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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8장 19절 ~ 28절
예레미야가 말하기를 "칼데아인들이 왕을 넘겨주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바라오니 내가 왕께 고한 주의 음성에 복종하소서. 그리하면 왕이 잘될 것이며 왕의 혼이 살리이다. 20)
But Jeremiah said, They shall not deliver thee. Obey, I beseech thee, the voice of the LORD, which I speak unto thee: so it shall be well unto thee, and thy soul shall live. 20)
그러나 만일 왕께서 나아가기를 거부하신다면 이것이 주께서 내게 보여주신 말씀이니이다. 21)
But if thou refuse to go forth, this is the word that the LORD hath shewed me: 21)
'보라, 유다 왕궁에 남아 있는 모든 여자들은 바빌론 왕의 고관들에게로 끌려갈 것이요, 그리하면 그 여자들이 말하기를, 네 친구들이 너를 덮쳐서 너를 이겼도다. 네 발이 진창에 빠지니 그들이 돌아갔도다. 하리라. 22)
And, behold, all the women that are left in the king of Judah's house shall be brought forth to the king of Babylon's princes, and those women shall say, Thy friends have set thee on, and have prevailed against thee: thy feet are sunk in the mire, and they are turned away back. 22)
위 말씀에 시드키야를 덮친 시드키야의 친구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조금 혼동이 됩니다. 덮치고, 진창에 빠지게 하는 것은 바빌론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아닙니다. 패전과 침략당함의 책임은 권한과 책임을 가진 자들의 가해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나라도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정책과 방향을 결정하여 국정을 운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드키야와 그의 측근들이 전쟁과 침략받음의 상황에서 결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덮치는 친구들이자 시드키야가 진창과 같은 함정에 빠지자 배신하고 돌아가버린 사람들은 그의 측근들입니다.
그 측근들은 예레미야가 가져온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불태운 예후디와 바빌론이 퇴각하자 예레미야를 가두자고 나섰던 스파티야, 그달랴, 유칼, 파술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바빌론의 철수 이후에 예레미야를 죽이자고 나선 모습에서 그들이 또 다시 시드키야가 잡히자 배신하고 돌아가버리는 기회주의자들의 모습을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네 모든 아내들과 네 자녀들을 칼데아인들에게 끌어낼 것이요, 너는 그들의 손에서 피하지 못하고 바빌론 왕의 손에 잡히리라. 또 너로 인하여 이 성읍이 불살라지리라.'" 하더라. 23)
So they shall bring out all thy wives and thy children to the Chaldeans: and thou shalt not escape out of their hand, but shalt be taken by the hand of the king of Babylon: and thou shalt cause this city to be burned with fire. 23)
시드키야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불살라지는 것입니다. 이는 심판이 아닌 재앙의 모습으로 지금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신사참배로 우리민족이 전쟁으로 들어갔고, 목회자들의 에큐메니칼추종과 종교통합으로 이 땅에 재앙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시드키야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불에 타는 것처럼 목회자들의 일탈과 배교로 인하여 우리민족이 고통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재앙은 우리에게는 억울한 고통이지만 이땅의 일들이기 때문에 지나가면 모두 잊혀집니다. 우리는 시선을 이 땅에서 하늘로 향하여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공의의 심판에서는 모두 각자의 댓가를 감당하거나 누릴 것입니다.
O 시드키야가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 누구도 이 말들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래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24)
Then said Zedekiah unto Jeremiah, Let no man know of these words, and thou shalt not die. 24)
그러나 만일 내가 너와 함께 이야기한 것을 고관들이 듣고,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네가 왕에게 말한 것을 이제 우리에게 밝히고, 우리에게 숨기지 말라.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또 왕이 네게 말한 것도 밝히라.' 하거든, 25)
But if the princes hear that I have talked with thee, and they come unto thee, and say unto thee, Declare unto us now what thou hast said unto the king, hide it not from us, and we will not put thee to death; also what the king said unto thee: 25)
그떄는 네가 그들에게 말할지니 '내가 왕 앞에서 내 간구를 드려 왕이 나로 하여금 요나단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여 거기서 죽지 않게 해 달라고 하였다.' 하라." 하더라. 26)
Then thou shalt say unto them, I presented my supplication before the king, that he would not cause me to return to Jonathan's house, to die there. 26)
시드키야가 예레미야에게 당부하는 말로 예레미야를 보호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시드키야는 우유부단한 사람이지만 마음은 착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시드키야는 예레미야를 보호하려고 하고 있고, 동시에 하나님도 예레미야를 통하여 시드키야를 보호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시드키야의 보호를 그대로 순종하여 살고, 시드키야는 하나님의 보호를 순종하지 못하여 파멸하는 것입니다. 시드키야는 자신의 말이 어떻게 예레미야를 보호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어떻게 보호한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의 보호는 사람이 공감하기 쉬우나 하나님의 보호는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이뤄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공감하기 쉬운 사람의 보호는 완전한 보호가 아니지만 공감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보호는 절대적으로 완전하게 안전한 보호가 됩니다. 그러므로 시드키야처럼 공감하기 어려워 불순종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시드키야를 어리석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에게도 시드키야같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은 우리를 보호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백신을 맞으라고 하는데 그것을 거부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공감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백신을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백신에 대해서 알려주셨으며, 그들은 주저하고 망설이는 믿음이라는 부정형의 믿음으로 백신접종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백신은 부분일뿐 제 자신도 매일의 삶에서 내 자신의 생각으로 안주하고 있는 것이고, 그런 시간은 시드키야가 예루살렘성이 함락되기전까지의 나날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있는 것은 없는 것처럼 없는 것은 있는 것처럼 느끼고 살아야 합니다. 어짜피 우린 가진 것이 없었고, 모든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모든 고관들이 예레미야에게 와서 물으니 그가 왕이 명한 그 모든 말대로 그들에게 말하였더라. 그들이 그와 말하는 것을 그치고 떠나갔으니 이는 그일이 알려지지 아니하였음이라. 27)
Then came all the princes unto Jeremiah, and asked him: and he told them according to all these words that the king had commanded. So they left off speaking with him; for the matter was not perceived. 27)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감옥의 뜰에 거하였으며,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도 거기 있었더라. 28)
So Jeremiah abode in the court of the prison until the day that Jerusalem was taken: and he was there when Jerusalem was taken. 28)
예레미야는 시드키야의 조언에 순종하여 그를 죽이고자하는 이스라엘의 고관들로부터 살해당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조언도 능력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조언은 절대적인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거나 없거나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순종은 이해해서 동의하여 실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이해하고 동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탄의 종들이 무엇이 급한지 그들의 시간표를 서두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신뢰해야 합니다. 내 자신의 동의할 수 없는 것을 신뢰해야하는 것은 가혹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드키야왕도 이방인에게 항복하는 것이 그의 사는 길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어색하고 언짢은 길이 사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탄의 종들이 그들의 일들을 진행하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세계적인 산불과 하와이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이런 것에 두려워할 필요없이 하나님의 일들을 위하여 그들의 악행도 같이 일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드키야는 그의 사람들과 느부캇넷살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시드키야가 느부캇넷살에게 항복해야 하는 것이 그가 사는 순종의 길이라면 우리 앞에 놓여진 순종은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것에 당신은 당연히 공감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순종은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것만 순종이 아닌 것입니다.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순종은 모든 재산과 지위와 명예와 건강을 포기하는 순종이 됩니다. 이것에 대해서도 공감하실 수 있나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 힘들어 할 것입니다. 왜냐면 인내가 필요하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의 연기가 영원무궁토록 올라가리라.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있으며 여기에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느니라."고 하더라.
요한계시록 14장 11절 12절
당신은 인내를 하며, 잘 극복하시는 지요? 저는 인내함을 좋아하지 않고 잘 극복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저의 선택과 상관없이 반드시 인내하고 순종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것은 인내가 필요한 것이며,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것이며, 그 때 인내하지 못함은 곧 사망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백신은 인내하지 못함이 재앙이지만 짐승의 표는 인내하지 못함이 심판이라는 것을 반드시 유념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지금 마음속에 새겨야 합니다. 언제 성경을 읽지 못할 시대가 닥칠 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를 인내하는 것은 곧 세상의 모든 것을 잃는 것에 대한 인내인 것입니다. 백신에서도 직장과 생계를 잃을 수도 있는 인내를 요구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표나 백신을 거부하는 것이 인내가 아니라 세상을 선택하지 않고 버리는 것이 인내인 것입니다. 백신에서는 쉽게 거부를 이룬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의사나 고위관료, 그리고 부유하여 다른 사람들과 엮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그리고 저와 같이 자영업자들도 비교적 압박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가올 짐승의 표는 그런 예외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인내에 대한 자신의 준비를 지금 해야합니다. 인내는 되는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모두 탈락하여 시드키야처럼 낙오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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