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우도(十牛圖)를 보면 소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림(騎牛歸家)이 나옵니다. 그림에는 동자가 한가하게 앉아 멋지게 피리를 불면서 가는 모습입니다만 이건 사실 공부가 다 된 경지에서나 있는 모습이지 현실적으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 마음공부하는 분들에겐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공부 안할 수는 없고 하자니 울며불며 겨우 따라간다고나 해야 맞는 표현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십우도 그림에서 소(牛)는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일반적으론 법(法相)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은 자기 에고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에고(自我)는 결국 아상과 법상(법은 이래야 한다)으로 구성된 것이니까요. 이 공부를 하는데 왜 울며불며 간다하냐면 에고는 이 공부를 전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애들처럼 징징대며 당장 마음편하고만 싶은 것이지요.
그런데 법은 자꾸 정면으로 부딪쳐라든지 수용하라 하니까 원래는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래야 한다니까 결국 힘들어서 울며불며 따라가는 거지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경계 앞에선 자기 에고가 먼저 나서 자기를 보호하려고 합니다만 사실은 그럴수록 생각과 감정은 고통만 더 양산해냅니다.
다행히 역경계를 피하거나 잠시 해결한다 해도 그게 근본 해결책은 아닙니다. 이게 바로 인생사지요. 그래서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 하셨고 석가는 어째야 한다는 자기 마음(소)을 타고 정신없이 끌려갈게 아니라 고삐를 잡아 8정도를 통해 영원한 집으로 가라는 겁니다.
소타고 고삐 잡는 비결이 기독교에선 늘 깨어있음이며 불교에선 [정견]입니다. 물론 에고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온갖 생각과 감정을 양산하며 거칠게 몸부림을 칩니다. 그게 바로 역경을 맞는 자기 마음상태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고통은 습관화되고 영원히 재반복됩니다. 끝없는 고통의 반복과 윤회 재생산을 끊는 유일한 방법은 소를 잡아타고 고삐를 단단히 움켜쥔채 힘들어 울며불며 가더라도 영원한 집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놀라운 변화가 서서히 내면으로부터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뜨겁던 마음 속 감정 욕망의 불길이 가라앉고 마침내는 꺼지는 겁니다. 그리고 불가사의하고 경이로운 내면의 성장과 평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선 [법력]이라하고 기독교에선 [성령]이라 할 뿐입니다. 즉 자기의 과거 습성과 에고심을 조복시키고 본래(하늘나라)의 알지 못할 신비한 평화와 기쁨에 친숙해지는 내적 성장은 법력(성령)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서 이런 법력(인내력)과 성령(고통 속에서도 자기를 버티게 하는 힘)체험이 없다면 그건 바르게 공부하는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진정한 내면의 변화와 구원의 섭리가 작동하시기 때문입니다.
한번 제대로 이 맛을 본 사람은 세상에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설사 지금은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소타고 울며불며 끝까지 이 길을 가는 겁니다.
아직 이 맛을 보지 못하신 분들은 자기 앞에 다가오는 역경 속으로 에고란 자기 소를 타고 고삐를 단단히 부여잡은 채 변화의 길을 따라나서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