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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8일 [성 루카 축일]
루카 10,1-9
거절과 실패를 이기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오늘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당연히 복음도 복음을 전하도록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는 내용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저도 소공동체 반장님들을 파견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겪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바로 거절당하는 아픔입니다.
문을 열어주지도 않고 전화를 안 받고 심지어는 안 다닌다고 했는데 왜 괴롭히느냐고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절당할 때 오는 아픔을
이겨내는 힘입니다.
이 힘의 출처를 알지 못하면 선교를 계속 이어 나갈 수 없습니다.
영화 ‘라라랜드’에서 남자친구는 여자친구를 위해 오디션 기회를 한 번 더 얻어옵니다.
그러자 여자는 말합니다.
“또 안 되면 어떡해? 이번에도 거절당하면 난 죽을 거야. 수백 번의 오디션을 봤지만,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어.
내가 연기를 해도 그들은 방해하고 비웃었어.
나 말고도 더 예쁘고 실력 있는 애들이 널려있고 아마도 난 그냥 충분하지 않은 거야.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 무언가 하고 싶어서 매일 꿈을 꾸지만, 결국 헛된 꿈이었단 걸 깨닫는 사람들.
나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인 거야.”
남자는 여자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음 날 데리러 나오겠다고 떠납니다.
여자의 거절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남자의 응원하는 마음에 무너집니다.
그러나 이 도전이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바로 그 남자를 사랑할 때까지만입니다.
누구도 혼자 힘으로는 거절당함의 고통을 계속 이겨낼 수는 없습니다.
그 거절당하는 고통을 상쇄해 줄 사랑하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거절당하기 연습』이란 책을 쓴 지아 장이 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의 거절과 실패로 실의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두려움을 극복해보기 위해 100일 동안 거절당하는 연습을 해 보기로 합니다. 경비원에게 100달러 빌리기, 햄버거 리필 요구하기, 하루 동안만 취직시켜 달라고 하기, 도넛으로 오륜기 만들어달라고 하기 등을 시도했습니다.
대부분은 거절당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들을 동영상으로 올리고 공유하지 않았다면 100일 동안 거절당하는 연습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동영상을 보는 이들을 기쁘게 해 준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지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 포트’는 끈기와 인내로 장애인임에도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판매실적을 올렸습니다.
그가 다시 일어날 때 기뻐해 준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그에게 샌드위치 위에다도 끈기와 인내라는 글을 케첩으로 써줄 정도였습니다.
그는 실패하는 고통을 다시 일어설 때 어머니를 기쁘게 한다는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도 못하고 얼굴도 못나서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그가 존경하는 인물은 포레스트 검프입니다.
비록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불구의 몸으로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그의 모습을 존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윈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며 자신이 포레스트 검프와 비슷해지고 있다는 느낌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 일이 그와 닮게 만든다면 그 기쁨이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장 큰 행복이 복음을 전하다 거절당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가장 닮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와 닮는 방법이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는 모습이라면 그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길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합시다.
그러면 거절당하고 실패할 때 다시 일어설 기회가 생긴 것에 묘한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18일 [성 루카 축일]
루카 10,1-9
저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저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이냐시오 주교님의 순교는 추억의 명화 ‘쿼바디스’나 ‘벤허’ 같은 영화에 등장하던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최후 장면과 거의 흡사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엄청난 규모의 종합 운동장이 당시 순교의 현장이었습니다.
콜로세움 안에는 이미 순교자들의 대학살을 직관하기 위한 수많은 군중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벌어질 순교자 처형 장면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메인 이벤트인 순교자 학살극이 벌어지기 전, 경기 장 내에는 검투사들의 목숨 건 격투가 한창이었습니다.
격투에 패배한 검투사는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경기장 안은 이미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최고조에 도달하면 드디어 순교자들이 경기장 한 가운데로 끌려 나왔습니다.
이어서 육중한 철문이 하나 열리면 잔뜩 굶주린 사자 떼가 우르르 몰려나왔습니다.
허기진 사자들은 순교자들에게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물어뜯으며 포식을 즐겼습니다.
그 모습에 관중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쳤습니다.
체포에서 순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참으로 잔인하고 혹독했지만, 이냐시오 주교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당당히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체포된 주교님은 로마로 압송되어가는 과정에서 수인이라기 보다는 영웅이요 개선장군 같은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압송되어가는 당신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고 통곡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냐시오 주교님은
오히려 그들을 따뜻이 위로했고 격려했습니다.
용기를 잃지 말고 힘을 내라고, 파이팅 하자고 외치셨습니다.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냐시오 주교님께서는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압송되는 그 고통스러운 여정 중에도 머릿속은
언제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 양떼에 대한 극진한 사랑은 일곱 통의 편지 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저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저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저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 두십시오.
저는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저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이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제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기도하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쾌락도 지상의 모든 왕국도 저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 극변까지 다스리는 것보다 그리스도 예수와 일치하기 위해 죽는 것이 저에게는 더 좋습니다.
제가 찾고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바로 그분이며 제가 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바로 그분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제 출생의 때가 가까웠습니다.”
“지금은 제가 살아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죽음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저의 지상적인 모든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물질을 사랑하기 위한 불은 내 안에 더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강론>
(2023. 10. 18. 수)(루카 10,1-9)
<‘삶’으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2-9).”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날이 다가오는데 그 나라의 건설에 참여하는 사람이 적다.” 라는 뜻이고, 다시 이 말씀은, “종말과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 믿고 회개하는 사람이 적다.”,
즉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적다.” 라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사람들에게 회개와 구원의 길을 알려 주고, 사람들을 그 길로 인도하는 활동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참여하는 일꾼을 모집하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일꾼이라고 표현하지만, 그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이고, 동시에 자녀의 일, 즉 ‘나의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일하는 것은,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말씀은, ‘기도하면서’ 복음 선포 활동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박해와 고난을 겪을 수도 있음을 예고하시는 말씀인데,
이 말씀에는, 복음 선포 활동을 하다가 이리 떼 가운데에 놓여 있는 양들 같은 처지가 되더라도, ‘예수님의 양’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말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리 떼’는 박해자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기는커녕 신앙인들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박해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리 떼’는(박해자들은) 적이 아니라
‘잠재적인 예비신자들’입니다.
회개시켜서 구원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복음 선포 활동이 바로 그 노력인데, 우리는 ‘말’보다 ‘삶’이 먼저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라는 말씀은, 세속의 물질에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에게만 의지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방법들 가운데에서 첫 번째는 그렇게 “하느님만 믿는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모습”입니다.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되어야 복음 선포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세속 일로 시간낭비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육적이고 세속적인 일에 매여 있지 않고 신앙생활에만 집중하는 모습은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두 번째 방법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 활동은 ‘주님의 참 평화’를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활동이기도 하다는 가르침입니다.
<복음 선포와 평화 선포는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해 주려면 자신이 먼저 그 평화를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안에 없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참 평화’를 누리려면, 이리 떼 가운데에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주님의 양’으로서 살아가야 하고, 세속의 물질에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 믿어야 하고, 허무하고 쓸데없는 세속 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참 평화’를 누리는 모습은,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세 번째 방법입니다.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 활동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복음을 전해 주는 것까지만 신앙인이 할 일이고,
그 일의 결과는 주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들을(자녀들을) 당연히 먹이신다는 뜻입니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라는 말씀은, “주는 대로 먹어라.” 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신앙인을 받아들여서 숙소와 음식을 제공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천사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 대접이 아주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별로 안 좋은 것일 수도 있는데, 어떤 대접을 받든지 간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믿고, 겸손하게,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라는 말씀은, 복음 선포는 곧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는 모습은,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네 번째 방법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첫댓글 이렇게 매일 올려줌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