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3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요한 10,22-30
세상 살면서 누군가가 나와 일치한다는 기쁨을 누리고 싶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일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치하는 것일까요? 십자가를 목에 걸고 성경을 읽으면 일치하게 될까요?
물론 그것도 일치의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께 일치하는 방법을 알 때 사람들을 나와 일치하게 하는 방법도 알게 된다는 게 핵심입니다.
세바시 1814회 ‘우울증과의 위험한 동거 7년, 기적적인 탈출 스토리’에서 『소중한 사람을 위해
우울증을 공부합시다』라는 책을 쓴 최의종 씨가 강연하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 있는 최의종 씨에게 아내가 전화했다고 합니다.
이상하게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인가 깜짝 놀라서 달려가 봤더니 몸이 아프기는 아픈데 어떻게 아픈지 정확히는
모르겠더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우울증이었습니다.
두 아이이면서도 자살 충동을 끊임없이 느끼는 이 자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집은 지옥처럼 변했습니다.
아이들도 오랫동안 빨래를 못 한 옷을 입고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최의종 씨도 아내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열심히 해 주었는데 뭐가 부족해서 우울증에 걸렸냐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운동하고 음식을 먹으라고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내는 나아지지 않고 남편과의 사이는 더 벌어질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도 거의 우울증에 걸리게 됩니다.
아내가 죽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때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로 갔는데 그곳에서 쫓겨났습니다.
겉이 멀쩡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자신도 아내에게 그런 모습일 수 있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부터 최의종 씨는 우울증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모범을 보입니다.
먼저 쉬운 운동부터 아내가 보는 앞에서 합니다. 집이 헬스장이 되어갑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위해 하는 그런 행동들에 미안해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러니 입맛도 좋아지고 7년이 지난 지금은 수영을 자신보다 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우울증을 함께 극복한 부모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일치의 핵심이 있습니다.
남편이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나도 우울증 환자가 되어서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도 할 수 있다고 믿고 남편을 따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일치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우리가 따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일치는 그분이 아버지께 가시기 위해 하신 일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최의종 씨는 이미 우울증을 극복한 이들의 책을 공부해서 그것을 따라 했습니다.
따라 하는 것을 아내에게 보여줬습니다.
이것이 아내가 자신에게 일치하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둘이 일치할 수 없습니다.
어제는 ‘하.사.시.’를 함께 전하고 있는 카타리나란 자매가 드디어 하.사.시. 10권을 다 읽은 것을
알았습니다.
벌써 다시 2권째 읽고 있습니다.
그래서 카톡으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답글이 왔습니다.
“읽은 날은 죄를 덜 짓고…. 못 읽는 날은 죄를 더 짓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안 먹으면 배가 고프듯이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하면 기도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냈습니다.
“기도의 효과를 느끼고 있으면… 기도하고 있는 것임.”
그러니 장문의 글이 왔습니다.
“이거는 확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제 기도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주님께서 죄많은 저를
늘 도와주고 계심을요…. 그래서 미사 중에 주책맞게 자주 웁니다….^^
내게 해를 끼친 이웃을 위해 미움을 기도로 올리니 화해로 결실을 맺게 해주시는 주님의 기적을 보면서 또 감사로 기도합니다…. 요즘은 기도의 힘이 너무 큰 것을 알기에 죄인인 제가
그 기도라는 것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고 즐겁고 기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다 전 요셉 신부님 덕분이에요!!^^”
제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저도 카타리나 자매가 저와 더 일치함을 느끼게 되어서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일치한 것이지만.
저는 제가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모범을 보여주었고 그 자매는 그것을 따라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또 누군가가 저와 일치하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법을 모를 때는 누군가를 나와 일치하게 하는
법을 알 수가 없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치는 비난이나 강제로 시키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와 진정으로 일치하는 기쁨을 느끼고 싶다면 내가 그리스도께 일치하는 모범을 보여주는 길밖에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23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복음: 요한 10,22-30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자비와 용서, 축복과 구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축제!
우리나라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공통점이 꽤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라는 것. 그리고 주변 강대국들에 둘러쌓여 수시로 외침을 받아, 식민 통치를 받고 유배를 떠나는 등, 갖은 우여곡절을 겪어 왔다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낙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축제를 즐겼습니다. 계절별로, 역사적 기념비가 될만한 큰 사건들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기념하고, 경축하면서 부단히 현재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축제는 다른 이방인들의 축제와 뚜렷이 차별화되는 측면이 한 가지 있었으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풀어주신 자비와 용서, 축복과 구원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감사하며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전 봉헌 축제는 안티우쿠스에 의해 함락되고 파괴된 예루살렘을 유다 마카베오가 되찾은 후,
성전을 정화시키고 봉헌한 것을 기념하여 매년 겨울에 거행되었습니다.
이 축제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승리의 날을 경축하고 기렸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도 이 축제에 참석하셨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마치 하이에나 떼처럼 예수님 주변을 맴돌고 있던 유다인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유다인들의 어투를 참작할 때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손톱만큼의 호의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던가 확신하며 던진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강한 적개심과 증오심으로 무장한 채, 빈정거리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몰지각하고 파렴치한 유다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자극해서 빌미 잡힐 말을 하게 만들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이없는 말만 골라 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그간 예수님께서 행하신 설교 말씀을 귀담아들었더라면,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유심히 바라봤더라면 유치원생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메시아성을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예수님 주변을 맴돌면서 잔뜩 거드름을 피우는 유다인들은 유치원생보다 못한 존재들이군요.
오늘 다시 한번 알아들을 귀를 청합니다.
들은 바를 잘 실천할 힘도 덧붙여 청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유일무이한 메시아이심을 고백합니다.
오직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길이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4주간 화요일 강론>
(2024. 4. 23. 화)(요한 10,22-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25ㄴ-30).”
1) 예수님께서 “나는 메시아다.” 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밝히시는 말씀을 하신 적은 많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8-51).”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
2)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를 믿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믿는다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들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알아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나를 믿는다면, 내가 하는 일들이 곧 ‘아버지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앞의 9장에 바리사이들 사이에 일어난 논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요한 9,16).”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일보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일을 하셨다는 것만, 즉 안식일을 안 지켰다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하느님의 기적이며 표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규정보다는 기적 자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신념’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만들어 주신 뜻은 생각하지 않고, 안식일 규정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데,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3)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는 “나를 믿지 않으면 내 양이 될 수 없다.”입니다.
<양이 아니기 때문에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안 믿기 때문에 양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27절-29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양이 되었을 때
얻어 누리게 될 은총을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양이 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고, 영원히 죽음에서 해방될 것이고, 하느님과 예수님의 보호 속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라는
말씀은, 하느님보다 더 강한 존재는 없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얻은 영원한 생명, 구원, 영원한 행복도 절대적이고 영원합니다.
4)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은 완전히 하나로 일치되어 있다는 선언인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의 일이고,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뒤의 14장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약속은 하느님이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약속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속죄제물이 되심으로써 사람들을 구원하셨고, 부활 후에도 사람들 가운데에 살아 계시면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보호해 주시고,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