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을 세우다
분리수거를 위해 박스를 정리한다
뾰족한 각은 납작하게 펴줘야 한다
손으로 안 되면 발로 뭉개서 묵은 기억을 지워야 한다
박스는 오랜 습관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나는 각으로 존재한다
무수한 각이 생겨나고 사라지면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러니까 나를 키워온 것은 각이다
편협한 예각이 나의 주된 무기였으므로
경계와 의심의 날로 상대를 공격하며 나를 방어해 왔다
나는 둔각의 여유를 갖고 싶었을 것이다
태어날 때 나는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있는 순진무구한 평각이었을 텐데
살기 위해 각을 좁혀왔다
신의 이름으로
관습과 편견으로
각은 단단한 뼈대를 짓는 일이라서 직립의 사명으로 오롯하다
각이 각을 만나 곽을 지어 살고 관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한 생이다
각은 부딪치면서 더 날카로워지거나 둥글어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각을 세우고 허물면서 수없이 나는 태어나고 죽는다
내 안에 남은 각이 나를 자꾸 찌른다
마침내 각은 다 버려야 한다
복면의 자세
한동안 우리
표정을 지우고 살아갈까
이해와 감동도 오해를 낳기만 하는 날들
얼굴에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던 감정들을 듬성듬성 잘라버릴까
서로를 공격하느라 버려지는 시간을 아껴
좀 더 알뜰한 삶을 계획해볼까
묵언의 방식으로
서로에게 생각하는 거리를 만들어줄까
차라리
오래 잠복해버릴까
외딴 섬이나 설산에 갇혀 살다
문득 반가운 벗이나 난데없는 객으로 나타날까
서로의 부재가 공허해지는
추억이 차올라 먹먹해지는 순간을
기다려볼까
그리운 마음은
저절로 건너가고 건너오는 법이니까
이제 우리
알맹이만 남기고
껍데기는 버리기로 할까
희망을 아니
절망을 주입해 볼까
더 간절하거나
더 치명적인
사랑을 재건축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