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
지난 금요일 저희 식구들을 데리고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였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이 스쳐지날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감추기 위해 손으로
닦아냈습니다...
그 당시 부끄러운 행동이 기억에 떠올라서.....+
영화관람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들과 딸이 " 아빠는 그때 뭐했어~~?" 라고 물어봅니다.
애들이 커가면서
저에게 5.18에 대해서 물어보고, 제가 무엇을 했는지 물어볼때에는
일반적인 이야기로 설명을 매듭지었습니다.
저희 아이들에게 상황설명을 해도 믿기 어려울 일들이라 애써
상황를 설명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날은 집에 오는길에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응, 그 때 아빠는 대학생이었는데 (전남대학교 2학년)~~~"
당시 저는 대학방송국 지자로 활동하였습니다...
10.26 이후 그 다음해 80년 3월 초부터 ,
학교 방송국 기자로 5.18일 발생하는 그 날까지 시위현장을 뛰어다녔죠.
80년 5월 초부터는 취재때문에 귀가도 하지 않은채 현장에 참여하면서
기록을 하였습니다.
대학캠퍼스에서, 도청앞광장에서....하나 하나 빠짐없이 참여했기에 더더욱
기억에 남습니다...
5월17일 저녁,
그날은 평상시와 다른 느낌을 가졌습니다.
군부가 진압할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서둘러 10일만에 귀가했습니다.
5월 18일 아침 10시쯤,
10일간의 피로에 늦잠을 자고 있는데, 조카가 저를 깨우더군요.
지금 시내에서는 난리인데 아직까지 잠을 자고 있냐고...
그말을 듣고 시내로 달려갔습니다...
5.18일 10시 ~ 오후 5시까지...
영화에서 공수부대 의 한장면을 연상하면 됩니다.
쫒고 쫒기고,,
극장안으로 쫒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치 도망다니는 개를 잡듯이,,,,
금남로에서 장동로터리를 지나,,,
공수부대와 맞닥치는 순간
저는 시내 중심가 가까운
제 친구집으로 도망가다 죄없는 제 친구마저 잡혀버렸습니다...
영화에서 시민 학생 할것없이 잡아서 도로 주변에 엎드리게하고
몽둥이로 온몸을 난도질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지금도 그것을 이겨냈던 제 몸이 믿기질 않습니다.
저는 머리를 다치지 않았던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5월 18일 저녁.....
그날 잡혔서 어디론가 실려갔습니다.
조서를 작성하고 또 어디론가 이동,,,
트럭에 싣고 고개를 못들게 하니 방향을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CAC사령부 감방이었습니다(군부대 감방).
5월 21일 오후
CAC 사령부 감방이 부족했는지라
기존에 먼저 들어온 사람들을 석방되었습니다.
광주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모두 차단되어,
갈수 있는 길은 오직 시외(나주)입니다.....
5월 21일 저녁
컴컴한 길을 걷다가 집이 보이기에
아무 집에나 들어가 도와줄것을 요청
(영화의 나주댁에서 묘사하는 것과 비슷한 장면)
그 시골집 아주머님께 사정이야기 하고 하룻밤 의지 하였습니다.
밤새도록 헬리콥터 떠도는 소리와 나흘간의 정신적 공황으로
골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하루를 지냈습니다...^^*
그 다음날
우연하게 시민군(?)으로 무장한 트럭에 합류하고
광주 소식을 조금이라도 알게되었습니다.
광주로 가고 싶었도
광주로 진입하는 모든 길이 차단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무장한 트럭을 타고 돌격대를 선발해서 시내로 진입하는 차량에 저는 올랐 탓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총을 들었습니다...)
칼빈총 몇자루로 기관총으로 무장한 공수부대 저지선을 뚫는다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달걀로 바위치는 격이라 작전을 보류하고 헤어졌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정말 하늘이 노랗다는 말이 맞습니다.
이후 저는 남쪽으로 남쪽으로 걸어서 친구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광주에는 모든 통신수단이 차단되어 제 소식을 모르는 부모님께서는
저를 찾기 위해 도청앞 상무관(영화- 관이 널려있는 장면)에서
혹시나 하고 저의 주검을 찾기 위해 며칠동안을 돌아 다녔다군요.
또다른 저의 친구는 저의 소식을 듣고 도청앞으로 달려가서 시민군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잊어버렸는데,
갑자기 화려한 휴가가 개봉되다보니 주절 거리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광주의 진상을 안다기 보다는
글을 쓰는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영화에서 처럼,,,
신애(20대 여성)의 방송을 듣고 도청으로 도청으로 많은 시민들이 달려갔습니다.
아마 시내에 있었던 사람들도 이 영화를 본다면,
참여하지 못한것에 대한 죄책감이 더 크게 느낄 것입니다..
저 역시 시내 돌파를 포기하고 시외로 빠져 나간 것이
마음 한구석에 죄책감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때 산화한 5월 영령들에 대해 부끄러움과,
기억하고 싶지 않는 그 순간 순간의 고통이 떠올라
매년 광주의 5월에는 애써 마음을 피합니다...
첫댓글 오늘 점심 매운탕 먹으러 우리팀이 20여명 갔을 때 이 영화 얘기 나오더라구요. 구단님이 또 얘기하시네요. 간접체험하고 갑니다. 그 때 살아 계신 덕택에 재테크에 많은 도움을 주시네요.
당시 구단님의 행동은 부끄러운 행동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행하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의 한 켠이 힘드실 수도 있지만, 그 시절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을지 저로써는 감히 짐작이 되질 않습니다. 아직도 마음으로 부터,반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게 문제가 아닌가요? 힘내세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철학있는 보험구단님답네요... 지금도 좋은 일 많이 하시지만 앞으로도 좋은 일 많이 하실겁니다...
보험구단님 보셨군요?전 지금 10시 30분꺼 끊어놓고 기다리는 시간중 피씨방왔다가 카페 잠시 들렀습니다. 휴지 왕창들고 가려구요...
보험구단님 글 읽으니 어렴풋이나마 그때 상황이 그려지는군여...저는 내일 저녁에 관람하러 가려고 합니다..많은 사람이 보고 기억하는 날이 되었으면 해여...다시는 그런일이 벌어지지 않도록이여...
구단님은 용기 있으신 분이세요. 전 그 당시 중학생이었고, 광주와 떨어져 있어 그 당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고 살다가, 대학에 들어가 참상을 알게 되었어요. 그 때부터 제 인생에 있어 '광주민주화운동'은 여러모로 영향을 주고 있는 역사가 되었어요. 저도 남편이랑 이 영화를 이틀 전에 관람했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신애가 지프차에서 외쳤던 "광주를 잊지 말아 주세요."라는 외침이 얼마나 찡하게 다가오던지, 가슴 먹먹한 아픔들이 치유도 되기 전에, 올 대선에서 '광주'와 무관하게 아니 '광주'를 철저히 외면하고 살았던 이들이 힘을 얻어 우리 역사의 바늘을 거꾸로 돌릴까 정말 걱정되어요. 그런 일은 절대 없어야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