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ng du nach dem Glucke jagst, Bist du nicht reif zum Glucklichsein, Und ware alles Liebste dein. Solang du um Verlornes klagst Und Ziele hast und rastlos bist, Weiβt du noch nicht, was Friede ist. Erst wenn du jedem Wunsch entsagst, Nicht Ziel mehr noch Begehren kennst, Das Gluck nicht mehr mit Namen nennst, Dann reicht dir des Geschehens Flut Nicht mehr ans Herz, und deine Seele ruht. 행복을 찾아 쫓아다니는 한 당신은 아직 행복을 누릴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비록 모든 사랑스러운 것이 당신의 것이 된다 해도. 당신이 잃어버린 것을 한탄하고 목표를 정하고 초조하게 있는 동안은 당신은 아직 평화의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어떠한 목적도 욕망도 모르고 행복이란 말을 부르지 않을 때 그때야 비로소 세상만사의 흐름은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오. 당신의 영혼은 안식을 찾을 겁니다. 헤르만 헤세
복(福)은 행운(幸運)이 아니라 재앙 없는 삶이 이어지는 것 !
재물을 얼마만큼 가지면 부자(富者)라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의 저자 독일 문학가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Von Schonburg, Alexander)는 부자(富者)의 기준을 “가진 것보다 덜 원하면 부자, 가진 것보다 더 원하면 가난”이라고 간단 명쾌하게 정의하였다.
나이가 들수록 정부로부터 기초연금을 안 받을 정도의 생활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행복은 꼭 많은 돈이 행복의 척도가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순자(荀子)의 말이다. 福莫長於無禍(복막장어무화)라 “복(福)이란 로또가 당첨되는 것처럼 뜻밖의 행운이 굴러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재앙(災殃) 없는 생활이 이어지는 삶”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경험해 봐서 알지만 삶이란 게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예측 불가한 것인가.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년의 강진 유배생활을 끝내고 고향인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집을 짓고 당호(堂號)를 “與猶堂(여유당)”이라 지었다. 노자(老子) 15장을 인용한 이름이다. 與猶堂(여유당)의 의미는 與兮若冬涉川-겨울에 코끼리가 살얼음의 시냇물을 건너듯 조심하며 산다. 여유(輿猶)는 코끼리가 겨울에 살얼음 시냇물을 건너듯 조심하고 원숭이처럼 매사에 의심하라는 말이다.
필자는 오래전에 읽은 일본 소설가 구리 료헤이(栗 良平りりょうへい)의 “우동 한 그릇”이 평생 기억에 남아있다.
아래는 소설의 간단한 줄거리다. 일본은 매년 마지막 날(그믐날) “해 넘기기 우동”을 먹는 풍습이 있다. 홋카이도(北海道)의 우동 가게인 “북해정”에 12월 31일 늦은 밤에 마지막 손님이 들어왔다. 어머니와 어린 두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미안해하며 150엔짜리 우동 1인분만 주문했다. 행색이 초라한 세모자에게 무뚝뚝한 주인은 주방에서 우동 반 덩어리를 더 넣어 1.5인분의 우동을 내온다.
주인의 말없는 서비스를 아무도 눈치를 못 채었다. 세모자는 푸짐한 1인분의 우동을 너무도 맛있게 나눠 먹는다. 150엔을 지불하고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하는 그들에게 주인은 의례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인사한다.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明けまして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
그다음 해도 12월 31일 그믐날 가난한 세모자가 찾아와 미안해하며 우동 1인분을 주문한다. 그리고 주인은 역시 우동 반덩이를 더 넣어주고---
그다음 해 마지막 날에는 주인 내외가 세모자를 기다린다. 그새 200엔으로 오른 우동 값을 메뉴에 150엔으로 슬쩍 고쳐 놓았다. 그들이 오면 앉았던 2번 테이블에는 “예약석” 팻말을 올려놓았다.
밤 10시 반이 되자 지난해보다 더 자란 아들 둘과 변함없이 낡은 외투를 입은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날은 웬일인지 어머니가 우동 2인분을 시킨다. “우동 2인분!”이요 맞받아친 주인은 주방에서 우동 세 덩이를 뜨거운 국물에 넣는다.
그리고 주인 내외는 무심한 척 세모자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어머니는 아들들에게 오늘이 죽은 아빠의 빚을 다 갚은 날이라고 고백한다.
막내아들이 작문으로 발표한 “우동 한 그릇”이란 글의 내용을 얘기한다.
“우동집 아저씨와 아줌마가 너무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큰 소리로 말해주신 일. 그 목소리는… 지지 말아라! 힘내! 살아갈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요.
그래서 어른이 되면, 일본 제일의 우동집 주인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커다란 목소리로 읽었어요.”
우동집 주인 내외는 카운터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한 장의 수건 끝을 서로 잡아당기며 참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몰래 닦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한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세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십 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 해 12월 31일 두 청년을 데리고 노부인이 들어왔다 그리고 예의 구석진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노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저… 우동… 3인분입니다… 괜찮겠죠?”
아들 두 청년 큰아들은 의사가 되었다. 작은 아들은 커서 우동집 주인이 희망이었는데 은행원이 되었다.
노부인의 큰아들이 말한다. “우리는 14년 전 섣달 그믐날 밤, 어머님과 셋이서 1인분의 우동을 주문했던 사람입니다. 그때의 한 그릇의 우동에 용기를 얻어 세 사람이 손을 맞잡고 열심히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 셋은 오늘 인생 가운데에서 최고의 사치스러운 일을 계획했습니다.
그것은, 섣달 그믐날 어머님과 셋이서 삿포로의 북해정을 찾아와 3인분의 우동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최고의 사치(奢侈) 우동 세그릇 주문 !
필자는 살만치 산 사람이다. 사실 이 이글의 주인공 세모자보다 더 어려운 시대를 살았다. 행복하기 위해 일을 한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고 그냥 살기위해 일했다. 그처럼 다짐하며 살아온 행복은 어쩌면 우동 한 그릇 값 정도일지 모른다.
농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