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랭지 여자
홍대욱
장미의 중심과 배추의 중심은
똑같이 활짝 피어난다
섭리보다 아름답고 정직한 사람
폭설을 견디는 햇살 좋은 오두막집
쌀쌀하지만 따뜻한 연옥이
예열하는 지옥보다 낫다
도시 구석진 곳 살 적에
들어오는 어귀부터 환하게 밝혔다가
떠나는 너른 마당에 길고 무거운 그림자 끌어당기며 걸어간 그대
드리운 그늘에 사는 나는 행복하다
해칠지도 모를 겨울 햇살 죽창을 막고서 감싸주는
드높은 고랭지 여자
聖 겨울 쪽지
나무도 아닌 시멘트 전봇대
세찬 바람에 뒤틀리며 펄럭이는
스카치테이프 손가락 마디만큼 붙은 쪽지
급구 주방 보조
먹고 사는 이가 먹고 살려는 이를
간절히 찾는다
그나마 매정한 세파는
전봇대마다 뾰족 돌기 판을 씌워
발도 붙이지 못했다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휘파람은 불지도 못한 채
바람 따라 울면서 펄럭이는
겨울 쪽지
겨울 시인
겨울의 시인은 칼바람에, 지상에서 도려내질 수도 있다. 가난한 이들, 힘없는 이들과 함께.
나는 안데르센을 프롤레타리아 문학가의 한 사람으로 본다. 그의 「성냥팔이 소녀」가 그렇다. 성냥팔이 소녀처럼 먹고사는 소망과 그 최대치의 환상의 불을 가까스로 지피다 이내 불은 꺼져버리고 지상에서 마치 종이 인형처럼 오려내질 운명이라면 기꺼이.
위안과 희망이 있다. 다름 아니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여름 시인론’이다.
“나무는 봄의 폭풍 속에서도 의연하게 서 있습니다. 혹시나 그 폭풍 끝에 여름이 오지 않으면 어쩔까, 하고 불안해하는 일도 없습니다. 여름은 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그들의 눈앞에 있듯 근심 걱정 없이 조용하고 침착하게 거기 서 있는 참을성 있는 이들에게만 여름은 찾아옵니다.”
-릴케, 「이탈리아 비아레지오에서 띄우는 편지」
봄의 폭풍뿐이겠는가. 겨울 삭풍도 그러리라. 릴케의 그 나무를 나는 ‘고독의 맹수’라고 부른다. 나무는 등 돌리면 못 견디는 우리 인간과는 다르게 모든 세계의 앞에 서 있는 고독의 맹수다. 호랑이가 절대 자신을 가엾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우리 ‘고독의 맹수’들 또한 어떤 폭풍과 삭풍이 와도, 지상에서 도려내질지언정 자신을 가엾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