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수미산이미지 원문보기 글쓴이: 수마제
신묘장구대다라니 산스크리트어 본
나모 라뜨나 뜨라야야
나마 아리아-아발로기떼슈와라야
보디쌋뜨와야
마하 쌋뜨와야 마하 까루니까야
옴 싸르와 바예슈 뜨라나 까라야
따스마이 나마하 끄리뜨와
이맘 아리아 아발로끼떼슈와라 쓰따밤
닐라깐타 나마 흐리다얌 아바르따이시야미
싸르와르타 싸다남 슈밤 아제양
싸르바 부따남 바바 마르가 비슈다깐
따디 야타
옴 알로께 알로까 마띠 로까띠끄란떼
헤헤 하레 마하 보디쌋뜨와
쓰마라 쓰마라 흐리다얀
꾸루 꾸루 까르망 싸다야 싸다야
두루 두루 비자얀떼 마하 비자얀떼
다라 다라 다렌드레슈와라
짤라 짤라 말라 비말라 아말라 묵떼
에히에히 로께슈와라
라가 비샹 비나샤야
드웨사 비샹 비나샤야
모하 잘라 비샹 비나샤야
훌루 훌루 말라 훌루 훌루
하레 빠드마 나바
싸라 싸라 씨리 씨리 쓰루 쓰루
부디야 부디야 보다야 보다야
마이뜨레야 닐라깐타
까마씨야 다르시남 쁘라흘라다야
마나하 쓰와하
씻다야 쓰와하 마하-씻다야 쓰와하
씻다-요게슈와라야 쓰와하
닐라깐타야 쓰와하
바라하 무카 씽하 무카야 쓰와하
빠드마-하쓰따야 쓰와하
짜끄라 육따야 쓰와하
샹카 삽다 니보다나야 쓰와하
마하 라꾸따 다라야 쓰와하
바마 쓰깐다 디샤 쓰티따
끄리슈나 지나야 쓰와하
비야그라 짜르마 니바싸나야 쓰와하
나모 라뜨나-뜨라야야
나마 아리아-아발로끼떼
슈와라야 쓰와하
----------------------
대비주의 공덕
송주(誦呪)란 주문(呪文)을
암송하는 것을 말한다.
주문은 곧 다라니(陀羅尼)를 가리킨다.
다라니(dharani)라는 말은 ‘
총지(總持)’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어원적으로는 ‘법을 마음에
새겨 잊지 않음’이라는 뜻이다.
또한 다라니를 만뜨라(mantra)
라고도 한다. 만뜨라를
‘진언(眞言)’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
허망하지 않은 언어’라는 뜻이다.
어원적으로는 ‘생각하는
도구’라는 말이다.
이 다라니는 신비한 주〔神呪〕,
은밀한 주문〔密呪〕, 밀언(密言),
밝은주문(明呪〕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초기경전에서 기복적인
주문을 외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진실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게 하는 진언,
즉 다라니를 지송하는 것은
율장(律藏)에서조차 권장하였다.
다라니 지송(持誦),
즉 송주는 대승불교 수행법
가운데 가장 많이 활용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한국의 선사(禪師) 가운데는
다라니 지송을 일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서산(西山, 1520~1604) 스님은
그의 저서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진언을 외우는 것은,
금생에 지은 업은 비교적 다스리기 쉬워
자기 힘으로도 고칠 수 있지만,
전생에 지은 업은
지워버리기 어려우므로 신비한
힘을 빌리려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서산 스님의 영향으로
많은 고승들이 선(禪) 수행에 앞서
다라니를 지송하여 번뇌 망상과
업장을 제거했다.
근세의 선지식 가운데 수월음관(水月音觀, 1855~1928) 스님과
용성진종(龍城震鍾, 1864~1940)
스님은 천수 다라니 지송으로
큰 깨달음을 이룬 분으로 유명하다.
대비주의 공덕
대비주(大悲呪)는 독송용
천수경에 나오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이 다라니를 지송하는 공덕에
대해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천수경 해석에 나오는
다라니 지송 공덕을 여기에
간추려 옮겨 놓는다.
대비주는 불가사의한 위력과
공덕을 가지고 있다.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암흑처와
삼악도(三惡途) 중생들이
이 다라니를 들으면
모두 고통을 여의게 되고,
보살로서 아직 초주(初住)에도 오르지
못한 사람이 이 경을 들으면 초
주는 물론 십주(十住)에까지
당장 뛰어 오르게 되고,
얼굴이 추예(醜穢)하고 병든
사람이 이 경을 읽으면
어진 의사와 좋은 약을 만나
묵은 병은 씻은 듯이 낫고,
새 몸은 금빛처럼 찬란하여
즉시 32상 80 종호를 갖추게 되어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귀의를 받을 수 있다.
만약 어떤 중생이 소원이
있어 3·7(21일)일 동안
깨끗이 계율을 지키고
이 다라니를 외우면 반드시
소원을 이루며,
그의 악업중죄가 모두 소멸되고
죽은 뒤에는 즉시
연화국토(蓮華國土)에 태어나서
다시는 태(胎)·난(卵)·습(濕)
·화(化)의 몸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물며 읽고 쓰는
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경에 의하면, 이 다라니를 받아
지닌 사람이 길을 가다가 바람을 쏘이면
그 몸이나 옷에 스친 바람이
다른 중생들 몸에 스쳐 지나가면
그 중생의 일체 중죄악업이 소멸되고
항상 부처님 곁에 태어나
법문을 듣게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광명을
갈무린 몸이니
모든 부처님들께서 항상
큰 지혜의 빛으로써
비추어 주는 까닭이다.
이 사람은 자비를 갈무린
몸이니 항상 다라니로써
일체 중생을 구제하여
보호하는 까닭이다.
이 사람은 두려움이 없는
몸을 갈무리고 있는 까닭이니
용과 하늘의 선신들이
항상 보호하기 때문이며,
이 사람은 묘한 말을 감춘
사람이니 입에서
항상 다라니의 음성이
끊어지지 않는 까닭이다.
이 사람은 약왕(藥王)을
감춘 몸이니
항상 다라니로써 중생의
병을 고치는 까닭이다.
이 사람은 신통을 감춘 몸이니
모든 불국토에 자재하게 되는
까닭이다.인도에서 시작된
붓다의 가르침〔불교〕은 크게
두 갈래의 전통으로 전승되었다.
하나는 인도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전해진 남방불교,
즉 상좌불교이고, 다른 하나는
북쪽으로 전해진 대승불교이다.
이와 같이 두 전통의 불교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하지만 현재의
전세계 불교도의 분포와
영향력을 고려해 볼 때,
상좌불교와 티베트불교 둘로
양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권인 중국·한국·일본의
불교가 세계 무대에서는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티베트불교도 넓은
의미의 대승불교에 속한다.
하지만 티베트불교는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외국인 특히 서양인들이
상좌불교 아니면 티베트불교에
귀의하는 이러한 양극화 현상은
단순한 교리와 실천하기 쉬운
수행법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반면 중국·한국
·일본의 불교는 교리와 실천법이
너무나 복잡 다단하다.
종파와 전통에 따라 의례와
수행법들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이방인이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반면 상좌불교와 티베트불교는
이론〔교리〕과 실천
〔수행법〕이 하나로
잘 정리되어 있다. 이를테면
상좌불교도의 주된
수행법은 위빠사나
(Vipasana, 觀法)이고,
티베트불교의 주된 수행법은
다라니 지송, 즉 송주(誦呪)이다.
누구나 쉽게 배워 실천할 수
있는 수행법을 갖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누구나 직접 실천해
보면 당장에 그 공덕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는 것이다.
지난 호에 이어 소개하는
송주의 공덕은 후자의
수행법에 속한다.
이번 호에서는 대비주와
능엄신주의 공덕에 대해 알아본다.
대비주의 공덕
대비주(大悲呪)는 독송용
천수경에 나오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이 다라니를 지송하는 공덕에
대해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천수경 해석에
나오는 다라니 지송 공덕을
여기에 간추려 옮겨 놓는다.
대비주는 불가사의한 위력과
공덕을 가지고 있다.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암흑처와 삼악도(三惡途)
중생들이 이 다라니를 들으면
모두 고통을 여의게 되고,
보살로서 아직 초주(初住)에도
오르지 못한 사람이 이 경을
들으면 초주는 물론 십주(十住)에
까지 당장 뛰어 오르게 되고,
얼굴이 추예(醜穢)하고
병든 사람이 이 경을 읽으면
어진 의사와 좋은 약을 만나
묵은 병은 씻은 듯이 낫고,
새 몸은 금빛처럼 찬란하여
즉시 32상 80 종호를 갖추게
되어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귀의를 받을 수 있다.
만약 어떤 중생이 소원이
있어 3·7(21일)일 동안
깨끗이 계율을 지키고
이 다라니를 외우면 반드시
소원을 이루며, 그의
악업중죄가 모두 소멸되고
죽은 뒤에는 즉시 연화국토
(蓮華國土)에 태어나서
다시는 태(胎)·난(卵)
·습(濕)·화(化)의 몸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물며 읽고 쓰는 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경에 의하면, 이 다라니를
받아 지닌 사람이 길을 가다가
바람을 쏘이면 그 몸이나 옷에
스친 바람이 다른 중생들
몸에 스쳐 지나가면
그 중생의 일체 중죄악업이
소멸되고 항상 부처님 곁에
태어나 법문을 듣게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광명을
갈무린 몸이니 모든 부처님
들께서 항상 큰 지혜의
빛으로써 비추어 주는 까닭이다.
이 사람은 자비를 갈무린 몸이니
항상 다라니로써 일체 중생을
구제하여 보호하는 까닭이다.
이 사람은 두려움이 없는 몸을
갈무리고 있는 까닭이니
용과 하늘의 선신들이 항상
보호하기 때문이며, 이 사람은
묘한 말을 감춘 사람이니
입에서 항상 다라니의
음성이 끊어지지 않는 까닭이다.
이 사람은 약왕(藥王)을
감춘 몸이니 항상 다라니로써
중생의 병을 고치는 까닭이다.
이 사람은 신통을 감춘 몸이니
모든 불국토에 자재하게 되는 까닭이다.
능엄신주의 공덕
수능엄경(首楞嚴經) 제7권에
부처님께서 대불정능엄신주
(大佛頂楞嚴神呪)를 설하시고
아난에게 말씀하시었다.
“이 부처님의 정수리 광명이
모여 이루어진 비밀한 주문은
시방의 온갖 부처님을 내는
것이다. 시방여래가 이 주문으로
인하여 위없는 삼먁삼보리를 이룬다.
시방여래가 이 주문으로 말
미암아 마군(魔軍)을 항복 받고
외도(外道)를 이기며,
법문을 설하고, 수기를 주며,
중생을 제도하고, 불법을
유촉하며, 계율을 청정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주문의 공덕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치지 않고
항하사겁이 지나도록
말하여도 다할 수 없다.
이 주문을 여래의 정수리라고도
이름한다. 너희 배우는 사람들이
윤회를 벗어나는 도를 얻고자
하면서도 이 주문을 외우지
아니하고 몸과 마음에
장애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
만일 여러 세계 여러 나라에
사는 중생들이 나무껍질이나
잎이나 종이 혹은 천에
이 주문을 써서 간직할 것이니,
설사 외울 수 없거든 몸에 갖거나
방안에 두기만 하여도 독이
이 사람을 해치지 못한다.
이 주문은 금강장왕 보살의
종족들이 밤낮으로 따라다니면서
보호하기 때문에 어떤 중생이
삼매가 아닌 산란한 때일지라도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이 주문을 외우면, 이러한
금강장왕들이 항상
이 사람을 보호할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보리 마음을 결정한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이 주문을 읽거나
외우거나 몸에 간직하면
이 사람은 처음
보리심을 낼 때부터 부처님
몸을 얻을 때까지 세세생생
나쁜 곳에 나지 아니하며,
천하고 가난한 곳에도 태어나지
않는다. 계를 파한 사람은
계를 청정하게 하며,
계를 얻지 못한 이는
계를 얻게 하며, 정진하지
못한 이는 정진하게 하며,
지혜가 없는 이는 지혜를
얻게 하며, 재계를 가지지
못하는 이는 재계를 이루게 한다.
어떤 중생이 한량없는
옛적으로부터 지은 죄업을
이때까지 한 번도 참회하지
못하였더라도 이 주문을 읽거나
외우거나 써서 가지면,
모든 죄업이 없어질 것이며,
오래지 않아서 무생법인을 얻게 된다.
어떤 사람이 소원이 있어
지극한 정성으로 이 주문을
외우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며,
나라나 지방에 싸움이나
기근이나 질병의 재앙이
있더라도 그 지방에 사는
중생들로 하여금 이 주문을
모시거나 예배하게 하면,
온갖 재앙이 모두 소멸하게 된다.”
특히 이 능엄신주는 입적하신
성철 스님께서 일생동안
지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성철스님 문하에서는
조석으로 이 능엄신주를
주력하고 있다. 그들은
체험을 통해 이 능엄신주의
불가사의한 위신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의 본심,
대비주 공덕
신묘장구대다라니는
관세음보살님의 지혜와
자비와 위신력과 과거의 행적,
그리고 관세음보살님의 여러가지
모습을 담은 (천수경)의 핵심입니다.
동시에 대다라니는
관세음보살께서 증득하신
우주 대 진리의 결정체이기도 합니다.
범어로 된 이 다라니는
능히 우리말로 풀이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옛 전통에 따라
구체적인 해석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뜻을 풀이하면 읽는 이가
갖가지 생각에 휩싸여
오히려 대다라니의 신묘한 힘을
그대로 받아 들이지
못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로 신묘장구대다라니의
힘은 불가사의 합니다.
수년 전, 한 TV 방송국에서는
신묘장구대다라니 속에
신비로운 힘이 간직되어 있는지를
시험한 적이 있습니다.
한 그릇의 물을 컵 두 개에 옮겨 담은 뒤,
한 컵은 그대로 두고
다른 한 컵을 향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몇 편 읽은 다음,
두 컵의 물을 수질검사하여
비교한 것입니다.
과연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운 컵의 물은
우리 몸에 훨씬 좋은
성분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실로 신묘장구대다라니의 신묘한 힘은
물의 성분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불과 3% 정도밖에 쓰지 못하고 있는
6백억 개나 되는 뇌세포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어떠한 불치병도 치유할 수 있고
어떠한 불행도 행복으로
바꾸어 놓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는가?
그것은 신묘장구대다라니의
파장 때문입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의 파장이
무한능력을 지닌
우리 마음자리의 파장과 일치하여
그 무한 능력을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그럼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어떤 파장을 띠고 있는가?
완전한 언어인 신묘장구대다라니는
부드럽다 거칠다, 밉다 곱다,
좋다 싫다는 등의
상대성을 떠난 언어요,
자비사상과 평등사상으로
가득한 마음의 언어입니다.
곧 관세음보살과 '나' 본연의
주인공인 마음의 세계를
범자로 표현해 놓은 것이 바로
이 신묘장구대다라니인 것입니다.
실로 이 다라니는 인간의
언어나 문자가 아닙니다.
우주의 대진리를 글자로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주의 파장을 이용하고
지수화풍 등의 음파를 이용하여
대 우주의 마음 깊은 곳에 간직된
참된 진리의 법문을 표출시킨
것이 다라니인 것입니다.
사람의 입으로 하는 말은
그 언어를 익힌 사람만이 알아듣지만,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 언어는
형상이 있는 세계나 형상이 없는 세계에
두루 다 통하는 공통의 언어입니다.
마음의 언어는 이곳과 저곳,
부처님의 세계와 중생계에
두루 다 통하는 언어인 것입니다.
이처럼 다라니는
어디에서나 다 통하는
'언어 이전의 마음의 언어'이기 때문에,
우리의 근본 마음자리는
이 다라니를 알아 듣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워
우리의 근본 마음자리를 깨닫고
관세음보살의 본심과
대우주의 진리를 체득해야 합니다.
이상의 글은 (천수경과 천수신앙)
이라는 혜국스님의 책에서
옮겨 온 것입니다.
이번 조계종단에서 처음으로
출간하여 봉정한
'간화선'이라는 책의 편찬위원장
이셨던 혜국스님은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
수행에 대해
특히 많이 강조하신 선사 스님
가운데 한 분 이십니다.
혜국 스님의 말씀처럼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인간의
언어를 뛰어넘은
언어 이전의 마음자리를 바로
보게 해 주는 언어이자
대 우주의 진리와 관세음보살의
본심이 고스란히 담긴
소리의 파동이자 울림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기관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직 외부에서 오는 자극적인
감각에만 많이 이끌렸기 때문에
우리 내면 그것도 아주 깊은 곳에서
은은하고도 평화롭고 깊게
울리는 그 대비주의 파동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감각으로 육감으로
느끼지 못한다고
그것이 아무런 소용도 없는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대비주를
매일같이 독송하고 정진하고 있지만
도무지 잘 하고 있는 것인지,
대비주를 독송하니까 더
좋아지는 것이 있는지,
대비주의 공덕을 받고 있기는 한 건지
대비주 독송의 울림이
내 안의 본심을 일깨우고 있기는 한 건지
도대체 직접적으로
느끼지를 못할 것입니다.
불성이라는 본심 자리에서의 울림을
어찌 우리가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직접적으로 대비주의
공덕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대비주를 금방 포기하려 들거나,
대비주 수행에 대한 신심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에게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대비주, 신묘장구대다라니에 대한
그 수행 방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보니까 벌써 3000독을
끝내고 4000독을 향해
가시는 분도 계시고,
아직 1000독 수준에서
왔다 갔다 하고 계시는
분들도 계시는 듯 한데요,
아무래도 좋습니다.
숫자는 어디까지나
방편이라고 했습니다.
대비주라는 이 큰 공부를
하는 사람이
숫자라는 방편에 휘둘린다면
한참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얼마 하지 못하신 분들도 좋고,
아직 시작도 못 하신 분들도 좋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다면
바로 그 시작이 곧 1만독의
회향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초발심시변정각이란 말처럼
처음 낸 발심의 마음이
곧 정각을 이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들 보다는 조금 늦더라도
아직 대비주와 인연 맺지 못한,
또 아직 수행과 인연 짓지
못한 수많은 분들에 비한다면
훨씬 더 앞서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마음도 근원이 아닙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위안
삼으며 그래도 낫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은
곧 나보다 더 많이
한 사람을 보며 열등감을 느끼는 것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교'라는
이 자체를 놓아버리세요.
수행에는 비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대비주 100독만 가지고도
당장에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고,
대비주 100만독 그 이상을 하고도
여전히 중생계의 흐름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비교를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비교와 분별, 나뉨 자체를
버려 버리는 공부입니다.
제가 대비주 공부를 하면서 꾸준히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를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방편으로 대비주를 잡고 공부를 하면서
도리어 대비주라는 방편에
걸려 넘어지지 말라는 말이고,
또한 대비주 독송 횟수에
걸려 넘어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대비주 독송에 대한 중요성과
밝은 공부인 이유를 말씀드리고 있지만,
저는 한 번도 대비주가 가장
좋은 수행법이라고
단정짓지 않았습니다.
그렇듯 대비주라는 뗏목도
목적지에 가면
턱 놓아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배를 타고 가는 수행자가
바닷가의 한 가운데에서
뗏목을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대비주 1만독을 시작하셨는데요,
대비주라는 뗏목을 타고
바다 한 가운데까지 가고 있는 사람이
힘들다고 지루하다고 하기 싫다고
대비주를 그만둔다면
바다 한 가운데서 타고 있는
뗏목을 버리는 것과
어찌 다르지 않겠습니까.
이제까지 잘 했거나 못 했거나
지금 이 자리에서 다
놓아버리시기 바랍니다.
잘 했던 사람도 잘 했다는
생각을 놓아버리고,
내가 대비주 수행을 잘 하고
있다는 생각도 놓아버리고,
남들보다 앞서고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다 놓아버리고
오직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못 했다는 생각도
다 놓아버릴 일입니다.
다만 대비주라는 이 뗏목에
어차피 승선했으니
이제는 다른 뗏목이나 더
좋은 배나 고속정을 타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말고,
다른 곁눈질도 할 것 없이
오직 대비주라는 뗏목에 의지해
다만 앞으로 묵묵히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대비주 수행자 도반님들.
수행자 여러분들의 수행의 길에
밝은 부처님의 광명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대비주 공덕문)
대비주 수행이 업장을
녹여줍니다.
대비주 수행이 삶을
평화롭게 합니다.
대비주 수행이 나를
깨어있게 만듭니다.
대비주 수행이 이 우주를 밝혀줍니다.
대비주 수행이 좋은
인연을 가꾸어 줍니다.
대비주 수행이 잡념과
번뇌를 없애 줍니다.
대비주 수행이 미래를 밝게 만듧니다.
대비주 수행이 집착과
욕심을 비우도록 이끌어 줍니다.
대비주 수행이 내 몸의 모든
세포들을 생기롭게 일깨워 줍니다.
대비주 수행이 내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아 줍니다.
대비주 수행이 마음의
본성을 찾게 해 줍니다.
대비주 수행이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저자가 주문을 믿고 지니고
독송한지 비록 오래되지
않았어도 2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다.
4년전 내가 주문을 독송할
때도 한건의 기적이 발생하였다.
대비주는 내가 항상 수행하고
독송하는 것이고,
십소주(十小呪)도 내가 항상 읽는 것이고,
밀교의 일자금륜주(一字金輪呪)와
변정토주(變淨土呪)도
내가 수행하고 독송하는 주문이었다.
그날 나는 자신의 법당에서
조용히 여러 불보살을 예배한 후
합장하고 좌정하여
대비주를 독송하기 시작하였고,
일곱번 독송한 후 다시
일자금륜주를 한번 독송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난 듯하고 벼락소리와 함께
나의 몸과 마음은 점점 허공
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러한 감각은 이미 나의
몸과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망각한 것이다.
그러한 후 알 수 없는 시간이
경과하고 입으로 다시
일자금륜주를 독송하자 귀에서
은은한 소리가 들려오고
눈을 뜨자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눈앞에 있는
분이 바로 금강좌에 앉아 있는
본사(本師) 석가모니불 이었다.
석가모니의 법신은 구름에
닿도록 매우 거대하였고 상단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덮여 있고,
몸 전체의 땀구멍에서 금빛이
발산되고 그 형상은 매우 장엄하였다.
불조의 주위에는 하늘의
수호신이 있었고,
그 중에서 내가 제일 뚜렷이
알아볼 수 있는 분이
묘음(妙音)보살 이었고,
이 묘음보살은 바로 수시로
나타나셔서 나에게
주문과 표준음을 가르쳐준 보살이었다.
그외 궁중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비천신이 가득차 있고,
나는 바로 불조님 앞에서
무릅 꿇고 앉아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마음 속으로
나는 원래 집안의 법당에
앉아 있었는데
어찌 돌연히 부처님이
거주하고 있는 불국토에
왔을까라고 생각하였다.
석가모니불은 약간의 미소를
띠면서 불문의 음성으로 말하였다.
"진공의 법성은 허공과 같고
법보(法寶)에 상주하면
헤아리기가 어렵다.
일심으로 불문의 법을 따라
귀의의 예를 올려라."
그리하여 나는 내심으로
매우 환희하였고 마음속으로
말할 수 없이 흥분하였다.
이어서 나는 부처님에
대하여 8배의 예를 하고,
부처님의 주위를 세번 돌았고,
모든 것을 장엄하고 엄숙하게 행하였다.
예배를 끝낸후 나는 다시
불조 앞에 무릅 꿇고 앉았고,
석가모니불은 다시 불문의
음성으로 말하였다.
"예를 행하였으면 예절의
본성이 공허함을 알게
되고 감응으로 연결된
교감은 헤아리기 어렵다.
내 진리의 본질은 하늘의
구슬과 같이 당신의 불법주문을
그 속에 나타나도록 한다."
그러한 후 나는 다시
가슴 앞에다 합장하여
불조에게 절을 3배 하였고,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은
사라졌고 나는 다시 집안의
법당에 앉아 있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마음 속으로
깊이 생각한 바,
이는 불조께서 나에게
전해준 독려와 계시임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3년전 나는
매우 많은 비방과 고난을 겪었다.
적당치 못한 다른 도가
나를 삼키려는 외에,
심지어 불문중에 아집심이
강한 수도자들도 고집을 부려서
나를 배척하려고 하였다.
사실 내가 영학(靈學)을 연구
,선양하는 것에는 아무런 계략도
없고 명예를 위한 것도 아니다.
대중들에게서 노여움을 받을
것을 뻔이 알면서 어찌
명예를 얻을 수 있으며,
또한 문을 걸어 잠그고 멀리
이국타향으로 가는데
어찌 이익을 취할 수 있는가?
나는 단지 의미와 해석을
완전하게 표현하여
출세(出世;불보살이 세계에
출현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의
사실을 알리고,
인과를 설명하고, 진리를
말하고, 본성을 기술한 것 뿐이었다.
즉 수많은 중생이 제도받기를
소망하고, 무수한 번뇌를
끊어주기를 소망하고,
무궁무진한 법문을
깨닫기를 소망하고,
무상(無上)의 불도가
소원을 이룩해줄 것을
희망하였던것 뿐이었다.
나는 나의 제자들에게
관음대비원만주(觀音大悲圓滿呪)를
모두다 외우고
독송하기를 원하였다.
대비주는 많은 죄장(罪障)을
제거시킬 수
있으므로 진심으로 독송하면
무궁무진한 공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법문을 지니고 믿고
독송하는 것이 보기에는
간단하지만 사실 그리 쉽지 않다.
먼저 변함 없는 마음을
갖추어 매일매일 일생일세
동안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주문의 발음은 필히 정확해야
하므로 고명하신 법사(法師)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주문을 지니고 믿고
독송할 때에는 소원이
있어야 그 공적과 행적이
있게 되므로 필히
소원을 빌어야 하고,
이 모든 것들은 상호간의
인과로 이루어 진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