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지나간 아픈시절 우리의 선인들은 나라도 없는 서러운 시절을 살아왔다.
나라가 있어도 살기 어렵다 아우성치는 요즈음이지만,
그런 나라마저 일본에 빼앗긴 채
자신의 삶은 오직 자신만이 지킬 수 있었던 뼈저린 시절이 바로 100여년 전의 현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까마득한 옛날 일로 생각하지만,
그 시절은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직접 겪으면서 살았던 시대이고,
이제 마지막 노년을 살고 계시는 분들이 바로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시다.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그 시대를 살아오시면서
모진 고초를 그저 인내심 하나만으로 살아왔고,
그것이 자랑할 만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 시절을 살면서 갖은 수모와 고초를 참고 목숨을 부지하면서
그 고초를 가한 이들에 대하여 한을 품으면서도 스스로 참회하고 반성하기를 바라며 살아왔다.
그 중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침략국의 군화발에 짓밟히는 치욕을 당하고
그 사실을 숨긴 채 한많은 세월을 살다가,
그것은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일본이라는 나라의 잘못이라고
세계를 향하여 소리 높여 외치는 이들이 마지막 남은 위안부 할머니들이다.
그들은 살아서 가해자들인 일본정부로부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참회와 반성을 받고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삶을 살고자 하였지만
일본은 이런 기대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언행으로
지금껏 참고 살아온 할머니들에게 또 다른 고통과 욕을 보여주고 있다.
그시절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왕족과 고관대작 대신들을 굴복시켰으니,
이제는 마음대로 한민족과 그 영토를 자신들의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무슨 큰 은혜나 베풀듯
조선인은 일본인 다음가는 대우를 해주겠다며
제2국민이 되려면 국가를 위하여 징용과 징병으로 의무를 다하라며
강제로 끌어다가 부려먹고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차출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한민족의 의로운 선비들은 제 한목숨을 아까와하지 않고
거대한 제국주의와 기꺼이 한목숨 바쳤으니,
윤봉길, 이봉창, 안중근등이 대표적인 의사들이며,
거기에 더하여 서울역에 새로 부임하는 일본 사이토 총독을 향하여
폭탄을 던진 이가 있었으니 바로 강우규지사이다.
강우규지사는 1859년 태어나 격동기 험난한 세상을 살면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서서히 침몰하는 전 과정을 몸소 느끼면서 살아왔다.
썩은 부패관리들은 마지막까지도 나라 생각보다는 자신들의 부귀영화가 우선이었고,
분연히 일어선 동학농민군들에게는 호랑이와도 같이 무서웠으나,
나라를 빼앗으려 들어온 일본군에는 말잘듣는 삽살개 같았다.
그렇게 기울던 나라가 마지막 한일병탄까지 진행되고보니
이제 더이상 치욕적인 삶에 집착보다는
그 집착에서 벗어나 불의의 집단에 대하여 온몸을 던져 항거하고자 마음먹었다.
강우규지사는 1919년 60세가 되던해 삼일만세운동에도 참여하였으나,
이 또한 여의치 않음을 알고,
그해 새로 부임하는 조선총독 사이토가
9월 2일 서울역에 온다는 정보를 알게 된 후
삼엄한 경비를 뚫고 나타나 그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그는 자신이 가져온 폭탄을 던졌으나 안타깝게도 본래의 뜻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의거는 세계 만방에 일본의 부당함과
그에 저항하는 조선인의 울분과 독립에 대한 의지만은 또다시 확실하게 알렸다.
그 의거 이듬해인 1920년 강우규지사는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조국의 독립을 뒤로한 채 산화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뜻깊은 의거는 한국이 해방된 후에야 비로소 되살아나,
그가 사이토를 향하여 최후의 의거를 했던 장소인 이곳 서울역 광장에 우뚝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