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5장 14 - 6장 7절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5.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부지중에 범죄하였으면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네가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숫양을 양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16. 성물에 대한 잘못을 보상하되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건제의 숫양으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17.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라 벌을 당할 것이니
18. 그는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로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가 부지중에 범죄한 허물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19. 이는 속건제니 그가 여호와 앞에 참으로 잘못을 저질렀음이니라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3. 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의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4.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잃은 물건을 주운 것이나
5. 그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6. 그는 또 그 속건제물을 여호와께 가져갈지니 곧 네가 지정한 가치대로 양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고 갈 것이요
7.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으리라
구약 시대의 제사 중에서 의무제는 속죄제와 속건제 두 가지였습니다. 범죄한 것에 대해서 용서를 받기 위해 드렸던 제사가 속죄제였다면 속건제는 자신의 실수나 범죄로 인해 생긴 보상의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지도록 정하신 규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속건제도 속죄제처럼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기 위해서 드렸던 제사이기 때문에 두 제사가 큰 차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건제는 보상이 따른다는 점에서 속죄제와 엄연히 구별되는 제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거룩한 물건들을 성물이라고 부릅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한 모든 도구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성물에 대해서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야 하고 더불어서 성물 값의 오분의 일을 더해서 보상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천 원짜리 성물을 망가뜨리거나 파손했다면 오분의 일을 더한 가격 천이백 원을 보상하도록 만든 규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였을 때도 속죄제처럼 제사를 드리도록 했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속죄제와 같은 맥락의 제사였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죄제는 보상에 대한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보상이 따르는 속건제와는 명확히 구분이 되는 제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법체계에서 보면 벌금을 내야 하는 범죄들이 있는데 속건제가 그런 측면이 강한 제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속죄제와 다르게 속건제는 사람들 간의 관계 회복을 하라는 취지에서 만든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는 범죄가 바로 속건제에 해당하는 범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돌려주지 않고 가진다거나 거짓 맹세를 해서 이웃에게 손해를 입혔다면 그만큼의 보상은 당연한 것이고 거기다 오분의 일을 더해서 돌려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통해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법을 통해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지 못하도록 제도적인 장치를 만드셨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건제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다면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용서를 받아야 하고 그 다음 단계로 자신이 손해를 입힌 사람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손해액보다 더 많은 것으로 보상을 해서 상대의 상한 마음을 보듬어 주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부담이 되는 제사였겠지만 이런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고 천국의 가치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것이 우리의 삶의 습관이 되고 가치가 될 수 있도록 꾸준히 훈련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모습이 바로 삶의 예배를 바르게 드리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각박해지다 보니까 남에 대한 배려가 점점 더 사라지고 있는 추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수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혔더라도 더 많은 부담감을 가지고 상대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상대와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게 최선의 노력을 기우려야 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삶의 예배를 드리라고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런 속건제를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삶이 이런 가치를 부여해서 살아가고 있는 삶인가를 잘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치중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신만 은혜 받으면 되고 자신만 부귀영화를 누리면 하나님은 멋진 하나님이시고 좋은 하나님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예배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아픈 사람들과 함께 울어주고, 부족한 사람들에게 함께 나누고 베푸는 공동체를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속건제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보다 더 헌신적인 삶을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 믿는 사람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던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모습이 속건제를 만드신 하나님께 기쁨의 제사를 드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죄제는 민감하게 잘 드리고 있으면서 속건제에 대해서는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습이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을 새롭게 만드는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적 책임감이 강해야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려하고 양보하고 나누고 베푸는 것이 속건제의 핵심 가치이기 때문에 이런 삶의 모습이 우리의 습관이 되고 가치가 될 수 있도록 오늘도 깨어 근신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삶의 예배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시고 오늘도 우리 때문에 더 밝은 세상이 되고 기쁨이 더욱 넘치게 되는 좋은 세상을 보게 될 줄을 믿으시고 이 말씀을 잘 적용해서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