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생 | 1937.3.16. |
---|
“원형을 망각한 전통음악은 생명력이 없어요. 생명력이 없는 음악은 결코 감동을 주지 못하죠.”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당대 최고의 대금 연주가인 이생강! 우리의 전통음악을 지켜내기 위해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무대 위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이생강류’의 대금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다. 서양 음악에 뒤지지 않는 우리 고유의 한과 흥을 멋으로 승화시키며 그가 닦아온 연주인생 70년, 그 안으로 들어가 보자.
1937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고향 소리가 그립다며 나무를 끊어다가 직접 피리를 만들어서 불기도 하셨죠. 타지에 나가있으니 고향이 얼마나 그리웠겠어요.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피리나 대금을 어느 정도 불 줄 아셨던 아버지는 늘 새벽 1시쯤이면 조용히 단소를 부셨어요. 그럴 때는 꼭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그때 제가 다섯 살인가 그랬는데 아버지가 왜 그러시는지 영문을 모를 어린 나이였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눈물을 손으로 닦아 드리면서 아버지가 들고 있던 단소를 가져다 소리를 내보는 거였어요. 그것이 악기를 만져 본 계기가 되었지요. 단소 소리를 처음 내보는 거였는데 제가 부는 소리가 좋았는지 아버지께서 놀라서 눈물을 거두시더니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설명을 해주시던 기억이 나네요. 예사롭지 않았던 거죠.
1945년 해방되고 귀국한 이후 10년간 부산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동안 일본에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말이 서툴러서 힘든 일도 많았어요. 형과 밖에 나가면 동네 아이들이 왜놈은 떠나라며 돌을 던졌고, 저희는 다투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냥 맞고 있을 때가 많았죠. 그렇게 아이들에게 맞고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가 된장을 꺼내서 발라주고 그러셨어요. 지금도 머리에 흉터가 많이 남아있어요.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말을 철저하게 배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당시 저희 집은 형편이 제법 넉넉한 편이었는데 아이들에게 간식거리를 나눠 주면서 부산 말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때 열심히 배워서인지 1955년에 서울로 올라왔는데도 이 부산 사투리 억양이 좀처럼 고쳐지지가 않네요.
대금 연주가 이생강 선생은 어릴 때 재능을 알아본 선친 덕분에 어려서부터 관악기를 배워 모두 23명의 스승을 모셨다. 대금과 퉁소, 피리, 태평소 등 일곱 가지 국악 관악기 최고의 연주자들이었다. 이렇게 많은 선생님들을 모실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6ㆍ25 전쟁으로 팔도에 흩어져 살던 분들이 부산으로 피난 온 덕분이었다.
부산에서 건어물 장사를 시작하셨던 아버지는 제 재능을 발견하시고 스승을 찾기 위해 건어물, 생선 등을 실은 트럭에 저를 태워 예인들이 많다는 전라도 지역으로 가셨어요. 첫 도착지였던 전주역 앞에서 운명처럼 한주환 선생을 만나게 되었죠. 그분도 마침 전주에 볼 일이 있어 왔다가 제가 태평소 연주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신 거예요. 그때가 열 한 살이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저는 그분이 누군지도 몰랐어요. 제 연주를 보시고는 두루마기 소매에서 긴 막대를 꺼내시는데 처음엔 사무라이 칼인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대금이었어요. 그날부터 21일 동안 역 근처 여인숙에 머물면서 선생에게서 대금산조 자진모리 가락을 배웠지요.
그렇게 아버지에게 단소와 피리를 배우는 것으로 시작해 대금의 한주환, 퉁소의 전추산, 피리의 오진석, 임동석, 태평소 시나위의 김문일 등 여러 스승에게 배우면서 음악 세계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스승들을 모시고 말이죠. 단소, 소금, 대금, 태평소 등 일곱 가지 관악기 최고의 연주자 스물 세분을 모셨어요. 이렇게 많은 선생님들을 모신 것은 6ㆍ25 전쟁 덕분이었어요. 전쟁이 나면서 팔도에 흩어져 살던 분이 한 지역으로 피난을 오셨기 때문이죠. 한 지역에 모여 계셔도 많은 스승들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는 정말 부지런하게 뛰어다녀야 했어요. 하루에 일곱 분, 여덟 분 만나 뵐 때도 있고 세 분, 네 분을 찾아가 배울 때도 있었죠. 각기 다른 악기를 배우다 보니 정신이 없을 정도였지만, 그때는 십대였기 때문에 기억력도 좋고 외우기도 잘해서 큰 문제는 없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저는 은사 복이 많은 것 같아요. 생각하면 흐뭇하고 감사할 따름이죠.
죽향(竹鄕)은 대나무가 제대로 있다는 뜻입니다. 원래 있을 곳인 향(鄕)에 제대로 서 있어 본연의 소리를 낸다는 의미예요. 스승이자 대금명인이신 한주환 선생께서 지어주셨어요. 그 분께서는 항상 저를 부르실 때 이름 대신에 ‘아가’라고 하셨어요. 소년 시절부터 청년 때까지 늘 ‘아가’라고 하셨죠. 그런데 선생을 만나 뵙고 10년이 지나자 “너도 앞으로는 이름이 알려질 테니 호를 하나 지어야겠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부터 아가가 아닌 죽향으로 불리기 시작했지요. 대가 제 자리에 있듯 저 또한 모든 본분을 지키라는 뜻을 담아서요. 죽향(竹鄕)이라는 이름에는 여러 가지 함축적인 의미가 있지만, 저 스스로는 인성이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이 선생은 대금 안에 선조의 정신과 얼, 살아 숨쉬는 싱싱한 생명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의 소리이자, 사람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것이 그가 생각하는 대금의 매력이다.
대금의 종류에는 정악대금과 산조대금이 있어요. 정악대금은 주로 궁중음악이나 양반들의 풍류음악을 연주하려고 만든 악기로, 다른 악기와 합주할 때 적합해요. 관이 길게 되어 있는 것도 다른 악기와의 음정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악은 글자 그대로 정해져 있다는 뜻이죠. 글씨체로 말하면 인쇄체 같은 겁니다. 변함이 없어요. 그냥 입김만 불어넣어서 연주를 할 뿐인데도 구성진 음을 낼 수 있다는 게 장점이기도 해요. 그러나 취구(吹口: 입김을 불어 넣는 구멍)가 작고, 손가락을 짚는 지공이 넓어서 다루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호흡 또한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어요. 이 때문에 산조대금과 같은 꺾기나 깊은 농음, 다루치기(순간적인 지공의 개방을 통해 경쾌한 소리가 나도록 하는 기술)가 어렵죠.
반면 산조대금은 대금산조 독주를 위해 만들어진 악기입니다. 다양하고 화려한 가락이 많아 손동작을 원활하게 하려고 정악대금보다 짧게 만들어져 손 움직임을 편하게 하는 특징이 있어요. 정악이 인쇄체라면 산조는 필기체에 가까워요. 손가락을 잘 떼서 매끄럽게만 불면 되는 정악대금에 비해 산조대금은 개성 있는 꼴바꿈이 가능하고, 선율도 다채로우며 인간 세계의 희로애락이 녹아있다고 볼 수 있어요. 연주자의 능력에 따라 어떠한 곡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악기거든요. 저도 산조대금을 수십 년 연주하고서야 모든 곡을 소화시킬 수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
모든 악기를 다 섭렵했지만 대금처럼 그릇이 큰 악기는 본 적이 없어요. 선조의 정신과 얼이 함축돼 살아 숨쉬는 싱싱한 생명의 에너지가 이 속에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게다가 자연의 소리이자 사람의 목소리에 가장 가까운 것이 대금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대금은 대(竹)의 소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대는 항상 푸르고 곧아서 그 소리가 멀리 퍼져 나갑니다. 깨달은 이의 마음은 대의 소리와 같아 오래 이어지죠. 또한 고증된 스케일에서 움직여야 하는 서양 악기와는 달리 연주하는 곡에 따라서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풍부함을 자아내기 때문에 연주할수록 더 매력적이에요. 게다가 구성지죠. 그리고 음역의 한계가 없어서 변화무쌍하게 움직입니다. 맛있는 과자를 꿀에 발라먹는 그런 느낌이에요. 세계 어느 악기와 비교해도 우리나라의 대금만큼은 절대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대금의 청아한 소리는 다른 악기와 비교할 수가 없거든요. 충분히 감정을 실어서 불면 속이 뚫리는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1960년 4·19혁명 직후였어요. 한국민속예술단 소속 무용수와 악사 등 33명이 에어프랑스 비행기를 타고 파리에 갔습니다. 그때 저는 악사로 따라갔었고, 33명의 단원 중 최연소였어요. 거기서 춘향전을 무용극으로 공연을 해야 했는데 주인공을 맡은 안나영 씨가 갑작스레 맹장 수술을 하게 돼서 공연에 차질이 생겼어요. 그로 인해 약 13분 가량의 공백이 생겼는데 그 공백을 저에게 메워달라 더군요. 아주 급박한 상황이었고 저는 대타로 빈 시간을 채우기 위해 대금을 들고 무대에 섰죠. 무슨 정신으로 연주를 했는지 모르게 시간은 지나갔고 다음날 프랑스 신문에 본 공연에 대한 평은 없고 제 대금 연주에 대한 칭찬만 가득 실렸더라고요.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민속악기 독주회를 처음 갖게 됐고 그렇게 해외에서 인정을 받은 셈이죠. 그 당시 사람들이 대금 안에 무슨 기계장치라도 있나 들여다보고 난리였어요.
당시 한국에 대한 인식은 전쟁 이후 분단국가로 가난한 나라라는 시선이 대부분이었고 한국예술에 대한 선입견도 많았는데, 제 연주가 그런 편견을 불식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죠. 여러모로 돌이켜봐도 그 연주가 독주자로 데뷔하게 만든 첫 무대였다는 점에서 저에게도 의미가 깊습니다. 그 이후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도 공연했고 그것을 계기로 여러 곳에서 초청을 받아 지금까지 50여 개국을 돌며 공연했어요.
프랑스에서의 갑작스런 독주회 데뷔 이후 국제적인 인정을 받은 이 선생은 이를 계기로 1968년 멕시코올림픽 등 세계 곳곳에서 초청을 받아 지금까지 50여 개국을 돌며 공연했다.
파리행 에어프랑스를 탔을 때의 일이에요. 저는 비행기를 처음 타봤기 때문에 비행가기 날아가는 것부터 내부의 구조까지 신기한 것이 많았어요. 눈 앞에 스위치는 여러 개가 보이는데 누르는 방법도 모르고 의자 사용법도 전혀 몰랐죠. 다른 분들은 다 옆으로 편하게 눕는데 저는 어떻게 눕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옆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좀 그래서 혼자 이것저것 눌러봤는데, 글쎄 제 의자가 뒤로 넘어가면서 쾅 소리를 내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까 외국인이 의자에 부딪친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이 그 유명한 이탈리아의 여배우 소피아 로렌이었던 겁니다. 제 뒷자리에서 메모를 하던 중에 부딪힌 거였어요. 저희가 탄 비행기가 로마를 경유하는 거였는데, 그때 소피아 로렌과 존 포드 감독이 같이 탑승했었던 거죠. 그리고 제 뒷자리가 바로 소피아 로렌의 자리였던 거예요. 저는 영어를 할 줄도 모르니 어찌할 바를 몰랐고 주변에서는 난리가 났었죠. 세계적인 배우 소피아 로렌을 놀라게 한 사람이 이생강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재미있는 일화로 남았죠.
또 한 가지 기억나는 사건이 있어요. 파리에 도착해서 기차를 타고 스위스로 이동하던 중이었는데요. 무용 선생님께서 제게 돈을 주시면서 물을 사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다른 칸으로 건너가 물을 사서 돌아 왔는데 글쎄 제가 탔던 칸이 없어진 거예요. 잘못 왔다 싶어서 열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는데도 일행들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10시간을 달려가다 보니 이탈리아에 도착했어요.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일행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곳 사람들에게 아무리 손짓 발짓을 해도 통해야 말이죠. 곧 공연 시간은 다가오고 마음도 급해지기 시작하더군요.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곳에 있는 지도를 보고 다음 열차로 갈아타서 겨우겨우 찾아갔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니 제가 심부름 갔을 때 기차 뒤 칸을 스위스를 가는 쪽으로 붙였더라고요. 저는 앞 칸으로 물을 사러 갔으니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쪽에서도 난리가 났었나 봐요. 제가 없으면 춤을 출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공연을 관악기가 리드해 나가야 하는데 제가 빠지면 무리가 있었거든요. 가까스로 공연 한 시간 전에 도착했어요.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 몰라요.
한국 전통무용음악을 집대성한 <춤의 소리> 전집 음반 50장을 한꺼번에 내놨어요. 국악계가 깜짝 놀라더군요. 산조 춤, 화관무, 부채춤, 살풀이, 승무, 농악 등이 총망라돼 있으니 우리나라 전통 무용음악의 100년사를 담은 ‘백과사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어요. 제가 무용음악을 전공하다 보니 '무용음악은 바로 이생강이다'라는 인식이 많았어요. 저는 대금과 같은 관악기 독주자이면서 동시에 무용음악가였던 셈이죠. 나이 40대가 넘어가던 1980년대부터 건강이 허락하는 한 꼭 전통무용음악의 100년사를 음반으로 정리하자고 마음먹었는데, 그 결실을 보게 된 거예요. 선대의 스승들께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은 것 같아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구슬도 꿰어야 보석이라고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곳곳에 흩어진 전통무용음악을 하나로 엮어냄은 물론 이를 무대공연과 연구 활동 등에서 실용적으로 쓸 수 있게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보고 있어요. 그리고 100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음악을 모두 묶어내 누구나 한눈으로 쉽게 일별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모든 무용음악이 한 덩어리로 엮여 일관성을 갖춘 셈이죠.
사실 규모가 방대해서 제작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어요. 무엇보다 재원 확보가 힘들었습니다. 제 연주를 빼더라도 한 장 제작에 2천만 원에서 2천800만 원 가량 드는데, 그 제작비 마련이 가장 힘들었어요. 연주자들을 한 데 모아 CD에 취입할 연주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요. 한 곡을 연주하는 데 적게는 4명, 많게는 20여 명이 동원되는데 각자의 일정을 조절해 자리를 함께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거든요. 과거의 아날로그 음악을 디지털 음악으로 전환시키는 것도 기술적으로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부분이었죠.
몇 년 전 꿈을 꾸었는데 예수님이 저에게 찬송가를 부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제가 종교를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그런 꿈을 꾸고 나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가는 꼭 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고심 끝에 잘 아는 지인들에게 부탁했어요. 찬송가는 그냥 음악이 아니니 아무나 선정할 수가 없어서 장로 몇 분이 나서서 40곡 정도를 정해주셨고요. 연주 음반은 마음을 어루만지며 들을 수 있는 한국 고전음악의 대표 관악기 대금과 그 외 소금, 퉁소, 피리로 연주한 찬송가 26곡을 두 장의 CD에 담았습니다. 국악 패턴에 맞게 변화를 주고 찬송가만의 탁월한 멜로디와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만든 음반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정서에 잘 어울리는 전통관악기로 교회음악에 새 생명을 불러일으키고 대중화에 유리하도록 국악기의 연주 곡목(레퍼토리) 확장에도 힘썼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마음과 우리만의 음악 유산이 요즘 문화적 정서에 자리 잡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국악 찬송가 음반을 출반한 겁니다.
서양악기와 음계를 따라가려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매력을 찾아 전통음악과 악기를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생강 선생. 전통음악의 원형이 변질되는 현실을 개탄하는 그는 우리에게는 전통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국악이 존재 가치가 없어지고 버린 자식처럼 천대받고 있어요. 민속악의 원형을 버리고 무조건 퓨전으로만 가고 있으니 옛날 우리 할머니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처럼 깊고 구수한 맛이 사라지고 있는 겁니다. 마치 갓 시집온 새색시가 겉모양만 내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죠. 시간이 갈수록 전통음악의 원형이 변질되는 것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어요. 퓨전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전통이 바탕 되어야 하거든요. 발전을 위해 변형시키는 것은 괜찮지만, 원형을 망가뜨려 음악도 아닌 음악으로 만드는 것은 변질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 또한 퓨전을 시도하는데 타 그룹과 다른 것은 전통 악기를 바탕으로 한다는 겁니다. 신시사이저가 화음을 깔고 가는 역할만 맡을 뿐, 제가 대금으로 선율을 내고 타악기가 리듬을 가져가고, 아쟁이 베이스, 25현 가야금이 화음을 맡는 구성이죠.
한국 사람은 우리 전통을 지켜나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서양 말을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의 말이 알아듣기 쉽고 표현하기 좋은 거예요. 그런 우리가 서양 음악에 젖어 살고 학교에서도 그것만 배우니 우리 전통음악은 들을 기회도 없어졌죠. 그러니 이제 우리 음악은 아예 들을 생각도 않고 텔레비전에서 전통음악이 나오면 꺼버리기 일쑤예요. 그런 모습을 보면 국악의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려는 사람들도 후회될 때가 많다고 하더군요. 정말 슬픈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지난 70년간 우리 것을 위해 달리다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는데, 서양 악기가 아무리 훌륭하고 탁월하다 해도 우리의 전통악기를 흉내내지 못한다는 거예요. 결코 따라오지 못하는 우리만의 매력이 있다는 거죠. 결국에는 우리 국민들이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 악기는 5음계로 되어있는데 굳이 서양처럼 7음계로 만들 필요는 없어요. 그럼 대금이나 피리, 가야금의 특수성을 살릴 수 없거든요. 그걸 바꿔보려고 하면 변질이 되는 거예요. 원형을 망가뜨리는 일이니까요. 우리는 우리대로 연주하는 거예요. 7음계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특색을 가지고 기량, 기교로 반의 반음을 사용하다 보면 더 구성지고 구수한 맛있는 연주가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음악에는 흥과 한이 담겨야 해요. 그게 바로 한국의 멋이지요. 그걸 벗어나면 전통음악이라고 할 수 없어요. 서양음악을 흉내 내는 것일 뿐. 이제는 국악과도 생겨서 재능 있는 젊은 후학들이 아주 많아요. 지도자들이 정신을 좀 더 차려서 올바르게 가르치고 우리 것을 전달한다면 미래는 밝다고 봅니다.
국악이 대중에게 외면당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으로 ‘전통 음악 교육의 부재’를 들 수 있겠죠. 어릴 때부터 우리 음악을 많이 들려주면서 귀에 익숙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일제가 우리의 맥을 끊기 위해 서양음악을 부각시켰고 그런 분위기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서양음악은 우아하고 훌륭하지만 국악은 천한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는 거죠. 게다가 요즘은 초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국악을 빼자는 말이 나오는데, 민초의 음악이 없어진다는 것은 우리의 기초 언어가 사라진다는 뜻이나 다름없어요. 유아기부터 우리 것을 즐기고 자꾸 듣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통음악이 앞으로 보존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교육과 지도자 양성이 필요해요. 그러려면 양성소가 있어야 하고 서양음악을 가르치는 것처럼 조기교육을 해야 합니다. 유치원부터 들려주고 가르친다면 희망이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요즘 구상하고 있는 사업이 있어요. 독특한 우리의 전통 가무악을 전수할 민속악예술대학을 설립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궁중음악은 국립국악원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교육되고 전수되고 있지만, 민속음악은 마땅한 교육기관이 아직 없거든요. 저라도 먼저 아담한 규모의 대학을 세워 기악과 판소리, 민요, 춤, 농악과 같은 5개과를 설치하고 싶습니다.
이 선생의 대금. 그에게 대금은 숨소리와 같은 존재다. 이 선생은 영감이 떠오르면 바로 연주를 해서 녹음하기 때문에 잠잘 때에도 머리맡에 대금을 놓아 둔다.
자정적(自淨的)으 순환하는 자연의 감동적인 움직임과 고매한 자취의 정적을 담아 시심(詩心)을 일깨우는 대금은 저에게 숨소리 같은 존재죠. 말하자면, 호흡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호흡을 멈추면 세상을 떠나야 하잖아요. 그런데 대금을 연주하니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대금은 제게 ‘생명’ 그 자체입니다. 저는 영감이 떠오르면 바로 연주를 해서 녹음하기 때문에 잠잘 때에도 머리맡에 대금을 놓고 자요.
전에는 스승의 가르침만 따라 연주했는데, 음악을 향한 열정과 욕심이 많아지니 스승을 뛰어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쉼 없이 노력하며 달려왔죠. 지금 생각해 보면 젊어서는 최고의 연주자가 되려는 욕망이 가득했던 것 같아요. 정말 열심히 불었어요. 밥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대금을 손에서 떼어놓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반세기 가량 불다 보니 1등도 꼴찌도 없더군요. 이제는 잘 불어야겠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대금을 잡았을 때 대금을 부는 사람과 대금, 그리고 듣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식 자체가 없어야 비로소 대금산조가 나온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거죠.
이 선생은 연중 130회 이상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한다. 하지만 늘 현장에 맞는 음악을 자신의 느낌대로 연주하기 때문에 항상 다른 소리를 낸다. 야외에서 공연을 할 때면 멀리 있는 관객들이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 서서 연주할 때도 많다고 한다.
연중 130회 이상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하지만 늘 현장에 맞는 음악을 제 느낌대로 연주하기 때문에 똑같을 수가 없어요. 상황에 따라 피리를 불기도 하고 대금을 불기도 하면서 즉흥적으로 음악을 연주하죠. 야외에서 공연을 할 때면 멀리 있는 분들이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 서서 연주할 때도 많아요. 관객들이 음악을 들어야 하는데 안 보이는 곳에서 하면 안 되잖아요. 장소가 산만한 곳일 때는 듣는 분들이 몰입할 수 있도록 그분들이 원하는 곡이나 잘 알려진 곡을 들려드리기도 하죠.
저를 닮아 그런지 아들, 손자, 조카까지 아주 잘 불어요. 특히 아들은 중앙대 국악과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제 뒤를 잇고 있지요. 대통령상도 받았어요. 아주 잘해요. 지금은 제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초·중·고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반응이 좋습니다. 몇 년 전엔 패혈증에 걸려 생사의 고비를 넘겼는데 꾸준히 대금을 불면서 기적적으로 완쾌했어요.
언젠가 제 아들이 “큰 나무 밑에 작은 나무가 있으면 큰 나무의 그림자 때문에 못 크지만, 언젠가는 노력한 만큼 큰 음악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 들었어요. 마음고생이 심했구나 싶어서 내심 안타깝더군요. 하지만 기둥을 잘 세워놓았으니 제 이후로 반드시 훌륭한 연주가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폼만 재고 다니지 말고 기초를 잘 닦아놔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민속 가무악을 하는 분들이 많지만 학문적으로 정립한 분은 많지 않아요. 그분들이 이전의 스승들께 배운 것들을 잘 정립하여 후학들에게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기초를 탄탄히 할 수 있도록 잘 지도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자들도 대학에 가기 위해서 혹은 상급반에 올라가려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기초부터 잘 배워 두어야 합니다. 어떠한 음악도 표현해내고 연주할 수 있는 그런 연주자가 나와야 하는데 그런 제자가 많지 않아요. 대학에서도 우리 전통음악의 원형을 깊게 가르치지 않으니 전부 서양 음악에만 관심을 갖게 되는 거예요.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전통음악은 소멸되어 가겠죠. 스승과 교감하고 원리를 터득하면서 우리 음악이라는 큰 뼈대에 살을 붙이는 것이 곧 제자의 역량이며 기량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기초가 없으면 안 되겠죠.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원형을 망각한 전통음악은 생명력이 없다는 거예요. 감동을 주지 못해요. 그러니까 기초를 잘 다져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로부터 출발해 동경(憧憬)을 키우라는 말을 하고 싶군요.
제 예술 철학은 ‘감동’입니다. 음악은 하나의 언어이기 때문에 먼저 연주자와 관객이 소통해야 한다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무조건 “우리 음악을 들으시오”가 아니에요. 국악이든 클래식이든 퓨전이든 감동을 주지 않는 음악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생명이 없기 때문이죠.
그리고 학문이나 예술뿐 아니라 모든 것에는 ‘중심’이 있어야 된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중심이 흔들리게 되면 모든 것이 다 헝클어지기 때문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각자의 능력은 그 다음이에요. 흔들리지 않아야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만약 흔들렸다면 오늘날 이 자리에 있지도 못 했을뿐더러 스트레스를 받아서 벌써 세상을 떠났을 겁니다. 어디까지나 중심을 잡았기 때문에 지킬 수 있는 자리였어요. 흔들릴 때는 흔들리더라도 중심만 잘 잡고 있다면 넘어지지 않아요. 흔들린다는 건 살아있다는 거예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언제든지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봐요. 음악의 경지란 보이지 않습니다. 완전하다고 생각했더니 또 가지가 나와요. 불완전을 넘어 완전을 향하는 그 반복의 원대한 음악 세계는 끝없는 무한대라고 할 수 있죠.
특별히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바람은 없습니다. 굳이 말하라면 훌륭한 악성(樂聖)을 포함한 역사적으로 기억되는 많은 분들처럼 저도 그렇게 칭송을 받을 수 있는 예술가로 불리면 좋겠습니다.
이생강
1937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광복 후 귀국했다. 어려서부터 그의 재능을 발견한 선친의 도움으로 23명의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다. 1960년 프랑스에 공연을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독주자로 데뷔하게 되고, 해외에서 먼저 실력을 인정받아 이후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대금과 우리 전통음악을 알렸다. 자연이 살아 숨쉬는 생명의 에너지이자 사람의 목소리에 가까운 대금의 청아한 소리에 반해 한평생 대금과 사랑에 빠진 그에게 대금은 곧 숨소리와 같다. 서양음악을 무조건 따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리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여전히 우리 음악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애쓰는 대금 연주가다.
|
첫댓글 대금소리에 산천초목도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드릴것 같아요.
이생강님의 대금소리가 조용했던 금수강산의 찬란한 빛이 다시 살아나는것 같기도 하구요.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대금연주 감상 감사히 잘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