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카쿠 열도(尖閣列島)
동중국해 남부
6.3㎢
아시아
센카쿠 열도는
동중국해 남부에 위치한
5개의 무인도와
3개의 암초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댜오위다오 열도라고 부른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타이완 섬과 부속 도서 및
펑후 열도를 일본에 할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타이완과 펑후 열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으나,
댜오위다오 열도 등은
미국이 위임통치하는
오키나와의 관할하에 두었다.
당시 중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969년
센카쿠 열도 부근 해역에
천연가스와 석유가
대규모로 매장되어 있는 것이 알려지면서
분쟁지역이 되었다.
미국이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자
일본은 댜오위다오 열도 등을
자국 영토로 편입하고
실효적 지배를 해오고 있으나,
중국, 타이완도 함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동중국해 남부에 위치한
다섯 개의 무인도와
세 개의 암초를 말한다.
일본 오키나와(沖繩)의
나하(那覇)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400㎞ 떨어져 있고,
중국 본토에서는 350㎞,
타이완의 지룽(基隆)으로부터는
약 175㎞ 떨어져 있다.
중국에서는
댜오위다오 열도(釣魚島列島),
댜오위타이 군도
(釣漁臺群島)라고 부른다.
센카쿠 열도라는 이름은
일본이 1884년
영국 해군이 붙인
'피너클 아일랜드'
(Pinnacle Islands, 뾰족한 섬)에서
본뜬 것이다.
명나라 초기 푸젠성(福建省)과
타이완성(臺灣省) 어민들이
고기를 잡거나 약초를 캐어 오면서
열도의 존재가 알려져서
중국의 판도에 들어갔다.
영락(永樂) 연간(1403~1424년)에
출판된
순풍상송(順風相送)이란 책에
'조어서'(釣魚嶼)란 이름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다.
이는 1984년
오키나와에 살던
고가 다쓰시로(古賀辰四郞)가 발견해
1895년
오키나와 현 영토에
정식 편입했다고 주장한 것보다
400년이나 앞섰다.
1863년
청나라가 제작한 지도에는
푸젠성에 소속된
댜오위타이 군도란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 정부는
1895년 4월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을 통해
타이완 섬과 그에 부속된 도서
및 펑후(彭湖) 열도를 일본에 할양했다.
이후 일본은 새로 제작하는 지도에
중국 이름인 댜오위다오 열도 대신
센카쿠 열도라고 표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은 미국과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타이완과 펑후 열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고 했으나,
댜오위다오 열도 등 도서는
미국이 위임통치하는
오키나와의 관할 안에
두는 것으로 했다.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중화인민공화국 총리는
성명을 통해
"중국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결코 인정하지 않겠다"고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69년
유엔의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에서
센카쿠 열도 부근 해역에
천연가스와 석유가
대규모로 매장되어 있다고
발표하면서
일대의 영해는 일약 황금지대로 변모해
분쟁 지역으로 급부상했다.
1972년
미군이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자
일본은 댜오위다오 열도 등
도서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한 후
주위에 해양순시선을 배치해
감시하는 등
실효적 지배를 해오고 있으나,
중국과 타이완도 함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어서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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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카쿠 열도(尖閣列島)
靑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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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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