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해가 해결되다
수 22:30-34
30 제사장 비느하스와 그와 함께 한 회중의 지도자들 곧 이스라엘 천천의 수령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의 말을 듣고 좋게 여긴지라
31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오늘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 이는 너희가 이 죄를 여호와께 범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고
32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와 지도자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을 떠나 길르앗 땅에서 가나안 땅 이스라엘 자손에게 돌아와 그들에게 보고하매
33 그 일이 이스라엘 자손을 즐겁게 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거주하는 땅에 가서 싸워 그것을 멸하자 하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
34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제단을 엣이라 불렀으니 우리 사이에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수 22:30-34 / 비느하스 제사장과 함께 간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군부대의 지휘관들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떡였다. 그것도 그럴 법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31) 엘르아살 제사장의 아들 비느하스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 사람들에게 `그래요.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소. 우리는 당신들이 여호와를 배신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소. 당신들이 여호와께 등돌리지 않았으므로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겠지요. 그래요. 바로 당신들이 우리 이스라엘을 건졌소. 여호와께서 우리를 내리치실 텐데 당신들이 우리를 구하였소.' 32) 이렇게 말을 하고 엘르아살 제사장의 아들 비느하스와 백성의 지도자들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사람들을 떠나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사정이 이러이러하게 되었다는 보고 내용을 지닌 채 길르앗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33) 사정이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흐뭇해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는 군대를 소집하여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으로 쳐들어가 쓸어 버리자는 이야기를 다시는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34)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사람들은 이 제단이야말로 강 건너 동쪽에 사는 우리와 강 건너 서쪽에 사는 형제 이스라엘 사이에 여호와야말로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언하는 증거물이라고 말하면서 그 제단을 `증거'라는 뜻으로 엣이라고 불렀다.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의 적극적인 해명으로 분쟁은 해결되었습니다.
요단 서편 대표단의 반응(30-33) 비느하스와 그 일행은 요단 동편의 사람들이 단을 쌓게 된 이유를 자세하게 듣고, 요단 서편 총회에 돌아와 보고하였습니다.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모든 의심을 풀고 그들에 대한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 내었느니라’(31)라는 것은 다른 제단을 쌓았지만 여호와의 진노를 피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두 지파 반이 단을 쌓은 행위가 여호와 앞에서 올바르지 못했다면 두 지파 반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큰 재앙을 입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형제가 올바르게 신앙 가운데 거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였으며 이 사건의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욱 결속되었습니다.
단의 이름과 뜻(34) 요단 동편의 사람들이 세운 단을 ‘엣’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증거라는 뜻으로 요단 동편과 서편에 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신다’라는 사실을 증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을 여호와께서 지금도 계속 진행하시는 중이시며, 이 단이 그러한 사실들을 증언해 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단은 이스라엘이 공동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으며, 후손들에게 그들의 순수한 신앙을 전수하려는 열망의 표현이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증거는 첫째, 표(21-28; 창 31:44; 신 31:26; 욥 16:8)를 뜻하며, 둘째, 증인(창 31:50; 욥 16:19; 롬 1:9; 고후 1:23)을 의미하고, 셋째, 법적인 증인(눅 24:48; 행 1:8; 2:32; 3:15)을 뜻하기도 합니다.
적용: 성경은 당신에게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화목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들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보물처럼 보관해 온 노트 한 권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 비밀 노트를 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노트에 적힌 것은 가족들의 이름과 친구들의 이름, 그리고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낯선 이들이 누군지 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란다. 아버지는 매일 그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올리셨지.”
< 설 교 >
형제의 증거물
수 22:30-34
지난 시간에는 형제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미 요단 동편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입장에서 굳이 요단을 건너갈 이유가 없지만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을 건너가서 가나안과의 전투에 참여를 합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요단 서편에서는 얻을 기업이 전혀 없고 또 얻지 않겠다고 이미 공헌한 그들의 입장에서는 돌아오는 이득이 전혀 없는 한마디로 말해서 남는 것이 없는 전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전쟁에 그들이 참여하게 된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여러분이 그들의 입장이라면 어떤 태도를 취하겠습니까? 돌아오는 것이 전혀 없는 전쟁에 단지 아직 기업을 얻지 못한 형제들을 위해서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세태 속에서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오늘 우리 자신들의 성품을 정확히 진단하고 생각을 한다면 참으로 주저할 수밖에 없고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피하고 싶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미 삶의 터전을 마련한 입장에서는 하루속히 그곳에 정착해서 기반을 마련하고 싶은 생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세에게 '우리는 요단을 건너가지 않고 여기에 남겠다'는 요청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그들이 생각을 돌이키고 형제의 기업을 위한 전쟁에 손해를 감수하고 참여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신들로 인해서 형제가 낙심하게 될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의 행복보다도, 자신들의 이득보다도, 자신들로 인해서 형제가 낙심하게 되는 것을 더 크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아무런 이득이 없는 전쟁에 참여하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곧 이스라엘의 마음이고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저는 신자에게는 말씀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말씀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은 말씀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 4: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말씀은 죽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운동력은 우리의 혼과 영을 찔러 쪼개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즉 말씀이 우리 안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흔적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뜻을 감찰하면서 우리의 생각이나 행하고자 하는 것들이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 안에서 사는 신자라면 자연히 말씀이 원하는 쪽으로 순종되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에 대한 책임이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즉 말씀에 대한 책임은 말씀을 실천하고 행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되어지는 삶을 의미한 말입니다.
요단 동편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로 인해서 형제가 낙심케 될 것을 염려해서 이득이 없는 전쟁에 참여하게 된 그것이 곧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말씀에 순종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편안함과 이익 때문에 어린양의 피로서 함께 구출되고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땅을 향해서 살아온 형제들을 낙심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가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형제라는 관계는 혈통이나 인간적인 친근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서 이루어진 특이한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민족과 혈통과 인간적 이해로 형성되어지는 인간관계가 있는 세상에 어린양의 피로서 이루어지는 특이한 관계가 새롭게 형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피가 지니고 있는 모든 의미는 피로 형성된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형제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 하나하나가 결국 그들이 어린양의 피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인간 관계는 자식이 부모에게 불효하고 형제가 서로 다투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문제가 있다고 해도 단지 도덕과 윤리적인 기준에서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는 윤리와 도덕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희생과 섬김에 대한 감사와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지가 폭로되는 현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무시하고 살기 때문에 개인적인 신앙 행위만 착실하다면 자신의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해 버리고 형제를 대할 때 어떤 생각으로 어떤 태도로 대한다고 해도 그것을 별 문제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중요하게 여기고, 교회 역시 중요하게 여긴다고 하면서 형제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지 않은 신앙일 수밖에 없고 그가 생각하는 교회란 형제를 염두에 두지 않는 단지 자신의 종교 생활을 영위하는 터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란 형제들의 모임입니다. 형제관계가 없는 교회란 있을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21-22절에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합니다. 나 혼자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함께 처소로 지어져 가는 관계가 교회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형제 관계를 무시한 채 모여지는 교회를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형제 관계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여호수아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요단 동편으로 돌려보낸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요단 동편에 터전을 잡은 지파들은 가나안 땅을 떠나서 자기들의 기업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10절에서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단을 쌓았는데 볼 만한 큰 단이었더라"는 말씀을 보면, 그들이 요단 동편으로 다시 돌아가다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렀을 때 아주 큰 단을 쌓았다고 말합니다. 볼 만한 큰 단이었다는 것은 멀리서도 잘 볼 수 있을 정도로 큰 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을 쌓은 것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전쟁의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12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고 말합니다. 결국 단을 쌓았다는 것 때문에 요단 동편에 터전을 잡은 이스라엘과 요단 서편 가나안에 터전을 잡은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을 쌓았다는 것이 왜 전쟁을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입니까? 신 12:4-14절의 규례를 보면 여호와의 제단은 오직 한곳에만 세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제단이란 사람들이 세우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곳 여호와가 지정한 곳에만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 규례를 어기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서 진멸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은 이 규례를 내세워서 요단 동편의 이스라엘이 단을 쌓은 것을 여호와께 범죄한 것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단 동편 이스라엘의 범죄가 그들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약 요단 동편의 이스라엘이 단을 세운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만 국한되어지다면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이 그들과 전쟁을 해서라도 그 범죄를 막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에 한 개인의 죄로 인해서 이스라엘 회중 전체에 진노가 임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단 동편의 죄를 그들의 죄로만 여기고 수수방관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사람을 보내서 그들의 죄에 대해서 책망을 하고 죄에서 돌이키기를 권면하게 됩니다. '너희가 왜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여호와를 좇는데서 떠나서 자기를 위하여 단을 쌓아 여호와를 거역하고자 하느냐? 과거에도 브올의 죄로 인해서 회중에 재앙이 내렸고 오늘날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입지 못했는데 그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해서 오늘날 너희가 여호와를 떠나려고 하느냐? 만약 너희가 여호와를 배역하면 또 다시 여호와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하실 것이다'(16-18절) 이것이 서편 이스라엘이 파견한 사람들이 동편 이스라엘을 찾아와서 책망한 내용입니다.
서편 이스라엘은 동편 이스라엘이 자기들 마음대로 단을 쌓는 이유를 자기들을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19절에 보면 "그런데 너희 소유지가 만일 깨끗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를 취할 것이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 외에 다른 단을 쌓음으로 여호와께 패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패역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너희 소유지가 만일 깨끗지 아니하거든'이라는 말씀은 '너희들이 살 땅이 단을 세워서 여호와를 섬기기에 거룩하다고 생각지가 않거든'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을 세워서 제사 드리고 제물을 바쳐야 복이 임할 것인데 요단 동편 땅은 단을 세우기에 적당하지 않고 그렇게 되면 복을 받을 수가 없어서 요단 가에 큰 단을 세웠다면'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요단 동편의 소유지를 버리고 여호와의 단이 있는 이곳으로 와서 우리 중에서 너희들이 살 땅을 취할지언정 아무데나 단을 세워서 여호와께 패역하고 우리에게도 패역하지 말라는 것이 동편 이스라엘을 향한 서편 이스라엘의 엄중한 책망이었던 것입니다.
서편 이스라엘의 이러한 말을 보면 그들이 중요시하고 있는 것은 '너희들이 범죄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면 우리 역시 진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한 개인을 생각할 수 없고 항상 회중 전체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오늘날의 인간관계와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우리들의 인간관계란 어떤 죄를 짓고 벌을 받든 그것은 철저하게 개인의 문제로 여깁니다. 내가 범죄하지 않았으면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겨버립니다. 신앙의 문제도 나 혼자 잘해서 나 혼자 복받으면 된다는 마음이 우리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나 개인의 문제이고 책임이지 다른 형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지는 공동체 관계란 우리의 생각과는 거리가 멉니다. 애당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출될 때부터 개인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개인을 판단해서 구출할 만한 사람을 골라낸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단 하나였습니다. 어린양의 희생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의가 이스라엘을 있게 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희생 안에서는 하나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가르치십니다. 한 사람의 잘못이 이스라엘 회중의 잘못으로 여겨져서 이스라엘에 진노가 임합니다. 반면에 하나로 인해서 전체가 살아나는 은혜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셨을 때도 왕 한 사람이 잘하면 이스라엘이 복을 받고 왕이 잘못하면 이스라엘이 진노를 받는 원칙 속에 이스라엘을 두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로 보신 것이지 각기 개별적으로 보시고 판단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같습니다. 교회란 개별적으로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분의 의로 인해서 전체가 산 것입니다. 세상 전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전체입니다. 이렇게 의로 인해서 산자들의 모임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나 만 잘하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범죄란 몸의 범죄이며 고통은 몸의 고통으로 여겨야 합니다. 따라서 은혜 안에서 한 몸된 형제가 여호와를 버리는 범죄를 하게 될 때 마치 나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함에 들어가는 것으로 여기고 형제를 대하는 것이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로서의 참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편 이스라엘의 엄중한 책망에 대해서 동편 이스라엘이 무엇이라고 답을 합니까? 22절부터 보면 그 답이 나옵니다. 먼저 동편 이스라엘은 '지금 우리들의 행동이 여호와께 패역한 것이고, 단을 쌓은 목적이 여호와를 좇지 않으려고 한 것이거나 번제나 소제를 드리기 위해서 쌓은 것이라면 우리를 구원치 말고 벌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단을 쌓게 된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합니다.
동편 이스라엘이 단을 쌓은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장차 서편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동편 이스라엘의 후손을 향해서 너희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제단은 아무데나 세울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동편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서 서편 이스라엘로 와야 합니다. 이것이 반복될 때 후대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이 기업을 주신 약속의 땅에 거하지 않는 동편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제사 드리러 오는 것을 막을 수도 있다는 염려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요단 가에 멀리서도 보일 수 있는 큰 단을 세워둠으로서 서편 이스라엘에게 요단 동편에도 그들의 형제가 있음을 잊지 않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 동편 이스라엘이 단을 쌓은 것은 자기를 위해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회중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혹 서편 이스라엘의 후손이 '너희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라고 할 경우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것을 내세울 수 있는 증거로서 단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손이 되어지지 않기 위해서 단의 모습을 한 가짜 단을 세운 것입니다.
서편 이스라엘은 이것을 매우 좋게 여겼습니다. 31절에 보면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오늘날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 이는 너희가 이 죄를 여호와께 범치 아니하였음이라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고 말합니다. 비느하스는 동편 이스라엘의 그러한 마음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로 여겼습니다. 자기를 위하지 않고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가 되어지지 않기 위해서 단을 쌓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로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 단을 쌓는 죄를 범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동편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복을 위해서 제사를 드릴 목적으로 단을 쌓았다면 그 죄가 이스라엘 회중에 미칠 것인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범죄하지 않게 된 것이고 그로 인해서 진노를 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이상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애당초 동편 이스라엘은 제사드릴 목적으로 단을 쌓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동편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제사드릴 목적으로 단을 쌓았다가 서편 이스라엘의 책망과 설득에 의해서 마음을 바꿔서 제사드릴 단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너희들이 범죄하지 않음으로서 진노를 받지 않게 되었다'고 하면서 기뻐하고, 그들의 마음을 바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제사드릴 목적으로 쌓은 것이 아닌데 '너희가 범죄하지 않음으로서 우리를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다'고 하면서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과연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사드릴 목적으로 단을 쌓은 것이 아니다 그저 너희들의 후손이 장차 우리 후손을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로 여길 것이 염려되어서 우리도 하나님과 상관이 있는 백성이라는 증거로 삼으려고 쌓은 것이다' 이 말 한마디로 오해도 풀어지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마치 동편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제사 드리려는 목적으로 단을 쌓아서 여호와께 범죄를 했다가 나중에 마음을 고쳐 먹은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편 이스라엘은 아주 큰 불안감으로 동편 이스라엘을 찾아옵니다. 자칫하면 전쟁까지 해야 할 위험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오해였음이 밝혀집니다. 오히려 동편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지 않고자 하는 좋은 마음을 가지고 단을 쌓았습니다. 비느하스는 바로 이러한 마음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되어지지 않고자 하는 마음, 그 마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결과로 주어진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자기를 위해서 단을 쌓을 수밖에 없는 강퍅한 인간인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러한 마음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편 이스라엘이 범죄치 않고 좋은 마음으로 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형제의 믿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에서도 사도 바울이 교회들의 믿음을 인해서 감사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로 살전 1:2-3절에서도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이라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들의 믿음과 사랑과 수고가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증거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가 서로 경쟁관계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허무는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경쟁 관계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서로 자신의 것을 자랑하며 내세운다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34절에 보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단을 엣이라 칭하였으니 우리 사이에 이 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고 말합니다. 동편 이스라엘도 서편 이스라엘도 여호와가 하나님이 되신다는 증거로 단의 이름을 '엣'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엣'이란 '증언' 또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동편 이스라엘이 세운 단으로 인해서 서편 이스라엘도 동편 이스라엘도 똑같이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단을 증거로서 우리 모두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이스라엘임을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양쪽 이스라엘은 전쟁의 위기 속에서 한분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된 백성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만 섬기고자 하는 그 마음이 그들이 서로 하나임을 확인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 관계도 아니고 친분 관계도 아닙니다. 한분 하나님을 섬기는 관계 속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서로 하나라는 것이 확인되어질 수 있는 것은 '은석교회'라는 단체 안에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남겨져 있는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이 확인되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엣'이라고 이름하는 단이 증거가 된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증거물이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증거물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그 증거물을 바라보고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에서 오직 그리스도만 섬기고 주님의 희생과 섬김을 따라 살기를 소원하는 믿음이 보여질 때 우리 모두가 한분 하나님을 섬기며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 있음을 확인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각기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것은 동편과 서편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각자 자신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교회로 모이는 여러분의 관계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삶에서 하나님이 필요 없고 그리스도의 은혜 역시 필요가 없는 사람은, 교회에서도 형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네가 내 신앙에 무슨 도움을 주느냐?'는 생각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도 필요가 없는 사람이 형제가 필요하겠습니까? 특히 약자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형제를 필요로 하겠습니까? 참된 교회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물로 삼고 모이는 신자 되기를 바랍니다.
엣단 사건과 교훈
수 22:30-34
오늘 성경에 보면 34절에 ‘엣’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엣’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증거’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 22장의 내용은 엣단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엣단의 유래와 그 교훈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엣단의 배경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서 정복하고 땅을 분배하는 기록이 여호수아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정착한 땅을 크게 나눈다면 요단강을 중심으로 요단강 동편과 서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살아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요단강 동편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요단강 동편을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반에게 이미 분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지파 반은 모세로부터 땅을 분배받았지만 젊은 장정들은 다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 서편에서 함께 정복전쟁을 하였습니다. 여호수아 22장의 내용은 이렇게 함께 수고한 두지파 반에게 여호수아가 그들의 장막으로 돌아가라는 내용입니다. 3,4절에 보면 ‘오늘날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 하니님 여호와의 명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이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편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지파 반이 먼저 땅을 분배받았지만 다른 지파를 위해서 마지막까지 수고한 이 행동은 좋은 교훈이 됩니다. 여호수아는 수고한 두 지파 반에게 축복을 하고 요단강을 건너 가라고 하였는데, 요단강을 건너 가던 이들이 요단강 가에서 단을 크게 쌓기를 시작하였습니다. 10절에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단을 쌓았는데 볼 만한 큰 단이었더라.’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과 의논도 하지도 않고, 여호수아에게 보고도 하지도 않고 두지파 반이 요단강가에 큰 단을 쌓자 다른 이스라엘 백성이 이 일을 궁금 해하며 모였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이스라엘 자손들은 두지파반이 그곳에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서 큰 단을 쌓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우상숭배에 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엄한 교훈을 받았기에 우상숭배를 위한 단을 쌓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2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라고 흥분하였습니다. 그때에 전쟁을 하기 전에 왜 이런 단을 만드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고 몇사람을 그곳에 보내었습니다. 이때에 두지파 반은 이들에게 단을 쌓은 목적을 24-26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분의가 없느니라 하여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으로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한 단 쌓기를 예비하자 하였노니 이는 번제를 위함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함도 아니라.’ 결론으로 두지파 반이 쌓은 단은 우상숭배를 위한 단이 아니라 요단강 동편에 사는 사람도 똑같은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증거물로 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을 ‘증거’라는 뜻을 가진 엣단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2. 엣단의 교훈
두지파 반이 요단강가에 만든 엣단에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교훈을 정리해 봅시다. 첫째로,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사건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은 두 지파 반이 요단강가에 큰 단을 쌓는 것을 보고 미리 짐작하기를 우상숭배를 위해서 단을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들과 싸우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고 외형으로만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다른 지파들이 대표를 뽑아서 두지파 반에게 보내지 않고 전쟁을 시작하였다면 큰 실수를 할뻔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내막을 알지 못하고 외형으로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형제를 비판하기전에 먼저 그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알지 못하면서 성급하게 행동을 먼저하거나 비난을 해서는 안됩니다.
두번째로 우상숭배의 경계심을 배우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가 이토록 흥분하게 된 것은 혹시나 이들이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가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의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이들이 잘 알고 있기에 이런 사건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의 대표단이 두지파 반에게 가서 하는 말이 18절에 ‘오늘날 너희가 돌이켜 여호와를 좇지 않고자 하느냐 너희가 오늘날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 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동안 광야길을 오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상숭배를 미워하시며,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큰 벌을 받는지를 분명히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단을 쌓는 것을 보기만 해도 조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대표들이 두지파 반에게 가서 우상숭배로 받은 저주를 예로 들면서 브올의 죄악과 아간의 죄악를 말했습니다. 브올의 죄악으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이만 사천명이 죽었습니다 (민수기 25:3,9 참조). 그리고 아간의 죄악으로 아간의 모든 가족이 아골 골짜기에서 죽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성에서 패배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스라엘 백성이기에 우상숭배를 철저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우상은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많은 사람이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배금(拜金)주의 사상이 이 시대에 만연하여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지만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번째는, 같은 형제의 중요성입니다. 두 지파 반은 요단강 동편에서 살고, 다른 아홉지파 반은 요단강 서편에서 살게됩니다. 세월이 지나면 요단강을 경계로 해서 같은 민족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단강 동편에 사는 사람들도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단을 쌓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같은 형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살아가는 터전은 요단강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하나님을 같이 섬기고 사는 같은 형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같은 형제라는 관념이 너무나 적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도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서 차별을 두려고 합니다. 어떤 집에서 사느냐, 돈을 얼마나 버느냐, 학벌이 있느냐에 따라서 나누어져 살려고 합니다. 이것은 옳은 행동이 결코 아닙니다. 얼굴은 달라도, 사는 곳은 달라도, 피부색이 다르다고 해도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같은 성도입니다.
엣단은 처음에는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 싸움이 벌이질 것 같은 불길한 일이 있었지만 결론은 33절에 ‘그 일이 이스라엘 자손을 즐겁게 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의 거하는 땅에 가서 싸워 그것을 멸하자 하는 말을 다시 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합니다. 우리들도 이 시대에 함께 살아가는 형제를 즐겁게 하는 자들이 됩시다.
갈등을 해소하는 길
여호수아 22:1-34
우리는 지난주에는 여호수아 20장을 통해서 도피성을 세우도록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보았습니다. 여호수아 21장은 레위인들이 거할 성읍들을 내주는 주는 말씀입니다. 레위인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살 수 있는 거처는 마련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12지파들이 분배받은 기업의 땅 가운데 48개의 성읍을 레위인들이 사는 성읍으로 내주었습니다. 각 지파별로 평균 4개의 성읍을 레위인들을 위하여 내어주었습니다. 그 48개의 성읍 중에 6개 성읍이 도피성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21장 43-3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을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 땅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방에 안식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습니다. 그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이제 요단강 동편 땅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모세가 살아 있을 때 이미 요단강 동편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그 대신 가나안 정복 전쟁에 선봉장이 되어서 싸웠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을 떠나 7년 동안 가나안 정복전쟁에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헌신을 통해서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모든 전쟁이 끝나고 처자식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돌아가는 길에 후손들의 하나 됨을 위하여 요단강변에 큰 단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동족들이 큰 갈등에 휩싸였습니다.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지도자들이 열린 마음으로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크게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본문은 갈등을 해결하는 세 가지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I. 속단하고 싸우려 하지 말라(1-12)
여호수아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칭찬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한 것을 다 지키고, 여호수아의 명한 모든 말을 청종하여 지금까지 책임을 다했습니다(2,3). 이제는 모세가 요단 저편에서 그들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한 가지를 명심시켰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모세의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지켜 행할 것과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길로 행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친근히 하고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그분을 섬길 것을 명했습니다.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가서 살겠지만 그들의 신앙과 삶의 원칙만큼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 다시 말하면 성경 중심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사는 지역이 다르고 환경이 달라도 신앙이 변질되지 않고, 삶의 원칙과 표준이 동일하다면 그 민족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에게 친근히 하고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그분을 섬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6장 5절에 근거하여 준 명령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의 수고를 치하하고 그들을 축복하여 보냈습니다. 7-9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는 그들을 돌려보내면서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 금 동 철과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가도록 탈취물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서 그 동안 애타게 기다리던 가족들에게 나누어주라고 축복하였습니다. 여호수아 장군의 축복을 받고 아내와 자식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은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들의 눈앞에는 요단강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7년전에 저 강을 건널 때 ‘과연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지, 죽어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르는 그런 생각으로 건넜습니다. 그런데 살아남아서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심정은 참으로 감격스러웠습니다. 한시바삐 가족들에게 달려가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단강 언덕에 이르자 한 가지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요단을 건너간 후에 세월이 많이 흐르면 풍습과 문화가 달라지고, 결국은 이스라엘로부터 자기 후손들이 떨어져나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무엇을 하기로 결정했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르우벤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제단을 쌓았는데 보기에 큰 제단이었더라” 그들은 요단 언덕 가에 보기에 큰 제단을 쌓았습니다. 강 건너에서도 볼 수 있는 큰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 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쌓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손들을 위하여 쌓은 것이었습니다. 후손들의 하나 됨을 위하여 세운 증거판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먼 훗날 가나안 본토에 있는 후손들이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우리와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27).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증거물을 세운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단강 건너편에 가서 살지만 가나안 본토에 사는 이스라엘과 동일한 백성이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속한 후손들임을 증명하는 단을 쌓은 것이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고, 후손들이 끝까지 형제우애를 지키며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큰 단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 그들은 강건너 간 형제들이 요단강변에 단을 쌓았다는 말만 듣고 속단을 내렸습니다.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서 요단강변에 큰 단을 쌓았다. 저대로 가만 놔두다가는 우리 전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다. 가서 쳐부수고 그 단을 허물어버리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였습니다. 동쪽 지파 형제들에게 대항하여 싸우러 가려고 했습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이 벌어질 위기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처럼 섣불리 남을 판단하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겉모습만 보고 자기 나름대로 판단합니다. 어떤 분은 남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화를 냅니다. 그 전후 상황을 직접 들어보지도 않고 싸우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남을 비난하고 헐뜯는 말을 하기를 좋아합니다. 한번 말씀드린 기억이 있는데 이 세대를 가리켜 칠면조 세대라고 합니다. 칠면조는 동료 중에 누가 싸우다가 피를 흘리면 다른 칠면조들이 달려들어 피를 흘리는 칠면조를 계속하여 쪼아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인간의 내면에 그러한 잔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터넷에 악풀을 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악풀을 달기 시작하면 너도 나도 악풀을 달아서 치명상을 입히는 것입니다. 최진실씨가 자살한 이유가 많겠지만 한 증권회사 여직원이 자살한 배우 안재환씨의 빚 40억인데 그 중 25억이 최진실씨가 빌려준 것이라는 악성 루머를 퍼뜨린 것이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여기저기에서 올라오는 악풀로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사람이 선한 의도로 한 일이 비난거리가 될 때 참담한 심정이 됩니다. 이런 세상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을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한 영혼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 보실 때에 너무나 큰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과 행동을 좀 더 신중하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속단하고 판단함으로 형제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II.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라(13-29)
이스라엘 자손들은 감정과 혈기로 형제들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를 길르앗 땅으로 보내어 강 건너 형제들을 만나보도록 했습니다. 비느하스가 갈 때에 다른 이스라엘 열 지파 대표들도 함께 가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열 한 명의 특별조사단을 길르앗에 파견했습니다. 그들이 요단강 건너 길르앗 땅에 가서 그 형제들을 만나서 요단강변에 단을 쌓은 문제에 대한 그들의 소견을 말했습니다. 16-20절을 보십시오.
첫째는 어찌하여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제단을 쌓아 여호와를 거역하느냐?
둘째는 브올의 죄악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내린 하나님의 진노를 겪었는데, 너희가 범죄하여 또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하려느냐?
셋째는 기업으로 받은 땅이 불만스러우면 다시 요단강 동쪽으로 건너와서 소유지를 나누어 갖자는 것이었습니다.
넷째는 여호와의 제단 외에 다른 제단을 쌓게 되면 아간이 범죄하여 온 이스라엘에 진노가 임한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브올의 죄란 민수가 25장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출애굽한 후에 이스라엘이 싯딤에서 바알브올을 섬기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날에 염병으로 24,000명이 죽었습니다. 이런 타락의 위험성은 늘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이스라엘이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아간의 범죄로 인해서 아이성 공격에 실패하고, 36명이 죽임을 당하고 간담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길르앗에 거하는 두 지파 반 형제들이 단을 세운 것을 그런 시각으로 보니까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비느하스와 열 명의 두령들은 그들이 왜 그렇게 분노했으며, 전쟁이라도 불사할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했습니다.
그러자 길르앗에 거하는 형제들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22-29절을 보십시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이 제단을 쌍은 것은 결코 제사를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22,23).
둘째로 그들이 제단을 쌓은 목적은 후손들의 단합을 위하여 세운 기념비일 따름이라는 것이었습니다(24-27).
셋째로 후손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에 이 제단이 한 형제자매인 것을 증거해 주는 모형이라는 것이었습니다(28,29).
그러므로 단을 쌓은 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여호와를 거역하고, 여호와를 따르는 데서 돌아서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이들은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진실한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그 대화를 통해서 그들은 무엇을 확인할 수 있었을까요? 조사단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열정과 동족을 사랑하고 후손들까지도 하나가 되게 하고자 하는 사랑을 서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 길르앗에 거하는 형제들은 가나안의 형제들이 왜 그렇게 화를 내고 달려왔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두 집단의 행동은 각기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심하지 못하거나 성급히 판단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은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여호수아에게 자세히 설명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괜한 오해를 사서 형제들 사이에 피를 흘릴 뻔하였습니다. 또한 요단 서편의 지파들도 우상숭배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정의감은 이해되지만 성급하게 판단하고 전쟁을 준비한 것은 옳지 못합니다. 참된 신앙인이라면 형제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모든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청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답할 때 싸움에 이르지 않고 신앙 공동체는 더욱 확고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조사단을 파견하지 않고 감정과 혈기로 싸우러갔다면 얼마나 큰 희생이 따랐겠습니까? 조그만 일에도 화를 내고 공격적인 언행을 하게 되면 주위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줍니다. 그러므로 자기 나름대로 의와 교만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왜 그랬는지 물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남을 오해하고, 오해 받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을 살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만 오해에서 비롯된 스트레스가 가장 큽니다. 부부간에도 오해를 할 때가 있습니다. 형제간에도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가까운 믿음의 동역자들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청했을 때 오해가 풀리고 더욱 견고한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대화를 청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치유세미나에 갔을 때 상담심리 교수님이 한 말이 제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이분이 많은 상담지식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볼 때 대부분의 갈등은 오해에서 비롯되는데 그 오해를 푸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본인에게 물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에게 물어보면 97%이상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자기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을 봤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때부터 남편을 의심하거나 자기 혼자 소설을 쓰지 말고 본인에게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본인의 말이 가장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입니다. 왜 수십 년 함께 사는 남편은 아니라고 하는데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옆집 사람의 말을 더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많은 사람을 상담해 본 결론은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면 본인에게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 해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조건 저한테 물어보면 됩니다. 메일로 물어보아도 되고, 문자 메시지로 물어보아도 됩니다. 저에 관련된 문제는 저한테 물어보면 됩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 추측성 말을 옮기지 말고 본인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열린 마음으로 물어보면 열린 마음으로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진실을 알려고 하는 사람에게 누가 거짓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면 언제나 한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III.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30-34)
열한명의 특별조사단은 요단 강변에 가서 그들이 쌓은 단을 보고 또 그들과 대화를 나눔으로 말미암아서 그들이 얼마나 엄청난 오해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제사장 비느하스와 그와 함께 한 회중의 지도자들 곧 이스라엘 천천의 수령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의 말을 듣고 좋게 여긴지라” 조사단장으로 왔던 비느하스가 길르앗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오늘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 이는 너희가 이 죄를 여호와께 범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비느하스는 형제들의 말을 열린 마음으로 듣고 그들의 진심을 받아들였습니다. 자기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었음을 인정했습니다. 비느하스는 단을 쌓은 길르앗 형제들에게 무죄함을 선언하고, 오히려 너희가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보고했습니다. 그랬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33절을 보십시오. “그 일이 이스라엘 자손을 즐겁게 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거주하는 땅에 가서 싸워 그것을 멸하자 하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 온 이스라엘이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다시는 길르앗에 거하는 형제들과 싸우자고 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상대방을 의심하고 싸우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한편 르우벤과 갓 자손이 그 제단을 엣이라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이 제단은 여호아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습니다. 곧 증거의 단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 단을 보면서 후손들에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 민족의 참 신이시며,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 서로간의 오해로 인하여 전쟁까지 치를 뻔한 사건이 그들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서로간의 공동체 의식을 더욱 확고히 다짐으로서 더 깊은 형제애를 맛보게 된 것입니다.
요단강을 가운데 둔 두 집단이 함께 만족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화해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단강변에 단을 쌓은 형제들도 후손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신앙공동체를 잘 세워갈 목적으로 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그들의 결단이었습니다.
한편 화를 내고 조사단을 파견한 형제들은 그들대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전쟁도 불사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우상숭배에 빠진 형제를 구해내기 위해 열을 올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를 잘 세워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그들의 결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진심이 있으면 거의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욕심이나 집단이기적인 욕심이 숨어 있으면 화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갈등이 있을 경우 우리 마음의 동기가 정말 순수한 것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의 체면이나, 나의 유익이나, 나의 자존심 때문에 화를 내고 싸우고 있는지,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우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면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많은 갈등을 겪습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또 친구들 사이에서나 회사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오해도 많이 받습니다. 또 다른 사람을 오해할 때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말만 듣고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속단하는 것은 형제를 살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로 열린 마음으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면 풀리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셋째로 마음의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갈렙과 비느하스의 신앙을 본받읍시다
수 22:30-34 찬송 450장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과 광야생활, 그리고 가나안 땅 정복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한복판에서 당연 두드러진 인물은 모세와 여호수아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생활을 이끈 지도자였고,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 정복과 정복한 땅을 분배하는 일의 최선봉에 섰던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의 신앙과 열정, 강력한 영적 리더십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연구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앙을 닮으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비록 모세와 여호수아의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이스라엘 구원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신앙인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갈렙과 비느하스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영적 위기에 도래했을 때 자신을 희생해서 그 위기의 터널을 통과하게 했던 위대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의 비관적인 메시지에 맞서서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증거했습니다. 이 때문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셨다는 확신을 가집니다. 이처럼 그는 과연 믿음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이 있은 후 역사의 배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는 어느덧 가나안 땅 정복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로 우뚝 서 있었습니다. 갈렙이 다시 등장한 때는 이미 가나안 땅 정복전쟁을 상당부분 마친 상태에서 이제 노인이 되어버린 때였습니다. 당시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분배하는 사명을 받고 헌신하는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지파별로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고, 되도록 상대하기 쉬운 적들이 있는 곳에 거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갈렙은 가장 먼저 여호수아 앞에 가서 가장 강한 아낙자손이 살고 있는 산지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여호수아에게 힘을 실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몸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비록 여호수아에 이어 이인자의 자리에 있었지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후 아낙자손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피성의 문제로 성읍을 다시 내 놓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미련 없이 자신의 소유를 바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이러한 갈렙과 같은 믿음의 선조가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또 한 명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한 비느하스였습니다. 그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의 직전까지 다다르게 된 시기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 입성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영적인 나태함에 빠지게 되었고, 모압 여인들의 유혹에 넘어가 바알브올이라는 우상에 빠졌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큰 벌을 내리셨습니다.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목을 매달도록 했고, 바알브올에 가담한 자들을 모두 죽이게 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께 참회의 시간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지도자격인 시므리라는 자가 미디안 여인을 자기 진영으로 데리고 와서 자기 막사로 들어 가버린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바로 그 때 비느하스가 손에 창을 들고 직접 나서서 그들을 찔러 죽였습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내렸던 전염병이 멈추게 된 겁니다. 당시 비느하스는 엘르아살의 아들로 이스라엘 진영을 지키는 문지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면서까지 그 일을 행했던 것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이 일로 하나님이 분노하셨는지,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얼마나 탄식하며 안타까워 하셨는지 알았던 것입니다.
결국 이 일로 하나님은 그에게 평화의 언약을 주시겠다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비느하스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 목전에서 발생한 불순종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미디안을 정복하라는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거룩한 전쟁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그는 평범한 레위인에서 출발했지만, 군대의 유능한 지휘관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느하스가 전쟁만을 이끌었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후 제사장이 되어 제사장의 신분으로 요단동편지파와 요단서편지파 간의 오해로 야기된 상황에서 중재자로 나서는 역할도 감당합니다. 요단동편지파가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큰 제단을 쌓자, 이를 알게 된 서편지파는 혹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닌지, 그리고 본래 제사를 드려야 하는 장소가 아니라, 그들만 따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제단을 쌓은 것은 아닌지, 우려하면서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전쟁이라고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요단 서편지파는 우선 사실관계를 분명히 알 필요를 느끼고 대표들을 파견하게 되는데, 그 대표단의 수장이 비느하스였습니다. 그를 중심으로 요단서편 지파의 대표들은 요단 동편 지파들을 향해서 하나님을 떠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가 과거에 저질렀던 죄로 하나님이 심판하신 일을 상기시키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뜻을 돌이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요단서편의 땅 일부를 내놓을 수도 있다는 뜻까지 전했습니다.
그러자 요단 동편 지파 사람들은 이것은 완전한 오해이며, 오히려 우리의 후손들이 더욱 더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혹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요단서편지파 후손들이 자신들의 후손들을 배제할 것을 우려해서 이 제단을 통해서 요단동편과 서편지파가 모두 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임을 보여주는 표징으로 삼고자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제사장 비느하스와 그와 함께 한 지도자들이 이 말에 크게 안도하며 기뻐했고, 이 때 비느하스는 요단동편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 이는 너희가 이 죄를 여호와께 범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그리고는 다시 요단 서편 땅으로 돌아가 그곳의 백성들에게도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모두 이를 즐거워했고, 더 이상 요단 동편 지파들이 사는 땅에 쳐들어가서 그들을 멸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비느하스는 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이 분열의 위기에 놓였을 때 이를 수습하는 책임을 맡아 그 사명을 잘 감당했던 것입니다. 여기서는 거룩한 전쟁의 선봉에 섰던 그런 비느하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영적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민족 간의 화합과 연합을 통해 평화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로서 각자 맡은 사역이 있습니다. 그 사역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이를 위해서 헌신하며 함께 사역하는 자를 격려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그를 귀하게 여기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갈렙과 비느하스는 분명 성경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적절할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바탕에는 철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힘이 그들로 하여금 다른 형편과 상황에서도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데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갈렙과 비느하스와 같은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본받아서 더욱 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기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지파 반의 선택
여호수아 22:30-34 / 340장(통366)
1.한 시간관리 전문가가 투명한 유리 항아리에 큰 돌을 채워 넣고 수강생들에게 질문했다. “지금 이 항아리가 꽉 찼습니까?” 수강생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전문가는 다시 항아리에 자갈을 넣기 시작했고 같은 질문을 했다. 수강생들은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전문가가 항아리에 모래를 넣고 동일한 질문을 하자 수강생들은 확신 있는 목소리로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전문가는 자신이 보여준 실험이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인지 질문했다. 한 수강생이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짬을 내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하고픈 이야기는 큰 돌을 먼저 넣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넣으려 해도 넣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늘 바쁘게 살지만 열매가 없다면 내 삶의 우선순위를 정립해야 할 것이다. 인생의 우선순위를 정하게 되면, 나 자신을 지혜롭지 못한 결정들로부터 지키고, 옳은 방향을 찾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그곳에 이르도록 이끈다. 오늘 하루와 나의 남은 일생을 지혜롭고 복되게 살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생의 우선순위를 가르쳐 주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나의 인생의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2.여호수아 22장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정복전쟁을 마치고 가나안 동편으로 돌아간 이야기다. 이 두 지파 반은 여호수아로부터 칭찬과 축복을 받고 돌아갔다. ①모세가 명한 것을 다 지켰고(수22:2), ②가나안 정복 초에 내게 약속한대로 내 말에 순종하였고(수1:12-18, 수22:2), ③가나안 정복 전쟁 동안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고 끝까지 책임을 지켰다(수22:3). ④여호수아는 이들에게 복을 빌고 전리품을 주었다(수22:7-8). 이 두 지파 반은 모세와 약속한대로 가나안 정복전쟁에 마지막까지 참여하여 약속을 지켰다. 이들이 요단 동편 땅으로 돌아가면서 요단 언덕에 큰 제단을 쌓았다.이 일로 화가 난 요단 서편 이스라엘은 군대를 모아 요단 동편 두 지파 반과 싸우려고 하였다. 먼저 요단 서편 아홉 지파 반의 천부장 10명이 비느하스와 함께 길르앗 땅에 들어가 두 지파 반을 만나 왜 너희는 너희를 위해 또 다른 제단을 쌓았느냐고 추궁했다(수22:16). 너희는 우리가 출애굽 때 싯딤에서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고 그들의 신 바알브올을 섬겨 염병으로 이만 사천 명이 죽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수22:17, 민25장). 또 여리고성을 공격할 때 세라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을 취하여 아이성 전투에서 패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수22:20), 너희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냐?고 물었다. 지금 너희가 머문 소유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나님의 성막이 있는 우리에게로 건너와 우리 가운데 머물고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외에 다른 제단을 쌓지 말라고 하였다(수22:19). 이에 두 지파 반이 말하기를, ①우리가 제단을 쌓은 것은 여호와를 버림도 아니고, ②그 위에 번제나 소제나 화목제물을 드리려고 한 것이 아니고, ③후에 너희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너희와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여 우리 자손들에게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이 제단을 쌓았다고 하였다. ④이 제단은 모형으로 번제나 다른 제사를 위함이나 하나님을 버리려고 한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와 너희가 한 민족이고 한 하나님을 섬기는 족속임을 증거하기 위하여 쌓은 제단이라 하였다(수22:28). 이 말을 듣고 요단 서편 아홉 지파 반은 오해가 풀려 돌아갔고,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은 그 제단을 ‘엣’이라 불렀다. “우리 사이에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수22:34)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의 이야기는 역대상 5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르우벤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맏아들인데 그가 아버지 첩 빌하와 통간하여(대상5:1) 장자권을 요셉 자손에게 뺏기고, 통치권은 유다 자손에게 넘어갔다(대상5:1-2). 이 두 지파 반은 한때 하나님을 의뢰하고 부르짖으므로 하나님의 도움을 입어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대상5:20-21).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이방신을 섬겨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앗수르 왕 불에게 사로잡혀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차지한 땅을 떠나 이방 땅으로 끌려가 살게 되었다(대상5:26). 이 두 지파 반은 비옥한 땅에 거주하였지만 요단 서편 지파들에 비해 수리아(왕하10:32-33), 앗수르(대상5:26)의 침공을 더 많이 받았다. 두 지파 반은 최고로 좋은 땅으로 생각하고 욕심을 부리고 차지했지만(민32:2-5) 결국은 믿음도 잃고 목숨을 걸고 차지한 땅도 빼앗기고 말았다.
3. 두 지파 반은 가축이 많았다. 이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고, 늘리고, 가족들이 편안하게 거주하는데 있었다. 이들은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 정복하라고 하셨는지, 왜 그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었는지 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오직 눈에 보이는 풍요로움만을 보고 자신들의 위치를 생각하지도 않고 요단 동편 땅을 달라고 그곳에 머물겠다고 어린아이처럼 보채다가 모세에게 책망을 받기도 하였다(민32:7). 이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가나안 정복 전쟁에 끝까지 참여하여 여호수아로부터 칭찬과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존재 의미와 이유가 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막 보다 요단 동편 비옥한 땅이 더 중요하였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요단강가에 모형제단 ‘엣’을 세우고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증거하였지만 결국 형식에 그치고 말았다. 우선순위가 뒤바뀐 이들은 원했던 번영도 이루지 못하고, 다른 지파보다 더 많이 대적에게 시달리고 일찍이 망했다. 이 두 지파 반 이야기는 우선순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1)하나님의 뜻 보다 내 명철이 우선되면 복이 되지 못하고 화가 된다. 두 지파 반은 요단 서편보다 요단 동편이 훨씬 더 비옥하고 살기 좋다고 생각하고 욕심을 부려 구했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 지역이 훨씬 더 살기 좋은 땅이라고 생각하여 택하였지만 그 땅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땅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창13:10-13). 내 명철이 우선되어 하나님의 인도를 무시하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복이 되지 못하고 화가 된다(잠3:5-6).
2)내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과 사명에 있지 않으면 계속해서 그릇된 판단과 선택을 하게 된다. 두 지파 반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뜻과 주어진 사명에 있지 않았다. 오직 자신들의 재산과 가족의 안녕이 우선순위였다. 이들은 왜 하나님이 자신들을 애굽 종살이에서 건져 자유민이 되게 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는지를 잊었다. 사명을 잊었기에 육적인 것에 붙들리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사명을 잊었을 때 끝내 버림을 받고 말았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먹고 마시는 데 있지 않고 복의 근원으로의 사명 감당에 있다(마28:19). 사명 감당할 때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신다(마28:20).
3)내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 예배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 삶에서 멀어지게 되고 결국은 비옥한 땅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내 삶에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가짜 모형 ‘엣’을 허물고 성소를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내 집에 있는 ‘성구 성화’도 ‘엣’이 될 수 있다. 내 직분도 ‘엣’이 될 수 있다. 나의 작은 선행도 ‘엣’이 될 수 있다.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나와 직접 예배드리는 삶이 지속되도록, 내 삶에 우선순위가 되도록 붙잡아야 한다. 이것이 무너지게 되면 나머지 것들은 가짜가 되고 만다. 하나님의 뜻과 맡겨준 사명과 하나님 예배가 내 삶에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