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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연재 제31회>
<의열단>의 고향 밀양 독립운동 대하장편소설
[떠오르는 지평선][제2부][제3권]
악산(嶽山) 정대재(鄭大載)
제2부 제1권 차례 제1장. 젊은이들의 양지(陽地) ◇꼬마 전령(傳令) 박차정(朴次貞) ◇문객(門客)과 협객(俠客) ◇분홍댕기 제2장. 동트는 대륙(大陸) ◇귀거래사(歸去來辭) ◇풍운지회(風雲之會) ◇무정부주의자와 아나키스트 제3장. 북풍만리(北風萬里) ◇스님과 테러리스트 ◇마산비우(馬山飛雨) 제4장. 유성(流星)이 흘러가는 곳 ◇배신의 그림자 ◇의열 청년 박재혁(朴載赫) 제5장. 안개 낀 국경선(國境線) ◇봉오동(鳳梧洞)의 전사들 ◇복벽(復辟)의 꿈 |
제2부 제2권 차 례 제1장. 이역(異域)의 하늘 밑에서 ◇머나먼 청파호(靑波湖) ◇청산리(靑山里) 전투 제2장. 청춘시대 ◇만추(晩秋)에 찾아온 진객(珍客) ◇의인(義人)의 탄생 제3장. 길 따라 마음 따라 ◇어떤 잠행(潛行) ◇바람의 초대(招待) 제4장. 깃발 없는 별들 ◇길 위의 사람들 ◇충신의 후예(後裔) 제5장. 사이토 총독의 음모(陰謀) ◇밀양성(密陽城) 가는 길 ◇호국성지로 향한 칼끝 |
제2부 제3권 차례 제1장. 새로운 여정(旅程) ◇태몽(胎夢) 이야기 ◇산사(山寺)에서 가진 밀회(密會) 제2장. 하계동천(夏季冬天) ◇비상대책회의 ◇의열(義烈)에 빛난 별 제3장. 이념천하(理念天下) ◇의열단과 북경 삼인방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제4장. 도생(圖生)의 길 ◇사공 많은 배 ◇먹구름 뜬구름 제5장. 여명(黎明)을 찾아서 ◇뜨거운 둥지 |
제5장. 여명(黎明)을 찾아서
◇뜨거운 둥지
그날 밤 중산은 운사와 약속하였던 대로 산외면 남기리로 가지 않았다. 아니, 가지 못했다.
“숙부님, 오늘 저녁 때 산외면 남기리를 급히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무봉사에서 내려와 두고 온 말을 타러 혜민당에 다시 들러 죽명 숙부께 그 사실을 이렇게 밝혔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고 만 것이었다.
“아니, 갑자기 남기리를 다녀오겠다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중산이 의욕에 찬 얼굴로 자기의 의향을 이렇게 밝혔을 때, 언제나 그의 의견을 존중해 주곤 했던 죽명 선생의 반응은 이날 따라 의외로 신통치가 않았다.
“아까 밀성대군단 축조 공사장을 둘러보기 위해 영남루 쪽으로 올라가던 중에 그곳으로 왕진을 가는 운사와 우연히 마주쳤다가 아주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요즘같이 어수선한 시국에 반가운 소식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는 것이냐?”
죽명 선생은 의욕에 차 있는 중산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만주 무송에서 온 군자금 모집책이 지금 산외면 남기리에 와 있는데, 우리와 조속히 접촉하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해 왔다고 하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니, 만주 무송에서 온 군자금 모집책이라고? 그렇다면 보나마나 또다시 <흥업단>에서 보낸 사람이 아니겠느냐?”
<흥업단>이라면 부북면 무연리 출신의 단애 윤세복 선생이 세운 대종교 계열의 독립군 단체로서 서일 총재와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와도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죽명 선생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숙부님! 이번에 온 군자금 모집책은 4.4 태룡리 만세운동에 가담하고 나서 북간도로 망명한 단장면 사연리 출신의 김홍규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단애 윤세복 선생 밑에서 대종교 포교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는 걸 보면 <흥업단> 소속일시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저쪽에서 왜 또다시 우리와 접촉하기를 원하는지, 그 목적부터 먼저 알아본 연후에 만나 보든지 말든지 해야 할 것이 아니냐?”
한껏 들떠 있는 중산과는 달리 죽명 선생의 얼굴은 더욱 심각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숙부님! 저쪽에서 이처럼 자신의 신분과 만나고자 하는 장소까지 구체적으로 먼저 알려 왔는데, 구태여 더 이상 알아 볼 필요도 없지를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은 문중 당주인 자네가 함부로 나설 때가 아니야! 표충사 서상암에서 <흥업단>의 군관 양성자금 모집책들을 만나 적잖은 군자금을 기탁한 것이 불과 2년밖에 안 된 지난 신유년(1921년) 정초가 아니었더냐? 그런데 또다시 우리와 접촉하기를 원한다면, 거기엔 필시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게다!”
<흥업단>에서 보낸 사람이라면 크게 고무될 줄 알았는데, 대체 이게 어인 일인가? 중산은 전에 없던 죽명 숙부의 태도에 어리둥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숙부님! 저도 그런 판단이 섰기 때문에 더욱 서둘러 만나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의열단>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니 다른 특별한 사정이 있음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의열단>에도 가담하고 있는 사람이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왔다고? 그렇다면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더욱 어려운 일일 수도 있음이 아니겠느냐?”
죽명 선생은 열 명도 훨씬 넘는 <의열단> 단원들이 대거 구검된 지난 1920년의 <밀영·진영 폭탄 반입사건>을 떠올렸는지, 강하게 고개를 흔들면서 언성을 높였다.
“지난번에 적잖은 군자금을 기탁하며 그만큼 성의를 보였는데, 설마하니 우리가 감당 못할 무리한 요구를 또다시 해올 리가 없지를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쪽의 뜻을 운사에게 전해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을강 전홍표 선생님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결코 부담이 되거나 나쁜 일은 아니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중산은 을강 선생이 3.13 밀양 만세운동을 진두지휘할 때, 그의 우국충정에 크게 감동한 나머지 휘하의 열혈 청년들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을 하게 될 경우에 대비하여 거액의 도피자금까지 은밀히 지원해 주었을 때의 뜨거운 마음과 믿음을 아직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한 가지만 알고 둘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을강 선생은 밀양 만세운동 후에 북간도로 피신하였다가 2년만에 돌아온 이후로 아직도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형편이 아니냐? 그러니 만주 쪽의 사정은 몰라도 국내의 사정에 대해서는 나보다도 오히려 어두울 수밖에 없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사실, 밀양 유지 모임의 동료들 중에서도 을강 선생과 가장 교분이 깊었던 죽명 선생도 요즘은 그와의 소통이 원만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산외면 남기리는 숙부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지난 신유년에 다녀왔던 재악산의 서상암처럼 첩첩산중에 있는 험지도 아니고, 말을 타고 달린다면 한 식경이면 능히 가 닿을 수 있는 탄탄대로변에 있는 아주 가까운 마을이 아닙니까?”
산외면 남기리는 밀양읍성 북문 밖의 범북 고개를 넘어서 응천강 북쪽 지류를 건너고 기회 송림을 지나가기만 하면 곧장 가 닿을 수 있는 들마을이었다.
“허허, 이거야 원…. 제 아무리 을강 선생이 주선하고 나선 일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거리의 멀고 가까움만 따져 보고 결정할 일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글쎄!”
죽명 선생은 중산의 적극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셈인지 여전히 자신의 뜻을 굽힐 태세가 아니었다.
“숙부님!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중산은 기가 막힌 나머지 결례를 무릅쓰고 그 까닭을 대놓고 파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도 말하지 않았느냐? 자네가 삼수까지 데리고 표충사 서상암으로 가서 <흥업단>의 군자금 모집책을 만나고 왔던 것이 불과 2년 전의 일이고, 지금은 그때와 형편이 달라서 자네가 또다시 나설 때가 아니라는 게야!”
“숙부님, 그때 역시도 서상암을 오가며 남기리를 두 번씩이나 지나쳤더랬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지를 않았습니까?”
중산은 열이 올라 어느덧 얼굴마저 붉어지고 있었다.
“허허, 지금까지 아무런 일이 없었다고 해서 앞으로도 무사하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하는 말이 아니겠느냐? 거듭 강조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이야!”
“숙부님, 지금 일본 동경에서는 대지진이 일어난 혼란 속에서 우리 조선인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자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주에서는 또 우리 독립군들이 일본군의 대공세에 밀려 연해주로 이동했다가 대참변을 겪는 등, 아주 어려운 사정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섯이나 되는 우리 문중 하인들을 만주 독립군으로 떠나보낸 당사자인 제가 어찌 일신의 안위만 챙기고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단 말씀입니까?”
중산은 지금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보낸 청암 아우의 일도 크게 걱정이지만, 이번 기회에 만주 무송에서 온 김홍규라는 사람을 만나서 <흥업단>과 동일한 대종교 계열로서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는 <북로군정서> 소속의 자기네 문중 하인들의 소식만이라도 우선 알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이다.
“허허, 그러한 자네의 절박한 심정을 나라고 해서 어찌 모르고 있겠느냐? 하지만 자네는 우리 문중의 생존과 미래를 책임져야 할 기둥이 아닌가! 그러니 이런 때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게야, 내 말은!”
서로의 입장만을 거듭 밝히는 가운데 양쪽의 생각은 여전히 팽팽한 간극을 유지한 채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중산은 답답하다 못해 엉뚱한 생각이 들기까지 하였다.
“숙부님, 혹시 제가 삼수를 데리고 표충사 서상암으로 갔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운사와 같이 말을 타고 동행하기로 했기 때문에 이러시는 것입니까?”
“허허, 이렇게 내 뜻을 몰라서야, 원! 운사는 내가 일본 유학까지 애써 알선해 주었을 정도로 혈육 같이 아끼는 우리 교회의 교우인데, 아무려면 그럴 리가 있겠느냐? 이것은 자네를 위하고, 운사를 위하고, 더 나아가 우리 가문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어찌 그걸 모르느냐!”
“숙부님!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저희들이 다녀 오고자 하는 남기리와 이십여 리쯤 떨어진 곳에 산외면 사무소와 경찰 주재소가 자리잡고 있다고 해서 이러시는 것입니까?”
중산의 생각이 돌고 돌아 여기에 이르자, 죽명 선생도 굳이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수긍하는 뜻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산외면 다죽리(多竹里)는 죽명 선생이 문제시 하는 남기리에서도 이십여 리나 더 떨어진 곳에 위치한 면소재지였다. 세칭 다원(茶院)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고촌 마을은 울창한 대나무숲을 가운데 두고 밀양 손씨들의 세거지인 죽동(竹東) 지역과 안동 일직 손씨들의 세거지인 죽서(竹西) 지역이 마주보고 있는 고촌 지역으로서 밀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유림 양반촌이었다.
“이제사 꽉 막힌 자네의 생각이 겨우 뚫린 모양이로구나! 그곳 다죽리가 남기리에서도 이십리가 넘게 떨어진 곳이기는 하나, 우리 동산리처럼 왜놈들한테는 요시찰 대상 마을임을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아니 될 것이야!”
일직 손씨들의 세거지인 이곳 죽서 마을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횡포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충의(忠義)와 탁절(卓節)로서 두문불출하며 오직 도학에만 전념하였던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 선생의 학문과 충절을 기리는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일찍이 영조 때부터 세워져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서산서원은 훼철되고 지금은 ‘철운재(徹雲齋)’라 편액한 서산고택(西山古宅)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3.1운동 후에 유림계의 거두 곽종석 선생을 위시하여 장석영, 김창숙 등, 유림계의 인사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고 있던 세계평화회의에 대한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파리장서 서명운동>을 벌일 때, 망명지인 만주에서 돌아와 단장면 무릉리에서 자암서당(紫岩書堂)을 열고 후진양성에 주력하고 있던 강우학맥(江右學脈)의 거유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선생을 도와 크게 활약하였던 유생들도 이곳 격재 손조서 선생의 후손들이 대부분이었다.
중산이 다죽리 일직 손씨네 집안의 큰 인물인 격재 손조서 선생의 내력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된 까닭은, 그가 당대에 손꼽히는 학문과 시문의 대가로서 이름이 드높았을 뿐만 아니라, 예림서원의 주벽 인물로서 자기네 여흥민씨 문중의 큰인물로서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등과 동문수학을 하면서 이름을 드높였던 욱재 민구령, 경재 민구소, 우우정 민구연, 무명당 민구주, 삼매당 민구서 등, 오우 선생 형제들의 스승이자 진외종조부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도 친교가 깊었던 거유(巨儒)이기 때문이었다.
“조선 황실의 외척 집안이라는 이유만으로 동산리의 우리 여흥 민씨 가문을 요시찰 대상으로 삼고 있는 왜놈들이 항일의식이 뿌리 깊은 다죽리 사람들을 그대로 가만히 방치해 두고 있을 성싶으냐? 결코 그렇게 허수룩한 족속들이 아니란 말이다!”
“숙부님, 저 역시도 다죽리가 어떤 마을인지 알 만큼은 다 알고 있습니다! 무오독립선언서에 민족 대표로서 윤세복 선생, 황상규 선생과 더불어 서명하였던 회당 손일민 선생도 그 마을 출신이었고, 지금 <흥업단>의 군자금 모집을 담당하고 있는 성하 손경헌 선생도 본가는 안법리에 있어도 다죽리 일직 손씨 집안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죽리의 유생들이 소눌 노상직 선생을 도와 파리장서 서명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는 사실은 중산도 고종황제의 국상에 참여한 뒤, 당신의 외가 지역인 경북 의성으로 내려가 비밀 통문을 제작하는 등, 그 운동에 동참하였다가 의성경찰서의 수사대에 체포되는 풍파를 겪었던 부친으로부터 들어서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그래, 그 말 잘 하였다! 그렇다면 서상암에서 <흥업단>의 군관 양성자금 모집책들을 만나서 적잖은 군자금을 전달했다는 사실이 뒤늦게라도 왜놈들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상상이라도 한번 해 보았느냐?”
목청을 높이는 죽명 선생의 반문에 중산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숙부님! 그것은 2년 전에, 그것도 첩첩산중인 서상암에서 극비리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군자금 모집책들은 그때 맡은 바 소임을 원만히 수행하고 만주로 무사히 돌아갔다고 숙부님께서도 직접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런 일도 없었고요!”
“그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지난번에 서상암으로 갈 때는 면사무소와 경찰 주재소가 있는 다죽리를 그대로 지나쳤기에 별 탈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자네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바로 다죽리와 아주 가까운 남기리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된다는 것이야!”
“숙부님, 그것은 지나친 기우이십니다!”
“허허, 결코 기우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지금은 그때와는 달리, 왜놈들의 우리 민족 이간책으로 인하여 친일 앞잡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도처에서 생겨나는 판국이 아니냐? 그런 걸 감안하면 그 마을에도 왜놈들의 첩자가 있지 말라는 법이 없기에 하는 말이다!”
“숙부님! 그렇게 일일이 따진다면 황실의 척족 집안인 우리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대체 뭐가 있겠습니까?”
평소 같잖게 지나칠 정도로 소심해져 있는 죽명 선생의 모습에 기가 막힌 나머지 뜨겁게 부르짖는 중산의 목소리에도 마침내 피가 맺힌 듯하였다.
“그만 두라면 그만 두래두! 벽에도 귀가 있고, 바쁠수록 둘러서 가야 하는 법이니라!”
죽명 선생의 태도는 아주 단호하였다. 그 바람에 중산은 태산처럼 버티고 있는 그를 바보처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크게 낙담을 하면서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전에 없던 냉점함과 강경함으로 자신의 뜻을 기어이 관철시킨 죽명 선생의 까닭 모를 일탈! 그런데 예상 외로 크게 낙담하는 중산의 모습이 오히려 가슴을 아프게 때렸던 것일까? 죽명 선생한테서도 오래지 않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중산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그의 입에서 넋두리처럼 이런 말이 흘러나온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내가 더 이상 숨겨서 무얼 하겠나…. 모처럼 부푼 꿈을 안고 남기리로 가려는 자네의 발길을 내가 이토록 한사코 막으려는 데는 사실 그럴 만한 곡절이 있었기 때문이니라. 그러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구나.”
중산의 기를 기어이 꺾어 버린 죽명 선생의 목소리는 나직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개화의식을 이어받아 가멸차게 활동 중인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만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럴만한 곡절이라는 바람에 중산이 마법에 결린 듯이 후딱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만주 독립군 지원사업에 공을 들여 온 자네의 신념과 의욕에 큰 타격이 되지나 않을까 하고 애써 함구해 온 일이 하나 있었더니라!”
“숙부님, 갑자기 그게 어인 말씀입니까?”
“…지난 신유년 정초에 자네가 서상암에서 만났던 그 만주 <흥업단>의 군관 양성자금 모집책들 말이다!”
“숙부님, 그분들은 20만 원이나 되는 거액의 목표액을 거뜬히 달성하여 지난해 섣달 그믐께에 만주 무송으로 무사히 돌아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꿈속을 헤매듯이 반문을 하는 중산의 눈에서 크게 바람이 일었다.
“물론 그랬었지…. 허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더니라!”
“아니, 숙부님! 그게 아니라면, 그분들한테 무슨 변고라도 생겼단 말씀입니까?”
중산은 갑작스런 사태의 반전에 머리끝이 쭈볏해지면서 거의 숨이 멎는 듯하였다.
“불상사가 있었어도 웬만했어야 말이지! <흥업단> 군자금 모집책들과의 만남을 알선해 주었던 그 손기석이라는 산내면의 약초꾼이 지난해 연말에 우리 혜민당에 일부러 찾아와 전해 준 바에 의하면 말이다, 그동안 경상남도와 북도를 넘나들며 군자금 모집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겨우 6만원 정도밖에 확보하지 못했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초조해진 나머지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는 바람에 경북 청도에서 고등계 형사들한테 그만 꼬리가 잡혀서 네 사람 모두가 연이어 체포되고 말았다고 하였느니라!”
“숙부님, 그게 정녕코 사실이란 말입니까?”
부르짖듯 하는 중산의 물음은 거의 울음에 가까웠다.
“난들 어찌 그 말을 믿고 싶었겠느냐? 하지만 그건 어김없는 사실이었더니라! 그래서 내가 자네한테 사실대로 말은 못하고 그토록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게 아니겠느냐?”
크게 탄식하는 죽명 선생의 언성에도 피가 맺히는 듯하였다.
“숙부님, 그렇다면 지금 그분들은 어찌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경북 경찰국에 끌려가서 모진 취조와 심문을 받은 끝에 지난 봄에 대구지방법원에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고 지금 대구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문제는 그게 그들만의 일로 끝날 수 있는 사안이 결코 아니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음이 아니겠느냐!”
죽명 선생은 크게 한숨을 내쉬는 중에도 앞날에 대한 걱정만은 여전히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중산 역시도 사태의 심각성이 뒤늦게 가슴에 쿵! 하고 와 닿으면서 차가운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듯하였다.
“숙부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거 정말 보통의 일이 결코 아니로군요!”
“그 사람들이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끝내 함구해 주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하지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문제는 그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이 아니라, 언제 우리한테 튀어 올지 모르는 상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야!”
“숙부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딴은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럴 수가 있다는 정도가 아니야. 그 양반들이 우리가 협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설할 리는 없겠지만, 그렇잖아도 우리를 못 잡아 먹어서 으르렁거리는 왜놈들인데, 자네가 다죽리와 가까운 남기리를 다녀왔다는 사실이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우리한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지를 상상만 해도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니냐?”
“예, 숙부님! 저의 남기리행을 한사코 만류하신 숙부님의 신중한 뜻을 이제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로소 한마음이 된 그들 두 숙질 사이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손 원장한테는 자네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사정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충분히 설명을 해 줄 터이니, 그리 알고 자네는 그만 동산리로 돌아가도록 하여라. 그리고 당분간 성내 출입도 삼가는 게 좋을 것이야!”
무거운 침묵을 깨고 나선 쪽은 역시 중산의 남기리 행을 한사코 말렸던 죽명 선생이었다. 아마도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자신이 직접 나서 가지고 무슨 특단의 조처를 취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중산도 당분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아 가면서 은인자중하고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동산리로 돌아온 중산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김홍규라는 군자금 모집책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만은 여전히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운사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설명을 해 주면서 자기 나름대로 별도의 복안을 가지고 있는 듯하였던 죽명 숙부한테서는 여러 날이 지나도록 더 이상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명절 분위기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도구늪들 일대는 잘 자란 벼들이 황금 물결을 이루고 있었으며, 객지에 나갔다가 온갖 선물 꾸러미를 들고 귀성하는 이들의 모습이 들판길 곳곳에서 눈에 띄곤 하였다.
중산이 걱정하였던 청암 문식이 일본에서 귀국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의 일이었다.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의 귀향은 <흥업단>의 군관양성 자금 모집책들의 일로 크게 상심해 있던 중산에게는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관동 대지진에 관한 흉흉한 소식에 뒤 이은 그의 귀향은 민 대감 댁 사람들은 물론, 동산리 여흥 민씨 문중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특히 그가 상하 구분할 것 없이 민 대감댁 아이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일본에서 가지고 온 여러 가지 선물 중에서 병준이와 병호의 몫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예쁜 복실 강아지 두 마리는 안고 온 것이었다.
윗분들의 처소에 차례로 들러 귀국 인사를 올린 그는 후원 별당에 들러 중산 내외와 재회의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훌쩍 자란두 조카들에게 복실 강아지를 각각 안겨 주면서 이렇게 특단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병준아, 이 두 녀석은 세파트라고 하는 품종이란다. 원산지가 독일이라고 하는 먼 나라인데, 아주 뒤뇌가 뛰어난 품종이라 앞으로 무럭무럭 자라서 너희들의 훌륭한 길잡이 겸 수호자가 될 거란다.”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을 한 문식은 각자의 소유 관계를 설명해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여기 양쪽 앞다리에 흰 반점이 있는 녀석은 내가 ‘천둥’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수놈인데 병준이 네가 가지고, 다른 한 놈은 암컷으로서 이름은 ‘번개’인데 병호의 것으로 하자꾸나.”
별당에 머무르면서 중산 내외며 어린 조카들과 더불어 잠시 회포를 푼 문식은 문중의 다른 어른들에게도 귀국 인사를 올리기 위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형님! 아까 오면서 보니 삼수 녀석이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더군요?”
별당을 나서면서 문식이 묻는 말이었다.
“그 녀석은 내가 밀양청년회의 가입을 허락해 준 이후로 요즘 들어 틈만 나면 읍내로 나가곤 하는데, 오늘도 아마 저녁 때가 되어야 돌아올 모양이다.”
“형님께서 결국 그 녀석에게 두 날개까지 달아 준 것이로군요?”
“그게 너의 뜻이 아니었더냐?”
“잘 하셨습니다. 형님! 그리고 고맙습니다!”
넙죽하고 절까지 한 문식은 문중 회갓길에 나섰다. 명절이나 크고 작은 문중 행사가 있을 때면 으례히 그랬듯이, 이날도 귀성 내방객들과 명절음식 장만을 도우러 온 드난꾸들로 인하여 사랑채, 안채, 행랑채 할 것 없이 온 집안이 붐볐다. 게다가 늘 한가롭던 후원 별당 주변에도 문식이 일본에서 강아지 두 마리를 안고 온 사실을 알게 된 행랑 아이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귀국 인사차 밖으로 나간 청암 문식은 하루 해가 다 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집에 있던 중산은 중산대로 끊임없이 찾아오는 내방객들을 맞으랴, 자기네 소작인들과 빈민들에게 송편이라도 빚어 먹게 중추절 구휼미 방출을 서두르는 등, 온종일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루의 일과를 겨우 끝내고 문식과의 저녁 식사를 위해 후원 별당으로 먼저 올라가 있던 중산이 그와 다시 만난 것은 저녁 식사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읍내에서 돌아온 삼수와 솟을대문 밖에서 마주친 문식은 그와 재회의 기쁨을 다 나누고서야 환하게 웃는 얼굴로 별당에 나타났다.
“형님, 방금 밖에서 삼수를 만났는데, 요새 문맹퇴치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문식은 중산에게 맡기고 갔던 삼수에 대한 관심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밀양청년회에 가입한 이후로 그 녀석이 하고 있는 일이 어디 그 뿐이겠느냐?”
"두 날개만 달아 준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 있는 일도 맡기고 있는 것이로군요?"
이렇게 삼수에 관한 얘기를 이렇게 이것 저것 물어 보던 문식은 박씨 부인이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기다렸다는 듯이 궁금한 것을 중산에게 물었다
“형님, 요새 하는 일들은 잘 되고 있습니까?”
“잘 될 리가 있겠느냐? 그렇잖아도 너한테 해 주고 싶은 얘기가 있었는데, 그러 것들은 나중에 따로 조용히 나누기로 하자꾸나. …그건 그렇고, 신문 기사를 보니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이후로 일본 동경에서는 요새 조선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이 자행되고 있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 사실이냐?”
“어디 사실이다 뿐이겠습니까, 형님! 지난 9월 1일 오전 11시 58분경에 관동 지방에 대지진이 엄습한 이후로 도쿄와 요코하마 등지에서 조선인과 공산주의자들이 건물에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유언비어가 난데 없이 퍼지기 시작하였는데, 구조활동을 위해 출동한 일본군과 경찰은 물론 심지어 자경단까지 합세하여 조선인들에 대한 린치를 가하기 시작했지 뭡니까? 그러자 일반 폭도들까지 거기에 가세하여 집집마다 뒤지고 다니면서 조선인들을 발견하면 닥치는 대로 일본도와 죽창을 휘두르는 만행을 서슴지 않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너에게도 신변의 위험이 있었을 것이 아니냐?”
“그야 물론이지요! 도쿄에서만 1천7백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죽었고, 전국을 통틀어 거의 7천 명에 가까운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저라고 해서 어찌 무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나마 우리와 연대하여 반제국주의 아나키스트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일본 사회주의 운동권 학생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어쩌면 큰 봉변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나키스트라고 하면 중국에 있는 우당 이회영 선생과 단재 신채호 선생이 벌이고 있다는 그 무정부주의 운동이라는 말이 아니냐?”
“예, 그렇습니다. 일본의 학생들 중에도 반제국주의와 아나키스트 운동을 벌이는 축들이 많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계열에 속하는데, 이념적으로 우리 조선인 학생들의 아나키스트 운동과 공통점이 많아서 서로 연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흑도회>라는 단체를 조직한 경북 문경 출신의 박열이란 청년도 반제국주의 항일 학생운동가라고 하던데, 혹시 너도 그 사람을 알고 있는 것이냐?”
“형님, 어디 알고 있다 뿐이겠습니까? 박열 동지를 중심으로 하여 결성된 <흑도회>란 모임에 가입하여 지금까지 함께 활동해 온 걸요! <흑도회> 창설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제가 동래 객사에 있을 때, <성운>에서 함께 활동하였던 우리 박문희 동지의 외재당숙이 되는 약수 김두전이라는 사람이 포함 되어 있었거든요. 그 바람에 나도 그분을 통하여 어렵지 않게 <흑도회>에 참여하게 된 것이고요!”
“아니, 그게 사실이냐?”
중산은 깜짝 놀란다. <흑도회>라는 조직이 노동자사회의 지도와 원조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운동단체라는 얘기를 일본 소식에 정통한 운사로부터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저를 거기에 가입시켜 준 김두전이라는 분은 경남 기장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의 눈을 피해 서울로 올라간 뒤, 휘문의숙을 거쳐서 경성공업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그때 서울 중앙학교에 다니고 있던 약산 김원봉, 여성 이명건과 함께 항일활동을 하던 중에 의기투합하여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였던 사람이지요. 그들 세 사람은 <광복단> 출신의 독립운동가로서 김원봉 군의 고모부이기도 한 백민 황상규 선생으로부터 ‘약산(若山: 산과 같아라)’, ‘여성(如星: 별과 같아라)’, 그리고 ‘약수(若水: 물과 같아라)’라는 별호를 각각 부여받고 의형제를 결의한 사실은 우리 <성운>의 동지들 사이에서도 크게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니까요.”
“나도 그런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느니라. 그런데 최근에 그 박열이라는 한인 청년이 일본 황족들에 대한 투탄의거를 도모하다가 그 사실이 드러나는 바람에 일본인 처와 함께 경찰에 체포가 되었다고 하던데, 그 내막도 잘 알고 있겠구나?”
“알다마다요! 박열 동지는 3.1운동 때 고향 문경에서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격문을 살포하는 등, 항일운동에 참여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지요, 그 후 신문배달과 날품팔이, 우편배달부, 인력거꾼, 인삼행상 등 온갖 노동에 종사하면서 틈틈이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다녔을 정도로 아주 학구적이고도 가슴이 뜨거운 입지전적인 인물이지요!”
항일운동에 뜻을 둔 조선인 고학생인 박열이 반제국주의 자유사상을 가진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라는 일본 처녀와 만나게 된 것도 가히 운명적이라 할 수 있었다. 요코하마 출신인 가네코 후미코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버림을 받고 조선으로 건너와 7년 동안 충청북도 청주군 부용면 부강리에서 살았던 뼈아픈 경력을 지닌 처녀였다. 거기서도 할머니와 고모에게 모진 학대를 받는 등 갖은 고초를 겪다가 1919년 4월에 일본으로 돌아와 여학교 졸업검정시험을 치른 뒤에 여자의전에 진학하고자 하였으나 금전에 눈이 먼 아버지가 자신을 외삼촌에게 노예처럼 막일꾼으로 팔아넘기려고 하자 집에서 뛰쳐나와 도쿄에서 신문판매대 점원으로 일하면서 영어학원에 다니는 등 자신의 운명에 도전하였다.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불행한 상황을 안겨 준 제국주의 일본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었던 후미코는 그 후 이와사키 오뎅집의 점원으로 일하면서 사회주의자인 히라사와 다케노스케와 아나키스트인 다카오 헤이베에 등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소개로 조선인 아나키스트 운동가인 원종린과 공산주의자인 정우영, 김약수, 정태성 등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반제국주의에 심취하여 사회주의 잡지를 즐겨 읽던 가네코 후미코는 자기네 오댕집의 단골인 정우영이 보여 준《청년조선》이란 책의 교정쇄에서 박열이 지은 ‘개새끼’란 시를 읽고 크게 감동한 나머지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우영의 소개로 박열을 만나게 되면서 첫눈에 그를 사랑하게 된 무미코는 그의 반제국주의 사상에 크게 공감한 나머지 항일활동을 함께 펼치기로 쉽게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그들은 도쿄부 에바라군 세타가야의 데이지리에서 신발가게를 하는 아이카와 신사쿠의 이층 방을 얻어 동거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게 문식이 전하는 그들 두 남녀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 얘기였다.
박열은 당시 도쿄 최대의 한인 노동단체였던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에 가입해 활동하였으며, 동료 유학생인 김두전, 백무 등과 함께 간부로 활동하면서 노동자 교육을 위한 야학활동을 벌이기도 했다고 하였다.
철저한 반제국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인 그는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와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 등, 당시 저명한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주최하는 <여명회(黎明會)>와 <코스모구락부>, <자유인연맹> 등 각종 사상단체의 강연회에 참여하면서 반제국주의 자유사상과 아나키즘에 더욱 심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열은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동경의 한인 고학생들을 규합해 <의혈단(義血團)>을 조직해 친일 행위자들에게 협박장을 보내거나 집단 응징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난 1921년 11월 말경에는 원종린, 김두전 등의 유학생들과 함께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하여 일본 약탈체제의 근본적 파괴를 목표로 삼았으며, 니카다현(新潟縣)과 나가쓰가와(中津川)의 한인노동자 학살사건의 조사단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흑도회>의 취지는 크게 한국의 현실을 양심적인 일본인에게 전달하는 것, 국가적 편견과 민족적 증오가 없는 세계융합을 실현하는 것 등이었다. 그에 따라 지난해(1922년) 7월에는 시나노가와수력발전소(信濃川水力發電所)에서의 조선노동자 학살사건에 대한 조사 및 항의운동 등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열·정태성·백무 등은 무정부주의자인 오스기[大杉英]·이와사[岩佐作太郎] 등의 지도하에 있었고, 김두전과 조봉암, 김사국, 원종린 등은 사회·공산주의자인 사카이(堺利彦)의 영향 하에 있는 등, 이념적으로는 서로 차이가 있었다.
1922년 7월 10일, 박열은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흑도회>의 기관지인 《흑도(黑濤)》를 창간하고 항일 세력의 규합과 선전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식민체제의 근본적인 파괴와 의열투쟁에 뜻을 두고 있는 박열과는 달리, 대중적인 전위정당을 추구하던 약수 김두전은 그와의 결별을 선언한 뒤, 김종범·안광천 등과 함께 <흑도회>를 탈퇴하고 말았다. 그 후 사회주의 계열의 <북성회(北星會)>를 조직한 그는 국내를 오가며 사회주의 이념 보급에 주력하였고, 김중한·이윤희 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함께 <풍뢰회(風雷會)를 조직한 박열은 그것을 다시 <흑우회(黑友會)>로 개칭하여 반제국주의·무정부운동에 나서고 있는 상태였다.
기관지《흑도》를 폐간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뻔뻔스러운 조선인》이라는 잡지를 창간하는 등, 가멸찬 열의를 보였으나 그 무렵 불령선인의 지도자급 인물을 가리키는 ‘요시찰 조선인 갑호 해당자’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의 감시와 미행에 시달리면서 무려 50여회에 달하는 예비검속을 당하는 등의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난 4월에 이르러 박열은 기존의 <흑우회>와는 별도로 김철, 육홍균, 홍진유, 정태성, 서동성, 나가타 게이자부로, 오가와 다케시, 최규종, 이필현, 서상경, 하일 등 15명의 조선인과 6명의 일본인 등 총 21명을 규합하여 <불령사(不逞社)>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와 함께 일제의 폭압적 식민지 지배체제를 종식시키기 위한 비상수단을 모색하던 박열은 폭탄 테러를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외국에서의 폭탄 유입을 모색하던 중에 때마침 경성과 동경에서 폭탄 테러를 기획하고 있던 <의열단>의 국내 책임자인 김한을 통하여 거사용 폭탄 50개의 일본 반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회심에 가득 찬 이 계획은 폭탄 운반책들이 한·만 국경 근처에서 만주 군벌 장작림 (张作霖)의 부하들에게 폭탄을 빼앗김으로써 그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후 고교 동창이며 <흑우회>의 동지인 김중한을 통해 폭탄을 구입 방안을 다시 모색하기 시작한 박열은 <불령사>의 회원인 최영환을 통해 중국 상해의 한인 의열단체인 <다물단>으로부터 거사용 폭탄을 다시 확보하게 되었으며. 그 폭탄은 금년 10월 중에 있을 예정인 일본 히로히토(裕仁) 황태자의 결혼식 때 투척할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9월 1일에 관동 대지진의 발생과 함께 대혼란이 일어나자 한인 폭동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6천 명이 훨씬 넘는 한인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거사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제 당국이 선량한 한인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6천2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강제 연행할 때, 박열은 물론 가네코 후미코까지 검찰 당국에 구검되고 만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대적으로 펼친 일본 검찰의 취조 도중에 폭탄 구입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일본 정부와 검찰 당국은 이를 ‘대진재(大震災)를 틈탄 조선인 비밀결사의 폭동계획’이라는 대역사건으로 비화시키고 나선 것이었다.
“그렇다면 <의열단>을 창단한 우리 밀양의 김원봉 의백과 의형제를 맺었다는 그 약수 김두전이라는 사람의 요즘 활동상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느냐?”
문식의 얘기를 대충 듣고 난 중산의 관심은 역시 <의열단>의 인맥과 맞닿아 있는 김두전에게 가 있었다.
“이념 문제로 우리 <흑도회>와 결별을 선언하고 탈퇴한 이후로 국내를 오가며 사회주의 이념 보급을 위한 활동에 나서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연락은 잘 안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지금도 박열이라는 사람과 함께 새로 결성했다는 <흑우회>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김약수라는 사람과의 관계는 단절되었단 말이지?”
“그렇게 된 셈이지요! 저는 처음부터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노동운동보다는 반제국주의 내지 무정부주의 항일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으니까요!”
“그래, 나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박열 부부가 일본 황족들에 대한 투탄의거 모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면 너도 당분간은 신변 관리에 각별히 조심을 해야 할 것이다!”
중산은 <흥업단>과의 문제로 심란해 있던 터이라, 또 하나의 무거운 돌이 가슴에 와 얹히는 걸 느끼면서 뼈 있는 당부를 한다.
“예, 형님! 우리 문중 일만 해도 한 짐일 텐데, 저의 일은 제 스스로 알아서 헤쳐 나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중산이 안고 있는 고민을 알 리 없는 문식은 거침없는 어조로 안심을 시킨다.
그들의 밀담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밖에서 도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방님, 저녁 밥상을 대령하였습니더!”
“그래, 안으로 들이거라.”
중산의 대답과 함께 좀만에 문이 열리면서 도화와 연실이가 떡 벌어지게 차려진 저녁 밥상을 마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뒤를 이어 병준이와 병호의 밥상을 든 박씨 부인까지 안으로 들어오자 한동안 무겁게 경직해 있던 방안의 분위기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지는 듯하였다.
중산과 문식이 모처럼 겸상을 두고 마주 앉아 두런두런 정담을 나누면서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에 어느덧 하루 일과가 끝난 민 대감댁은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추녀 끝마다 장명등이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하였다. 박씨 부인이 손수 시중을 드는 속에서 한가로이 저녁 식사를 끝낸 중산과 문식이 바깥사랑으로 내려왔을 때, 저녁 마을을 나온 문중 젊은이들의 발길이 그곳으로 하나 둘씩 이어지고 있었다.
객지에서 귀성한 학도들은 멀리 서울이나 평양 같은 타지역에서 온 축들도 없지 않았으나 문식과 함께 동래 객사에서 기숙하며 신학문을 공부하였던 문중 학도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중산의 처소에 모여든 청년 학도들의 관심사는 역시 국내에서도 떠들썩하게 소문이 났던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대혼란과 그 와중에 불거진 박열 부부의 황족 저격 모의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국내에 있을 때부터 항일 학생운동에 가담하였던 문식이 일본 유학을 가 있는 곳이 바로 대사건의 진원지인 동경인 것과도 결코 무관치가 않았다.
하지만 문식은 박열 부부의 국경을 초월한 운명적인 만남과 그들이 펼치는 반제국주의적 항일운동에 관한 얘기만 사실 그대로 흥미진진하게 들려 주었을 뿐, 정작 일본에서 벌여 온 자신의 활동에 관해서는 일체 입에 담지 않았다. 하지만 박열 부부에 관한 얘기를 자세하게 해 줌으로써 자기 또한 그들과 함께 반제국주의적 아나키스트 운동에 참여하고 있을 것이라는 신빙성을 안겨 준 것은 사실이었다.
이날 밤, 관동 대지진과 박열 부부에 관한 얘기에 이어 중구난방으로 벌어진 방담과 토론은 결국 예측을 불허하는 시국 상황과 대한독립운동 문제로 자연스럽게 귀결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황실 척족으로서 용화부인과 영동 어른이 왕조복고를 위해 벌여 온 자기네 문중의 복벽주의 독립운동 지원 사업과, 그와는 별도로 다음 세대를 위해 중산이 벌이고 있는 공화주의 독립운동 지원사업에 관한 얘기는 그 누구도 아는 바가 없었고, 따라서 그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당사자들의 비밀 유지 노력이 그만큼 철저하였다는 방증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눈채챈 사람이 있어도 문중의 안위를 위해 감히 입에 담지 못한 결과일 수도 물론 있었다.
후끈한 열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넘칠 정도로 뜨겁게, 그리고 길게 이어졌던 문중 학도들의 시국에 관한 방담 및 토론회는 밤이 깊을 대로 깊어서야 겨우 끝이 났다. 그들이 아직도 미진한 마음으로 왁자지끌하게 떠들어대며 모두 자기네 집으로 돌아가고 난 뒤였다.
문식과 함께 모처럼 자기의 처소에서 자기로 한 중산은 이부자리를 펴기에 앞서 그때까지 속에 넣어 두고 있었던 만주 무송에서 온 <흥업단>의 군자금 모집책을 만나기 위해 산외면 남기리로 가려고 했다가 불발로 끝났던 아쉬운 사연을 사실 그대로 털어놓았다.
“청암아. 너도 잘 알다시피 <흥업단>은 부북면 무연리 출신의 단애 윤세복 선생이 창설한 대종교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가 아니냐? 그리고 <흥업단>이라고 하면 우리 문중 하인들이 배속돼 있는 <북로군정서>와는 같은 대종교 계열로서 교류와 협력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더구나. 게다가, 지난 경신년(1920년)에 해외여행을 가장하여 중국으로 망명한 우리 갑완 항태자비 마마를 만나기 위해 상해로 가셨던 아버님께서 돌아오시는 길에 내가 특별히 소개해 드린 대종교 신의주 지사의 최응삼 사교를 만났다가 그의 안내로 직접 방문한 곳이기도 하고 말이다.”
“형님께서는 지금 군자금 모집책들이 모두 검거되고, 그들에게 기탁한 거액의 군자금이 일제 당국의 수중에 들어간 아쉬움보다도 만주 무송에서 온 그 <흥업단>의 김홍규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안타까움이 오리려 더 절실한 모양이네요?”
문식은 중산의 심정을 그대로 정확하게 꿰뜷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험하고 먼 표충사 서상암까지 스스로 찾아가서 쾌척하였던 군자금이 <흥업단>의 군자금 모집책들이 모두 검거됨으로써 아무런 보람도 없게 된 것이 어찌 아깝고 애통하지 앟겠느냐? 하지만 돈이야 앞으로 모으면 되는 것이지만, 내가 계획적으로 도모하여 만주 독립군으로 보낸 우리 문중 하인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기회란 좀처럼 잡을 수 없는 천재일우이기에 이러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절실한 심경을 드러낸 중산은 정색을 하고 묻는 것이다.
“문식아, 이번에 만주 무송에서 온 군지금 모집책 말이다. 이 사람은 단장면 사연리 출신의 김홍규라고 하는 사람인데, <흥업단>의 단애 선생 밑에서 포교 사업을 돕는 한편으로, <의열단>의 일도 겸하고 있는 모양이더라. 그런데 이런 사람이 자신의 신분과 머무르고 있는 장소까지 먼저 밝히면서 우리와 조속히 접촉하기를 원했다면, 너의 생각으로는 그 목적이 어디에 있을 것 같으냐?”
“아니, 형님! 방금 <의열단>이라고 하였습니까?”
<의열단>이라고 하는 바람에 담담하게 듣고 있던 문식이 화들짝 놀란다.
“그래, <의열단>의 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더라!”
“형님!그렇다면 군자금도 군자금이지만,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는데요?”
심각해지는 문식의 태도에 중산도 서슴없이 맞장구를 치는 것이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형님이 서상암에서 만났던 네 명의 군자금 모집책들이 모두 검거되고 말았으니 형님께서 거액의 군자금을 기탁한 사실을 알 리 없는 <흥업단>으로서는 또다시 군자금 협조 요청을 해 올 가능성은 충분하겠지요. 하지만 이번에 새로 파견된 군자금 모집책이 <의열단>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군자금과 다른 별도의 문제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일본으로 유학을 가면서 의열단장 김원봉과 의형제를 맺은 바 있는 약수 김두전의 소개로 <흑도회>에 가입하게 되었고, 박열과 함께 반제국주의 무정부운동을 벌이면서 <의열단>으로부터 폭탄 반입을 도모하는 일도 몸소 겪어서 그런지, 문식은 그쪽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지난번에 군자금을 서상암으로 갔을 때 만났던 부북면 출신의 황문익씨도 그렇고, 이번에 파견된 단장면 출신의 김홍규씨도 그렇고…. 대종교계의 지도자이신 단애 윤세복 선생의 영향 때문에 <흥업단>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우리 밀양 사람이 유난히 많다고 들었다. 그리고 백민 황상규 선생과 김대지 선생의 지도하에 창단된 <의열단> 역시도 우리 밀양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창설된 것 또한 어김없는 사실이니 그럴 수도 있기는 하다만…."
이렇게 말꼬리를 흐린 중산은 <의열단>에 대해 유난히 관심을 크게 두고 있는 문식의 태도를 보고 미리 쐐기를 박는다.
"하지만 내 미리 말해 두지만, 비밀결사운동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야!”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만주 무송에서 왔다는 그 김홍규라는 사람 말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또다시 거액의 군자금을 요구해 온다면 어떻게 대응할 생각입니까?“
“다소 부담이 되더라도 섭섭지 않게 최대한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중산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네 하인들이 배속돼 있는 <북로군정서>와 <흥업단>이 같은 대종교 계열의 공화주의 독립운동 단체로서 인적 교류와 협력이 잦다는 얘기를 전에 만났던 <흥업단>의 단원들로부터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불을 펴놓고 잠자리에 들 생각도 잊은 채 이렇게 속깊은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아뢰는 춘돌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방님! 나리 마님께서 청암 되련님과 함께 속히 중사랑으로 들라 하셨습니더!”
중산과 문식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쳐다보면서 그 까닭을 몰라 적잖이 놀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갑자기 어인일일까!’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한달음으로 중사랑 부친의 처소로 달려갔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추석 하루 전날 밤이 되어야 차례를 올리기 위해 미리 오곤 하던 죽명 선생이 청관 스님과 함께 하루 앞당겨 거기에 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 낯선 사내 하나가 그들과 함께 거기에 와 있다는 사실이었다. 허름한 양복 차림에 강인한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인사들 올리거라!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찾아오신 귀한 손님이시다!”
죽명 선생과 청관 스님에게 인사를 한 중산 형제가 어리둥절해 있는 것을 보고 영동 어른이 던지는 말이었다. 나이가 많아야 마흔 살쯤을 되었을까? 그러나 수염이 유난히 짙게 나 있어서 나이가 더 많아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삼십대 후반일 수도 있는 사내였다.
중산과 문식이 부친의 분부에 따라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는 것을 보고 낯선 사내는 황황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나서 이렇게 자기 소개를 하면는 것이었다.
“저는 여기 계신 청관 스님이 선도하셨던 4.4 태룡리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만주 무송으로 망명한 단장면 사연리 출신의 김홍규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 이후로 대종교계의 큰 어른이신 단애 윤세복 선생 밑에서 포교사업과 함께 <흥업단>의 일을 도우면서 <의열단>의 활동도 겸하고 있지요!”
“아, 그렇습니까? 그렇잖아도 을강 선생님의 전언을 받고 곧장 남기리로 달려갈 생각이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는데, 막상 이렇게 뵙게 되고 보니 무어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중산은 꿈에서도 그리던 백년지기를 만난 듯이, 김홍규의 두 손을 덥썩 잡으면서 크게 감격하였다.
“군관양성 자금 모집을 위해 먼저 왔던 우리 동지들이 모두 검거되는 불상사가 생기고 말았으니 오죽하셨겠습니까? 그렇게 된 사정에 대해서는 혜민당의 원장 선생님으로부터 이미 듣고 있었습니다.”
같은 또래의 중산과 김홍규가 오랜 혈맹의 동지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 것을 보고 옆에 있던 문식도 자신의 존재감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자신의 소개를 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김 선생님! 저는 우리 중산 형님의 둘째 동생인데, 동래고보에 편입학을 하여 신학문을 공부히다가 일본 유학을 간 이후로 <흑도회>에 가입하여 반제국주의 아나키스트 운동을 벌이고 있는 청암 민문식이라고 합니다!”
문식이 그동안 집안 오른들에게 철저히 숨겨 왔던 지신의 항일 학생운동에 대해 이렇게 부친 앞에서 아무 거림낌도 없이 떳떳하게 밝힐 수 있게 된 것은 <흥업단>과 <의열단>의 단원인 김홍규를 극진히 예우해 주는 부친의 모습을 보고 더 이상 감출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부친에 대한 문식의 그런 판단은 과연 빗나가지 않았다. 영동 어른이 그의 항일 학생운동의 행적에 대해 일체 문제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런 얘기를 꺼낸 것이다.
“내가 오늘 이렇게 늦은 시간에 너희들을 부른 것은 <북로군정서>에 배속 돼 있는 우리 문중 장정들에 관한 반가운 소식을 가져왔기 때문이니라.”
계층간의 신분 차별에 대해 아직도 완고한 주관을 견지하고 있는 영동 어른이 만주 독립군으로 가 있는 자기네 문중 하인들을 ‘아랫것들’이나 ‘하인’이라고 말하지 않고 일부러 ‘장정’으로 지칭하는 것도 중산과 문식 앞에서 보여 주는 크나큰 변화라면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아버님, 우리 문중 장정들에 관한 반가운 소식이라니요?”
귀가 번쩍하여 부친에게 향해 중산의 시선이 절로 김홍규한테로 옮아 간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제가 직접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연해주로 이동했다가 자유시 참변을 겪으면서 <대한독립군단>이 속절없이 와해된 상태로 만주로 돌아온 돌아온 서일 총재께서 그 책임을 지고 자결하시고 말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 바람에 만주의 우리 독립군들은 재건 작업에 나서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 <북로군정서>에 배속돼 있던 귀댁 문중의 김병환 동지와 황갑수 동지가 단애 선생님의 특별한 배려로 우리 <흥업단> 소속으로 편입하게 된 것입니다.”
김병환은 과거에 집사 노릇을 하였던 김 영감의 아들이었고, 황갑수는 축사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황 서방의 아들로서 삼수의 형이기도 하였다
“우리 집 행랑의 갑수와 김 영감의 아들 병환이가 <흥업단>에 배속되어 있다고요? 그게 사실입니까?”
문식은 자신의 충복인 삼수의 형 갑수가 병환이와 함께 <흥업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바람에 크게 놀란다.
“예, 그렇습니다. <북로군정서>의 군영이 왕청현 십리평에 있을 때, 수료탄 불발 사고로 크게 상처를 입고 우리 <흥업단>의 송림병원에 장기간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던 적이 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때 우리 집 식솔들을 치료해 준 분이 바로 윤필한이라는 의사라는 얘기는 나도 그곳을 다녀오신 아버님한테서 들은 바가 있었습니다.”
중산도 반색을 하면서 한 마디 거든다.
“물론 그러셨겠지요. 윤필한 선생은 우리 단애 선생님의 삼남이 되시는 분이기도 하지요.”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그 송림병원에 의약품과 의료 기구들은 제공해 주고 있는 분이 바로 부산에 있는 백산상회의 안희제 선생이니라.”
이것은 그들의 대화를 만족한 얼굴로 듣고 있던 영동 어른이 점잖게 이르는 말이었다. 그가 왕청현 십리평에 있던 <북로군정서>의 군영을 방문했다가 거기서 우연히 만난 백산 안희제 선생과 함께 그곳 십리평 계곡 깊숙한 곳에 있는 연병장에서 거행된 군관 임관식에 참가했다는 얘기는 중산도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안희제 선생이 <흥업단>의 송림병원의 운영에 그토록 지원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이날 밤 <흥업단>의 군자금 모집책으로 특파된 김홍규는 야참 대접까지 융숭하게 받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눈 끝에 외부인들의 눈을 피해 첫닭이 울기도 전에 유령처럼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 갔다. <의열단>의 단원이기도 한 그가 황실 척족 집안으로서 왕정 복고를 위한 복벽주의 독립운동 지원사업에 공을 들였던 여흥민씨 밀양 이참공파 동산리 종가인 민 대감 댁을 직접 방문하게 된 근본적인 목적을 직접 거론한 바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이번 방문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는 직접 거론한 이상의 큰 방점을 영동 어른과 문중 종손인 중산은 물론, 심지어 죽명 선생과 항일 의승운동을 벌이고 있는 청관 스님의 가슴 깊이 찍어 놓고 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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