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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5. 12. 주일 큐티
다니엘 5:1 ~ 12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관찰 :
1) 벨사살의 경거망동
- 1절. “벨사살 왕이 그의 귀족 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그 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 바벨론의 왕들의 계보는 느부갓네살(B.C. 605 – 562) -> 아멜말둑(렘 52:31, 에윌므로닥, B.C. 562 – 560) -> 네르갈사레셀(B.C. 560 – 556) -> 라바시 말둑(B.C. 556) -> 나보니더스(B.C. 556 – 539) -> 벧사루슬(Belscharusur, B.C. 550 - 538)로 이어집니다. 이 중에 벧사루슬이 바로 벨사살 왕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그 아들 에월므르닥으로 계승되었고(B.C 561. 왕하 25:27), 에월므로닥은 그의 매부 네르갈사레셀로 말미암아 계승되었고(B.C. 559), 네르갈사레셀은 그의 아들 라바시 말둑으로 말미암아 계승되었고, 그 뒤에는 나보니더스가 왕이 되었고(B.C. 554), 그의 아들이 벧사살입니다. 나보니더스는 B.C. 550년경 중앙 아라비아의 테마로 원정을 가게 되면서 그 아들 벨사살에게 모든 행정권을 위임했습니다. 이러한 이중적 통치는 바벨론의 멸망 때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나보니더스는 테마 원정에 성공했지만 바벨론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건강상의 이유이거나 정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본 절은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바벨론 도성이 에워싸여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벨사살은 큰 잔치를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벨론 성이 난공불락의 요새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군이 몰려와 에워싸고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귀인들 1000명을 불러서 큰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은 사실 정신 나간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혹 적군에게 여유를 보여주고자 한 전략적 행위였다고 하더라도 벨사살과 그 귀인들은 술에 만취했습니다.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 즉, 여호와의 전에서 사용되던 제기들을 가지고 오게 해서 거기에 술을 따라 마시는 경거망동의 극치를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 2절.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의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온 금, 은 그릇을 가져오라고 명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 사실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의 자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부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적인 표현에서 자주 사용되던 표현입니다. 손자를 자식으로, 혹은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표현하는 일은 종종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벨사살이 느부갓네살의 국권을 물려받았다는 의미로서 고의적으로 그렇게 표현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도 자신보다 천 년 전의 인물인 ‘나람신’(Naramshin)을 자신의 ‘늙은 아버지’라고 표현하며 신흥 바벨론의 정통성을 부각하는데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벨사살이 어떤 이유로 느부갓네살을 부친이라고 표현하게 하였던지 간에 느부갓네살을 부친이라고 했다면 그는 느부갓네살의 교훈을 받았어야만 했습니다. 다니엘 4장의 내용은 느부갓네살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박살이 나고, 그로 인해서 교만을 후회하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를 자처한 벨사살은 술에 만취하여 느부갓네살이 경배한 하나님의 전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제기를 가지고 자신과 귀족과 왕후와 후궁들로 하여금 술을 마시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당치 않은 짓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3절 ~ 4절.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탈취하여 온 금 그릇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과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더라 그들이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 => 벨사살은 하나님의 전에서 사용되던 도구들을 가지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우상단지들에게 경배하고 찬양했습니다. 그것은 고의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우습게 만드는 악의적인 행위였습니다. 그의 때에는 다니엘을 기용하지 않았고, 유대인들을 멸시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여호와의 제기를 가지고 술을 마시고, 다른 신들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권능이 다른 신들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의 뼈저린 회개와 하나님을 높인 사건과 너무나 크게 대조되는 사건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2) 글씨를 쓰는 손가락
- 5절.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 손가락들이 나타났습니다. 갑자기 손들이 나타나서 금박으로 씌워놓은 연회장의 거대한 벽면에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고, 온통 글이 씌여지게 되었습니다. 그 모양은 너무나 무시무시한 광경이었습니다.
- 6절. “이에 왕의 즐기던 얼굴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 => 너무나 두려운 광경을 홀연히 보게 된 벨사살은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무엇인가 크나큰 잘못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넓적다리”(חַרְצֵהּ, 하르체흐)는 원어상 ‘허리’를 가리키는 말이며, “마디”(קִטְרֵ, 키테르)는 ‘관절’, ‘매듭’이라는 뜻 외에 ‘등뼈’, ‘척추뼈’를 의미합니다. 허리를 힘의 근원으로 여겼던 당시의 통념상 극도의 공포로 말미암아 넓적다리까지 후둘거리고 무릎이 부딪치고, 등뼈가 오그라드는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자였던 느부갓네살 조차도 금신상에 대한 꿈과 큰 나무의 꿈을 꿀 때 두려움이 가득했는데, 못난 벨사살이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두려움이 가득하고 살 소망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것입니다.
- 7절 ~ 9절. “왕이 크게 소리 질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의 지혜자들에게 말하되 누구를 막론하고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리니 그를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리라 하니라 그 때에 왕의 지혜자가 다 들어왔으나 능히 그 글자를 읽지 못하며 그 해석을 왕께 알려 주지 못하는지라 그러므로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의 얼굴빛이 변하였고 귀족들도 다 놀라니라” => 벽에 새겨진 글씨를 해석할 자를 찾지만 그 글을 해석할 자가 없었습니다. 당연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씨는 고대 베니기아 문자라는 설과 히브리어의 고대 문자라는 설이 있지만, 당시 갈대아 술객과 술사들과 점쟁이들의 수준을 염두에 볼 때, 그들 중에 이러한 문자를 아무도 몰랐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 글자들은 전혀 생소한 문자들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영적 조명없이는 읽을 수 없는 암호와 같은 것이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로 인해서 벨사살은 더욱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3) 다니엘을 부르소서
- 10절 . “왕비가 왕과 그 귀족들의 말로 말미암아 잔치하는 궁에 들어왔더니 이에 말하여 이르되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왕의 생각을 번민하게 하지 말며 얼굴빛을 변할 것도 아니니이다” => “왕비”(מְלֶכֶת, 믈레케트)는 이미 왕의 아내가 잔치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을 염두에 볼 때, 벨사상 왕의 어머니, 즉 나보니두스의 아내이거나 느부갓네살의 아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11절의 내용을 염두에 볼 때, 느부갓네살의 아내일 가능성을 더 크게 보게 됩니다. 개역성경에서는 ‘태후’로 번역했습니다. 잔치에 참여한 이들이 모두 혼란에 빠져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상황이 되었고, 이미 잔치는 물건너 간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태후가 오게 되고,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 11절.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니이다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 태후는 다니엘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이후에 정계에서 은퇴하여 일선에 나서지 않았던 듯합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잊을 수 없는 것이었고, 태후는 그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박수장, 즉 일반 박수들의 리더가 아니라 그들 가운데 신과 같은 존재로 추앙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을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들의 어른으로 삼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12절.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하는 이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풀 수 있었나이다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 드리리이다 하니라” => 다니엘은 헝겊속의 송곳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결코 감추어질 수 없는 그런 탁월한 존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결국 찾아오게 될 수밖에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지 않고는 해법이 없기 때문에 결국 원하지 않아도 그를 부를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금, 은, 동, 철, 나무의 신에게 경배하고, 여호와의 성전 기물을 가지고 술을 마시기에 갈대아의 술사들과 술개과 점장이와 박수들은 감히 다니엘을 불러올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를 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 것입니다. 물론 다니엘의 위대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함이고, 하나님께 온전한 삶을 드린 자의 위대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에 이어 벨사살의 교만을 이렇듯이 박살을 내신 것입니다.
가르침 :
1) 벨사살은 정신이 나간 존재입니다.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이 에워싸서 바벨론이 언제 함락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바벨론의 성벽을 의지했습니다. 그 견고함으로 결코 나라가 망하지 않을 것이라 여긴 듯합니다. 그러하기에 귀인 천명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것이 대적들에게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될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느부갓네살이 결코 누구라도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할 것을 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느부갓네살의 정통성을 잇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 벨사살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전 기명을 자신의 술자리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술에 취해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 엉터리 같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벨사살이 제국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2) 두텁게 금이 발라진 회벽에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글을 가득하게 썼습니다. 그 그들은 벨사살과 그 잔치에 참여한 이들을 두렵고 또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심각한 잘못을 하고 있는지 그 때에야 자각 증상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그 글의 내용을 알 수 없어서 모든 사람들을 동원하지만 여전히 해석이 불가했습니다. 그럴수록 벨사살과 그 일행들은 두려움에 휩싸였고, 잔치는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습니다.
3) 결국 다니엘이 부름을 받게 됩니다. 헝겊속의 송곳과 같이 감추어질 수 없는 존재였던 다니엘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가 아닌 하나님이 만드신 상황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던 이들에 의해서 불려가게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아내로 여겨지는 ‘황후’는 다니엘을 알던 자였습니다. 다니엘이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존재였음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이 그 가장 높으신 분을 섬기지 않고 온갖 우상을 섬기는 것에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자, 벨사살의 교만으로 도래한 재앙과 같은 상황에서야 비로소 다니엘을 기억하고 그를 불러올 것을 제안한 것입니다. 이 황후 역시 미련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4) 다니엘이 그러한 제국의 상황에서 또다시 부름을 받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이 완악한 21세기의 상황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싫어하고 미워해도 하나님의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 세대의 상황에서 그렇게 세상 사람들을 압도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진짜 하나님의 사람은 준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삶의 모범으로, 민족과 역사 앞에서 책임 있는 존재로 준비된 인물이 있게 되면 그는 헝겊속의 송곳처럼 감출래야 감출 수 없고, 결국 하나님의 때에 찾아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청년들, 그런 다음 세대를 세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적용 :
1) 교만은 대를 넘어서도 망하는 길입니다. 느부갓네살의 후계자를 자처한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의 교만에 대한 처절한 고백을 들었어야만 했습니다. 다니엘 4장은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후예들에게 남긴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느부갓네살의 중요한 메시지는 뒤로한 채 느부갓네살의 영광만을 탐하고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른 벨사살은 가벼워도 너무 가벼운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제국을 다스릴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손가락들, 아마도 천사들의 손가락으로 여겨지는 손가락들에 의해 인간이 해석할 수 없는 문자 혹은 암호를 쓰게 하셨던 것입니다. 교만은 철저하게 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바벨론의 성벽이 견고했어도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자는 그 성벽을 방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헝겊속의 송곳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럴 수 있어야 할 것이고, 또 내게 맡겨진 양들이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양육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그런 놀라운 사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이 땅에서 머무는 상황 속에서 나의 최선을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삶을 살아내고자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