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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 대원군의 측근이던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 출세 코스 밟아
⊙ 육영공원 나온 후 주미 서리공사, 참찬관 등 역임하며 서구 문물에 눈떠… 독립협회 위원장 지내
⊙ 이완용, “천도(天道), 인사(人事)가 때에 따라 변역(變易)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라고 변명
장철균
1950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주라오스 대사·주스위스 대사 / 현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출간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 대표·전 스위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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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과 한일합병에 찬성해 ‘매국노’가 된 이완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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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주미 공사관 건물. 1889년 박정양 초대 주미 공사가 임차해 16년간 사용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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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이 학부대신 시절 문을 연 법어(프랑스어)학교. 맨 왼쪽이 프랑스인 교사 마르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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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을 강요하러 방한한 이토 히로부미. |
이 와중에 1901년 2월 의정부 참정(參政·정1품)이던 이호준이 노환으로 쓰러졌다. 고종은 이호준의 후계인 이완용을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으로 불러올렸다. 이호준은 얼마 안 가 81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이완용은 곧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자 보호자였던 아버지를 대신해 수구파의 좌장 자리에 올랐다.
이완용은 인생 최대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전 그의 정치적 행보가 전적으로 양부 이호준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자신이 독자적으로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의 국권 침탈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904년 9월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굳어지자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이완용이 스스로 내린 정치적 결단은 친일이었다. 1905년 일본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방한해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요했다. 이완용은 “일본 천황과 정부가 타협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우리 정부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면서 조약 체결에 앞장섰다.
이완용의 조카이자 이완용의 비서직으로 있던 김명수(金明秀)는 1927년 펴낸 《일당기사(一堂紀事)》에서 “이 말을 들은 이토는 하세가와를 대동해 궁궐로 들어가 마구잡이로 보호조약을 통과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 어전회의에 참석한 여덟 대신 중에 다섯 명은 찬성, 세 명은 반대했다. 처음부터 찬성을 외친 대신은 이완용과 이지용(李址鎔) 둘뿐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을사늑약 후 친일 행보
을사늑약 이후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명사가 됐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1907년에는 대한제국 총리대신직에 올랐다.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 이상설(李相卨) 등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 침략의 부당성과 을사늑약 무효를 세계에 호소해 보려 했으나 좌절됐다. 이완용은 이 사건을 빌미로 이토를 도와 고종을 퇴위시키고 내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는 정미(丁未)7조약을 체결했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이완용은 황제를 향해 칼을 빼들고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고함까지 질렀다고 한다. 반일 단체인 동우회(同友會) 회원들은 이완용의 자택으로 몰려가 불을 질렀다. 전국 각지에서 이완용 화형식이 격렬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이완용은 군대 해산에 앞장서는 등 친일 행보를 계속했다. 그 공로로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동화장(旭日桐花章)을 받았다.
그는 자식이 없었던 순종의 황태자로 고종의 막내아들 영친왕을 내세웠다. 막후에서 실질적 권력을 쥐려 했던 고종의 노욕을 이용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에서 물러나면서 사법권을 넘기는 작업을 계획하고 이 일을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맡겼다. 내각 내에서도 반대가 빗발쳤지만 그는 일본과 단독으로 기유각서(己酉覺書)에 서명해 버렸다. 그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대훈위국화대수장(大勲位菊花大綬章)을 받았다. 조선인으로 이 훈장을 받은 사람은 조선 왕족 3명을 제외하면 이완용이 유일하다.
통감부, “그물도 안 쳤는데 물고기가 뛰어들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토를 하얼빈역에서 사살했다. 이완용은 추도회에 참석해 “이토 공은 나의 스승과 같은 존재였으며 그가 제창한 극동평화론(極東平和論)의 뜻을 지지하고 존경한다”고 말하고 안중근 의사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해 12월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李在明) 의사가 이완용을 습격했다. 이완용은 칼에 세 군데를 찔렸지만 목숨을 건졌다.
이 무렵 통감부에서는 합방(合邦)을 앞당기기 위해 이완용과 대립관계에 있던 송병준(宋秉畯)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게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완용은 핵심 측근 이인직(李人稙)을 통해 “현 내각이 와해되어도 이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면서 일본에 합병을 먼저 제의했다. 송병준과 친일 경쟁을 하던 그가 선수를 친 것이다. 통감부마저도 “그물도 안 쳤는데 물고기가 뛰어들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합병조약문에서 이완용은 “국호 한국과 황실의 왕 칭호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제는 국호는 조선으로 변경했지만 순종에게 ‘이왕(李王)’, 고종에게 ‘이태왕(李太王)’이라는 칭호를 주고 한국 황실을 일본 황족에 준해 예우하기로 약속했다.
1910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어전회의를 열어 한일병합에 관한 건을 상정하고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통감부 관사로 찾아가 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와 조약문에 서명했다. 조약체결 후 이완용은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伯爵)의 작위와 퇴직금 1458원 33전, 총독부의 은사(恩賜)공채금 15만 원을 받았다.
3·1운동 당시 ‘경고문’ 발표
1912년 이완용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 올랐다. 일제하에서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였다. 이완용은 ‘일선융화(日鮮融化)’를 내세우며,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 간의 혼인을 권장하는 동화정책에도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손병희(孫秉熙) 등 민족대표가 그를 찾아가 독립선언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했다. 오히려 당시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편지를 보내 탄압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완용은 1919년 3월 28일에 쓴 친필 편지에서 “수습방책은 내선인동화(內鮮人同化)에 있습니다. … 먼저 조선인들에게 국어(일본어)를 보급하는 데 힘써야 합니다”라고 건의했다.
더 나아가 이완용은 조선 민중을 상대로 “조선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몰각한 망동으로서 이를 자각하지 못하면 강압책을 쓸 수밖에 없다. 한일합방은 조선 민족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이다. 일본과 조선은 한 뿌리로서 민족자결주의는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경고문까지 발표했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백작에서 후작으로 올려주었다. 1923년에는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이 되었다. 1924년에는 그의 아들 이항구(李恒九)도 남작(男爵)이 돼 보기 드문 부자귀족(父子貴族)이 되었다. 이완용은 일제에 협력한 공으로 막대한 부(富)도 누렸다.
이완용은 1926년 폐병으로 69세에 삶을 마감했다. 장례식은 일본인, 조선인 합쳐 50명의 장례위원이 엄수했고 장례 행렬의 규모는 고종 황제 장례 행렬을 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였다고 한다.
1945년 해방이 된 이후에도 친일파 박중양(朴重陽)은 이완용을 ‘역사의 희생자’라며 변호했다. 그는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에 항거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고 국난을 당하여 분사(憤死)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사상계의 자극은 될지언정 부국제민(扶國濟民)의 방도는 아니다. 하물며 관직을 사퇴하고 도피하는 것은 무책임한 자의 행동일 뿐이다”라면서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고 변호했다. 근래에 나온 ‘애국과 매국의 두 얼굴’이라는 부제(副題)가 달린 《이완용평전》은 “지금까지 우리는 탐욕스럽고 패륜적이며 배은망덕한 인간 말종이라는 ‘그럴듯한 매국노 이완용 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삿대질을 하면서 망국과 매국의 모든 책임을 그에게 떠넘겨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명수의 《일당기사》에는 이완용의 인생관이 기록되어 있다. “나(이완용)는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차 긴요한 까닭에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 갑오경장 후 아관파천 사건으로 노당(露黨)의 호칭을 얻었고 그 후에는 … 일파(日派)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망국의 책임을 이완용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고종의 정치력 부족, 민비와 대원군의 이전투구(泥田鬪狗), 척사 세력과 개혁 세력의 투쟁과 분화, 조선사회의 경직성과 부실한 근대화 개혁 등등 구한말 조선에 망국의 총체적 책임이 있다. 이완용이 총리대신으로서 ‘자진해서’ 일제에 협조하여 망국에 마침표를 찍는 선봉장의 역할을 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이완용은 ‘매국노’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다. 자신이 고백한 ‘천도와 변역’ 그리고 이러한 인생관에 따른 기회주의적 행적은 정치적 변신을 거듭했던 양아버지 이호준으로부터의 학습효과와 자기최면의 결과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월간조선 2016년 10월호 / 글=장철균 서희외교포럼대표·전 스위스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