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 이순신의 백의종군에서부터 노량해전 전투에서 전사하기까지 난중일기, 선조실록, 징비록, 난중잡록, 장계 등을 바탕으로 써여진 소설로 이순신의 적은 일본 왜구 뿐만 아니라 명지원군도 적?이었고, 왜와 같이 싸우는 조선군 내에도 적?이 있었고, 조선 조정 및 선조임금도 이순신의 적?이었다. TV 드라마, 영화, 위인전에서 본 이순신과는 또다른 면이 있으며, 비록 칼로 목을 베는 적이지만 무사 무인으로서 적을 인정하는 인간 이순신, 조선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장수로서의 탄성, 조정과 선조 임금의 종묘사직과 왕권 보전 사이에서 갈등하며 죽음을 찾아야 하는 고뇌 등 소설에서는 다른 어떤 곳에서 봤던 이순신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이순신의 칼은 왜적과 조선군 뒤에 숨어서 싸우지는 않고 백성들만 괴롭히는 명군, 내부 적에게는 징징징 울지만 백성들을 위해서는 노래를 한다.
** 이순신 연보(1545년 서울 출생, 아산 외가에서 성장)
- 1576년 무과급제 종 8품 함경도 국경수비 장교(32세)
- 1580년 고흥 발포진 수군만호(종 4품, 36세)
- 1586년 함경도 조산보 만호(종 4품, 42세)
- 1590년 정읍현감(종 6품, 46세)
- 1591년 전라 좌수사(정3품, 47세)
- 1592년 4월 13일(48세) 10만 일본군 부산 상륙, 5월 2일 서울 함락, 7월 평양 함락
선조파천 : 서울출발(1592년 4월30일) - 평양도착(5월 7일) - 의주도착(6월 22일)
- 1593년 7월 14일 한산도로 수영 옮김(49세)
- 1597년 2월 26일 한산 통제역에서 체포(54세, 군공 날조와 임금 기만 및 조정 능멸죄, 국문)
- 1597년 4월 1일 백의종군(죽음 직전에 일본 수군 대승으로 적의 대대적 침공이 이순신을 살렸다)
-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
** 육군 종8품 33살 이순신은 함경도 압록강가 삼수에서 여진족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 때 이순신을 꼭 닮은 셋째 아들 이면을 낳았다. 이 시기에 함경도 국경과 남해안의 수군진을 이삼년 도리로 옮겨 다녔다. 여전히 종 8품으로 근무중 36살 때 종4품 수군 만호가 되어 남해안 발포진에 부임했을 때 판옥선 2척과 허름한 협선 10척이 전부였다.
** 서울의 적들은 종묘를 불질러 마구간을 차렸다. 임금은 버리고 떠난 종묘를 향해 남쪽으로 울었고, 북경을 향해 울었고, 해 뜨는 동쪽을 향해 울었다. 임금은 울음과 언어로서 전쟁을 하고 있었다. 언어와 울음이 임금의 권력이었고 , 언어와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은 보이지 않았다. 임금의 전쟁과 나의 전쟁은 크게 달랐다.
** 나는 명랑 수로에서 죽고 싶지 않다. 나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아무런 은총도 없는 자리에서 죽고 싶다.
** 나를 죽이면 나를 살릴 수 없기 때문에 임금은 나를 풀어준 것 같았다. 나를 살려준 것은 결국 적이었다. 살아서 , 나는 나를 살려준 적 앞으로 나아 간다. 칼로 적을 겨눌 때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에 동시에 겨눈다. 칼은 겨누지 않는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 칼로 찰나를 겨눌 때 칼은 칼날에 닿지 않은, 닥쳐올 모든 찰나들을 겨눈다.
**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바다에서, 삶은 늘 죽음을 거스러고 죽음을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가능했다. 내어줄 것은 목숨 뿐이었으므로 나는 목숨을 내어줄 수 없다. 명과 일본 그리고 조선 조정 전체가 나의 군사적 적이라면 나의 함대는 수영을 이탈하거나 나의 죽음은 내가 수락할 수 없는 방식으로는 오지 못할 것이다. 나도, 조정도, 도원수부도 전쟁 전체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내가 살 길은 돌아가는 적을 바다에서 부수는 수밖에 없다. 그 마지막 바다는 그 두 개의 국면이 포개지는 노량앞 바다이다. 내 죽음의 환영은 물결 높은 바다 노을 속에서 어른거린다. 적탄에 죽는 나의 죽음은 자연사일 것이다.
** 이순신 검명 :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 :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로다!
** 노획한 적의 칼 : 이렇게 쓰여 있다. "칼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에 젖는구나. 청춘의 날들은 흩어져 가고 , 널린 백골 위에 벚꽃 꽃잎만 날리네." 비록 벤 적의 칼이지만 이들의 시심은 인정한다. 적의 칼은 조선군에 맞지 않아 그대로 사용치 않고 녹여 쇳물로 총통을 만들어 재활용 한다. 이 때 노획한 조총이 많은데 병기로 개발하였다면 종묘사직이 위태로웠을까? 그랬다면 병자호란의 치욕과 불행한 현대사는 어떻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