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0일 [연중 11주간 목요일]
집회서 48,1-14 마태오 6,7-15
'주님의 기도': 나를 하늘로 오르게 하는 엘리야의 불마차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알려주시며 이방인들처럼 자기가 원하는 것을 계속 알릴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 안에서 그분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을 알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기도에 다 들어있습니다.
오늘 독서도 기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은 성령을 의미하고 성령은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엘리야가 성령의 불 회오리바람에 들어 올려져 불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오른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이 지상에서 하늘에 오르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땅에 붙들어 매고 심지어 지하까지 끌어내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의 뜻입니다.
저와 함께 지내던 루카 보좌 신부가 자신이 처음 가위에 눌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가위에 눌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던 경험을 말하는데 자신은 그런
경험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가위에 눌릴 수 있을까를 물었습니다.
친구들은 잠들기 전에 가위에 눌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잠자면 가위에 눌린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바로 돌아와서 그날 가위에 눌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잤더니 진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숨도 쉴 수가 없었고 당연히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희미한 두 사람이 옆에서 말하는 게 들렸습니다.
“쟤, 지금 안 자!”
두려운 나머지 발버둥을 쳤고 간신히 깨어났는데 자신이 자기 목을 조르고 있었었습니다.
사실 가위에 눌리고 싶다는 마음은 친구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세상 것과 하나가 되고 싶은 자아의 욕구는 정말 땅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놓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과 하나가 되고 갚은 운명을 맞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가 사고 나서 죽은 곳에서 자신도 뛰어내려 죽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여 같은 운명으로 간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 희망을 하늘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썩어 없어질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하로 내려가지 않고 하늘로 오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이 지상에 집착하게
만드는 자기 뜻을 죽여야 합니다.
그 뜻을 죽이는 게 불입니다.
나무에 불이 붙이면 그 안의 진액이 먼저 빠져나오듯 성령이 오시면 자아의 욕구가 죽습니다.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자아를 상징하는 소를 살라버리고 그 밑의 물을 말려버린 것과
같습니다.
기도는 그렇게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합니다.
그런데 그 불 회오리바람 가운데 불마차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주님의 기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기도의 정수입니다.
그 안에 하느님 자녀가 가져야 하는 하느님 뜻이
다 들어있습니다.
내가 이 지상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일곱 개만 원하게 될 때 우리는 천사의 도움으로 하늘에 오르게 됩니다.
엘리야가 불 회오리바람과 불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오른 방법이 이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기도의 뜻을 음미하며 바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그 뜻에 하나로 젖어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마차라고 생각하고 주님의 기도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저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고 호흡을 50번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주님의 기도 한 번 하는 데 한 시간 걸립니다.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않게 하려고 호흡에 숫자를
세면 더 좋습니다.
숨을 끝까지 다 내쉬면 코로 저절로 공기가 배에 차게 됩니다.
이렇게 세포 하나하나에 산소가 들어가듯이 내가 가벼워지고 하늘로 올라가 천국의 평화를 느끼게
됩니다.
몇 번 바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뜻이 나의 뜻을 불사르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나머지는 덤으로 다 받게 될 것입니다.
왜 불마차가 불일까? 불은 태우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더 이상 태울 게 없다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태우는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이 사랑에 의해 태워질 때 하늘로 오를 수 있다.
그런데 무엇으로 태울까? 바로 하늘로 끌어 올리려는 이의 ‘뜻’이다.
그 뜻이 나의 뜻을 죽일 때 하늘로 오를 수 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당신 뜻을 죽이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했을 때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왔음을 잊지 맙시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 그때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그분의 기운을 북돋아 드렸다.”(루카 22,42-43)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20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 6,7-15
기도할 때도 너무 지향에 목숨 걸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과 재미있게 살 때의 일입니다.
자유롭게 외출 외박을 못 나가던 아이들이었는데, 주간 생활 태도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아이들은
신부 수사들과 동반 외출이 가능했습니다.
저는 주일 점심 식사를 끝내고 나면 습관처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아이들 서너 명과 길을 나서곤 했습니다.
너무 많이 데려가면 집단 이탈 가능성이 많은지라, 딱 서너 명만 데리고 나갔습니다.
외출 나가기 전날부터 제 머릿속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아이들을 어떻게 기쁘게 해줄 것인가?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어딜까? 영화관? 피시방? 오락실? 노래방?
간식으로는 뭘 사줄까? 피자? 통닭? 아이스크림?
대여섯 시간 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머릿속에 좋은 추억의 사진 한 장 남겨줄 수 있을까?
그렇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아마 세상의 모든 부모들도 비슷한 마음이겠지요.0
보십시오. 세상 부족한 저희 같은 사람도 누군가에게 좋을 것을 주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쓰는데, 선하신 주님께서는 오죽 하시겠습니까?
틈만 나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시고, 백방으로 노력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따라서 너무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하고 졸라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어련히 생각하고 계시고, 최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는데,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텐데, 그분의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굳게 믿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니, 그 어떤 것도 좋습니다.’ 하면서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기도할 때도 너무 지향에 목숨 걸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어련히 알아서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니, ‘당신 뜻에 맡깁니다!’하고 외치며 남은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저는 요즘 묵주기도 때 특별한 지향을 두지 않고 바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시간에, 좋으신 어머니 성모님과 함께 좋으신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의 여정을
묵상하는 마음으로 바칩니다.
좋은 시간, 좋은 분들과 산책하는 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의무감에서 숙제처럼 바치지 않으니, 그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지 모릅니다.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께서 여러분 자신을 바라보게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아주 아름다운 기도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강론>
(2024. 6. 20. 목)(마태 6,7-15)
<기도는 이미 주신 것을 잘 받기 위한 준비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7-15).”
1)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청할지를 우리보다 먼저 알고 계시고,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 또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먼저 준비하시고, 그것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의 보충설명과 같은 말씀이 마르코복음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사람들 가운데에는 “하느님께서 먼저 알고 계시고, 먼저 주신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이 있는데, ‘기도’는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것을 우리 쪽에서 잘 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그러니 더 간절하게, 정성을 다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주시는 것을 안 받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따라서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려고 우리가 애쓰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이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한 번 결정하신 일을 취소하거나 번복하는 일이 없으신 분입니다.
2) 구약성경에, 인간의 간절한 기도를 보시고
하느님께서 마음을 바꾸시는 이야기가 가끔 나오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전지전능에 관한 문제는 아니고, 인간의 눈으로 본 인간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좋은 예가 요나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 옷을 입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요나 3,3-5.10).”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큰 도시에서
요나가 하룻길만 걸은 다음에 하느님 말씀을 선포한 것은, 하느님 말씀을 충실하게 ‘그대로’ 선포한 것이 아니라, ‘대충’ 선포했음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분명히 하느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선포하라고 시키셨을 텐데, 요나는 멸망만 선포하고 회개는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바라신 것은 그 도시의 멸망이 아니라 회개였습니다(요나 4,11).
사람들이 회개한 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신 대로 된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마음을 바꾼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과 회개와 기도로 사람들이 변화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마음을 돌리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느님의 마음에 회개로 응답한 것입니다.>
3)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주시는 것을 우리가 잘 받으려고 바치는 기도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는 일과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 일과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은, 우리가 청하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 일들을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사실은 그 일들에 우리도 참여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의 경우도 같습니다.
이미 주신 양식을 잘 받기 위해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인데, 잘 받는 방법은 그 양식을 ‘우리’가(모든 사람이) 함께 나누는 것이고, 주님의 기도는 그 ‘나눔’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는 기도입니다.
용서의 경우에도, 하느님께서 먼저 용서의 은총을 주셨기 때문에 그 은총에 응답하기 위해서 이웃을 용서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유혹과 악에 대한 기도의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도 능동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유혹과 악을 물리치겠다고 다짐하는 기도입니다.
4) 바오로 사도는 기도에 관해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