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음식,
달걀
우리
어릴 적에는 다들 가난해서 달걀을 열 개 들이 꾸러미로 사 먹을 수 있는 집이 흔치 않았다. 그런대로 먹고살 만했던 우리 집만 해도 여덟이나 되는 식구가 한 개씩 고루 달걀을 먹는 식사란 꿈도 꿀 수 없었다.
소풍 갈 때나 삶은 달걀 한두 개를 소금과 함께 종이에 싸서 들고 갈 뿐 점심으로 달걀부침을 싸 오는 건 부잣집 아이들이나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어쩌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형의 밥그릇 안에 날달걀 한 개씩을 깨어놓고 밥으로 살짝 덮어 놓을 때가 있었다. 식사하던 형이 밥을 먹다가 달걀을 발견하고는 기쁨에 찬 표정으로 비벼 먹는 걸 보며 나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부러웠다.
그리고 조금은 서러웠다. 그 당시 옆에서 못 본체 그걸 훔쳐보던 나에게 달걀 비빔밥은
그야말로 최고의 요리였다. 하지만 식구가 많아 여유가 없던 집에서 가장과 장남에 대한 선택과 집중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예전에
아일랜드가 한국 못지않게 가난하게 살 적에도 달걀이란 쉽게 대할 수 있는 음식 재료가 아니었던 듯싶다. ‘안젤라의 재(Angela’s Ashes’)’라는 소설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영국에 취업하러 간 아버지가 첫 월급을 보내주면 다가오는 주일 아침에 식구마다 달걀 한 개씩 먹을 수 있는 근사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겠노라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주인공은 기쁨에 차서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 너 들었지? 주일 아침에 달걀 한 개씩 먹을 거란다.
오 하느님. 나는 달걀 먹을 줄 안답니다. 한쪽의 껍데기를 톡톡 쳐서, 가볍게 깨. 숟가락으로 껍질
안의 달걀을 살살 들어 올려. 그리고 녹인 버터와 소금을 노른자 쪽으로 밀어 넣어. 천천히 아주 조금씩 퍼먹을 거야. 입에 버터와 소금을 조금씩 넣어. 오 하늘에 계신 하느님. 하늘에 맛이 있다면 그건 분명히 버터 넣고 소금 친 달걀 맛이겠지요?”
나는 여태까지 본 글 중에서 달걀에 대한 갈망을 이처럼 절실하게 드러낸 걸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슬프게도 무책임하고 무능한 그의 아버지는 어쩌다 돈을 벌어도 술 마시느라 몽땅 다 써버려서 주인공의 소박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요즘은
달걀은 매우 값싼 식재료다. 나는 식품점에 가면 으레 달걀을 서른 개들이 한 판씩 사 오면서도 값이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가 아니라 달걀값이 워낙 싸서 값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렇다. 아마 서른 개에 $5쯤 되려나? 그러면 25센트 짜리 동전 한 개로 달걀 한 개를 사고도 거슬러 받을 수 있으니 정말 싸기는 싸다.
나는
아침마다 달걀을 한 개씩 먹는다. 가열한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조금 두르고 조금 튀긴 다음 물을 조금 붓고
큰 냄비 뚜껑을 닫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열어보면 하얀 막이 노른자를 덮은 모양이 예쁘다. 하얀 막은
노른자가 흘러내리지 않게 하므로 내가 즐겨 써먹는 달걀 프라이 방법이다. 프라이한 달걀을 접시에 옮긴 다음
소금이나 버터를 치지 않고 숟가락으로 퍼서 입으로 직행시키니 안젤라의 재에 나오는 주인공만큼 달걀에 대한 갈망이 절실하지는 않은 셈이다.
오늘
아침에는 늘 하던 대로 냉장고에서 달걀을 한 개만 꺼내려다가 ‘안젤라의 재’라는 소설이 생각나서 두 개를 꺼냈다. 프라이팬에서 그걸 튀기며 특별히 오늘은 버터와 소금까지
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귀한 음식을 흔하게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기로 했다. 그런데 소금은 있는데, 버터가 없었다.
하기야 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 그런 가공식품을 끊은 지 오래되었으니 있을 리가 없었다. 아쉬운 대로 달걀프라이 두 개를 예쁜 접시에 옮겨 담고, 소금을 조금씩 뿌려가며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먹었다. 넉넉하고 편안한 맛이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하늘의 맛도 이럴까요?
(2018년 2월 12일)
첫댓글 형기는 삶의 과정에서 느낀점들을 이야기 보따리풀 듯 생생하게 전하고 있어 누구나 공감하고있네. 다양한 소재를 발굴하여 재미있게 엮어나가는 형기의 글 솜씨에감탄을 금할 수잆네. 재미있게 읽었네
지금 형기의 이 글을 보는 시간은 2월14일 아침 06시39분, 주방에서는 아내가 아침준비하는 소리가 들린다. 07시가 되면 아침을 먹을 것이다. 마침 냉장고에 엇그제 갓 사온 달걀이 스물 댓개는 남아 있을 것이다. 오늘 아침은 날달걀을 갓 퍼온 밥속에 넎고 비벼먹어볼 것이다. 참 오래만이다, 초등학교4~5학년 시절, 우리집 닭장에 닭이 알을 낳으면 낳자마자 꺼내 뒤란에 가서 꽁치깡통에 밥을 지어 그 따끈따끈한 달걀을 넣어 비벼먹다 엄마에게 들켜 혼난적이 한두번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