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직접 하지 않는 운동은 거의 구경하지 않는 버릇이 있습니다.
학교 끝나기 무섭게 해질 때까지 흙먼지 풀풀 나는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농구하던 청소년 시절에는, 국내 농구 경기 중계하는 것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미국 NBA 경기의 묘기같은 장면이 소개되지 않을까 기대하며 스포츠 뉴스를 꼬박꼬박 보곤 했습니다. 20대에 학교 친구들과 야구팀을 만들어 놀 때는, 방학 때 집이 부산인 야구광 친구 좇아가 사직 구장에서 “부산 갈매기”를 함께 부르곤 했지요. 대학원 시절 시작한 조기축구를 유학와서도 계속할 때는, 이런 저런 유럽 프로 축구 경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비가 와도 할 수 있는 운동을 하나 하겠다고 테니스를 배울 때는 친구 덕에 프랑스 오픈 경기까지 구경했습니다. 탁구를 시작한 후로는 열심히 탁구 찾아보고 있지요.
흔히 ‘프로’라고 하는 직업 운동 선수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여는, 그 운동을 애정으로 하는 ‘아마추어’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동기를 부여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런 재미도 없어보여서 거들떠보지도 않던 스키 경기 중계를 이번 겨울에 조금씩 보게 된 것은, 스키를 배우기 시작해서야 보이기 시작한 프로들의 움직임이 흥미로워졌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의 예외. 예전에 한 적도 없고 앞으로 전혀 해볼 생각도 없는 운동인데, 팬이라고 자처할만한 운동이 하나 있습니다. 럭비입니다. 이 운동을 즐겨 보게된 것은 아내 때문입니다.
때는 2006년. 파리 지역 3부 리그(대충 동네 축구 수준입니다) 하위팀에서 마지막 시즌을 마쳤을 때입니다. 몇 달 뒤 스위스 제네바 쪽으로 멀리 이사를 가게 된 김에, 축구 그만 두고 몇 년 전 시작한 테니스나 슬슬 계속할 생각으로, 선수 등록 이전 신청도 하지 않았습니다. 30대 중반에 수비형 미드필더로 개 뛰듯 뛰어다녔더니, 이제 좀 ‘우아하게’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래도 막 시작한 독일 월드컵을 안 볼 수는 없었죠.
신혼이었습니다(열 한 살 어린 처자 만나 늦장가 갔습니다). 어렸을 때 제일 싫어하던 과목이 체육이었고, 텔레비젼 없이 자란 아내에게는, 이른 여름 휴가 내내 조그마한 텔레비젼 앞에 앉아 축구 경기 구경하는 제가 완전 불가사의였습니다. 그래도 새신랑과 함께 있겠다고 꼬박꼬박 함께 옆에 앉아있는 아내에게 열심히 축구 경기 규칙과 전술, 상황 설명 등을 해봐도, 아내에게 축구는 "그냥 공 잡고 골대로 직진하면 될 거를 한 시간 반 동안 벌떼같이 이리저리 빙빙 돌기만 하다가 0대0으로 끝나는 재미없는 운동"이었습니다.
몇 달 뒤 어느 주말, 볼 일이 있어 잠시 나갔다 왔더니, 아내가 혼자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프랑스 대표팀이랑 남반구의 한 나라(호주 혹은 뉴질랜드였을 겁니다) 대표팀의 럭비 경기를 보고 있더군요.
— 뭐야? 럭비 경기?
— 응. 이거 재미있어. 두 팀이 두 줄로 나란히 서서 공 가지고 치고 받고 하다가 상대편 진영 끝까지 가면 점수 나는 거야. 왜 축구를 이렇게 안하나 몰라. 누가 공격하고 누가 수비하는지, 공격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명확하잖아.
그런데 가만히 보니, 점수 계산하는 법도, 반칙이 났는데 그게 왜 반칙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저런 작전을 펴는데 그 의미도 모르면서 보고 있더군요.
— 너,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매년 럭비 구경했던 거 알아?
— 럭비를?
— 내가 나온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배양전’이라고 매년 친선 럭비 경기를 열었어. 해마다 때가 되면 한동안 오전 수업만하고 운동장에서 전교생 응원 연습시키던 희한한 학교였는데, 6년 동안 구경한 덕에 럭비 어떻게 보는지 대충은 알아.
그렇게 설명해준다고, 15년전 같이 보기 시작한 럭비가 둘이 함께 즐겨보는 공통의 취미가 되었습니다. 결국 2015년 월드컵 때는 가을에 일주일 휴가 내서 영국까지 갔습니다. 경기장 찾아가서 본 것은 한 경기이고, 나머지 경기는 런던의 맥주집(펍)을 전전하며 보았죠. 2019년 월드컵은 일본에서 열렸습니다. 일부러 여름 휴가를 작게 쓰고, 가을에 큰 휴가를 내어 한국 부모님 댁에 간 참에 일본에 며칠 다녀왔습니다. 럭비 경기 하나 보러요.
2023년 제10회 월드컵이 프랑스에서 열립니다. 벌써 표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팀별 혹은 개최 도시별에 따른 묶음표(패키지)를 우선 판매했는데요. 3월 중순, 3월 말의 1,2차 예매에서 실패하고, 오늘 저녁 3차 예매에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저희 집에서 차로 3시간 정도 달리면 닿는 도시에서 열리는 다섯 경기 중 세 경기 묶음표를 예매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오늘이 아내 생일이었습니다. 생일 선물로 친다고, 컴퓨터와 휴대 전화 동시에 켜놓고 예매 시작 시간 땡하고 친 때부터 한 시간 넘게 기다린 끝에 표를 샀습니다.
탁구 못 친지 네 달이 다 되어가는데, 이런 재미라도 없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삶의 소소한 재미를 찾는 프로 정신이라도 불들어봐야죠.
첫댓글 아내분과 탁구는 직접하시지않나요!?~ 같이 운동도 하세요^^ 어릴때 마지막승부보구 중학교 농구팀에 찾아가 감독에게 이학교 뺑뺑이로 걸리면 농구부 무조건 입단 약속 받아온적도있죠!~결국 다른 중학교 배정됬지만 @@;;;그열정 다 어디갔는지 ㅜ 지금은 탁구가 최고입니다 실력은 ....ㅠ 어서 프로출범및 많은 국내 대회들이 잘열리길 희망합니다!~ 아내분과 부럽습니다!!~@^^@
제 아내, 운동하는 것 아주 싫어해요. 산책하고, 산행하고, 겨울에 눈신발 신고 걸어다니는 것 빼고요. 아참, 수영은 저보다 더 잘하는군요.
'마지막 승부'는 제목만 알아요. 그러고 보니, 나이들어서 농구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군요. 말씀마따나, 탁구가 최고입니다.
예매 성공 축하드립니다~
럭비규칙은 하나도 모르지만
''블라인드 사이드''라는 럭비 영화를 감동적으로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처럼 럭비 규칙 1도 모르던 착한 주인공이
자기랑 부딪히는 상대선수가 아플까봐 걱정하는 모습이 저를 미소짓게 했었지요~^^
삶의 소소한 재미를 찾는 프로 정신~멋집니다~
검색해서 예고편을 찾아보았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 번 봐야겠네요. 고맙습니다.
소소한 즐거움과 재미를 찾는 것이, 정말 모든 이의 진짜 첫번째 직업(프로)이겠죠?
@다같이 셰이크 (구/나홀로 펜홀더) 블라인드 사이드. 아내분과 같이 꼭 보시길 추천드립니다.재미도 있고 따뜻한 영화예요~
럭비와 미식축구는 룰이 좀 다르죠? 장비도 그렇고...
아~제가 본 영화는 미식축구였네요^^
@초록아줌마(김현주) 앗 저격글이 아니었는데... 글쓴분한에게 아는척 좀 할려던것뿐 ㅠ
저격당함ㅋ
정말 저격글이 되었군요^^
네 그렇죠.. 고교시절 뉴질랜드에서 럭비가 아닌(..?) 미식축구를 했었는데 많이 다릅니다. 득점 방식부터 태클, 패스 규칙까지 그래도 비슷한 느낌은 있죠
@さとし 탁구와 라지볼의 차이쯤 되나요?^^
모르는 사람 눈에는 그게 그거 같아서요..ㅎㅎ
@초록아줌마(김현주) 럭비와 미식축구는... 함박스테이크 한 접시랑 맥도날드 햄버거의 관계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さとし 아니, 럭비의 나라 뉴질랜드에서 미식축구를...
이번에 산 표 셋 중의 하나가 뉴질랜드-이탈리아 경기입니다. '몽땅 검정'(All Blacks) 팀의 경기를 직접 보게 되어서 벌써 기대됩니다!
럭비 저도 아주 좋아합니다...
2019년 일본 럭비 월드컵도 아주 재미있게 봤었고요....
대학생때 럭비 동아리 매니저를 했던 아내가 TV중계때 룰이나 반칙 등 설명을 잘 해주니까...더 재미있었습니다.
우와~ 반갑습니다.
그런데, 일본 럭비 월드컵은 어떻게 보셨어요? 그해 보름 정도 한국에 있는 동안, 럭비 경기를 볼 수 없어서 답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에서는 중계는 커녕 월드컵 소식 알려주는 매체도 찾을 수 없었거든요. 무슨 유료 채널같은 데에서 중계를 해주었나 보죠?
옆에서 규칙과 전술을 아는 사람이 설명해주면 정말 좋죠.
럭비에 대란 열정과
아내에 대한 애정 만큼은 프로시군요
그래도 럭비보다 탁구가 천만배 더 좋습니다.
아내에 대한 애정이야 이 세상 모든 남편들이 가지(어야하)는 것이겠죠.
2023년쯤이면 별 걱정없이 경기장에서 럭비월드컵을 재밌게 보실 수 있을것(거라고 믿습니다ㅠㅠ) 같네요 ㅋㅋ 저도 다양한 스포츠를 좋아하지만 럭비는 잘 모르는데요 글 잘 읽고 갑니다!
역병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랍니다. 그나저나 탁구부터 치게 해줬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