

 

두 사람은 서로 추구하는 정치적 길이 달랐기에 동반자이면서도, 어떠한 계기가 생기면 철저히 대립할 수도 있는 너무나 위험한 관계였다. 아무리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신하라 하더라도 국왕의 입장과 신하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건국 초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정도전과 이방원이 피를 부르는 권력싸움을 전개한 것이나 세조의 왕위찬탈과 사육신 사건은 모두가 왕권이냐, 신권이냐를 두고 벌어진 권력투쟁이 아니었던가?

 

조광조는 신하는 왕에게 충성해야 마땅하지만, 그 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대 조선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성리학 이념이라고 판단했다.

 

조광조는 세조나 연산군대의 정치는 결국 왕이 성리학의 이념 위에 군림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인식했고 중종(왕권이 강화되면)과 같은 왕도 얼마든지 그러한 전철을 밟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따라서 중종이 자신만의 정치적 역량을 가진 군주로 성장하여 독재권을 행사하기 전에 성리학 이념이라는 견제장치로 중종을 압박하였다. 정도전이 그렇게 한 것처럼...

 

반정공신들과 훈구대신들의 견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조광조를 파격적으로 기용했던 중중 또한 자신의 기반을 강화하자, 이제 더 이상 조광조에게 휘둘릴 나약한 왕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왕권 확립을 꾀하던 중종이 훈구파에 대적하기 위해 정암(조광조)을 키웠으나, 훈구파를 정리하는 시점에 조광조 등 사림파가 또 다른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경계했다. 조광조와 중종은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든 것이다..

 

임근의 마음을 읽지 못한 조광조는 계속해서 임금도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사류가 되기를 원했고, 성리학 사상에 입각한 사류와 군주가 공동으로 다스리는 세계 또는 임금 역시 한 사람의 선비가 될 것을 매번 권고하였다. 이러한 조광조와 급진 사림의 압박이 중종은 피로를 느낌과 동시에 서서히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조광조의 정치가 더이상 혁신성을 잃고 도학적(道學的) 언행만을 되풀이하자 중종은 점차 총애를 거두었다. 실록을 따르면 이미 기묘사화 일이년 전부터 이미 중종의 총애가 정암 조광조로부터 떠나고 있었으며, 정암 조광조는 중종이라는 뒷 배경이 없어지자 점차 정계에서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중종은 사림파 역시 하나의 비대해진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해석하여 강력한 왕권의 걸림돌로 인식하였다.

 

급진 사림파의 개혁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심정, 김전 등 훈구파와 남곤 등의 온건 사림파를 이용, 친위 쿠데타를 계획한다.

 


1519(중종 14) 음력 11... 기묘년... 기묘사화

 

급진 사림파에 가장 불평이 많은 훈구파의 홍경주, 김전, 고형산 등과 심정, 남곤 등은 연합하여 조광조 일파를 타도할 계획을 세운다.

 

홍경주는 그 자신의 딸이 희빈(熙嬪)으로 중종을 모시고 있는 것을 이용하고, 심정, 남곤 등은 경빈 박씨 등과 친분이 있는 것을 이용하여, 이들 후궁들에게 호소하여 조광조 타도에 발 벗고 나섰다.

 

희빈 홍씨와 경빈 박씨 등은 나인들을 시켜 궁궐 안팎의 나뭇잎에 꿀을 발라서 벌레들이 파먹게 한다. 희빈 등은 천하의 인심이 조광조를 지지하니 조광조는 공신들을 제거한 후에 스스로 임금 될 꿈을 꾸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동시에 대궐 안의 나뭇잎에 꿀로 走肖爲王”(주초위왕)이라는 4자를 써서 벌레가 파먹게 하고, 이것이 묘하게 글자로 남은 것을 임금에게 보여 큰 충격을 주었다.

 

이때 走肖”()의 파자에 해당하며, 이는 은연중에 조광조가 왕위에 오른다는 참언이었다.

 

한편 북문으로 조정에 들어온 고관들은 비밀리에 회의를 진행한다. 남양군 홍경주와 예조판서 남곤, 공조판서 김전, 호조판서 고형산(高荊山), 도총관 심정 등은 비밀리에 모의한 끝에 홍경주가 일당을 대표하여 조광조 등이 당파를 만들어 과격한 일을 자행하고 정치를 어지럽히니 처벌해야 한다고 궁에 몰래 들어가 중종를 뵈고 조광조 일파를 밀고하였다.

 

마침내 중종은 대사헌 조광조와 우참찬 이자(李?), 도승지 유인숙(柳仁淑), 좌부승지(左副承旨) 박세희(朴世熹), 우부승지(右副承旨) 홍언필(洪彦弼)을 비롯하여 조광조파로 지목되는 많은 사람을 잡아 가두게 하였다.

 

홍경주, 김전, 심정 등은 당장 이들을 때려죽이려 하였으나 병조판서 이장곤(李長坤)과 좌의정 안당이 임금께 간절히 말렸고, 영의정 정광필은 젊은 선비들이 현실을 모르고 옛날 제도를 그대로 인용하여 실시하고자 한 것이라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말렸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남곤은 유배나 파면 선에서 해결하면 될 것이라고 의견을 피력했지만 역시 거절당한다. 이후 이장곤과 안당은 이로 인하여 옥에 갇혔다.

 

이날 성균관의 유생 천여 명이 달려와서 광화문 밖에 모여 조광조 등의 억울함을 울며 호소하니 주모자 이약수(李若水) 등 몇 명을 체포하자 모두 자진 포승을 지고 들어가 감옥은 가득차 있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회의에 참여한 신하들에게 서훈을 내렸지만 남곤 등은 상훈을 거절하고, 관직 사퇴를 청하기도 한다.

 

조광조일파가 유배되자 1119일 이조판서 남곤은 자신의 이판직을 여러 차례 사직하였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훈구파 대신들은 조광조의 유배에 만족하지 않고, 유배지 능주(綾州)에서 조광조의 사사를 계속 주장했다.

 

그해 1219일 남곤은 왕이 조광조에게 사형을 시키려 하자 사형보다는 인덕으로서 다스리기를 청하다가, 중종이 강경 대응을 시사하자 유배선에서 마무리 지을 것을 주청하였다.그러나 거절당한다.

 

조광조를 위시하여 참찬 이자 (李?형조 판서 김정(金淨대사성 김식(金湜부제학 김구(金絿도승지 유인숙(柳仁淑승지 박세희(朴世熹응교 기준(奇遵수찬 심달원(沈達源공서린(功瑞麟윤자임(尹自任안정(安挺이구(李構홍언필(洪彦弼박훈(朴薰) 등이 체포되었다.

 

처음에 홍경주 등은 그날 밤으로 모두 죽일 계획이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우의정 안당(安塘신임 대사헌 유운(柳雲신임 대사간 윤희인(尹希仁전한(典翰) 정응(鄭應봉교(奉敎) 채세영(蔡世英) 등의 역간(力諫)으로 일단 취조를 받게 되었다. 1116일 옥에 갇혔다. 의심 많은 왕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다.

 

옥에 갇힌 조광조는 유배형이 내려지자 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은 뭇사람 뜻과 어긋나더라도 임금이 계신 것만 믿고 정책을 펴 왔습니다. 친히 심문하신다면 만번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그가 옥 중에서 마지막 소명 기회를 애원하고 있을 때 왕은 "붕당을 만들어 국론과 조정을 어지럽혔다"며 단죄할 것을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훈구파는 계속해서 그를 비토, 사형시켜야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중종은 당초 유배나 파직으로 해결하려 하였으나 훈구파와 척신들의 계속된 공세와 압력으로 결국 조광조·김정·김구·김식·윤자임·박세희·기준·박훈 등 8명 중 조광조는 능주(綾州 :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에 귀양갔다가 음력 1220일 결국 사약을 받게 된다. 이때 그의 동지인 김식, 김정 등도 연루되어 자결, 처형되었다.

 

그가 유배지인 화순 능주(綾州)에 머문 동안 수시로 찾아와 위로가 되어준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곳에 고향을 둔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이었다. 양팽손은 일찍이 18세의 어린 나이에 경기도 용인에서 그를 만나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고 21세때에는 생원시에 장원급제한 후 같은 해에 급제한 정암과 더불어 성균관에서 생활한 적도 있었다.

 

그가 유배되자, 유배지에도 글을 배우려고 뜻있는 선비들이 찾아왔다. 양팽손 등의 지우들의 방문과 유배지에서의 학문 강의를 하던 중 음력 1220일 금부도사가 도착한다.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이밀자 한성부를 향해 큰절 3배를 올린 뒤 절명시 한 수를 남기고 사약을 마셨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38세였다.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같이 하였도다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라." -조광조-

 

사사당한 그의 시신은 학포 양팽손이 수습하여 가매장되었다가 후에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상현리(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서원말부락의 선영하에 매장되었다. 한편 김종직의 문하생으로 훈구파와 함께 조광조일파의 숙청에 가담했던 남곤은 후배 사림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간사한 인물로 매도되었다.

 

뒤이어 김전은 영의정, 남곤은 좌의정이 되고, 이유청(李惟淸)은 우의정이 되었고 현량과도 곧 폐지되었다. 이 옥사가 기묘년(己卯年)에 일어났으므로 기묘사화라 하며, 이때 죽은 사람들을 후에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하였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를 존경하던 유생과 선비는 물론 백성까지 목놓아 울며 나라를 걱정했다. 더욱이 조광조가 죽은 이듬해 봄부터는 비가 내리지 않아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기 때문에 가뭄이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광조가 죽은 뒤 이렇듯 인심이 흉흉해지자 조정에서는 조광조에 대한 말을 일절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다

 

훗날 이이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을 가리켜 동방사현이라 불렀다. 그의 제자인 홍문관 관원 소쇄 양산보(梁山甫)는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가 사사되자 '개처럼 사느니 흙이 되겠다'며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전라남도 담양군으로 내려와 소쇄원(瀟灑園)을 짓고 은거하며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



1. 사림(士林)의 정권 장악(政權 掌握)과 붕당(朋黨)의 형성()




2. 간단한 사대사화(四大士禍) 의 설명




3. 사대사화(四大士禍) 후(後) 사림(士林)의 붕당(朋黨) 변화(變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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