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 대통령 탄핵은 야비한 익살극'
한국 밖에 있으면서 요즘처럼 한국에 대한 기사를 자주 접하는 일도 드물 것이다.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북한 핵 문제라든가 한국의 첨단 인터넷 통신 사업 따위가 한반도 소식의 주류를 차지해 왔으나 최근 프랑스 언론의 관심은 한국의 정치 혼란에 집중돼 있는 듯 하다.
불을 당긴 것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위기'라는 기사를 시작으로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을 비판없이 내보낸 르몽드(Le Monde)였다. 그러나 노 태통령의 탄핵이 가결된 지난 3월 12일 이후, 논조는 확연히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리베라시옹(Liberation), 레제코(Les Echos), 라트리뷴(La Tribune)을 비롯해 보수 성향의 르피가로(Le Fifaro)까지 가세해 한국에서 일어난 '전대미문의 정치극'을 한 목소리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한 주간 프랑스 언론이 본 한국의 '탄핵 정국'을 정리, 소개한다.
'이런 사이코드라마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 한국 경제에 좋았을 것'
먼저, 지난 3월 15일자 일간지 레제코는 '대통령 탄핵 이후 혼란에 빠진 한국'이라는 제하의 도쿄발 기사를 타전했다. '한국 정치가 기괴해졌다'라는 말로 시작한 이 기사는 3월 12일 금요일, 노무현 대통령이 4.15 총선에서 자신의 정당에 투표할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했다는 시시한 이유로 노 대통령의 탄핵이 가결됐다며 느낌표를 달았다.
'대통령과 그의 정당(열린우리당)은 여론조사에서 상승세였고 일부 한국인들이 국회 쿠데타(coup d'Etat)로 규정한 이 (탄핵)사건은 주모자들에게 불리할 수도 있다'는 한 서방 외교관의 입을 빌어 수만 명의 한국인들이 서울에서 항의 행진을 벌인 사실을 강조했다. '정치 대청소에 나선 한국인들이 많은데 이것을 좋은 기회'로 인식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유야 어찌됐건, 결국 한국 정치인들에게 노무현을 제거하는 것은 절박해 보였다. 한국 정계는 뜻밖에 대통령에 당선돼 청와대에 모습을 드러낸 아웃사이더, 노무현을 결코 인정한 일이 없고 또 노무현은 그들을 위협해 왔다. 전통 엘리트 계층과는 무관한 입지전적 인물 노무현은 사실 정당들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경향이 있었다.(중략) 2003년 말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힘차게 상승했다. 그러나 이번 탄핵 사태는 불확실한 환경을 야기하면서 예측할 수 없고 불안정한 한국의 이미지를 굳게 할 것이다." 이처럼 평가한 기사는 '이런 사이코드라마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 한국 경제에 좋았을 것'이라고 맺고 있다.
3월 13/14일자 리베라시옹도 도쿄(東京)발 기사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를 보도하고 이것은 한국의 '짧은 민주주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며 '한국의 국회는 폭력적인 난투와 대립의 현장이었다'고 전했다. '분노로 눈물을 흘리는 의원들은 의원석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한편, 몇몇은 야당 의원들의 얼굴을 향해 신발을 던지기도 했다'며 당시의 다급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국회에서 일어난 사건은 야비한 익살극'
한편, 보수 성향의 르피가로의 경우, 노 대통령 탄핵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 단호했다. 베이징(北京)발 3월 13/14일자 동일간지 국제면에서 한국의 대통령 탄핵 현장을 일러 '분위기는 익살 인형극 그 자체였다'고 전하고 그러나 '서울의 국회에서 일어난 사건은 야비한 익살극이었다'고 힐난했다. 노 대통령은 선거 관련 '가벼운 과실'로 인해 탄핵됐으며 이것이 한국을 '전례 없는 권력 공백 사태에 빠뜨렸다'고도 했다.
"사실 보수야당은 노 대통령이 지나치게 당파적이라는 애매한 구실 하에 선거 득표수 계산과 함께 중도 야당과의 일시적 동맹을 맺으며 정치-헌법상의 함정에 몸을 맡긴 것이다.(중략) 그러나 총선을 한달 남짓 남겨둔 지금, 노 대통령 최후의 보루인 작은 정당 우리당은 여론의 순풍에 돛을 단 것으로 보인다. 이 추세가 확실해진다면 탄핵된 대통령은 자신의 부대를 재정비하고 총선을 재신임 투표로 전환시키기 위해 이 기회를 이용할 것이 틀림없다."
또 3월 17일자 동 일간지의 서울발 기사는 경제면을 빌어 탄핵정국이 가져올 한국의 경제 파장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한국은 포탄이 지나가는 것을 겪는 중'이라는 말로 시작한 기사는 '국회에 의한 노무현 대통령의 직권정지는 하마터면 경제 대이변을 일으킬 뻔했다'고 쓰고 있다. '서울의 주가는 4% 떨어졌고 달러 하락으로 이미 약세에 있는 원(won)화가 손실을 더 악화시켰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투자자들은 앞으로 정치 위기가 초래할 경제 국면을 불안하게 여긴다. 특히 외국인들은 이틀만에 수백억 원에 달하는 주식을 매각했고 의혹에 찬 시선으로 한국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매일 저녁 19시부터 수 천명의 한국인들이 대도시 거리에 모여들고 있으며 이들은 촛불을 밝히고 바닥에 앉아 노래를 부르거나 '탄핵 무효', '민주 수호'가 적힌 피켓을 흔들고 있다. 이 중에는 막 회사를 마친 넥타이와 정장 차림의 사무직 간부들도 많다."
한발 더 나아가 2003년 수출이 19.6% 증가해 1943억 달러에 달한 한국은 환상을 품게 하지만 '지난해 상반기 이미 경기 후퇴를 겪었고 기업들은 중국과 맞서 경쟁력 유지에 고심하고 있다'며 '한국은 정말이지 이런 불상사(탄핵)가 필요치 않았다'고 아쉬워 했다.
"빚에 싸여 문을 닫는 중소기업들도 많고 농민들도 헤어나지 못한다. 과도한 빚을 진 가정은 대출한 돈을 갚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 한국인들이 어제 저녁에도 서울에서 촛불을 흔들었던 것이다. 이들은 지도층의 이익에만 휩쓸린 해묵은 경제 시스템 청산을 원한다."
'한국에는 대통령이 없다'
"4.15 총선을 한달 앞둔 한국은 지금 대통령이 없다. 분석가들에 따르면 대통령을 겨냥한 비난이 사소한 성격임을 참작할 때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대통령 탄핵)결정을 무효화할 수도 있다. 1년 전부터 야당이 주도하는 국회에서 대통령은 당파적 게릴라의 표적이 돼왔다..."
이와 같이 전한 3월 15일자 라트리뷴도 대통령 탄핵 사태로 인한 한국의 경제 위기를 진단했다. '사스와 사회 혼란, 북핵 문제에서 한국은 이제 막 회복되고 있다'고 한 기사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한국이 13% 이상의 수출 증대와 신뢰 회복으로 2004년에는 적어도 4.7%의 경제 성장을 기대하고 있다'며 낮은 실업률과 역사적으로 낮은 이자율로 경제 성장은 활동력을 뒷받침할 것이라고도 했다. '다만 정치 상황이 모든 것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대통령 탄핵 가결 전부터 한국의 위태로운 정치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워온 르몽드지는 3월 15일자 도쿄발 기사에 '한국, 탄핵된 노 대통령 지지자들 쿠데타를 외치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권력 공백 기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헌법재판소가 신속히 대응할 것으로 전망한 이 기사는 대통령 탄핵의 '동기가 사소하기 때문에' 탄핵은 유효로 인정되지 않을 것으로 예측하는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라!
국민 90% 이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원한 스페인의 집권 국민당(PP)은 어떻게 몰락했는가. 총선을 불과 사흘 앞둔 지난 3월 11일 발생한 마드리드 열차 테러가 그 직접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여론을 무시한 채 총선에만 급급했던 아즈나르(Aznar) 정권은 이라크 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알 카에다(Al-Qaeda)가 아닌 바스크 분리주의 단체(ETA)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결과는 사회노동당(PSOE)의 승리!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지난 3월 21일 실시된 프랑스 1차 지방선거는 말그대로 국민의 심판이었다. 집권 여당을 제치고 사회당(PS), 녹색당(verts), 공산당(PCF) 연합인 좌파가 40%를 넘는 지지도를 이끌어 낸 것이다. 결과는 오는 28일 결선을 통해 밝혀지겠지만 지금에 와서 프랑스 정부는 최근의 이공계 파동과 더불어 봇물처럼 터져나온 각종 사회 문제에 좀더 국민의 목소리에 귀기울지 못했음을 탄식하고 있을 것이다.
70%에 육박하는 여론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에 반대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할 때다. 그리고 오는 4월 15일, 투표함은 심판의 무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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