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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인의 역모, 인조반정
1623년 조선 왕조사의 가장 커다란 오점으로 기록될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 15년 3월 이귀, 김규, 김자점, 최명길, 이괄, 이서, 신경진 등 눌려 지내던 서인들은 북인들의 폐모사건을 명분으로 삼아 능양군을 추대하여 반정을 일으켰다.
1,000명 정도 동원된 반정의 주모자는 김류와 이귀였고, 훈련대장 이흥립이 반정군에 가담함으로써 반정은 싱겁게 성공했다.
사실 이건 반정이 아니라 역모였다. 모처럼 한 번 성공한 역모의 주인공들이 하필이면 썩어빠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조선을 위해 정말 아쉽다.
이 역모로 광해군이 폐위됨으로써 조선은 회생할 수 있는 기회를 또 한 번 놓치게 되었다.
반정 다음 날 박정길, 이위경, 한찬남 등 대북파의 인물들이 저잣거리에서 처형되었으며, 박승종은 아들과 도망치다가 스스로 목을 매었다.
이이첨도 도망가다 잡혀 죽었고, 김개똥(김개시)과 정인홍도 처형되었다.
이로써 광해군을 떠받치던 대북은 전멸하고 말았다.
선조의 서손 능양군은 선조와 후궁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원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중종이 반정 때 허수아비 노릇을 한 것에 반해 능양군은 친병을 이끌고 반정의 주도세력으로 참가했다. 인조가 반정에 적극 참여한 것은 동생 능창군이 역모로 몰려 광해군에게 처형당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능창군은 무예에 능하고 신망도 높아 광해군에게 찍혀 있다가, 역모사건이 터지자 이에 연루되어 제거당한 것이었다.인조는 당시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역부족이었고, 그 바람에 실의에 빠진 정원군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더구나 정원군 가족이 사는 집터가 '왕의 기운이 서린 곳' 이라는 말을 듣고 그 집안을 풍비박산을 내니 인조가 광해군에게 앙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린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반정의 명분이었다. 반정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덕을 본 것은 눈꼽 만치도 없었으며, 국가적으로는 치욕적인 삼전도 항복을 불러왔다.
서인들의 반정 명분을 보자!
첫째, 배은망덕하여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이것은 광해군이 명과 청 사이 에서 중립외교를 펼친 것이 죄악이란 의미이다.
그래서 주제파악도 못하고 주접을 떤 서인정권의 친명배금 정책의 결과가 결국 저희들이 받들어 왕으로 모신 인조로 하여금 삼전도에 나아가 오랑캐의 왕 청 태종에게 세번 절을 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부딪치는 '삼배구고두'의 수모를 겪게하고 항복하는 치욕을 자초했다.
둘째,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궁궐을 지었다.
광해군은 왕권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하여 조일전쟁 때 불타버린 창덕궁, 창경궁을 재건하려 한 것이지만, 궁궐 건축 욕구가 지나친 것은 사실이었다.
셋째, 폐모살제
즉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했다.
궁중에서 왕권의 획득 또는 찬탈을 위해 형제끼리 죽고 죽이는 것은 어느 왕조에서나 흔한 일이다. 글쎄 어머니를 폐했다고 하는데 죽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않은가?
앞에 열거한 명분 중에서 말이 되는 것은 궁궐 건축 뿐이었다. 즉 인조반정은 광해군이 궁궐을 건축했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결론이다. 아니, 왕이 집 짓는 데 돈 좀 썼기로서니 그것 때문에 반정을 일으켜?
사실은 그게 아니고 인조반정은 광해군의 개혁으로 기득권의 상당부분을 상실하게 된 일부 기득권층과 찬밥이던 서인 세력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역모였다. 광해군은 조선에서 몇 안되는 밥값을 한 왕이었고, 반정으로 즉위한 인조보다 백 배나 괜찮은 왕이었다.
서인들은 정권은 잡은 후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당시 명망이 높았던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추대하고 서인과 남인의 연합 정권을 탄생시켰다.
인조반정으로 죽거나 유배된 사람은 모두 350여 명에 달하며, 이외에도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적극 실천했던 평안도 관찰사 박엽과 의주 부윤 정준도 체포되어 역적이라는 죄명으로 처형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서궁 유폐에서 풀려난 인목대비는 그동안 광해군에게 너무 이를 갈아서 이가 반쯤 갈려나간 상태로,치과 치료가 급하게 필요할 때였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분노를 표출했다.
"광해군은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참아온 지 이미 오랜 터라 내가 친히 그의 목을 잘라 망령에게 제사지내고 싶다. 10여 년 동안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날을 기다린 것이다. 쾌히 원수를 갚고 싶다."
- 인조실록 -
아마 인목대비가 이렇게 심정을 토로하는 동안 하늘에서는 하얀 서리가 내렸을 것이다. 이렇게 하늘을 찌르는 듯한 인목대비의 분노 하에서 광해군은 신하들의 만류로 겨우 목숨을 건지고 귀양길에 올랐다.
인조는 이름은 멀쩡하지만 실상은 질투심이 많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선조와 맞먹는 소인배였다.
청에 볼모로 잡혀 있다가 명이 망한 후 돌아온 소현세자가 청과 조선의 통로 역할을 하면서 양국의 갈등을 조정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여 청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자 이를 질투하여 자신의 장남인 소현 세자를 독살했고, 며느리인 세자빈에게도 사약을 내려 죽여버렸다.
그리고 손자들인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보내서 두 손자가 풍토병으로 죽도록 방치했다.
조선 왕들 중 형제를 죽인 태종이나 아들을 죽인 영조 같은 임금은 있었으나,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시원하게 싹쓸이 한 왕은 인조뿐이었다.
인조의 '인' 자는 '어질인(仁) ' 자가 아니고 '잔인할 인(殘忍)' 자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듯!
이 멍한 데다 잔인하기 짝이 없었던 인조는 재위 27년 동안 밥만 축내면서 두 번의 전쟁을 자초한 후 아무 치적도 없이 그냥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