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6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루카 6,36-38
남을 되질할 되를 깨버린 이의 행복
오늘 복음은 남을 심판하지 않으면 나도 심판받지 않는다는 주제입니다.
내가 자비로울 때 자비로운 기준으로 심판받습니다. 주는 대로 받습니다.
반면 남을 단죄하면 그것으로 나도 단죄받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와 엘레우시스 사이의 성스러운 길에 살았던 불량 대장장이이자 산적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손님에게도 완벽하게 맞을 것이라고
주장한 침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방법은 잔인했습니다.
여행자가 침대에 비해 키가 너무 작으면 선반에 눕혀 잡아 늘여 펴곤 했습니다.
여행자의 키가 너무 크면 다리를 잘라서 몸에 맞도록 만들었습니다.
테세우스는 처음으로 아테네를 여행하던 중 프로크루스테스를 만났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이 다른 많은 사람에게 가했던 것과 똑같은 잔인한 대우를 테세우스에게도 가할 생각으로 테세우스를 침대에 누워 쉬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제압하고 그를 자신의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런 다음 프로크루스테스를 같은 방식으로 대했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손님을 괴롭히던 바로 그 방법으로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며 나는 얼마나 부자유스럽습니까? 자기도 그렇게 못하면서 남에게 하도록 강요하면 다른 사람들 눈치가 있으므로 말도 실수할까 봐 제대로 못 하고 행동도 경직됩니다.
자기 판단의 감옥에 자신이 갇히는 것입니다.
자유로워하고 싶으면 자비를 원하면 남을 판단하는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우리 속담에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 진리를 압니다.
내가 외로우면 다른 사람들을 외롭게 만들고 있고 내가 짜증 나면 분명 다른 사람들을 짜증 나게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영화 ‘셰임’(Shame)에서 주인공 브랜든은 평범한 직장인지만 성에 대한 강박적인 중독으로 비밀스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당연히 그는 항상 고독하고 공허하고 외롭습니다.
여자를 자기 욕구의 충족도구로 여기기 때문에 세상도 그를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브랜든의 여동생 시씨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브랜든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브랜든은 시씨의 삶을 응원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상사 데이비드와 술집에 들렀을 때 시씨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데이비드는 그녀를 원하게 됩니다.
데이비드는 유부남임에도 브랜든의 집에서 그의 동생과 잠자리를 가집니다.
브랜든은 구토가 날 정도로 직장 상사가 밉지만, 그 화풀이를 동생에게 합니다.
오빠에게 쫓겨난 동생은 오빠에게 계속 전화하다가 자살 시도를 합니다.
동생을 품어줄 수 없었던 이유는 유부녀를 막론하고 흑심을 품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가
직장 상사와 동생에게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이유는 자기를 먼저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이 갈등의 굴레 안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받고 싶거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영화 극한 직업에서는 형사들이 잠복근무하기 위해 치킨집을 차렸는데 의외로 장사가 잘된다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왜 장사가 잘됐을까요? 사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돈 벌려고 한 게 아니니 아무 생각 없이 퍼주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주방장이 주인이 미워서 양념을 팍팍 썼더니
장사가 더 잘되더라는 것입니다.
더 주려 하니까 더 받습니다.
이 진리를 알면 세상에서 인정받지 않을 수 없고 가난할 수도 없습니다.
남을 건강하게 하는 트레이너가 몸이 안 좋아지기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돈을 떼먹으려 하고 남의 명예를 도둑질하며 남을 아프게 합니다.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몇 배로 돌아올 줄 모르면서 말입니다.
행복해지고 싶거든 우리 안에 사랑을 방해하는 남을 심판하는 되를 깨버립시다.
저절로 심판하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죄와 싸웁시다.
이웃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할지만 생각합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세상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6일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루카 6,36-38
단죄와 심판은 오로지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그저 용서하고 또 용서할 뿐입니다.
사순절을 지내며 십자가상 예수님의 모습을 자주 묵상하게 됩니다.
활기찬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의 모습도 감동적이지만, 십자가 상 예수님의 모습역시 그에 못지않게 감동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의 그 끔찍하고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명언 몇가지를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이른바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도 합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오 복음 27장 46절)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복음 22장 3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복음 23장 43절)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복음 23장 46절)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복음 19장 26~27절)
“목마르다.”(요한 복음 19장 28절)
“다 이루어졌다.”(요한 복음 19장 30절)
여러 말씀 가운데 오늘은 용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이 제 마음에 큰 반향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복음 22장 34절)
그토록 고통스런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저런 말씀이 입에서 나올 수 있을까? 참으로 놀랍니다.
그 순간 저 말씀이 예수님 입에서 나온 그 자체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 아니시라면 도저히 저런 표현을 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만일 십자가상 예수님이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묵상해봅니다.
욱하기 잘하고, 한 성깔 하는 제가 도저히 그냥 넘길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선 하느님 아버지께 따졌을 것입니다.
“아버지, 아무리 인류 구원 사업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저 인간들 하는 행동 한번 보십시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습니까?
인간으로서 저게 할 짓입니까?
저는 저들의 치유와 구원, 행복과 영생을 위해 이 한 목숨 불살랐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세상에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습니까?
무죄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것도 모지라 저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무리 바쁘시다 할지라도 제게 딱 3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저 녀석들 제대로 손 좀 보고 다시 십자가 위로 올라오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함구하십니다. 철저히 침묵하십니다.
인간들의 무자비한 악행 앞에서도 보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께 적대자들의 용서를 청하셨습니다.
참으로 크고도 놀라운 예수님의 인내요 사랑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마음에 깊이 새깁니다. 단죄와 심판은 오로지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그저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2주간 월요일 강론>
(2024. 2. 26. 월)(루카 6,36-38)
<주어라. 너희가 이미 받았으니.>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이 말씀은, “받고 싶으면 먼저 주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즉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싶으면 이웃을 용서하고,
심판을 안 받고 싶으면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황금률’과 비슷한 가르침이 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여기서 ‘남’은 하느님과 이웃을 모두 가리킵니다.
그리고 “해 주어라.”는 사실상 “먼저 해 주어라.”입니다.
“받고 싶으면 ‘먼저’ 주어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주시는 그것을 잘 받기 위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앞의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는 “주어라. 너희가 이미 받았으니.”가 됩니다(마태 10,8).
‘매정한 종의 비유’를 보면 바로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2-33)”
내가 ‘먼저’ 자비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응답으로
나도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받고 싶으면 먼저 주어라.” 라는 가르침과
“너희가 이미 받았으니 너희도 남에게 주어라.” 라는 가르침이 실제로는, 즉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실천하는 데에는 큰 차이가 없는 ‘같은 가르침’입니다.
그래도 어떻든 마음가짐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아직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받기를 기대하면서 이웃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과,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 이웃에게 베푸는 것, 둘 중 어느 쪽에 해당되든지 간에 이웃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푼다는 점에서는
똑같이 선한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내가 아직 받은 것이 없는데, 남에게 무엇을 주란 말인가?” 라는 반응을 보일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에 먼저 받아야만 남에게 주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많이 부족한 것이고, 속이 아주 좁은 것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한 경우에도, “그것은 내가 애써 노력해서 받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저 사람에게 무엇을 주란 말인가? 받고 싶다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역시 속이 좁은 태도인데, 그 경우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정말로 은총과 사랑을 체험한 것인지, 은총과 사랑을 체험했다면서 마음이 너그러워지지 않고 왜 속이 좁은 채로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볼 일입니다.
하여간에 우리는 무엇인가를 베푸는 일은, 받는 쪽의 태도를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자비’는 아무 조건도 없이 무조건 베푸는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라는 말씀에 대해서, “예수님의 이 말씀과 베드로 사도에게 매고 푸는 권한을 주신 일은 모순이 아닌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주신 ‘매고 푸는 권한’은 마음대로 사람들을 심판하고 단죄해도 되는 권한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임무입니다.
아무도, 사도들도 어떤 사람을 구원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권한은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애쓰시는 주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하나라도 더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임무만 받았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감히 하느님 행세를 하려고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구원, 심판, 단죄는 주님만의 권한입니다.
인간은 아무도 남을 구원하지 못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만 할 수 있습니다.
남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권한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이,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9).” 라고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단죄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에서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자기들은 틀림없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저 군중’은 율법을 모르니 구원받지 못한다고 멸시한 것인데, 그것은 교만죄를 짓는 말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모독죄를 짓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는 죄가 너무 커서 구원받지 못한다.” 라고 말하면서, 회개, 용서, 구원을 미리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인데, 인간이 스스로 포기해버리면, 주님께서도 그 사람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용서와 구원받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 자체도 주님의 권한과 사랑을 침해하는 큰 죄가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