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분 늦게 가는 시계
(월간문학 12월호 추호경)
우리 집에는 벽시계가 하나 있다. 문자판의 숫자가 고풍스러운 로마자로 되어 있고 테두리의 황갈색 색상도 거실 벽과 잘 어울려 화가인 아내도 매우 맘에 들어 한다.
그런데 이 시계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늦게 가는 것이다. 배터리가 약해서 그런가 하고 새 것으로 갈아 끼워 보기도 하고 시계 뒷면의 조절장치를 + 쪽으로 틀어 보기도 했는데 마찬가지였다. 시계방에 들고 가 고쳐 볼까 하다가 묘하게도 이 시계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꼭 15분만 늦은 상태에서 24시간 정확히 돌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크게 불편할 것도 없을 것 같아 그냥 그대로 두기로 했다. 그리하여 거실의 정중앙에서 ‘나 여기 있소!’ 하고 둥근 얼굴의 벽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이 어느 사이에 우리 집의 표준시처럼 되었다.
아내나 나는 진즉부터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일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거기서 어떤 교훈을 찾아내기로 하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 집의 ‘표준시’가 15분 늦어진 것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는데, 거기서 얻는 교훈은 서로 달랐다. 나는 ‘우리 시계가 15분 늦다. 그러니 그 만큼 일찍 서둘러야 한다. 맞아! 우리는 딱 제 시각에 맞추려고만 하다가 늦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고, 매사에 15분 정도는 미리 챙겨 정확을 기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아내는 거의 정반대다. ‘정말 우리는 그 동안 너무 시간에 쫓기며 아등바등 살아왔어. 뭐 제 시각에 꼭 맞추지 않는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15분만 느긋해도 얼마나 살맛나는데….’ 하는 식이다.
그러고 보니 아내에게는 ‘15분 트라우마’가 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니 꽤 오래 전 일이다. 놓치기 싫은 영화가 있어 상영 시작 15분 전에 극장 매표소 앞에서 아내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나는 칼퇴근하여 택시를 타고 와 여유 있게 티켓을 구매한 다음 아내를 기다렸다. 2월 초이고 바람도 좀 불어 날씨가 제법 써늘한데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었음에도 아내가 나타나지 않았다. 매표소 앞에 늘어선 줄이 아까보다 배나 더 길어진 것을 보고 일찍 와서 표를 사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 눈은 바쁘게 주위 사람들을 훑고 왔다 갔다 했다. 5분이 더 지나 얇은 옷 사이로 한기가 계속 매섭게 스며들자 영화를 본다는 기대보다는 짜증이 앞섰다. 10분이 더 지나자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이제는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그저 아무 일 없이 아내가 빨리 와줬으면 하는 생각만 간절했다. 15분이 다 됐을 무렵 드디어 아내가 헐레벌떡 멀리서부터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아내의 얼굴을 보자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지만 내 입에선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영화 안 봐!” 하는 퉁명스러운 고함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우린 그 날 그렇게 별렀던 그 영화를 못 봤다. 아내는 그 다음부터는 나하고 여간해선 밖에서 만나는 시간 약속을 하지 않는다.
언젠가 아내가 다른 얘기를 하다가 “시간에 관한 한 당신은 완벽주의자인 것 같아요.”라고 슬쩍 흘려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이때의 ’완벽주의자‘는 좋은 뜻은 아니고 빈정거림이 섞인 것이리라.
사실 돌이켜보면 나는 너무 완벽을 추구해 오며 살아 온 것 같다. 검사로서 사건 수사를 할 때에도 마치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를 수술하는 외과의사라도 되는 것처럼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물론 미숙한 수사로 진범이 분명한 피의자를 놓치거나 착오에 빠져 억울한 사람을 기소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은 검사로서의 당연한 자세다. 그렇지만 완벽하게만 일 처리를 하려다 보니 남달리 더 피곤했다. 또 그렇게 한다고 실수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완벽주의자라고 해서 완벽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아내가 나를 두고 ‘시간에 관한 한’ 완벽주의자라고 한 것은 시간에 관해서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관해서 특히 더 그렇다는 말일 것이다. 사실 나는 어려서부터 시간을 매우 소중히 여기고 아꼈다. 이 세상에 시간만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공평하게 분배된 자산이기에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고 생각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허투루 쓰는 사람이나 나와의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무슨 악덕이라도 범한 것처럼 취급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나이고 보니 우리 집 벽시계가 15분 늦게 가는 것에서 얻은 교훈이라는 것도 더욱 완벽해지라는 교시(敎示)로 받아들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하나의 반전이 일어났다. 얼마 전 틈새 시간이 생겨 조그만 커피숍으로 들어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노트북을 꺼낸 뒤 머그컵의 아메리카노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Wi-Fi 비번을 확인하려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메모판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을 잘 지키려면
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 알도 카마로타
순간 나는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가벼운 경련을 일으켜 머그컵의 커피를 바닥에 약간 흘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수십 년 전 극장 매표소 앞에서의 일부터 최근에 사무실에 늦게 온 의뢰인에게 핀잔을 준 일까지 ‘시간의 완벽성’ 때문에 내가 주위 사람들을 괴롭혀 왔던 수많은 일들이 하나하나 내 눈 앞에 나타나 청룡열차처럼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그러면서 기다리는 여유도 못 갖추고 그저 지키려고만 했음에 깊은 후회와 반성도 함께 일어났다.
그렇다! 반드시 완벽을 추구해야 할 분야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다 완벽할 수는 없다. 완벽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너그러움과 용기도 필요하다.
돌이켜보니 무슨 일이든지 항상 완벽하게 해내려고 열심히 살아왔기에 성취감도 크긴 했지만, 한편 시간에 쫓기며 너무 완벽해지려고 하다 보니 다른 중요한 것들을 놓쳤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나이도 꽤 들었고, 내가 꼭 해야 할 일들은 어느 정도 해 놓은 것 같다. 지금부터라도 시간은 시간대로 흘러가게 놔두고, 나는 나 나름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일만 자유스럽게 하면 어떨까? 나도 시간을 놓아주고, 나 역시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말이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벽시계를 바라보니 빙긋이 웃으며 “이제야 내가 주는 교훈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 같군.” 하는 것 같았다.☼
(월간문학 2021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