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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
1.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럭키슈퍼 / 고선경
2.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 백가경
3. 2022년 한경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 박규현
4. 202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내 침대는 오늘아침이 봄 / 박재숙
5. 2022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 / 이정임
6. 2022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엄마 달과 물고기 / 김미경
7.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비 오는 날의 스페인 / 이신율리
8. 202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 강영선
9. 202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시드볼트 / 오산하
10. 2022년 머니투데이 경제 신춘문예 시 당선작, 고요를 찾다 / 김종숙
11. 2022년 뉴스N제주 신춘문예 시 당선작, 다섯 개의 물의 장면 / 이정은
(영주일보 흡수)
12. 202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빈집 / 박수봉
13. 22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 / 김종태
14. 202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일 잘하는 요즘 애들 / 전예지
15. 2022년 전남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미역국 / 강일규
16. 2022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만유인력 / 양승수
17. 202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숲에 살롱 / 최은우
18. 2022년 대구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왜소행성 134340* / 유진희
19. 2021년 제27회 진주가을문예 시 당선작, 양초라는 사건 / 정월향
20. 202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목다보 / 송하담
21. 202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반려울음 / 이선락
22.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경유지에서 / 채윤희
23. 202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엽록체에 대한 기억 / 이경주
24. 2022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눈사람과 돌멩이와 한낮 / 신춘희
25. 2022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내성천변 물래실 / 구지평
26. 202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상자 놀이 / 김보나
27. 제11회 국민일보 신춘문예 신앙시 최우수작, 어머니의 무릎 / 이경은
28. 2022 현대경제 신춘문예 詩 당선작, 스케치 / 유휘량
28-1. 2022 현대경제 신춘문예 詩 가작, 영양교환 / 추일범
29. 22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詩 당선작,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손연후
1. 럭키슈퍼 / 고선경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입니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
나는 럭키슈퍼 평상에 앉아 풍선껌 씹으면서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를 세어 보는데요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 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슈퍼 사장님 딸은 중학교 동창이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닙니다
대기업 맛은 저도 좀 아는데요
우리 집도 그 회사가 만든 감미료를 씁니다
대기업은 농담 맛을 좀 압니까?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습니다
여름이 다시 오면
자두를 먹고 자두 씨를 심을 거예요
나는 껍질째 삼키는 게 좋거든요
그래도 다 소화되거든요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벗겨지지만
맨발이면 어떻습니까?
매일 걷는 골목을 걸어도 여행자가 된 기분인데요
아차차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요
바람이 불고 머리 위에서 열매가 쏟아집니다
이게 다 씨앗에서 시작된 거란 말이죠
씹던 껌을 껌 종이로 감싸도 새것은 되지 않습니다
자판기 아래 동전처럼 납작해지겠지요 그렇다고
땅 파면 나오겠습니까?
나는 행운을 껍질째 가져다줍니다
*고선경 ; 1997년 안양 출생, 한양여자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퉁치면서 눙치고, 貫하면서 通하는 시적 패기 높이 평가**
시의 봄은 세상의 봄보다 빨리 온다.
시의 나라에서는 새해 첫날이 새봄의 첫날이다.
‘신년문예’가 아니고 ‘신춘문예’인 까닭이다.
엄동설한에 봄을 열어젖히는 신춘 시처럼,
시의 시제(時制)는 언제나 미래다.
천 년 전을 노래하는 시라고 해도 그 시가 좋은 시라면
시의 마지막 행은 미래로 열리기 마련이다.
이번 새해 첫날에도 시의 나라는
설레는 마음으로 ‘입국비자’를 발급한다.
시인의 숫자가 아니라 우리 시의 영토가
다시 넓어지는 순간이다.
입국 심사대에 올라온 본심 대상작
열 분 중 네 분이 남았다.
‘폭우’(외)는 일상의 균열을 포착하는
감각적 묘사와 시적 통찰이 빛났으나
예견 가능한 시적 구도가 아쉬웠다.
‘팝콘꽃’(외)은 가족이라는 근원적인 상처
혹은 폭력을 겨냥한 팝콘처럼 튀는
비유적 상상이 매력적이었다.
튀려는 시적 욕망을 조금만 더 제어했으면 싶었다.
‘덫’(외)은 언어를 어떻게 마르고 잇고
매듭짓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언어의 압침들이 꽂힐 언어 이전이나
언어 너머의 지점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졸업반’(외)을 내려놓는 데는 긴 논의가 필요했다.
그의 시편들은 시가 노래와 만나는 지점을 잘 알고 있었다.
리듬감이 좋았고 시의 완성도도 높았다.
시편들에서 엿보이는 시에 대한 열정과
내공이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그 자연스러움에서 묻어나는 기시감이었다.
‘럭키슈퍼’(외)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최근 시의 파장 안에 있으면서도
지금-여기의 사회 현실과 청춘의 당사자성이
감지된다는 미덕이 있었다.
버려진 과일(홍시), 낙과(사과), 씨는 물론
껍질째 먹는 과일(자두),
그리고 부풀었다 터지는 단물 빠진
풍선껌, 헐렁한 양말, 납작한 동전을 먹는 자판기 등이 있는
‘럭키슈퍼’가 화자의 현주소다.
젊은이의 미래와는 먼 오브제들이다.
화자는 ‘농담 맛’이 가득한 ‘럭키슈퍼’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화자의 동창이자 ‘럭키슈퍼’ 사장 딸은
감미료로 비유되는 ‘대기업의 맛’을
맛보고 있다는 대비도 능청스럽다.
퉁치면서 눙치고, 관(貫)하면서 통(通)하는 ‘행운’의 의미를
농담과 엮어내는 시적 패기를 높이 평가했다.
신춘 같은 미래를 향해
“푸른 도화선 속으로 꽃을 몰아가는”(딜런 토마스),
그런 시의 힘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 이문재, 정끝별(시인)
2.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 백가경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1920년 변호사 세바스챤 힐튼은 어린이들에게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고자 정글짐을 발명했다
*
x가 머리 위에 달린 축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
높이를 미처 재지 못한 x의 발이 바닥에 거의 닿을락 말락
누군가 실컷 타다 뛰어내린 그네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x의 팔과 다리가 점점 빠르게 버둥거린다
x는 하나의 커다랗고 검은 점이 되는가 싶더니
그 어떤 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x값이 무한 증폭된다
y님 행복을 주는 치과 생일 축하드립니다.
임플란트 10% 할인 1
어떻게, 잘 지내? 1
은평구도서관 ‘세상의 끝’ 연체 49일 빠른 반납 요망 1
소액 대출 최저 이율로 신용등급 모두 가능
y는 몸을 정육면체 안으로 구겨 넣는다
점점 y값을 잴 수 없고 그럴수록 y는 생각한다
이 모든 되풀이는 나의 결과 값 “(경제적) 자유”를 위한 것
z의 미래 값: 직사각형 화장실 천장에 도시가스 공급관이 노출돼 있음
장판과 텐트 사이 혈액이 말라붙어 표백제와 기타 용액을 계산한 것보다
한 통 더 사용함 청구 예정
z의 현재 값: 중위소득 85% 이하 가정에서 자란 3학년 C반
*
발가락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지탱한 x는
같은 위치 옥상에 사는 주민이자
애인 z를 찾아 창백한 타일로부터 그를 무한 증식시킨다
열화 과정에서 z는 기체로 변할 수 있게 되고
y가 연체한 ‘세상의 끝’을 대신 반납한 후
49일을 1초 만에 앞당겨 ‘세상의 끝 역자 후기’를 대출한다
y가 연탄과 소주를 담아 온 마트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을 때
자연스럽게 제목을 볼 수 있도록
책을 비스듬히 세워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
범우주아카이빙센터 12호 연구소장은
x, y, z 세 어린이를 한 차원에 모아 두고 질문을 시작한다
말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여러분 어떻게 연결되었으며
이런 건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세 어린이 동시에 말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연구소장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어린이들 모르게 언어 변환 버튼을 누른 후 짧게 욕을 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능력은 어떤 문헌에서 찾은 것인가요?
어린이 일동, 문헌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Hypercube ; 4차원에서 모든 변의 길이가 같은 도형,
10개 이상의 처리기를 병렬로 동작시키는 컴퓨터의 논리 구조.
**백가경 ; 1991년생,
<심사평>**미학적 자유로움은 정확함 위에서 탄생한다는 것 보여줘**
우리 삶의 시간은 ‘살아내는’ 능동과
‘살아지는’ 수동이 얼마간 뒤섞이기 마련이다.
반면 우리가 시를 쓰는 시간은
온전한 능동만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투고된 작품들은
언어와 삶의 주체를 회복하려는 저마다의 고투다.
이 흔적을 따라 읽는 것은 경외가 가득한 것이었고
이들 가운데에서 한 편만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것은
고민을 더하는 일이었다.
5명의 작품을 정해 더 깊은 논의를 이어나갔다.
이미 모두 자신만의 것을 가지고 있는 고유함들.
김소영은 구어와 문어의 적절한 활용을 통한
활달한 에너지로 일순간 세계의 이면을
서늘하게 드러낼 줄 안다.
박규현은 개성 있는 호흡과 리듬이 돋보였다.
행의 배열이나 문장이 끝나는 지점을 어슷하게 두어
여운을 발생시키는 감각도 좋았다.
원예린은 무심한 듯 부리는 언어들로
미감을 이끌어내는 능이 상당했고
시적인 것을 발견해내는 밝은 눈도 인상 깊었다.
박다래의 원고는 끝까지 놓지 못했다.
평이한 진술 가운데 묘한 긴장감을 불러내는 능력.
숨어 있는 서정을 잡아채는 감각.
다만 문장의 반복이나 중복이 만들어내는 효과에 대해
스스로 한번쯤 의심해주었으면 하는 고언을 드리고 싶다.
백가경의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외 4편을 당선작으로 정한다.
백가경의 시는 명징한 언어로 작품을 구축한다.
어떤 모호성에 기대어 상상을 비약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사유와 진술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방법론은 자칫 단순해지고 평이해질 위험이 따르는 것이지만
시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 공고하게 세계를 확장시킨다.
미학적 자유로움은 정확함 위에서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름답고도 투명하게 상기시켜주는 시인이다.
앞으로도 내내 지난할 시간 속에서
시인만의 가장 고른 것들을 우리에게 꺼내주시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 박준, 김행숙, 김현(시인)
3.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 박규현 (2022년 한경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친애하는 메리에게
나는 아직입니다 여기 있어요
불연속적으로 눈이 흩날립니다
눈송이는 무를 수도 없이 여기저기 가 닿고요
파쇄기 속으로 종이를 밀어 넣으면
발치에 쌓이던 희디 흰 가루들 털어도 털어도
손가락은 여전합니다
사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녹지 않으니까
착하다고 말해도 되나요
의심이 없을 때
평범한 사람을 위해
젖은 속눈썹 끝이 조금씩 얼어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극야로부터 멀어지고 싶고
장갑을 끼지 않아 손가락이 아팠습니다
나에게도 손이 있다니
나무들을 베어 버릴 수 있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메리에게 답장을 씁니다
천사 혹은 기원이 있을 곳으로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눈밭에 글씨를 써도 잊혀지는 곳으로
우리가 전부여서 서로에게 끌려다니는 곳으로
눅눅한 종이뭉치를 한 움큼 쥐고 있었는데
눈을 뭉쳐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희망해 온 사람
무겁고 불편한 폭설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그들의 눈을 빌립니다
그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이가 될 것이에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메리, 나는 겨우 있어요
내일과 같이 여전히
*박규현(26세) ; 1996년 서울 출생, 현재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인 그는 문예창작과만 거의 10년째다. 안양예고 문예창작과와 서울과기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심사평>**랭보의 시, 떠올리게 해**
2022년 한경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다양한 세대의 목소리와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응모작이 많았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동시대인들의 절박한 생활,
희망을 찾고자 하는 고투 등이 반영돼 있었다.
본심에서는 네 분의 작품을 놓고 토론과 숙고를 거쳤다.
박서령의 ‘재수강’은 서사를 이어가며 감정을 표출하는 데 능숙했다.
그러나 편지 형식의 산문성으로부터 도약하는 힘이 부족했다.
박언주의 ‘도둑 잡기’에서는 생존과 죽음,
세계를 향한 질문들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적 이미지나 음악성을 가려버리는
설명적 진술들은 아쉬움을 키웠다.
임원묵의 ‘새와 램프’는 끊어질 듯 이어가며
이동하고 합류하는 언어 실험이 새로웠다.
그러나 언어는 평이해 가능성을 측량하기 어려웠다.
만장일치로 박규현의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읽는 줄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흡입력에 놀랐다.
이어질 수 없는 문장과 문장들의 연접을 통한
긴장감, 착란적 비약, 예상을 건너뛰는 불연속성에도
다 읽고 나면 이미지가 선연히 발생하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그는 사소한 일상의 가치를
애써 찾아가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나는 겨우 있어요/내일과 같이 여전히’라고 기록하는 시.
간신히 발설하는 이 미세한 약음이야말로
거대 담론이나 외치는 소리보다 시적 울림이 크다는 것을,
시는 ‘침묵하기’와 ‘겨우 말하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인에게 축하를 드린다.
✍심사위원 ; 손택수, 황지우, 김이듬(시인)
4. 내 침대는 오늘아침이 봄 / 박재숙 (202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침대에게 몸으로 물을 주는 건,
그에게서 달콤한 봄 냄새가 나기 때문이지
내 주변엔 봄이 너무 많아 침대도 나에겐 봄이야,
그건 아마도 침대를 향한 나의 일방적인 편애일지도 모르겠어
침대는 해마다 겨울이 알려주는 장례관습 따위엔 관심 없어
꿈과 현실 사이에서 철없이 스프링을 쿨렁거려도
푸른 봄은 여전히 아지랑이처럼 오고 있을테니까
침대 위에서 휴대폰 속 이미지나
사건들을 클릭하고 닫는 동작은 무의미해
그때마다 끝이 보이지 않던 내일이 침대 커버처럼
단순해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침대의 생각은 참으로 명료해
홀쭉하게 들어간 배를 쓰다듬으며,
지난밤 겹의 무게 뒤에 펼쳐진 피로를 걷어내고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얻지,
그건 내일이 던져줄 공복을 향한 강한 의지인 거야
공복은 채움의 예비의식이기도 해
그러므로 내 침대는 늘 비어서 오늘 아침이 봄,
때때로 난 널 사랑해 내 생각대로 꽃피게 하고 싶어
레시피는 간단해 갖가지 감정의 재료들을
봄 흙으로 만든 황토침대에 쏟아 부으면 끝,
그럼 우린 하루 한 끼 제대로 된 꽃밭의 식사를 할 수 있어
사계절은 한결같아 언제나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불쑥 깨진 거울을 들이미는 봄의 손을 보고 있으면
거울 속의 내가 보여 나인 듯 내가 아닌 듯,
너무 많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거울의 트릭이 보여
그래도 방언 같은 아지랑이의 말을 기억하는 내 침대는
여전히 오늘 아침이 봄
*박재숙 ; 1967년 전북 부안 출생.
중앙대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졸업.
2018년 ‘열린시학’ 신인상 수상.
<심사평>**유쾌한 상상으로 생명의 의지 캐낸 수작**
국제신문 신춘문예 공모에 보내온 작품들을 읽었다.
어느 해보다 전반적으로 서정적 색채가 두드러져보였으며,
‘어머니’의 존재를 포함한 가족의 이야기를
노래한 작품들이 많아 눈에 띄었다.
코로나 장기화로 인해 가족이라는 두터운 관계와
그 관계에서 오가는 정감에
시심(詩心)이 쏠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이 토론을 이어간 작품들은
‘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 외 4편,
‘흔들렸다’ 외 2편,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외 2편이었다.
시 ‘서부도서관 열람실에서의 중얼거림’은
너무나 질서 있게 꽂힌 도서관 서고와
검색대가 있는 열람실의 풍경을 보여주면서
그 공간에서의 작은 균열과 소란과 술렁거림과
이탈 욕망을 긴장감 있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시상 자체가 빛처럼 번득였으나 시어들의 선택과 활용이
다소 평이해 아쉬웠다.
시 ‘흔들렸다’는 하나의 존재에 투영되어 있는 다른 존재,
즉 존재들 사이의 유기적 연결에 주목한 작품이었다.
시의 마지막 대목에서 돌연한 충격을 주어 신선했지만,
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이 작품과는 편차가 있어
당선작으로 내는 데에 주저하게 했다.
심사위원들은 시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데에 모두 동의했다.
이 시는 회복되는 어떤 생명력의 강인한 힘을
사물인 침대에서 발견해내는 수작(秀作)이었다.
봄의 절기가 갖고 있는 환함과 꽃핌과 탄력을
침대의 공간과 끊어지지 않게
미묘하게 연결시키는 솜씨가 돋보였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에서도 개성적인 신예의 출현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게 했다.
시단에서 특별한 시의 목소리를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 강은교 권정일 문태준(시인)
5.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 / 이정임 (2022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잘방잘방,,,
가을 강은 할 말이 참 많답니다
저렇게 눈부신 석양은 처음이라고
내가 입을 열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도무지 닫혀 있던 입
흰 귓바퀴 꽃을 봅니다
안개 짙은 그 하얀 꽃을요
나는 휠체어를 밀어주면서 한 바퀴 즐거운 나의 집,
두 바퀴 세 바퀴 현(絃)을 타 봅니다
눈감고 오물오물 따라하는 어르신 핑 돌아 떨어지는 눈물
한낮의 요양원 창밖으로 찔끔 찍어 냅니다
사람들은 먼 나무위에 앉아 졸고
가을 강은 나를 자꾸 떠밀고 갑니다
알 없는 안경너머로 두 다리 유니폼의 건장한 날이 있습니다
서슬 퍼런 기백이 있습니다
백지로 두고 떠나자고 말한 적 있답니다
구절초 강아지풀 억새 어우러진 둔덕
제 모습에 반해 석양을 품은
비록 비위관(脾胃管)에 연명하지만
포르르 동박새 동백나무에 오르고
옛 기억 하나둘 돌아옵니다
참 맑은 하늘이 도리질 치다가 풀썩 잠이 들라 합니다
퐁당 물구나무를 서거나 물비늘을 따라
멀리멀리 헤엄쳐가기도 하는
가을 강은 심하게 몸살을 앓는 중입니다
소실점 잘방잘방 아스라이 붉은
<심사평>**균일한 울림, 따스하고 섬세한 서정 기대**
밤을 새워 영혼의 즙을 짠 문청들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시를 쓰면 굶어 죽는다’는 말을 듣지 않고
시를 쓴 이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엔 끊임없이 시를 쓰는 이들이 태어나고
그들의 시에서 영혼의 위로를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삶과 시. 지극히 이질적인 두 존재의 병치야말로
현생 인류를 설명하는 가장 따스하고
지적인 방식 아닐런지요.
‘점자책’ 외 4편, ‘트라이앵글’ 외 4편,
‘내 안의 붙박이장’ 외 4편,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 외 4편의
작품을 읽는 동안 마음 안이 따뜻해졌습니다.
현실과 유리되지 않았고
난해시의 범람에서도 거리를 두고 있었지요.
‘시가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해야하지?’하는
의문에 대한 답이라도 하듯
삶을 붙들고 있는 섬세한 현의 긴장이 느껴졌지요.
‘점자책’의 주인은 ‘손으로 세상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의 꿈을 새들이 부리 끝으로 톡톡톡 문 열어 달라’
‘혹등고래가 허공을 유영하듯
지느러미를 펄럭인다’고 묘사했습니다.
세계를 인식하는 차이를 결핍감이 아닌
자신만의 이해로 받아들였지요.
‘트라이앵글’은 작은 타악기를 통해
인간의 의미에 다가가는 인식의 바다가 있었지요
‘인간은 사랑을 이해하는 데 일생을 바친다’와 같은
범상한 인식이 트라이앵글의 진동을 통해
다가오는 순간 시의 본질이 은유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내 안의 붙박이장’은 함께 응모한
‘별주부전이 생각날 때 쯤’과 함께
우리 시의 고질적인 난해성을 극복한
좋은 예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낡은 가구와 고전을 통해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같은 인간의 본성을
쉬운 언어로 표현한 미덕이 있었습니다.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을 읽어가는 동안
제목이 주는 일시적인 번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심성이 맑고 착한 시였지요.
휠체어를 밀며 휠체어 안의 어르신에게 조용조용
가을 강을 얘기해 주는 모습이 따스했습니다.
쉬운 언어가 갖는 촉촉한 질감이
강 건너 무지개처럼 펼쳐지는 신비한 느낌이 있었지요,
‘내 안의 붙박이장’과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 모두
당선작이 될 시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귓바퀴 꽃 하얀 가을 강’을 당선작으로 정한 이유는
함께 응모한 ‘숙부’, ‘내가 꽃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 봄 언저리 호박벌이 맨땅에서 구를 때’와 같은
시편들이 지닌 균일한 울림 때문이었습니다.
따스하고 섬세한 서정의 물결이
세계를 향한 큰 울림이 될 수 있음을 당당히 보여주는,
멋진 시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심사위원 ; 곽재구(시인, 순천대 교수)
6. 엄마 달과 물고기 / 김미경 (2022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물고기는 내 오빠다
오빠가 물고기인줄 알면서도 내 엄마 달은
물살에 휩쓸려 떠밀려가는 물고기를 잡지 못한다
그러나 엄마는 달이다
눈물이 없는 달
우리가 잠든 밤마다 환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면서
놀라고 걱정스럽게 만드는 달 말이다
이런 달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각만 많다
물거품이 이는 곳에 가면
은빛 곡선을 가진 오빠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아기가 발을 핥고 있어서 젖 물릴 때가 됐다고 한다
물고기의 얼굴은 내 얼굴
우리는 형제다
물속에 잠긴 달이 운구릉을 헤적거리다
곱은 다리에서 암흑 속으로 내려간다
이번에는 검은 그림자에 싸여 비틀거리는 아빠도 함께다
그러나 엄마는 달이다
힘이 세다.
*김미경 ; 1964년 제주 출생, '시와몽상' 동인
<심사평>**활달한 시적 상상력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개성적 시선 돋보여**
2022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전국 각지에서 199명이 총 1142편의 작품을
응모하여 성황리에 마감되었다.
코로나로 힘든 시국 속에서도
문청들의 시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시 부문 199명의 응모자의 작품 중 예심을 거쳐,
본심에서는 최종 10편의 작품이 거론되었다.
올해 신춘문예 응모작들의 특징은
시의 길이가 길어지고 산문시 형태가 많았다는 점이다.
내용면에서도 현대인들의 소외와 불안,
서정성이 짙은 작품 등 다양하고
참신한 시적 경향을 선보였다.
본심에 오른 응모작 중에서 눈길을 끈 작품은
'엄마 달과 물고기', '거품공장 공장장 탁씨',
'뜨겁고 흰 유언' 등 3편이었다.
'거품공장 공장장 탁씨'의 경우,
아웃사이더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으며,
'구름(담배 연기)'과 '죽음'이라는 이질적인 결합이
시의 비극성을 환기하는 미덕을 보이고 있다.
다만 시 세계가 확장되지 못한 채
관습적으로 마감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뜨겁고 흰 유언'은 '어미 개'의 죽음을 통해
어미 개가 지닌 모성의 세계와 인간 혹은
공권력이 지닌 폭력성을 포착한 작품이다.
안정적인 시적 구조와 상징을 통해
시의 진정성을 잘 보여주는 반면
상상력의 변용과 확장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논의 끝에 '엄마 달과 물고기'를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엄마 달과 물고기' 외에 '눈, 어슴푸레한',
'오래된 서랍' 등 응모작들도 편차 없이
고른 수준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활달한 시적 상상력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시각이 개성적이며,
시 창작에 몰입한 고투의 시간이 육화되어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탁월하다는 점이 돋보였다.
당선작인 '엄마 달과 물고기'는
모성의 부재로 인한 비극미와 더불어
'달'이라는 매개를 통해 역사인식은 물론
은유와 상징성까지 획득하고 있다.
이때의 '달'은 타자와의 조화로운 삶을 염원하고,
공동체의 의지를 추동하는 매개로 작동하고 있어
'엄마 달과 물고기'를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수상자에게는 거듭 축하를,
응모자분들께는 깊은 감사와 응원을 전한다.
✍심사위원 ; 김수열, 서안나(시인)
7. 비 오는 날의 스페인 / 이신율리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린다
사과는 쓸모가 많은 형식이지 죽음에도 삶에도
수세미를 뜬다 사과를 뜬다
코바늘에 걸리는 손거스러미가 환기하고 가는 날씨
를 핑계로 미나리 전이나 부칠까
미나리를 썰 때 쫑쫑 썰어대는 말이 뒤섞인들 미나리
탕탕 오징어를 치며 바다가 보인대도 좋을
다행히 비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올리브 병에서 들기름이 나오면 핑계 삼아 한판
사과나무에서 다닥다닥 열린 복숭아를 다퉈도 되고
소금 한 주먹 넣으며 등짝도 한 대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는다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스페인보다 멀리 우린 가끔 떨어져도 좋을 텐데
철든 애가 그리는 그림 속에선 닭 날개가 셔터를 내리고 오토바이를 탄 새가 매운 바다에서 속옷과 영양제를 건져 올렸다 첫사랑의 정기구독은 해지했다
꽃병에 심야버스를 꽂았다 팔다리가 습관적으로 생겨나는 월요일, 아플 때마다 키가 자라는 일은 선물이었다
불꽃이 튀어도 겁나지 않은 나이는 이벤트였지
단풍 들지 않는 우리를 단양이 부른다 스페인은 멀고
안전벨트를 매고 접힌 색종이처럼 사진을 찍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누군가 멀리 떠난다
*이신율리(62세) ; 1959년 충남 부여 출생,
용인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악과 졸업,
제8회 오장환 신인문학상 당선
<심사평>**인생론적 깊이 함축, 언어적 안정감 탁월**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응모작들은 예년에 비해 숫자는 조금 줄었지만 그 수준과 내실은 더욱 탄탄해졌다고 할 수 있다. 역량 있는 신인들이 이렇게 다양한 작품을 투고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기쁘게 다가왔다. 심사위원들은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을 읽어가면서 다수 작품이 빼어난 언어와 안목을 보여주었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시단의 주류 시풍이나 관습적 언어를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의 경험적 언어에 오랜 시간과 정성을 쏟았을 작품들이 많았다. 침체기에 있는 한국 시는 이들의 언어를 통해 새로운 개진을 해갈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그 가운데 김하미, 이신율리, 조민주씨의 작품을 오래도록 주목하였는데, 숙의 끝에 상대적으로 균질성과 언어적 안정감을 가진 이신율리씨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신율리씨의 ‘비 오는 날의 스페인’은, 비가 내리는 풍경 속에서 구성해가는 사람살이의 외관과 생태와 속성이 인생론적 깊이를 함축하고 있는 수작이다. 그 안에는 음식들에 관한 숱한 기억의 구체성과 함께, 스페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더 멀리 떠나 있어도 좋을 사랑과 불꽃과 시간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수없는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의 파노라마가 환상성과 역동성을 함께 거느리면서 그림처럼 사진처럼 다가온 선물이자 이벤트였다. 더욱 성숙한 시편으로 세계일보 신춘문예의 위상을 높여주기 바란다.
당선작이 되지 못했으나 구체성과 심미성을 두루 갖춘 사례들이 많았다는 점을 부기한다. 대상을 좀 더 일상 쪽으로 구체화하여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는 타자들을 애정 깊게 응시한 결실도 많았다. 다음 기회에 더 풍성하고 빛나는 성과가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마음 깊이 당부 드린다.
✍심사위원 ; 안도현(시인), 유성호(평론가) (예심 ; 천수호 김종태(시인))
8.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 강영선 (202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시어른이 돌아가시고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에서 안부 전화가 왔다
노인정에 가기는 어정쩡한 젊은 노인에게
방을 내주어도 되냐고 동네 이장이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마당의 빈터는 앞집에서 농기구를 갖다놓아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샘가 감나무에 감이 무겁게 열리자 옆집에서
곶감을 좀 보내줄테니 감을 따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빈 닭장에 닭을 키우고 싶은데 그래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다
전기도 수도도 끊어놓은 그 집에 물이 들어오고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동네에서 가장
밝은 집이 된 빈집
빈집의 주인은 빈집인데
멀리 있는 아들 내외에게 물어온다
떼 내지 않은 나무 문패는 옛 주인의 이름으로 살아있어
하늘 번지수를 동 사무소에 가서 물어야 할지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강영선 ; 1969년 경북 문경 출생, 문경고등학교 졸업,
울산 중구 문화의 전당 시창작교실 회원.
<심사평>**담백한 시어지만 행간에 깊은 사유 담아**
<농민신문> 신춘문예는 다른 일간지와는
변별되는 특성이 있는 듯하다.
전통적 서정이나 생활의 실감이 전반적으로 강한 편이고,
실험적인 경향의 작품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도시 풍경보다는 농촌 현실에 대한 묘사나
자연과의 교감이 두드러진 편이다.
그야말로 대지에 뿌리내린 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330명이 응모한 1943편의 투고작 가운데
다음 네명의 시를 두고 마지막까지 논의를 이어갔다.
결이 곱고 섬세한 언어로 자연의 상징성을 잘 살린
<꽃누르미-그들의 압화> 외 4편,
활달한 상상력과 구수한 입담으로
농본적 세계를 재미있게 표현한
<주걱을 읽어주시겠습니까> 외 6편,
슬픔과 상실의 풍경조차 감정의 절제와
발랄한 언어감각으로 새롭게 조형해낸
<어떤 필기체> 외 4편,
담백하고 간결한 시어와 리듬으로
생활의 단상을 묵직하게 펼쳐낸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외 4편 등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다.
당선작으로 뽑은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는
제목에서부터 묻어나는 어떤 무심함이
오히려 감정과 의미 과잉의 시대에서
신선하고 돋보이는 면이 있었다.
투고한 작품 전체가 얼핏 무심하고 담담해 보이지만
행간에 많은 이야기와 깊은 사유를 거느리고 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이 많은 이의 터전이 돼주고
서로 연결해주는 따뜻한 풍경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이 시는
생활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선과
타자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시인의 미덕이고
가능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심사위원 ; 장석남, 나희덕(시인)
<울산저널>
울산 중구 문화의 전당에서 4년간 시 창작 수업을 들은
강영선 씨가 '2022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그의 시 당선작인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의 주인공은
많은 이의 터전이 돼주는 시골 빈집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을 통해 연결되는 사람들의 모습과
따뜻한 풍경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시다.
강영선 씨는 "이 시를 문화의 전당
창작 수업 시간 숙제로 쓰게 됐다"며,
"시댁의 시골 빈집에서 일어난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비어 있는 집은 늘 어두운데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고 나눠서 사용하다 보니 환하게 밝아졌다"며,
"각박한 세상에서 함께 나누고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 심사평에서
장석남, 나희덕 시인은 "제목에서부터 묻어나는 어떤 무심함이
의미 과잉 시대에 신선하고 돋보이는 면이 있었다"며,
"이 시는 생활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선과
타자를 따뜻하게 감싸 안은 태도에서 나온 것 같다"고 평했다.
강영선 씨는 "살면서 어둠이 늘 따라다니는 것 같아
피하려고만 했는데 생각해보니
어둠이 없으면 밝음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당선되고서 깨달았다"며,
"어둠이 시를 짓는 자양분이 됐다"고 밝혔다.
광부이자 농부의 딸로 태어난 그는
노동의 무게로 늘 굽어 있는
아버지의 등을 보며 성실함을 배웠고,
그 덕분에 자신도 8년 동안 시를 꾸준히 쓸 수 있었다.
그는 "평소 많은 시를 읽어준
중구 문화의 전당 조숙 선생님께 감사하다"며,
"당선을 계기로 시에 대한 책임감을 많이 느끼기에
앞으로도 시 창작 교실에서 열심히 시를 쓰겠다"고 밝혔다.
202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에 총 330명이 응모했으며
1943편의 투고작 가운데 강영선 씨의
시 <그러면 그러라고 할지>가 당선작으로 뽑혔다.
*정승현 기자
9. 시드볼트 / 오산하 (202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눈을 감았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국가를 떠올리면서
습한 냄새를 맡으면서 안개 속으로 뛰어들면서
길거리의 새를 하나둘 세면서 걸어
눈이 마주쳐도 날아가지 않는 새
발로 바닥을 밟아도 도망가지 않는 새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다가 넘어졌어
까맣게 피멍이 들었다
하루가 지나서 생일 축하해 문자를 받고 시차가 생겼어
하루 늦게 생일을 맞이하면서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과
선물 받은 오르골을 돌리면
모르는 노래가 나온다
노래는 언젠가 끝나겠지
전쟁과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언제가 가장 끔찍할 거 같아,
라는 노르웨이에 가고 싶대
거기에 자신을 묻을 거라고 했어
나는 Green Day의 Holiday를 들으면서
반역자! 반역자! 죽어버린 사람들의 피가 흘렀어
아 곧 종말이구나 그래서 라는 노르웨이에 가고 싶구나
두 개의 음 두 개의 박자
머리 위로 떨어지는 15층의 사람과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차
사람의 바싹 마른 피부와
솟구칠 힘도 없는 피 물 물 물 전쟁이 끝나지 않은 곳에
다 녹아버린 얼음의 흔적과 끈적한 더위가 있어,
라는 붙잡아도 부서진다
길을 걷다가 쪼그려 앉아서 새를 가만히 쳐다봤어
새가 내 눈알을 파먹으려고 해도 가만히 있었어
계속 굴러가다가 영원히 남도록 그곳은 마치 도서관 같다
추워 라는 시드볼트로 들어가 문을 닫았어
이건 한 세기 전 살아있던 사람의 눈알이구나
계속 걸었어 뚝 뚝 흘리면서 걸었어
끊어진 다리 뒤집어진 배
치지 않는 파도 하늘에서 떨어진 새
검은 새 검은 눈동자 뽑힌 눈알 굴러가는 심장
굴러 떨어지는 법을 배운 나 깔깔 웃는다
*오산하 (24세) ; 1998년 경기도 성남 출생,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예정.
<심사평>
**시류에 민감하면서도 그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개성을 보여주는 시**
본 심사평은 시의 어디어디가 부족하다는 식의
충고를 담고 있지 않다.
자기 작품에 관한 엄혹한 평가를 원하는 분도 있겠고,
적절한 지적은 실제로 창작과 퇴고에 도움이 된다.
다만 투고자에게 필요한 건 비판보다 응원이라고 믿는다.
계속 시를 써도 좋다, 이런 말을 누가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날이 내게도 있었다.
시가 나를 부른 적도 없고,
그래서 나 없이도 시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아 싫고 무서웠다.
이번 심사평을 통해 당신들 없이는
우리 시가 별로 안녕하지 못하리라는 예견과 확신을 전하고 싶다.
'랠리'의 건조한 문체는 대상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한때 마음을 쏟았던 대상이
‘나’로부터 문득 동떨어져 존재하게 되었기에,
그렇게 어쩔 수 없거나 어쩌지 못하는 거리감이
건조한 문장 사이사이로 유출된다.
'날개 뒤에는 근육이 있습니다' 외 4편은 한마디로 거침없다.
하지만 거침없는 중에도 시의 언어는 산만하지 않다.
넘칠 듯 넘치지 않게 제어되는 정념이 놀라웠다.
'베네수엘라'는 강렬한 도입부와
여운 깊은 결구로 독자를 매혹한다.
이 작가는 자기 세계를 어느 정도 구축한 듯하다.
작품이 조금만 더 쌓이면 그가 좋은 시를 쓴다는 사실에
누가 토를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치카의 숲'은 앞으로도 손해를 볼지 모른다.
신인상 심사는 단정한 정념보다는 떠들썩한 감수성에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등단이라는 문턱을 넘고 나면
이처럼 넉넉한 분량에 담긴 유려한 문장이
외면당하는 일은 없다.
지치지 않았으면 한다. '스로디카즈' 외 4편은
수많은 소년소녀가 등장하고,
위악적인 정황과 대화가 난무하며,
엄청나게 수다스럽다.
당연하게도 몇몇 기성 시인이 떠올랐으나
그럼에도 투고자의 연작은 여전히 새로웠다.
이 새롭고 좋은 작품을 다른 지면에서 곧 만나리라 본다.
'시드볼트' 외 4편은 비참한 죽음과 살아남음에 관한 이야기를
일관되게 풀어낸다.
아포칼립스를 예감하고 노르웨이 ‘시드볼트’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 ‘라’와 종말에 남겨진
(혹은 종말을 목도 중인) ‘나’는,
어느 쪽이 살아남았는지와 상관없이 비슷하게 비참할 뿐이다.
삶과 죽음을 공평하게 끔찍한 것으로 만드는
저 압도적 절망감은 때로 ‘산불’로,
때로는 ‘깨진 도자기’나 ‘폭풍우’로 형상화된다.
시인은 “간신히 우연으로 살아가는 사람들”('폭풍우')로서
분명히 어떤 현실의 환유일 비극적 사태를 생생히 기록한다.
비슷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투고작이 많았음에도
오산하 씨의 활달한 리듬은 단연 돋보였다.
시류에 민감하면서도 그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개성을 보여주기가
쉽지 않음을 알기에 더 믿음이 갔다.
심사위원단을 대신해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 김상혁, 송재학, 김소연(시인)
10. 고요를 찾다 / 김종숙 (2022년 머니투데이 경제 신춘문예 시 당선작)
요동치던 밥솥에 뜸이 들고
솥뚜껑을 열면 거기
너무도 고요해진, 반듯한 밥알들
끓어 넘치고 치솟던 설익은 시간이 지나고
잦아든 잘 지어진 밥
까칠한 쌀알들이
반지르르한 한솥밥이 되기까지
가령, 몇 억 년 동안 쌓인 사막의 무늬들이나
물에 씻긴 돌의 생김새 같은
저의 격렬을 저도 종잡지 못한 일을
따라 했을 뿐이다
또는, 반듯한 간격을 맞추어
파랗게 자란 벼포기들이
탈곡이 되고 같은 자루에 동량으로 담기는 동안
바르르 떨다 잠잠해진 저울의 바늘이 함께 들어 있어
더도 덜도 없는 정량,
들쭉날쭉 흐트러진 적이 없다
흔들릴 만큼 흔들린 벼 포기들
털릴 만큼 털려 본 낟알들
갈 만큼 다 걸어가 보고야
능숙하게 제 길을 가거나 돌아오는 답습처럼
그 뒤끝은 저렇게
결 고른 한솥밥이 되는 것이다
이쪽도 넘보고 저쪽도 넘보던
휘청이며 허기진 몸이 그 고요해진 밥을 먹고
제힘을 힘껏 잡는 것이다
*김종숙(45세) ;
<심사평>
올해엔 시 부문 응모작품 수가 적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이 많았다.
<도배사>는 여자 도배사의 아슬아슬한 삶과 닮은
작업 과정을 통해 "벽이 꽃그림자 속으로 환하게 스며드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종결어미가 모두 "~다"로 계속 이어지면서
시가 둔탁하고 리듬감이 부족했다.
<어머니 몸 속에는…> 작품은 뼈마디마다
삶의 무게로 점철된 통증들이 신음소리인
비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회한과 애정이 잘 담겨져 있다.
다만 응모작 대부분이 시의 주제나 의도와 달리
너무 길어 산만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목수의 딸>은 목수였던 아버지의 삶을 아련하게 반추하고 있다.
목장갑을 빨면서 아버지의 한 생애를
뒤돌아보는 시인의 눈이 따뜻하다.
다만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이
선정을 다음 기회로 미루게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고요를 찾다>였다.
벼 낟알이 쌀이 되고 밥이 되기까지, 하여
고요해지기까지 과정을 그야말로 '반듯하게' 그리고 있다.
잘 익은 따뜻한 밥을 앞에 대하듯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작품 중에 "가령", "또는" 같은 추임새도
시적 긴장을 확장시켜주고 있다.
함께 응모한 작품들에서도
시인의 세상을 바라보는 깊이를 느끼게 하고 있어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심사위원 ; 이희주(시인), 이순원(소설가)
11. 다섯 개의 물의 장면 / 이정은 (2022년 뉴스N제주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영주일보 흡수)
1
11월, 시침은 어디로 가고 없을까
카라꽃 조화를 11년째 키우고 있어요
물 없는 화병에서 꽃대는 올라오고
하얀 꽃잎은 향기를 뿜은 듯 버성기네요
속아주어야겠어요, 꽃이고 싶어 하잖아요
빈 화병에 물을 줍니다
찰랑찰랑 아파트 지하 수면실로 타고 내려가요
보일러 아저씨 잠이 깨요
달력 한 장 젖어요
2
양수리 두물머리
검푸른 물의 흐름이 엉켜있어요
마른 장작 타는 체취, 당신을 불러들인 건 나의 실수였습니다
목으로 넘어가는 와인 한잔이 나의 독주이기를
같이 했던 시간들은 윤슬처럼 흩어집니다
물의 카페에서 멀어질 때까지
3
어쩌지, 양수가 흘러내려
생명 다한 꺼져가는 촛불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없어
녹아 굳어버린 촛농들을
무덤 삼아 수그러드는
작은 호흡
물의 끝은 여기까지
인큐베이터 안이 추워
4
어느 시인과 사랑을 했어요
더 이상 뭘 원하시는 거죠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몰라요*
5
구피의 유영이 당신의 눈동자를 흐리게 하지요
몰려다니다가도 삐진 양 꼬리치며 돌아서는
구피의 번식력이 안방을 휘젓고 있죠
앉아 있을 장소조차 없이 불어난 구피 종자들
쏟아진 물난리에 익사를 조심하세요
물의 장면, 되돌이표를 그려 넣을까요
*김종삼의 시 <民間人>에서 가져왔으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울음을 터뜨린 한 嬰兒를 삼킨 곳.
스무몇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이정은 ;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 석사,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교육문예창작회 회원
<심사평>**해체’와 ‘일원’을 지향하는 작품들**
한 20년 전만 해도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분들은
대개 20대 안팎이었다.
그런데 상당수가 50대 이상인 것을 발견한
우리 심사 위원 일동은
구시대의 가치관에 의한 작품들뿐이면 어찌하나 걱정했다.
그런데 예심을 거쳐 넘어온 작품들 대부분이 의외로 해체적이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테마 면에서는 ‘일원(一元)과 다원(多元)’,
구성 면에서는 ‘인과와 해체’,
표현 면에서는 ‘전인적(全人的) 인식과 반응’에
고루 초점을 맞추되 유기적(有機的)’인 작품을 뽑기로 합의했다.
어느 한 쪽에만 맞춘 작품들은 잘 읽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제 이들을 융합해 새로운 가치관과
시학을 마련할 시대가 되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기준으로 살펴본 결과
황현자씨의 「현관」이 눈에 들어왔다.
생선 장수인 엄마에 대한 추억을 제재로 삼은 작품으로,
이런 제재를 택할 경우 흔히 그리움이나 효를 내세우기 마련인데,
끊겼다 다시 이어지는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
상반된 욕망을 드러내 상당히 입체적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주목을 끈 것은 김용천씨의 작품이다.
「탁란 청춘」은 취업을 위해 여기 저기 자기 소개서를 써 내고
기다리다가 우리 사회가 뱁새 둥우리에 알을 낳아 대신 부화시키고,
둥지까지 뺏는다는 뻐꾸기 사회라는 걸 깨닫고
절망스러워 거리로 뛰쳐나가는 젊은이를
화자로 내세운 작품이고, 「꿀벌 나라」는
어느 일벌이 꿀 따는 사람 하나가 등장했다며
다 뺏기기 전에 나눠 갖자고 제안 하자
계층 별로 분열을 일으켜 애벌레들이
다른 벌레들의 먹이 감이 되었는 데도
못 보는 모습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나정욱씨의 「다족류의 인간들에게」와 「랭보의 행보」는
화자 자신도 해체적임을 고백하는 작품이다.
앞의 작품에서는 다리가 열한 개인 사람과
열두 개인 사람들이 싸우는 걸 못마땅해 하지만,
자신도 아침에는 열두 개였다가 저녁에는 열한 개라며
그 까닭을 알려 줄 사람이 없느냐고 절망한다.
그리고 뒤의 작품에서는 ‘시는 인생을 닮았고’,
그래서 앞뒤가 없다면서 ‘행보’라는 단어를 읽다가
‘랭보’가 생각났다는, 말장난(fun)으로 비판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정은씨의 「다섯 개의 물의 장면」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다.
결혼식 부케나 장례식 때 관을 장식하는
‘카라꽃 조화’를 11년씩이나 기르면서
… 생화가 아니라 조화다 …
‘빈 화병’에 물을 주고,
그 물이 흘러내려 지하 보일러실 아저씨의 잠을 깨우고,
자궁의 ‘양수’로 이어 가는 줄거리 역시 해체적이지만
새 생명의 탄생 쪽으로 지향하고,
상상과 환상과 무의식적 본능과 의지와 비판을
한 작품에 담기 위해 연작시 형식을 취하는 점은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를 여는데 기여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걸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부탁드린다.
현대 사회에서 ‘일원’은 낡은 느낌이 들고,
‘해체’는 혼란스러워 절망을 가중시킬 뿐이다.
삶도 작품도 ‘통합ㆍ조절’ 쪽으로 지향하는 게
자기를 완성하는 길이니 참고하시기 빈다.
✍심사위원 ; 윤석산(시인)
(예심, 홍창국, 현달환, 강정림, 이은솔(시인))
12. 빈집 / 박수봉 (2022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빗속에 집이 잠겨있다
태풍이 온 나라를 휩쓸었지만 빈집은
날개를 접고 흔들리지 않았다
식구들은 모두 전주로 떠나버리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빈집
퇴행성관절염에 어깨 한쪽이 내려앉은 채
기울어 가는 생을 붙들고 있다
빈집의 담장을 지나다보면 허옇게 바랜 집이
손을 저으며 말을 걸어온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와 그 길로 져 날랐던
가난과 고단함에 대해서 빈집은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빈 방에다 새긴다
행간마다 피어나는 유폐의 점자들
마당 우물터로 목마른 잡초들이 조촘조촘 들어서고
버리고 간 장독대엔 혼잣말이 웅얼웅얼 발효 중이다
죽은 참가죽나무에 앉아 종일 귓바퀴를 쪼아대던
새소리도 날아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골목
일몰의 욕조에 몸을 담근 빈집이
미지근한 어둠으로 눈을 닦는다
종일 입술을 다문 대문을 빈집은
몇 번이고 눈에 힘을 주어 밀어 보지만
끝내 대문 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마당 깊은 곳까지 어둠이 차오르면 빈집은
눈을 들어 별자리를 더듬는다
식구들이 몰려 간 서남쪽 하늘
별이 기울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들쥐가
들어앉아 새끼를 낳았다
이따금 달빛이 새끼들의 털을 핥아주고 갔다
들쥐는 빈집의 뒷다리를 갉아 먹으며 자라고
집은 제자리에서 우물처럼 늙어간다
빈집의 늑막 아래로 어둠이 점점 차오른다
*박수봉 ; 전북 장수 출생으로, 경기대학교를 졸업했다.
지난 2018년 최충 문학상에서 최우수상을,
2021년 중봉 조헌 문학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심사평>**주관적 정서의 객관화, 소통 잊지 않은 작품**
전주에 펑펑 함박눈이 쏟아지겠다고 예보된 날 신문사로부터 본심에 올라온 14편의 시를 전달받았다. 이름을 지운 응모자의 시편들은 자아와 세계의 화해 불가능을 확신하는 비규범성이나 이질적인 것들의 혼돈 등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혼종적 욕망이 들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의 시단 풍토와 다르게 뜻하는 바가 분명했고 시어들 개개의 인상과 소리 맵시가 어울려 새 형상을 짓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응모작 중에서 <괄호 밖의 사람들>, <빈집>, <편의점 라이프>, <오래 머무르는 풍경>, <바람의 건축> 등의 작품을 오래 들여다봤다. <괄호 밖의 사람들>은 ‘괄호 안의 사람들’을 궁금하게 함과 동시에 모래가 환기하는 삶의 황폐성을 떠올리도록 하고, <오래 머무르는 풍경>에 적힌 ‘경작금지라는 팻말’과 ‘누군가는 스며들고 또 누군가는 닮아간다’라는 구절은 시 읽는 즐거움을 주었다. <편의점 라이프>와 <바람의 건축>도 심사위원들의 시선을 끌었다.
숙고 끝에 <빈집>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태풍을 피해서 모두가 떠난 빈집, 삶의 내력과 유폐된 시간을 감당하는 의인화는 고단한 시간을 견딘 타인의 이야기, 동시대 모두의 사연으로 읽혔다. ‘평생 걸어온 길의 기울기’에 어울린 빈집의 서사는 시 공부를 열심히 한 흔적도 보였다. 시는 주관적 정서의 객관화이며, 소통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시적 형상화에 공력을 들인 <빈집>의 시인,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민윤기(서울시인협회 회장), 이병초(전북작가회 회장)
✍심사위원 ; 민윤기(서울시인협회 회장), 이병초(전북작가회 회장)
13. 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 / 김종태 (22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뉴타운 소문을 태우고 마을버스가 들어왔다
미숫가루처럼 흙먼지만 내려놓고 폐교를 한 바퀴 돌더니
제비처럼 고샅길을 빠져나갔다
언젠가부터 절개지 묵정밭엔 어린 의혹들이 심겨지기 시작했다 깨진 항아리 속에 갇혀있던 뻐꾸기 소리에 둔덕 까마중 몇, 복부인 같은 선글라스를 끼고 귀고리를 흔든다 전과자인양 담장 안을 기웃거리던 햇살, 굴다리 밑으로 잠입하고 배 밭으로 달려간 그림자 하나가 이른 아침부터 풍선 불 듯 바람의 평수를 후후- 부풀린다
두부장수 확성기에 귀를 열던 도토리들 일제히 상수리나무를 버린다 선거벽보 어지럽게 붙어있는 축대 아래, 사방치기 놀이를 하던 아이들 오후가 오랜만에 찾아온 밀짚모자 주위로 몰려든다
뻥튀기 소리에 놀란 해바라기, 발밑에 검은 태양들을 투투둑- 파종하고 늦게 외출한 채송화는 발뒤꿈치를 높이 꺼내 분꽃의 망설임을 흔든다 태양이 시작되면 빨간 인주통이 열렸다 몇 평 봄이 처분되는 계약서 그 끝, 마을경로당에선 코스모스와 금잔화가 형광빛 포스트잇처럼 끝도 없이 유예되고 있었다
이장 집 옆 모과나무가 늙은 귀띔이라도 들은 걸까 오래된 우물 속에다 노란 주먹을 툭툭 박았다 내가 헐값에 처분했던 그 시절 변두리 네온사인과 외딴집에 세를 든 귀뚜라미의 지하 방엔 오래도록 해가 들지 않았다 지난밤 거처를 잃은 두견새와 갑작스레 약수터에서 쫓겨난 달빛은 창문 틈에 허리가 끼어 아침까지 웅웅거렸다
누가 분실한 것일까
공사 중인 안테나처럼 힘껏 꼬리를 세운 고양이 한 마리
방금 눌러 찍은 붉은 태양이 채 마르지도 않은 부동산 계약서를 입에 물고서
인적 드문 논밭을 검은 천 조각처럼 가로질러 어디론가 재빨리 구겨지고 있다
*김종태 ;
<심사평>
2022 전북도민일보의 신춘문예 응모작을 읽는 시간은 ‘어떻게 시를 써야 울림이 깊은가’에 대해 다시 되짚어보는 시간이었다.
천 편이 넘는 응모작에는 막 시를 쓰기 시작한 듯한 사람의 작품도 있었고, 시적 완성도와 문장의 긴밀도가 만만치 않은 작품도 있었다.
각주와 외래어가 난무하는 작품과 언어의 유기적인 연결이 아쉬운 작품도 많았다. 패기나 참신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적었고, 그만그만한 내용이나 익숙한 수사가 버무려진 작품도 많았다.
주제 면에서는 개인의 서정을 노래한 작품부터 시대의 불합리에 대한 작품까지 스펙트럼이 넓었다. 시국의 영향인지 사회의 어두운 면과 개인의 어두운 시간을 직조한 작품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었다.
최종까지 남은 작품으로 김선호 님의 ‘빙하의 숲을 걷다’, 조희 님의 ‘파울라가 있는 풍경’과 김종태 님의 ‘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 장성희 님의 ‘폭우’, 김수형의 ‘포스트잇’이었다.
모두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작품들이었으나, 제목이 내용을 끌고 가지 못하거나 내용이 제목을 받쳐주지 못하기도 했다. 시상을 직조하는 솜씨가 매끄럽지 못하기도 하고 제출 작품의 수준이 고르지 못하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은 조희 님의 ‘파울라가 있는 풍경’이었다. 시상을 전개하는 힘이나 주제를 끝까지 밀고 가는 힘이 좋았으나 아쉽게 되었다. 조금 더 힘을 내면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김종태 님의 ‘인주 묻은 태양의 행방’은 자신만의 언어로 시대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수준급이다. 삶의 현실에서 시의 뿌리가 발아했으나 주관에 휩쓸리지 않고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는 솜씨가 시의 밭을 오래 가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도 고른 수준을 보인 점과 앞으로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심사위원 ; 김영(시인, 전북문학관장)
14. 일 잘하는 요즘 애들 / 전예지 (202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프린터기가 또 말썽이다
이 애물단지를 버리든가 고치든가 이게 대기업의 수준인가요?
하루에 기본 다섯 번을 1층에서 2층으로
걸어야 하는 에스컬레이터 아니면 계단으로
왼쪽 끝 후문 쪽에서 오른쪽 끝 정문 쪽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프린터기를 하나 놔주면 이런 고생은 안 해도 될 텐데
겨우 몇 십 만원이 아까워서 사람을 갈아 버린다
두 여자는 욕이란 욕을 다 입에 담지만
차마 입을 벌리진 못한다 멋쩍게 서로 한숨만 쉴 뿐
낡고 늙은 마트에 새로 생긴 텅 빈 매장의 취급은 이 정도
[자리 비움]
자기는 왜 자꾸 마음대로 자리를 비워?
일하기 싫어?
하필 매니저가 없는 날
혼자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본부장이 찾아온다
억울한 아르바이트생은 그나마 매니저보다 깡다구가 있다
프린터기가 2층에 있어서 왔다 갔다 하려면 어쩔 수,
말대꾸도 하고 참 요즘 애들 무섭다
눈이 순간 흰자로 뒤덮여진 아르바이트생을 보고
머리 빠진 본부장은 혀를 찬다
죄송합니다
속으로 본부장이 매장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입으론 여전히
*전예지 ; 한신대 문창과 4년 재학중,
<심사평>**화려한 수사 없었지만, 일상의 소중함 일깨우는 어법**
202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의 관심은 뜨거운 편이었다. 비록 응모편수는 지난해보다 약간 줄었지만 응모작품의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는 게 중론이다.
우선 응모자들의 연령대가 2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고루 분포되었지만 50~60대의 응모자가 많았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현상일 수 있다. 그만큼 사물을 응시하는 시각이 깊고 인식의 수준이 높았다고 보여진다.
시가 죽었다고 말하는 시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문학의 영역인 것을 응모 편수를 통해 알 수 있다.
응모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경향으로는 거대담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생명 문제라든가 환경 문제라든가 통일 문제라든가 코로나 팬데믹 문제라든가 하는 거대담론을 다룬 시편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반면 개인의 일상생활에서 모티프를 얻거나 사소한 경험에서 소재를 찾는 경향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실험적인 응모작을 만날 수 없었다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이는 안정된 작품으로 위험부담 없이 순항하고 싶다는 의지의 발현일 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예시영의 '카이트 서퍼', 김현주의 '그림자를 수집하는 방법', 전예지의 '일 잘하는 요즘 애들'이었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쉽게 합의에 이르지 못해 장시간 토론과 논의를 거쳤다.
'카이트 서퍼'는 활달한 상상력과 긴 호흡이 미덕이면서 '그리고 바람이 불면/이 연서(戀書)가 당신에게 도달할지 모른다'와 같은 당돌한 문장이 시선을 끌었지만 응모작 모두 숨 가쁘게 긴 호흡이 문제였다. 압축미를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김현주의 '그림자를 수집하는 방법'은 어법이 새롭지 않다는 데 심사위원의 의견이 일치했다. 산문시의 군데군데 상투성의 혐의가 보이는 것도 문제일 수 있었다. 그러나 '푸른 별빛이 숨죽인 그들의 입속에서 검게 변해 자라졌다'와 같은 문장은 돋보였다.
전예지의 '일 잘하는 요즘 애들'은 사무실의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다. 프린터기가 말썽이어서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내려야하는 고충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화려한 수사를 구사하지도 않았으며 다양한 은유를 보여주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역병의 시대에 이와 같은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신선한 어법이 이 작품의 힘이다.
일상의 수없이 많은 흐름 속에서 한 장면을 포착해서 성화해낸 전예지의 시적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는 데 두 심사위원은 공감하고 당선작으로 합의했다.
당선을 축하하고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 김윤배, 김명인(시인)
15. 미역국 / 강일규 (2022년 전남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산부인과 병원 근처엔 혼자 우는 울음이 많다
팔을 벌리고 부를 이름이 없어
한낮에도 울음이 바람을 끌어안고 멸망을 낳는다
저만치 뒤따라오던 아내가
전봇대를 붙잡고 이름 없는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다
미안
미안
건너편 정류장에서도
한 여인이 어리어리한 앳된 딸아이를 끌어안고 있다
괜찮아
괜찮아
대기실에서 마주쳤던
한 남자와 한 남자가 보호자란 인연으로
눈빛이 스칠 때마다 놓친 연과 놓은 연을 위로했다
아내의 울음이
자궁 밖으로 다 빠져나가길 기다렸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고기 반 근을 샀다
*강일규 ; 1958년 충북 영동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문과 졸업
<심사평>**고통받은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
책상 위에 쌓인 응모작을 읽었다. 정성을 다해 보내온 시들이라 허투루 읽을 수 없었다. 코로나19 시대에 혼자 있게 되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고독과 우울한 내면을 다룬 시가 많았고 가족 서사와 함께 일상을 소재로 한 시들도 적지 않았다. 사유의 깊이를 언어로 형상화한 시에 먼저 눈이 갔다.
그중에 ‘뒷모습’, ‘여우야 여우야’, ‘미역국’ 등이 시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다. ‘뒷모습’은 시장의 노파를 새우로 비유하는 부분이 눈길을 끌었다. 어시장에서 노파의 삶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좋았으나 너무 쉽게 풀린 부분이 있고 함께 제출한 시들의 수준이 고르지 못해 아쉬움을 주었다.
‘여우야 여우야’는 코로나19로 격리된 상황을 동요로 표현한 발상이 신선했다. 하지만 몇몇 시어들이 전체적인 시적 긴장감을 반감시켜 작품을 선정하는 데 망설이게 했다.
‘미역국’은 아기를 잃은 ‘아내’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다른 이들의 아픔과 함께하는 지점에 마음이 갔다. 코로나19 시대에 고통받는 현대인들에게 공감과 연민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울림이 컸다. 나머지 작품의 수준이 고른 점도 신뢰를 주었다. 축하드린다. 깊은 울림을 주는 참신한 서정성을 기대한다. 당선되지 못한 분들도 빛을 발하리라 믿는다.
✍심사위원 ; 강대선 시인,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와 ‘광주일보’신춘문예 시에 당선, ‘시와사람’에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광주전남작가회원이며 시집으로 ‘메타자본세콰이어 신전’ 외 4권이 있다. 한국해양문학상, 한국가사문학상, 여수해양문학상 소설부문 대상, 김우종 문학상, 제8회 직지소설문학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
16. 만유인력 / 양승수 (2022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한 알의 사과가 저문다
잘 여문 것 좇아 줄기와 가지 따라
억지로 삼키던 몇 모금의 물 따라
바쁘게 걸어온 길에서 폴짝 뛰어오른다
느껴지지 않던 중력이 어느 순간 무거워져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날아오르는 것이다
떨어질 때가 된 사과는 서서히 붉어지는 것이고
떨어지고 난 사과가 여전히 싱싱한 것은
사라지지 않은 관성, 따르다 남은 습관 탓이다
사과의 단맛은 그런 식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과를 가졌을까
하루에도 몇 개의 사과가 공중으로 날아오를까
저로부터 최대한 멀리 뻗어
그러나 고작 몇 발자국 사과를 배웅 나갔다가
휘어졌던 가지가 그 탄력으로
복원되는 궤적을 그리며 돌아온다
돌아오는 가지 하나 횡단보도를 건넌다
걸음 재촉하는 신호등
가던 길 멈추고 고개 돌려 옆을 보았다면
중력이 늘 같은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거나
받아들이거나
도로에는 각자 서로 다른 중력으로 달려온 것들
잠시 멈추어 서 있다
그러나 멈추었다는 것을 아는 자동차는 없다
아무도 시동을 끄지 않는다
떨어진 낙과의 단맛 같은 엔진소리
정지선에 닿기 전 이 곳은 공중이다
바람이 지나온 커브길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뻗어나간 잎맥의 갈림길 따라
빨아들인 햇빛 같은 후회
꽃 피었다가 졌던 시간 흘러가지 않고 멈춰
오래 서성이던 발자국이었다가
흘러갈 곳 없는 소리들 엉켜있던 것이라 한들
사과를 두고 무슨 오해라 할까
*양승수 ;
<심사평>**뉴튼 사과와 이 시대 일상 적절한 시적 거리로 밀당**
시는 언어예술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언어가 박제된 문장으로만 남아서는 시가 되지 않는다. 언어는 화자의, 그리고 시인의 목소리가 실린 '말'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말이 살아 독자를 향해 나아갈 수 있고, 독자의 시가 될 수 있다. 시는 언제나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이지만, 시인이 되고자 꿈꾼다는 것은 또 언제나 이 언어와 말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 사람의 새 시인을 찾기 위해 1,000편이 넘는 응모작을 만났다. 코로나시대의 불안증이 시 쓰기에도 가위 누르기를 한 까닭일까, 전반적으로 활기차고 패기 넘친 작품보다는 사색적이고 관조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또 상투적인 언어와 생경한 이미지의 나열로 인해 박제화 되어버렸거나, 최소한의 형상화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기억과 일상을 그대로 진술하고 있는 응모작도 적지 않았다. 이들을 일차 걸러낸 후 남은 작품들을 다시 꼼꼼히 읽었다.
심사자의 감식안을 시험한 응모작에는 오랜 숙련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이는 작품도 있고, 새로운 감각으로 세상을 읽어낸 작품도 있었다. 홍여니의 〈를리외르〉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책 제본 과정에 빗대어 쓴 작품이었다. 그 상상력이 흥미로웠지만 묘사와 진술을 중첩시킨 어법에서 몇 군데 억지스러운 이미지가 정서적 몰입을 약화시킨 측면이 있었다. 고경자의 〈끈의 방식〉은 직장인의 삶의 방식과 애환을 진솔하게 담아내면서 체험과 사유를 잘 조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마무리 부분에서 시적 긴장이 유지되지 못한 채 느슨하게 풀려버린 아쉬움이 남았다.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손에 남은 응모작은 최형만의 〈새들의 삽화〉와 양승수의 〈만유인력〉이었다. 두 작품 모두 당선작으로 삼아 무방할 시품을 갖추고 있었다. 〈새들의 삽화〉는 언어를 다루고 시상을 직조하는 능력이 대단히 숙련되고 단단하였다. 굳이 흠을 잡자면 그 단단함 때문에 오히려 신인으로서의 활달함이 덜 느껴졌다는 것이다. 고민 끝에 〈만유인력〉을 당선작으로 선하였다. 거기에는 인간 존재의 무게와 삶의 부피를 응축시키는 상상력의 힘이 있었다. 뉴튼의 '사과'와 이 시대의 '일상'이 적절한 시적 거리로 밀고 당기고 있었다. 특히 꽤나 긴 호흡으로 끌고 간 작품인데도 끝까지 시상에 흐트러짐이 없었다는 점이 앞으로의 시적 성취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였다. 당선인에게는 축하를 드리며, 아깝게 선택되지 못한 분들에게도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심사위원 ; 김동근 (전남대 국문과 교수)
17. 숲에 살롱 / 최은우 (202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자꾸 이야기하다 보니 말이 생깁니다 기분이 달라지고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기분 탓인가요? 그러자고 한 건 아닌데 수다장이가 돼서 오물조물 오래 씹어 쉴 새 없이 꺼냈어요 이야기라면 해도 해도 할 게 많아요 귀를 여는 자가 없다면 저 무성한 나뭇잎들이 있잖아요 이리 와서 들어봐요 늘 같은 이야기지만 오늘은 하나 더 추가시킬 예정이에요 극적인 요소는 늘 있어요 마녀들이 밤에 모여 항아리에 대고 떠들던 주문 같은 것도 있다니까요 인생은 재미 아니겠어요? 문밖 무성한 화분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야길 엿듣고 흉내 내느라 줄거리가 아니 줄기가 생겨서 풍성해졌어요 염치도 없이 나무 옆에 나무를 낳네요 자꾸만 나무들이 생기는 오후에 하나 더 있다고 하나 더 없다고 나무가 나무 아닌 것은 아니겠지요 비 오는 오후에도 어김없이 이야기에 중독된 여자들이 똑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감수분열하듯 옆에서 옆으로 다음 손님을 부르네요
여자는 거미 다리 같은 손가락으로 사뿐사뿐 머리카락을 잘라요 몸이 생기기 전부터 손가락만 있었던 것처럼 손은 여자를 떠나 가위를 들고 허공에서 춤을 춰요 원피스에서 요란하게 싸우고 있던 꽃무늬들이 살짝 얼굴을 빼자 잎사귀들이 떨어져요 떨어져서 허공으로 떠다니는 꽃들. 차를 마시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요 알지 못해요 가위질 소리에 맞춰 간간이 웃음소리를 끼워 넣을 뿐. 유리문이 밀릴 때마다 들어오세요 붙여진 팻말에서 글자들이 살짝 떨어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서죠 비밀과 상처는 오늘은 괜찮고 내일은 거대해지다 모레면 잊고 글피엔 주저앉게 만드니까요 쉽게 묻는 게 좋을까요 쉽게 말하는 게 좋을까요 수다장이들이 수다스럽게 찻잔을 부딪치며 그런 건 관심 없다고 하네요
*최은우 ; 1980년 전북 순창군 출생, 원광대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읽고 있어도, 읽고 나서도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시**
506명이 보내온 1903편의 작품에 깃들어 있는 무게감. 당선작을 결정하는 일은 그것을 이겨내는 일이었다.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눈길을 끈 것은 ‘모두의 잠깐’ ‘뱉은 씨앗’ ‘숲에 살롱’ 세 편이었다.
‘모두의 잠깐’은 잘 쓴 시다. ‘우리는 중요한 일일수록/일의 틈틈마다 그 잠깐을 배치시켜 놓아요/하루가 연속성의 과정이라면/하루엔 얼마나 많은, 다양한 잠깐들이 있을까요’라는 진단은 휴식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마땅하고 옳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그 진단의 힘은 약해지고, 잠깐의 목록들을 호출, 나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뱉은 씨앗’은 ‘오물거리는 입속에서 톡톡 내뱉어지는/수박씨들, 저것은 아마도 최초의 농법’이자 ‘직파법’이라는 발상이 뛰어났다. 그러나 이 발상이 인간에게로 향하는 심화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시를 닫아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다.
‘숲에 살롱’은 재미있다. 읽고 있어도, 읽고 나서도,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어느 동네나 있을 법한 살롱(미장원)과 어느 동네나 떠돌만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요리조리 이야기의 잎사귀들, 시의 잎사귀들을 갖다 붙였다.
시가 독자를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대면이 어려운 이 시대에, 이런 재미난 이야기의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겁다.
첨언 한 가지. 이 시가 만약 잎사귀가 아니고 꽃을 이야기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아무쪼록 좋은 시는 꽃이 아니라 잎사귀를 보기 좋게 매다는 일이다.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 전동균, 유홍준(시인)
18. 왜소행성 134340* / 유진희 (2022년 대구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우주는 조금씩 부풀고 있고
우리는 같은 간격으로 서로 멀어지고 있어요
사방이 우주만큼 트여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
좌표만 같은 비율로 커지는 세계에서
시간만이 변수라고 한다면
아득한 게 쓸쓸한 일이 되고 맙니다
다시 올 것 같지 않게 멀어지다가
어느 계절엔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오는 별을
찌그러진 궤도를 가진 별을
사람들은 무리에서 내쫓았습니다
이로써 우리 행성계는
완벽하게 끼리끼리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공전 주기를 늦추고 싶은
사람들은 서둘러 여행을 떠나지만
매진 행렬이 더 빠르게 이어지고
출발을 위한 서류는 늘어납니다
서류가 늘어날수록 안심하는 사람들을 위해
늘 거기 여기의 세계에서
서류는 잠식하는 불안처럼 불어납니다
모든 항의에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는 답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관료의 심장을 뚫어버릴 별빛은
어느 블랙홀에 갇혀버렸을까요
다른 시간 속에서 유영하던 우주비행사는
돌아오자마자 순식간에 늙어버립니다
*태양계에서 퇴출된 명왕성이 받은 새 이름
**유진희 ; 1976년 서울 출생, 동국대 국어교육과 졸업.
한신대 문예창작대학원 졸업, 국어교사
<심사평>**응모자 연령, 지역의 다양함에 심사 내내 놀라,
다양성이 우리 시가 가진 가능성**
이번 매일신문 신춘문예에는 총 1천785편이 응모되었다. 응모자들의 연령과 지역의 다양함에 심사 내내 놀랐다. 이러한 다양성이야 말로 우리 시가 가진 가능성이라고 생각해 설레는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도미노' 외 4편의 응모자는 사유의 집중력과 점착력이 돋보였다. 오랜 시간 시를 쓰며 응시한 세계를 완성도있게 쌓아올릴 줄 아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이 시가 갖는 깨달음의 형식이 신선하고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는 의견이 있었다.
'천사를 만나는 날은 오늘' 외 4편의 응모자는 시가 젊고 감각적이어서 최근의 경향과 발맞추어 기대감을 갖게 하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젊은 시인들의 감각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변별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조금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과 분위기를 넘어서는 지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왜소행성 134340' 외 4편의 응모자는 자기만의 목소리가 돋보이는 시인이었다. 우주와 지구와 이국과 모국의 거리를, 익숙하면서 새로운 감각들을 발견하는 시선이 재미있게 그려졌고 각 시마다 마지막 문장에서 시적 분위기를 다시금 낯설게 만드는 감각도 좋았다. 그러나 문체에 대해 아쉽다, '습니다' 종결어미가 변주 없이 쓰이고 있다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세 분 다 수준 이상의 시를 쓰고 있었기에 당선자를 선정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세 분의 시를 두고 심사위원 셋이 고심을 거듭했다. 문청, 패션, 트렌드 및 시쓰기 감각에 대한 상당한 논의가 있었다.
'왜소행성 134340'의 유진희 씨를 당선자로 선정한 것은 다른 두 분에 비해 이견의 격차가 크지 않았다는 점과 유진희 씨가 응모한 다른 시들 모두 편차 없이 고루 좋았다는 점이 크게 작동했다. 유진희 씨의 시가 보여주는 매력적인 세계가 여기서 출발해 어디로든 멀리로 잘 떠날 수 있기를. 그가 꿈꾸던 여행이기를 기쁜 마음으로 응원한다.
✍심사위원 ; 강성은(시인), 김문주(영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정호승(시인)
19. 양초라는 사건 / 정월향 (2021년 제27회 진주가을문예 시 당선작)
오로라로 부릅니다. 양파 속에 앉아있는 당신과 당신 속에 앉아 있는 양파의 조합. 껍질 사이로 터지는 흰빛의 회오리. 이글루라 부릅니다. 천년 전에 내린 비가 기다리고 있는 집. 오래된 사건으로 다시 태어나는 집. 얼음과 얼음으로 마주 앉았습니다. 거대하고 동그란 악수. 반갑습니다! 평화로운 저녁을 만들었습니다. 얼음이 얼음일 때의 공포와 얼음이 얼음을 버릴 때의 쓸쓸함을 쌓아올렸습니다. 이누이트라는 말은 선뜩한 날고기. 길고 느린 석양의 조합. 결론을 알면서도 오늘의 손가락을 구부리는 이유. 비명을 지르면서 냄비를 놓지 못하던 엄마와 손바닥을 빨갛게 태우던 아빠의 시간. 양파의 흰 피는 화끈거리고 양파 속에서 찬바람 부는데 손 안의 오로라가 자꾸 미끄러집니다. 흰빛의 현란함이 위대, 라거나 장엄으로 불릴 때 한 방울의 내가 흘러내리던 사건. 걸쭉하게 웅크린 이글루 위로 위대와 장엄이 쏟아집니다.
*정월향(49세, 울산거주) ;
<심사평>
깊어가는 가을, 진주가을문예에 응모된 작품들과 만나는 일은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었고, 격리의 시대에 응모자들의 시를 향한 열정은 더 각별해지고 풍성해진 듯했다"며 "새로운 신인을 발굴하고 조명하는 기회의 자리답게 응모작들은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괄목할 만한 수준을 보여주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수많은 작품이 한데 포개어져 어깨를 맞대고 있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어떤 시를 보면서는 개성과 용기에 감탄했고, 어떤 시는 감정의 진폭이 남달랐다"며 "자신의 체험을 호소력 있게 펼쳐놓으며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킨 시도 있었다.
오래 매만진 손길이 느껴지는 정갈한 구성과 읽는 이를 사로잡는 이미지 사용이 돋보였다"며 "언어의 활용 폭이 넓어 하나의 문장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던진 단어를 딛고 날아오르는 시원한 날갯짓에 가슴이 탁 트이는 듯했다.
부려놓은 의미의 그물을 잊지 않고 거두어가는 노련한 면까지 갖춰, 제출된 작품 전반적으로 모난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의 수작들이었다"며 "특히 양초라는 하나의 사물에서 출발하며 양파, 이글루, 이누이트, 석양, 상처 등을 경유하며 일상 속에서 위대와 장엄을 발견해낸 탁월한 작품이었다.
✍심사위원 ; 김병호, 이혜미, 김성규(시인)
20. 목다보 / 송하담 (202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아버지는 목수였다
팔뚝의 물관이 부풀어 오를 때마다 나무는 해저를 걷던 뿌리를 생각했다. 말수 적은 아버지가 나무에 박히고 있었다.
나무와 나는
수많은 못질의 향방을 읽는다
콘크리트에 박히는 못의 환희를 떠올리면 불의 나라가 근처였다. 쇠못은 고달픈 공성의 날들. 당신의 여정을 기억한다. 아버지 못은 나무못. 나무의 빈 곳을 나무로 채우는 일은 어린 내게 시시해 보였다. 뭉툭한 모서리가 버려진 나무들을 데려와 숲이 되었다. 당신은 나무의 깊은 풍경으로 걸어갔다. 내 콧수염이 무성해질 때까지 숲도 그렇게 무성해졌다. 누군가의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건 박히는 게 아니라 채우는 것. 빈 곳은 신의 거처였고 나의 씨앗이었다.
그는 한 손만으로 신을 옮기는 사람
나무는 노동을 노동이라 부르지 않는다. 당신에겐 노동은 어려운 말. 그의 일은 산책처럼 낮은 곳의 이야기였다. 숲과 숲 사이 빈 곳을 채우기 위해 걷고 걸었다.
신은 죽어 나무에 깃들고
아버지는 죽어 신이 되었다
나무가 햇살을 키우고
나는 매일 신의 술어를 읽는다
목어처럼 해저를 걷는다
*송하담 (본명 송용탁)(45세) ; 부산 출생, 학원 국어강사
<심사평>**상상의 폭 넓게 두고 적확한 시어 찾아내**
예심을 거친 작품들은 대부분 오랜 습작의 내공들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왜 이 시를 쓰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흔쾌한 답을 주는 작품은 드물었다. 달아나기만 하는 언어를 붙잡아 내 존재의, 삶의 숨결을 불어넣으며 시 고유의 장르적 힘을 보여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선자들이 마지막까지 논의한 작품은 이용원의 ‘무심하게 미시령' 외 4편과 송하담의 ‘목다보' 외 4편이었다. 이용원의 시들은 마치 베틀로 피륙을 짜내려가는 듯한 직조의 맛이 돋보였으나, 이러한 정성이 오히려 시를 단조롭고 밋밋하게 만드는 아쉬움을 남겼다.
송하담의 시들은 이용원의 시들에 비해 좀 더 과감한 면이 있었다. 거친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다보'를 당선작으로 뽑은 이유는 이 작품이 이러한 응모자의 특성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상상의 폭을 넓게 두면서도 적확한 시어를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 그리고 이 상상과 언어 속에 삶의 비의와 존재의 근거를 담아내고자 하는 치열함이 그를 좋은 시인으로 우뚝 서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심사위원 ; 이영춘·이홍섭(시인)
21. 반려울음 / 이선락 (202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슬픈 시를 쓰려고 배고프다, 썼는데
배으다라 써졌다
뒤에 커서를 놓고
백스페이스키를 누르자
정말 배가 고팠다
뱃가죽이 등에 붙어버렸나?
배가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고프다, 쓰자 배가 없어졌다.
등이 구부러지는, 굴절된 뼈 같은 오후
그래, 슬픔은 늘 고프지
어딘가가 고파지면
소리 내어 울자,
종이 위에 옮겼다
*
세면대 위에 틀니를 내려놓듯 덜컥,
울음 한마디 내려놓고 왔습니다
그뿐인가 했더니
옆구리 어디쯤에 쭈그리고 있던 마음,
굴절되어 있네요
거품을 집어 삼킵니다
씹어도 건더기라곤 없는 튀밥
혓바닥이 마르고, 버썩거립니다
그래요, 뭐든 버썩거릴 때가 있어요
잠깐 눈 돌리면 쏟아지기도 하고…
난 수년 전 아이 몇몇 쏟아버린 적도 있어요
그땐 내 몸도 깡그리 쏟아졌던 것 같아요
마지막 손톱을 파낼 땐 눈에도 금이 가고 있었죠
‘얘야, 눈빛이 많이 말랐구나
눈을 새뜨고 있는 게 아니었어’ 내가,
‘손가락을 흘리고 다니지 말랬잖아요
근데 왜 까마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지…’
보송보송 털이 난 꿈속에서
*
배가 고프단 얘긴 줄 알았는데, 그림자 얘기였어
부품해진 그림자론 날아오를 수 없다,
어떤 돌은 그림자도 생겨나지 않는다,
죽은 후론 배꼽도 떠오르지 않는다,
쏟아졌던 아이들이 처음으로 수면에 떠올라
‘배꼽은 어디 있을까?’ 찾고 있을지도 모르는
깨지지 않는 것도 깨진 것이 돼 버린 오후
이렇게 비좁고, 나는 깎아지른 맘뿐이었나
몇 줄 적지 못한 종이 한 장
찢어, 공중에 날리는
*이선락 ; 1957년 경북 경주 출생, 건국대 수의과대학 졸업,
동리목월문예창작대 재학
<심사평>**고픔과 아픔 외면하지 않는 시, 질문을 그치지 않는 시**
올해도 많은 분들이 새봄을 향해 시를 보내 주셨다.
오랜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읽었다.
예년보다 더 오래 숙고했는데,
손에서 쉽사리 내려놓을 수 없는 작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단단하게 짜인 세계를 횡단하며,
심사자들의 눈과 손이 시종 천천히 움직였다.
‘오픈’이 보여 준
감춤과 들킴의 미덕,
‘물과 풀과 건축의 시’에서 감지한
조용한 폭발,
‘비닐하우스’가 만들어 낸 미묘한 긴장,
‘온몸일으키기’가 일으킨 위트와
블랙 유머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같이 머리와 가슴을 두드리는 시편이었다.
당선작과 끝까지 경합한
‘저기 저 작은 나라’ 외 네 편은
독특한 시적 세계관으로 심사자들의 고른 지지를 받았다.
자기만의 세계가 이미 상당 부분 구축돼 있어
앞으로 그 세계가 어디로 어떻게 뻗어 나갈지 궁금했다.
토씨 하나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 문장들은
묘한 리듬감을 자아내 읽을 때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띤 토론 끝에 ‘반려울음’ 외 두 편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젊음은 젊은 상태,
혹은 젊은 기력을 가리킨다.
젊은 시가 있다면
그 상태를 잊거나 잃지 않고자
기력을 쏟아 붓는 시일 것이다.
‘고픔’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시,
질문을 그치지 않는 시일 것이다.
일상의 한 장면에서
지나간 시간을 길어 올리고
작금의 감정을 그 위에 내려놓는 시일 것이다.
‘반려울음’은 쓰면서 고파지는 시,
배가 뱃가죽과 배꼽을 소환하는 시,
마침내 쏟아버리면서 동시에 쏟아지는 시였다.
“버썩거리는” 일상을 비집고
다른 존재를 향한 유일한 감정이 솟아오르며 빛나는 시였다.
울음을 껴안으면서 울음과 함께 살겠다고 다짐하는 시였다.
시 쓰는 데 있어 이른 시간과 늦은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를 쓰는 시간은 모두 제시간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응모자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심사위원 ; 신해욱, 오은, 박연준(시인)
22. 경유지에서 / 채윤희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중국 부채를 유럽박물관에서 본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는
딱정벌레 날개위에 누워 있다
한때 공작부인의 소유였다는 황금색 부채
예수는 얼핏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약속의 땅은 그림 한 뼘
물가로 사람을 인도한다는 뿔 달린 짐승은 없다
한 끝이 접혔다가 다시 펼쳐진다
떨어진 금박은 지난 세기 속에 고여 있고
사탕껍질이 바스락거린다
잇새로 빠져나와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받아적을 수 없는 소리
파란색을 좋아하는 나는
물총새 깃털을 덮고 잠든다
멸종에 임박한 이유는 오직 아름답기 때문
핀셋이 나를 들어올리고
길이 든 가위가 살을 북, 찢으며 들어간다
기원에 대한 해설은 유추 가능한 외국어로 쓰여 있다
따옴표 속 고어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오랜 세월 파랑은 고결함이었고
다른 대륙에 이르러 불온함이 되었다
존재하지 않던 한 끝 열릴 때
나, 아름다운 부채가 되기의
열망은 그곳에서 끝난다
*채윤희 (27세) ; 1995년 부산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과 졸업.
<심사평>**시간, 공간 넘나드는 활달한 상상력, 매력적으로 다가와**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대체로 무난했다.
달리 말하면 위험도 모험도 드물었다는 말이다.
안정적 기량이 우선인 것은 틀림없지만
개성적인 목소리가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균일함은 우리가 보낸
한 해의 격동과도 거리가 있어 보였다.
시가 삶의 불안을 고스란히 드러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시대의 삶의 환경과 동떨어진
기예를 겨루는 경연도 썩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본심 심사위원들이 만나서 가장 먼저 나눈 얘기는
바로 이 의아함에 대한 것이었다.
오래 논의한 세 작품은
‘남겨진 여름’, ‘씨앗의 감정’, ‘경유지에서’였다.
‘남겨진 여름’은 문장의 신선함이 눈에 띄었고
근경과 원경을 오가며
사유를 전개하는 리듬도 흥미로웠다.
다만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시의 마지막 연에서 상투형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쉬웠다.
압축과 절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씨앗의 감정’은 이질적인 이미지를
하나의 시상을 중심으로 그러모으는 솜씨를 보여줬다.
씨앗을 소재로 한 사유가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변주되는 양상은 신선했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 대목에서 대사를 그르쳤다.
모든 시가 기승전결과 대미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심사위원들은 긴 논의 끝에 ‘경유지에서’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활달한 상상력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나아가 찰나적 순간을
자신의 삶에 대한 사유로 길어오는 기량도 믿음직스럽다.
함께 투고된 작품들이 고른 기량을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한 작품을 고르라면
이 작품일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동의가 있었다.
기대와 더불어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위원 ; 정호승 시인·조강석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23. 엽록체에 대한 기억 / 이경주 (202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숲을 떠난 푸른빛의 기억이 갇힌 방으로 들어간다
형광등 불에 달궈진 자갈과
모래알들이 바닥에 깔리어
전갈이 지나는 길을 만들고 있다
마른 바람이 눈에 익거나
때로는 낯선 발자국들을 지우는 한낮에는
미세한 먹이사슬들이
잠깐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하얗다
종일 내리쬐는 빛은
벽에 박힌 나무들의 뿌리와
그걸 바라보는 죽은 새들의 밥상과
좁은 틈새를 뚫고 머리를 든 작은 벌레들의
핏줄까지 하얗게 만든다
한번이라도 불빛에 닿은 것들은
제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오후가 저물 때면
변색의 관성은 더욱 강해져
누구도 아침을 기억하지 못한다
방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나갈 수 없다
아무렇게 발을 들여 놓았다가
깊은 사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폭풍에 갇히어 돌아설 수 없다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 있고
표정이라고는 창백한 빛뿐인 고요한 방이
암흑 속을 빠르게 날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이상하다 분명 하루가 지난 거 같은데
눈을 뜨면 다시 그 자리에 와 있고
녹색이 사라진 방으로 계속 나비들이 날아 들어온다
*이경주 ; 1963년 충남 홍성 출생, 서울 거주,
서울대 농경제학과 졸업, 신한금융투자 근무
<심사평>**울림 큰 문장들, 시적 틀 만들어가는 상상력 돋보여**
코로나19로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단계적 일상회복으로 접어들면서
코로나 19 종식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으나
다시 확진자가 급증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는 등
여러 어려움이 많은 때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 때문인지
예년보다 신춘문예 시 부문 투고량이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수백명의 시인 지망생이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해 와
뜨거운 문학적 열기를 느끼게 했다.
올해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작에는
신춘문예에 응모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시적 역량을 보여준다는 것이 오히려
과도한 수사에 매몰되어
시적인 깊이와 사유의 넓이를 놓치고 있는
작품들이 눈이 많이 띄었다.
한 사물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집중력이나
정서를 짜임새 있게 압축하여
끌고 가는 긴장감이 부족한 경우도 많았다.
숙고 끝에 심사위원들은
김난(김향숙), 김휼, 나영채, 노수옥, 이경주, 이동우,
임승환, 최수안 제씨의 작품들을 본심에 올려 논의하였다.
몇 분은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현실 등
사회에 대한 인식을 담아내어 보여주기도 했지만
시대정신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깊은 정서적 울림을 주지 못했다.
또 몇 분은 토속적인 정서에 기대어
서정의 영역을 파고 든 경우도 있었지만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내지 못하고
익숙한 어법에 머물러 있었다.
또 시적 발화가 너무 무성하여
이미지를 응집시키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것이다, 하고 단숨에 손꼽을
작품을 만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런 속에서 노수옥씨와
이경주씨의 작품을 만난 것은 기쁜 일이었다.
노수옥 씨의 응모작 가운데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끈 작품은 ‘입관’이다.
언어를 세공하는 솜씨가 우수했다.
주제에 대한 집중도가 높고
문장을 끌고 가는 힘도 좋았다.
이경주씨의 ‘엽록체에 대한 기억’은
현대인들의 고뇌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시적인 틀을 만들어나가는 능력과 상상력이 돋보였다.
퇴색되고 변해가는 자아와 만나는
방의 풍경은 흡인력이 있다.
“눈을 뜨면 다시 그 자리에 와 있고,
녹색이 사라진 방으로
계속 나비들이 날아 들어온다”는
환상성을 보여주는 문장이기도 해서
울림이 크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노수옥씨의 ‘입관’과 이경주씨의 ‘엽록체에 대한 기억’을 놓고
숙고하고 논의했다.
논의한 끝에 응모작 전편이 편차 없이
고르다고 판단된 이경주씨를 당선자로 합의했다.
축하하며, 한국시단을 이끄는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안타깝게 당선을 놓친 노수옥씨에게
심심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심사위원 ; 이성모, 배한봉(시인)
24. 눈사람과 돌멩이와 한낮 / 신춘희 (2022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눈사람 한쪽 눈이 삐뚤게 붙어 있다
돌멩이 하나 머금었다
지금 조금씩 녹고 있는데
눈두덩이가 시릴 만큼 너를 오래 붙잡고 싶어
미안하지만 나는 점점 온기를 갖고
안타깝지만 너는 점점 부피를 줄이고
한동안 우린 밀착된 결빙으로 중력을 버티지
눈송이들 모여 숨겨둔 방
이곳은 해의 꼬리가 닿지 않아 심장을 두기 좋지
두근대는 돌멩이가 감정이라면
겨울은 안전한 밀실이야
사람들은 그저 눈빛을 얹어주거나
손끝으로 훑어볼 뿐
녹아내려야 하는 운명엔 관심이 없지
내가 너를 지키는 방법은
구름을 불러 모으는 일
눈이 자꾸 짓물러지고 있어
눈 속에 갇힌 마음이 죄다 흘러내리고 있어
우리가 견뎌야 했던 것들을 생각해
처음 눈덩이 궁글렸을 때의 설렘같은 거
아이들 모두 돌아간 뒤 입꼬리를 움직여본 거
별들이 싱싱해서 우리는 하나였던 거야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낮이야
돌멩이와 눈덩이가 분별되어야 하는 시간이야
마지막 냉기가 사라지면
너는 나를 놓아줄 테지
그때까지너는 나늬 공중이 될거야
머리가 기울고 있어
몸에 금이 가고 있어
물의 장례가 시작되고 있어
툭, 돌멩이 하나 그렁그렁 쏟아져 내린다.
*신춘희 ;
<심사평>**예술의 완성을 향한 치열성 확인**
위험하고 슬픈 시대, 고립과 폐쇄의 시간을 밀치고
희망처럼 피어날 새로운 언어를 기다리며
예심을 통과한 응모작들을 깊이 읽었다
언어에 대한 탐색과 예술의 완성을 향한
치열성을 확인할 수 있어 매우 반가웠다.
행과 연을 무시한 산문성의 경향,
여백의 문제에 고민해 본적이 없는 소통불가의 작품은 줄었지만
외래어에 대한 무자각과 상상력보다는 사소한 현실과
현상에 대한 묘사에 지우친 경향은 여전했다.
오늘날 지구를 위협하는 생태문제로서
썩지 않는 플라스틱의 현실을 주제로 한
‘5초 5분 500년’, 오래된 소나무를 통하여
역사와 인간의 발자국을 읽는 ‘나무 실록’과 함께
응모한 ‘눈사람과 돌멩이와 한낮’,
혼자가 시대의 모습이 된 오늘날의 자화상같은
‘고독에 물리지 않는 방법을 따라함’과
감각적인 포착이 돋보이는 ‘가베라에 대한 경배’와
‘천사를 만나는 날은 오늘’이 선자의 손에 오래 남았다.
숙고 끝에 ‘눈사람과 돌멩이와 한낮’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나무 실록’은 완성도는 높았지만
신인답지 않은 사유와 안정된 진술이
오히려 긴장을 줄이고 있었다.
신춘문예란 새해 아침 가장 신선하고 새로운 언어가
등 푸른 용처럼 뛰어오르는 것이 아닐까?
등용문(登龍門)이란 말도 다시 떠올려보게 된다.
한국 시단의 강한 수압(水壓)을 잘 견디어
부디 좋은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문정희(시인)
25. 내성천변 물래실 / 구지평 (2022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어정쩡한 물안개가 저녁 강을 서성이다
속기 벗는 투명함에 산 빛이 검어질 때
실골목 저뭇해지는 내성천을 감싸고
굼닐대던 저녁연기 모래톱으로 불러내면
속 깊도록 시詩에 숨어 우련한 물래실이
갈라진 시간 틈새로 제 몸피를 드러낸다
허물어진 돌담 너머 마당귀에 마른 장작더미
텅 빈 방 잠긴 시간 푸른 여백 문장인데
이제야 적요를 푸는 한 올 한 올 자화상
평면으로 구겨지는 빛바랜 담초談草 위에
창문마다 달이 뜨면 거기에, 아! 거기에
묏등에 답청하시는 어머니가 서 있네
*물래실 : 경상북도 예천군 마을 이름
**구지평 ;
<심사평>**신선한 감각과 고요한 시심 돋보여**
불교신문 ‘2022 신춘문예’에 응모한 시·시조 부문 작품들을 꼼꼼하게 읽었다. 불교문인의 등용문인 만큼 응모한 작품들의 경향도 예년과 다름이 없이 불교적 소재를 시적인 모티프로 삼은 경우가 주를 이루었다. 사찰 공간과 주변 환경, 수행, 불교와의 인연 등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았다. 특히 불교의 연기법, 공(空), 무심과 무욕 등을 노래한 시편들은 예년의 시편들보다 깊고 확장된 시심(詩心)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다만, 한 편의 좋은 시는 빈틈없이 꽉 찬 상태에 있지 않고 오히려 흰 여백에 의지할 때가 많고, 읽는 사람이 개성적인 독해의 내용으로 그 여백을 마저 채우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당선작 선정을 두고 크게 고민한 작품들은 ‘두고 간 신’, ‘반가사유상’, ‘고목’, ‘내성천변 물래실’이었다. ‘두고 간 신’은 낡은 구두를 보며 아버지의 일생을 가늠하는 작품이었다. 작고하시기 전 구두를 닦고 끈을 묶어 신발장에 가지런하게 두었다라고 쓴 대목은 감동이 컸지만 술회의 방식이 다소는 산문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반가사유상’은 마음이 안정의 세계에 머물게 된 일을 목수의 목공의 일에 견주고 있는데, 시를 짓는 데에 익숙한 솜씨를 보여주었지만 번뇌의 소진과 맑은 명상을 죽음의 상태인 ‘관’에 견준 점은 다소 의아했다. ‘고목’은 벌판에 선 고목을 노스님으로 여기고 쓴 작품이었다. 고목이 “옥빛 낮달 하나 걸치고” 있고, 스스로 적막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다고 적은 시구들은 깨끗한 시심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눈꽃들이 입적해 있다”라고 쓴 시구 등은 다소 과장되어 있는 듯했다.
긴 고민 끝에 ‘내성천변 물래실’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 시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는 풍경을 응시하는 고요한 시심이 돋보였다. 시행을 따라가며 읽을 때 잡스럽고 탁한 것을 걷어내며 밝고 환한 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절로 상상할 수 있었는데, 그러할 때에 어떤 환희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시어의 선택이나 시상의 전개가 매우 자연스럽고 또 신선한 감각을 선보여 신뢰감을 안겨 주었다. 앞으로 더 많은 가편(佳篇)들을 보여주시길 당부 드린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 문태준(시인)
26. 상자 놀이 / 김보나 (202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내 방엔 뜯지 않은 택배가 여러 개 있다
심심해지면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본다
오래 기다린 상자는
갑자기 쏟아지는 풍경에 깜짝 놀라거나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건 착각이야
세계는
누군가 눈을 뜨기 전에 먼저
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지
나는 상자가 간직한 것을 꺼내며 즐거워한다
울 니트의 시절은 지났고
이 세제는 필요하다
새로 산 화분을 꺼내 덩굴을 옮겨 심으면
내 손은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다
그래도 돼
뮤렌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을 따라가도 돼
친구는 이것을 선물하면서
식물은 쏟아지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란다고 말했지
방을 둘러보면 여전히 상자가 수북하다
이삿짐이거나 유품 같다
빈 상자가 늘고 열 만한 것이 사라져 가면
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해 본다
*김보나 ; 1991년 서울 출생. 성신여대 교육학과 졸업. 편집자
<심사평>**평범한 소재서 리듬감 이끌어낸 상상력, 서정시 품격 한층 높여**
심사는 예심과 본심을 통합해 진행됐고,
논의를 거쳐 10여 편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이 중에서 ‘가뭄’ ‘포도’ ‘청년 희망 회복’ ‘상자 놀이’가
경합한 끝에 ‘상자 놀이’가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마지막에 아쉽게 수상의 영예에서 밀려난
다른 작품들 역시 서정적 울림과 개성을 지닌
높은 수준을 보여줬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중론이었다.
‘가뭄’은 자연어의 결합을 통해
영혼의 갈증과 슬픔을 형상화해내는
언어 감각이 눈에 띄었다.
‘포도’는 도입부의 돌발적인 이미지가
끝까지 유지되는 흡인력과
의미의 여운을 증폭시키는
간결한 시상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청년 희망 회복’은 변두리 재개발지와
도시계획 차원에서의 개발행위의 상관관계를 통해
사회적 관심을 환기해내는 시선의 힘이 돋보였다.
‘상자 놀이’는 평범한 일상의 소재에서
운문적 리듬감을 이끌어내는
풍부한 상상력과 감성이 감탄을 자아냈다.
이 작품들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일차 의견 교환이 있고 난 다음
‘가뭄’은 언어 감각의 화려함에 비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불투명하다는 점,
‘포도’는 돌올한 언어 배치가 인상적이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행간의 깊이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이 각각 지적돼 제외됐다.
최종적으로 ‘청년 희망 회복’과 ‘상자 놀이’가 남았다.
‘청년 희망 회복’은 재개발지에 꽂힌 ‘깃발’을 통해
세계가 재편되고 그 안으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지적하는 사회적 비판의식과 구체적 사실감이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다소 시가 직설적이고 산문적이라는 점이
고심케 해 당선작이 되지 못했지만
이 응모자의 앞날을 기대하게 한다.
결국 끝까지 남은 ‘상자 놀이’가
별다른 이견 없이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우선 ‘상자 놀이’는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여백의 미가 서정시로서
갖춰야 할 품격을 한층 높인다.
시상을 전개하는 맑고 순수한 시행의 흐름이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에서 막힘없이 운용돼
운문적 리듬감으로 충일하다.
또 시행과 시행을 건너뛰는 간결함과 담백함으로
우리 마음의 여백에 잔잔한 파문을 남기는
풍부한 상상력이 여운을 자아낸다.
이 시는 “뜯지 않은 택배”라는
평범한 일상의 소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태의연하게 쓰지 않고
현실에 발을 댄 독특한 시선으로
변주하는 공간 변용 능력과
감정의 안배가 뛰어나다.
상자의 닫혀 있음과 열림,
그를 통해 드러나는 어둠과 빛이
팬데믹 시대의 도시적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내를 주거 공간에 집약해낸다.
무엇보다 당선작과 함께 보내온 응모작들의
수준이 고른 점도 안심케 하는 대목이다.
산문화와 장식적인 수사가 대세를 이루는
오늘날의 시적 풍경 속에서
이 신예시인이 현실 세계와 상상 세계를 덧대어
어떤 삶의 박동과 리듬을 우리에게 선물해줄지
큰 기대를 가지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 나희덕, 박형준, 문태준(시인)
27. 어머니의 무릎 / 이경은 (제11회 국민일보 신춘문예 신앙시 최우수작)
꿇은 무릎 사이로
날개 돋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성결한 눈물의 시간들로 만들어진
날개를 펼쳐
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날,
날개가 찢긴
그날의 그녀를 기억합니다.
물에서 떠오른 낡은 작업화를
남자의 마지막처럼 껴안은 그녀가
먼바다의 입구에 망부석으로 앉아 있던 날이었습니다.
어린 것들이 젊은 영정사진 앞에서 파랗게 떨고 있습니다.
눈치빠른 뱀이 그녀의 혀를 빼앗았고
순결했던 심장은 가시들에 찔려 검게 피를 흘렸습니다.
굶주린 어린 입들은 그녀가 물어다 준 사과를
싸우며 나누어 먹었습니다.
연탄 리어카를 끌던 가파른 언덕 끝에서
날개를 펼쳐 달아나는 대신
리어카를 밀던 어린 거지들에게
매서운 겨울 같은 회초리만 자꾸 내리쳤습니다.
혀를 팔아 무화과 잎을 껴입은 여자가
매일 가시신을 신고 울었습니다.
쓸쓸했던 어린 거지가 드디어 뱀의 목을 조릅니다.
길을 잃었던 수호천사가 창세의 문자들로
십자가를 그려보는 사이
푹풍우도, 눈보라도 그쳤지만
한 팔십 년쯤 전의 일이었을까요
성결한 자리에 앉았던 그녀의 날개가
세마포에 싸여 박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붉은 사과의 어렸던 입술은 여기 어딘가 둔 것 같습니다만
제 무릎은 어디다 꿇어야 할까요
우리엄마의 무릎
그 위에 제 날개를 돋게 해주시겠습니까
*이경은 ; 대구 달성교회 집사, 제7회 문향전국여성문학 공모전 은상
<심사평, 심사위원>
최우수상 수상작은 ‘어머니의 무릎’(이경은)이다. ‘붉은 흙’(김태호) ‘미역’(이석재) ‘허수아비’(이희경) 작품이 각각 우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심사위원장 이근배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은 “국민일보 신춘문예 수준이 높다. 기독문화 발전에 기여하길 바란다”고 평가했다. 한문예총 김소엽 회장은 격려사에서 “문학이 자기 내면의 깊은 사색과 성찰에서 비롯된다면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고 했다.
✍심사위원 ; 이근배(시인)
28. 스케치 / 유휘량 〈2022 현대경제 신춘문예 詩 당선작〉
-기린의 생태계
우린 목이긴 걸
기린이라 불러
하필 넌 목이 길구나.
누가 널 그리고 있는 걸 아니?
그림자를 졸여 만든 잉크로
괜찮아. 너는
그리는 동시에
사라지는 감각이 좋았다.
따듯한 색은 대체로 몸에 좋지 않았던 그때
핏줄엔 면역이 없어서, 핏줄에 묶인 몸이 싫다고 목에 핏줄 세우며
새가 새를 잡아먹는 건 이상하다. 완벽한 새장을 만들기 위하여 가시밭에 두 손을 넣어두고 돌아왔다. 그 두 손은 그림자놀이를 통해 새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럼에도 기린이 새를 입에 물고 불타는 머리를 흔드는 걸 보면 이상하다. 나무에 열리는 아가미는 싫어하면서 하루에 새 하나씩 꼬박꼬박 먹는 건 이상하다.
몸을 벗고 남겨진 자신을 봐.
복도 같이 긴 목에서 빠져 나온 새
새를 먹는 게 아니었구나. 기린은, 몸집에서 그냥 목이 길뿐이었다. 그래도 입에 새를 넣고 빼는 것은 이상하다. 새가 거기에 거주하는 것도 이상하다. 기린들은 둥글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뭉쳐 있구나. 자기들끼리 새들을 주고받으면서…. 기린은 왜 목이 길지. 새들은 기린을 빠져나가면서 어떤 그림자를 버리고 가지. 기린은 소리 내지 않고 새를 보여준다. 새가 물고 온 아가미는 받아준다. 기린 속의 웅덩이가 너무 깊어서 목이 긴 걸까. 있지.
나, 사실 네가 쟤를 잡아먹는 걸 봤어.
유독 목이 긴 새였잖아. 걔는 한 번도 나온 적 없었어. 거기서 죽으면 누가 묻어줘? 가끔 새가 새를 물고 기린 밖으로 나가는 걸 보았어. 어쨌든 걔는 고독사는 아니길 바라지만. 기린 속의 새들은 둥지를 뒤집어 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린다는데, 속이 뒤집어 지는 느낌은 어떤건지. 나는 몰라. 나는 목이 짧고 기린은 아닌데,
가끔,
가끔 말이야.
씹어 먹고 싶지 않니, 새들 말이야. 입가에 머무르면 달콤한 금속성의 눈 맛이 나잖아. 입안 한가득 새들을 내보내지 않고 와득 씹고 싶을 때. 있지 않니. 웅덩이가 말라가도 아가미들은 나무에서 계속 열릴 거고. 묶인 핏줄을 하나 하나 풀다보면, 새들의 둥지는 뭐로 만들까.
문 열어.
금속성의 눈이 내리잖아.
세상은 자꾸 굳은 물감 같잖아.
새알이 든 둥지를
머리 위에 올리면
액체의 금속이 흘러
자,
이제 기린이라 불러라.
*유휘량 ;
〈심사평〉**시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의응답 사이에서**
세계사의 아슬한 난간을 모든 인류가 함께
붙잡고 있는 상황이 과연 당대의 문학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상상보다 더 끔찍해진 현실이
섬세하고 정치한 질문을 던지는 중이다.
이제까지 그 질문들을 예민한 일부의 사람들만 수용했다면
이번에는 모든 인류가 그 질문을
이해하고 답변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투고작들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변 때문에
시의 행간은 길어지고
시적 경향은 어둡고 다양해졌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주목한 분은
유휘량의 '스케치–기린의 생태계'와
추일범의 '영양교환',
이선락의 '염색공장 아줌마 보세요' 등이다.
유휘량의 ‘기린’을 발견한 것은 좋은 일이다.
환상과 서정의 플랫폼에서 울림을 구축한
유휘량의 '스케치–기린의 생태계'의 ‘기린’은
시적 화자의 그림자 놀이에서 탄생된 발명이다.
불빛에 제 몸을 맡기면 목이 길어지는 그림자/
기린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목이 길어진다는 것은 불빛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간절하다는 갈망의 의태이기도 하다.
기린의 파트너로서 ‘새’라는 키워드 역시
그림자 놀이에서 추출된 두 손의 변주이다.
그 새는 그림자/기린의 돌기이면서 또한
외부로 향하는 메신저이기도 하면서
누군가 그림자에게 보낸 메신저이기도 하다.
내부에서 고독사로 향하는 새,
외부로 나가지 않으려는 새를 씹어먹으면서
기린/그림자의 외부는 딱딱한 눈이 내리거나
자꾸 굳은 물감의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심지어 새알의 둥지에서는 액체의 금속이
흘러내리는 종말의 세계가 시작된다.
그러니 이제 나를 자아와
겨우 연결된 기린이라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의 삶이 기린을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까.
“죽은 고양이를 세 번 봤다 /
로드킬은 빼고”라는 맹렬한 도입부는
추일범의 '영양교환'이다.
‘이런 것도 밥’, ‘이런 것도 몸’,
‘이런 것도 일’을 행사하던 죽은 고양이 세 마리는
우리 생활의 공감각 부분이다.
어쩌면 과거, 현재, 미래를 실천하는 중이기도 할 터이다.
누군가 우리를 사육하고 있고,
더 끔찍한 것은 누군가 우리를
고양이처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고양이의 주검에 휘발성 냉소가 건너가는데,
다시 끔찍한 것은 그게 차라리 비애이기 때문이다.
고양이와 사람의 의무가 있다는,
단호하고 간결한 추일범의 고유성이
눈을 사로잡는 이유이다.
이선락의 '염색공장 아줌마 보세요'는
관찰의 측면에서 시의 전범을 드러낸 가편이다.
사물과 사람이 가진 밝음과 어둠,
슬픔과 기쁨이라는 ‘안팎’과 ‘좌우’를
어김없이 추스리면서 다시 사물과 사람에 대해
되돌아오게끔 한다.
게다가 리듬이 시를 잘 부추기고 있다.
시의 이야기라는 측면에 눈을 뜨게 된다면
이선락의 시적 영토가 어디까지
벋어나가게 될지 짐작할 수도 없다.
이은경의 '창, 세기'는 사물이 가지는 매혹에 헌신한다.
세계와 나를 연결하는 물질과 영혼으로서의
‘창(窓)’을 넘나드는 충분한 존재들이 여기 있다.
때로 눈부시고 때로 끔찍한 것들,
그게 같은 인과율인 것을
소스라치게 깨닫는 지점이 돋보인다.
최정민의 '껍질에 베인 손',
김희숙의 '털실로 얼음 들기'에도
우리가 서성거리고 편애했다는 것을 덧붙인다.
시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의 응답 사이에서
우리는 유휘량의 '스케치–기린의 생태계'를 당선작으로,
추일범의 '영양교환'을 가작으로 선택했다.
당선된 두 분에게 축하를,
여기까지 힘겹게 도착한 분들의 여정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심사위원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송재학 시인
28-1. 영양교환 / 추일범 〈2022 현대경제 신춘문예 詩 가작〉
죽은 고양이를 세 번 봤다
로드킬은 빼고
골목에 밥그릇이 엎어져 있다
토한 우유처럼 고양이가 누워있다
빈 그릇에 사료를 붓는다
이런 것도 밥이라고
먹을 것 주변엔 개미가 꼬인다
개미를 죽이는 방법은 많다
한 마리씩 손가락으로 눌러 죽일 수도 있고
침을 뱉어 죽일 수도 있다
굴을 찾아 따뜻한 물을 부으면 더 많이 죽일 수 있다
잼이나 설탕으로 반죽한 붕산을 놓는 방법도 좋다
집으로 돌아간 개미들은 빵을 나누어 먹고
배가 부풀어 함께 죽는다고 한다
태우는 데 두 시간쯤 걸립니다
고양이는 죽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것도 몸이라고
가는 길이 멀면 내장을 제거하는 편이 좋다고 했다
상자에 넣고 리본을 묶었다
고양이를 안고 온 사람이 눈물이 안 난다고 했다
자기도 울 줄 아는데 가끔 이러는 거라고
아무 것도 바르지 않은 스콘 하나를 나눠 먹으며 기다렸다
저도 정말 슬프고 싶어요
빈 그릇에 사료를 붓는다
이런 것도 일이라고
고양이 세 마리가 죽는 것으론
끝나지 않는다
오래 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겨울이었다
*추일범 ;
29.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손연후 (22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詩 당선작)
노란색 상자 안에
털실 뭉치 좋아하는 고양이를 기르는 일
누구나 동그란 노란색으로 웅크려본 날들 있었지
쉼표 모양 씨앗처럼 고요히 꿈꾸는 연습
감자야, 하고 부르면 눈이 동그래져서 딸꾹 하고
딸기향 나는 감기에 걸린 것 같아
당신 넥타이에도 딸꾹거리는 딸기가 묻었어,
우리는 서로의 코를 쿡 찌르며 웃어버렸지
커튼을 열면 우리도 고양이 꼬리처럼
기다랗게 기대어 보고
노란 고양이 무늬 닮은 햇빛이
머리 위로 얼룩덜룩 흘러내렸지
반짝이는 유리잔마다 함께 이름을 붙이던 날
사람은 이름대로 사는 거래,
여기저기 우리 이름을 붙이자
우리는 감자 눈동자 속에 살고
유리잔과 식탁보 넥타이 구두에도 살고
사람들 와르르 모였다 흩어지는
보도블록 횡단보도에도
길쭉하게 누워 있는 거야
수많은 버스 차창 손잡이에도
상냥한 고양이 키스처럼
토닥토닥 흔들리고 있는 거지
하늘이 자몽즙 같은 노을빛으로 젖어들면
기다란 빨대 꺼내 눅눅해진 하루를 보글보글 휘저어볼래
볼을 삐죽 부풀린 거품들 퐁퐁 터지고
푹 익은 노을 냄새 싫어하는 감자는
자꾸만 빨대를 타고 기어오르고
잭의 콩나무처럼, 하늘 위로 쑥쑥 자라나는
노란색 빨대를 올려다봤지
높이 더 높이, 어느새 굵어진 줄기에서는
샛노란 꽃잎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어
날마다 눈부시게 타오르는 구름 위로
훨훨 날아가는 꿈을 꿨어
감자는 점프를 잘했고 우리는
고양이 무늬로 웃으며 서로에게 손을 뻗었지
하늘에서 빨간색 노란색으로 뒤섞여 열리던
우리의 기다랗고 사랑하는 미래들
감자에 대해 말하자면 먼저 사랑에 대해 말해야 해
우리는 노란색이었고, 커튼을 열면
유리잔마다 함께 반짝이며 살아있었지
우리는 씨앗처럼 가벼워 이 계절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늘씬한 고양이처럼 숨차게 달려보지 않겠니
매일 밤 노란색 상자 안에서
우리는 털실 뭉치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었고
통통 고양이 발소리 다가오자
우리는 눈 맞추며 함께 큰소리로 웃어버렸어
*손연후 ;
<심사평>**경쾌·발랄한 시어 구사, 당찬 신인의 미래 기대**
본심에 올라온 스무 분의 시 가운데
장현숙씨의 '뭉친 나이' 외 2편과
김지영씨의 '뜨겁고 흰 유언' 외 16편,
홍담휘씨의 '카라멜마끼야또가 꽃피는 동안' 외 3편,
손연후씨의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 외 2편이
선자의 눈길을 끌었다.
장현숙씨의 작품은 시를 차분하게 끌고 가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만지는 솜씨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글에 생기가 부족하다는 점이 흠이었다.
김지영씨의 시에서 두드러진 것은 현실 묘사 능력이었다.
다만 완성도에서 "이거다!"하고 내세울 수 있는 한 편이 보이지 않았다.
홍담휘씨와 손연후씨의 작품들을 놓고 장시간 논의가 있었다.
홍담휘씨의 '젠가'는 젠가 게임을 통해 일상과 가족,
현대성의 문제, 지구온난화까지를 유머러스하고도
시니컬하게 담아내는 능력이 돋보였다.
"마스크 쓴 계절도 빙하가 녹는 북극까지도 쌓아야 하는데/
밤하늘이 하나둘 별빛을 빼내고 있었죠"를 비롯한
빼어난 표현이 촘촘히 박혀 있다.
이 작품만으로 본다면 당선작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투고한 다른 시편들의 질적 균질감이 편차가 있었다.
손연후씨의 '고양이 무늬로 웃는 연습하기'를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이 시에서 유독 강조되는 '노랑'은
삶의 어둠과 우울을 들어 올리는 힘이다.
우리는 "노란색 상자 안에 털실 뭉치 좋아하는"
감자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기른다.
놀라운 건 감자와 교감을 하면서
마침내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노란색 상자 안에서/ 우리(도) 털실 뭉치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게 된다"는 것이다.
서두와 종결부의 아름다운 대응을 보라.
그건 '감자'의 무늬에서 번지고 성장하는 사랑 때문이다.
사랑은 "유리잔과 식탁보 넥타이 구두에도" 산다.
그 사랑의 힘이 "눅눅해진 하루를 보글보글 휘저으며"
그때마다 "볼을 삐죽 부풀린 거품들이 퐁퐁 터진다."
이 당찬 신인은 자기만의 스타일로
경쾌한 시어와 발랄한 상상력을 구사한다.
이 싱싱한 능력은 이 신인의 미래의 가능성을 예고한다.
동봉한 '여름의 아이들을 아세요'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었다.
당선을 축하하며 아깝게 당선에서 밀려난
홍담휘씨에게도 힘찬 응원을 보낸다.
✍심사위원 ; 손진은, 안상학 (시인)
첫댓글 이춘효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올해는 제가 바빠 신춘문예작 취합을 못 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앞으로 좋은 기사나 취합 글 올려 주십시오
늘 고생이 많습니다.
눈동자의 열망은 갈수록 색을 잃어가지만
온맘에 새겨놓은 해와 달의 시간이 빛나는 지금입니다.
한해 내내 건승과 함께 소원성취하소서!!
이춘효산생님 우선 럭키슈퍼 1편만 읽었습니다. 난해한 문장이 없이 쉽게 술술잘 읽힙니다.신춘문예 당선자 여러분에게 축히를 보냅니다.^^
배 선생님 반갑습니다.
공부는 늘 필요하겠지요?
옛부터 운문이라고 해서, 시란 리듬처럼 다정다감한 운이 깃들어야 함에도
세태가 산문이니 해체시니 하여
과학적, 사회적 입증을 중시하니
낭송시로도 거리가 멀고
술술 읽히더라도 영~영 재미는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