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농씨(神農氏)가 농사와 의약을 천하에 펼쳤으되 세상 사람들은 그 공덕을 모르고 매약에 신농 유업(神農遺業)이라고만 써 붙이고 강 태공(姜太公)이 부국강병의 술법을 천하에 내어 놓아 그 덕으로 대업을 이룬 자가 있되 그 공덕을 앙모하나 보답하지 않고 다만 디딜방아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강태공 조작(庚申年庚申月庚申日姜太公造作)이라 써 붙일 뿐이니 어찌 도리에 합당하리오. 이제 해원의 때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신농과 태공의 은혜를 보답하리라”고 하셨도다. (예시 22절)
위 성구에 따르면 세상 사람들은 디딜방아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강태공 조작(庚申年庚申月庚申日姜太公造作)’01이라는 글을 써 붙였다고 한다. 이 글의 뜻은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에 강태공이 지어 만들었다’라는 의미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에는 강태공이 민간 풍습에 등장할 만큼 사람들에게 친숙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강태공은 명(明)대 고전소설인 『봉신연의(封神演義)』에 등장하고, 조선 시대 무과 시험 과목이었던 『육도삼략(六韜三略)』 병법서의 저술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런 강태공이 경신 연월일과 함께 디딜방아에 적힌 이유는 무엇일까?
강태공과 경신 연월일시에 관한 두 가지 추정
우리 조상들은 예부터 집을 짓고 바깥 대문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02 강태공 조작(庚申年庚申月庚申日庚申時姜太公造作)’이란 글을 써서 붙이곤 했다. 그리고 디딜방아를 만들어 걸면서 고사를 지낼 때도 방아의 몸통에 이와 같은 글을 써 왔다.03 이렇게 경신 연월일시를 강태공과 함께 사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강태공이 태어난 사주와 관련 있다는 것이다. 사주가 모두 ‘경신’으로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천만년이 넘어야 한 번 올 정도로 희박한데 민간에서는 강태공이 이날 태어났다고 믿어왔다.04 그래서 희귀한 날인 경신 연월일시에 강태공과 함께 붙여 써왔던 것으로 보인다. 강태공의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중국인물사전』에서는 기원전 1156년에 태어나 기원전 1073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05 그런데 출생 연도인 기원전 1156년은 경신년이 아닌 을사(乙巳)년이다. 경신년에 태어났다고 할 때 제일 근접한 경신년은 기원전 1141년으로 사전의 출생 연도와 15년 차이가 난다. 이렇게 강태공의 출생 연도와 간지는 잘 맞지 않는다.
▲ <위빈수조도, 渭濱垂釣圖>, 명나라(1368~1644), 비단 족자,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재, 출처: 위키미디어
그럼에도 사람들이 강태공이 경신년에 태어났다고 믿었던 것은 경신이라는 간지(干支)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당시 사람들의 인식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경신의 경(庚)은 일곱 번째 천간(天干)으로 ‘바꾼다’, ‘변화하다’라는 뜻이고06, 신(申)은 아홉 번째 지지(地支)로 ‘신(神)과 같아 신성스럽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07 그래서 육십갑자(六十甲子)에서의 ‘경신’은 ‘바꿔 고쳐 신성시되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경과 신은 오행에서 보면 모두 계절로는 가을이고 금기(金氣)이므로 매서운 숙살지기(肅殺之氣)가 있어 살(煞)08을 누르는 성스러운 간지(干支)로 여겨졌다. 이러한 이유로 민간에서는 경신일과 경신시에 맞추어서 디딜방아를 고치거나 새로 놓는 풍습09과 고사를 통해 살을 누른 방아를 귀하게 여겨 방아가 있는 방앗간을 산실(産室)로 이용하는 등의 풍습이 전해졌다.10
두 번째는 강태공이 신을 봉(封)했던 시기가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명대의 고전소설인 『봉신연의(封神演義)』에는 강태공이 상(商) 나라 폭군 주왕(紂王, 기원전 ?~기원전 1100?)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싸우다 죽은 자들의 혼백을 태상원시천존의 명을 받아 365신(神)으로 임명하는 내용이 나온다.11 강태공이 365신을 봉했던 때가 바로 ‘경신년ㆍ경신월ㆍ경신일ㆍ경신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2 이 주장에 따른다면 봉신(封神)한 연도는 언제가 될까? 위 소설에서 강태공은 주왕이 사망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봉신을 하였다. 주왕의 사망 연도는 명확하게 고증되지는 않았지만, 기원전 1100년 신축(辛丑)년으로 추정된다. 강태공이 봉신을 한 때가 경신년이라고 한다면 주왕이 사망한 후 첫 경신년은 19년 후인 기원전 1081년이 된다.13 그러므로 이 주장이 옳다면 기원전 1081년경에 365신을 봉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경신 연월일시가 강태공이라는 명칭과 함께 사용된 것은 그의 사주나 봉신일과 관련되어 있다고 유추하였다. 하지만 경신 연월일시와 관계없이 강태공만을 사용하여 그를 수호신으로 여기는 풍습도 있었다.
살(煞)을 막아주는 수호신, 강태공
『봉신연의』에 따르면 강태공이 주왕을 정벌한 후 전쟁에서 죽은 상나라와 주나라의 혼백들을 봉신하며 상나라와 주나라 사이에 맺힌 원한을 풀어 살겁(殺劫)을 제거하자 모든 신이 감동하여 그에게 복종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내용처럼 살겁을 제거하는 강태공의 능력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속담이나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중국 속담에 “강태공이 여기 있으니 금기할 일이 전혀 없다[강태공재차(姜太公在此), 백무금기(百無禁忌)].”14라는 말이 있고, 부적처럼 사용된 강태공의 그림에는 이 속담이 함께 쓰여 있다. 이렇게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잡귀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 것이다.
▲ 영화 <봉신연의> 포스터, 2016년 개봉작, 중국
보통 강태공의 그림은 전설의 동물인 기린(麒麟)을 타고 있고 손에는 팔괘(八卦)와 음양(陰陽)의 상징이 그려진 원판과 장검 및 깃발을 들고 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강태공재차 백무금기(姜太公在此 百無禁忌)’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그림 1>은 강태공이 가운데 앉아 있고 네 명의 수행원이 각각 인장, 검, 깃발, 언월도(偃月刀)를 들고 있다.15 그리고 가운데 금기할 일이 전혀 없다는 뜻의 ‘백무금기(百無禁忌)’라는 글이 보인다. 이는 강태공이 어떤 대상에 대한 접촉으로 생길 수 있는 살을 막아주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강태공은 사후에도 살을 막아주는 수호신으로서 사람들의 믿음 속에 남아 있었다.
디딜방아와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 조작
강태공이 살을 막아준다는 믿음은 우리나라 민간 풍습에서도 나타났다. 집을 짓고 상량할 때, 대들보 위에 모년월일시(某年月日時) 상량대길(上樑大吉)이라 쓰고 바깥문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 조작’이라는 글귀를 붙여 썼다.16 그리고 곡식을 찧는 디딜방아에도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 조작’17이라고 글귀를 붙여 살을 막고자 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방아 거는 일을 집 짓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했다. 방아를 걸 때에는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 조작’이라고 쓰고 이날 저녁에 고사를 지냈다. 고사를 지낼 때 시루떡과 정화수 한 그릇을 마련하고 “이 방아 걸고 나서 동토(동티)가 없도록 도와주소서.”라고 축원을 올렸다.18 동티는 흙이나 나무 또는 쇠를 잘못 다루거나 만졌을 때 귀신을 노하게 하여 질병에 걸리거나 심하면 죽게 되는 처벌을 가리키는 민간 용어이다.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 조작’이라는 글귀가 적힌 방아로 동티를 피하는 방법은 지방마다 다양했다. 경상북도 상주군 일대에서는 이웃 마을에 돌림병이 돌았다는 소문이 돌면 다른 마을의 디딜방아를 훔쳐 와서 상여 소리를 내고 마을 어귀에 거꾸로 세우는 풍습이 있었다. 강원도 강릉시 일대에서는 못 쓰게 된 방아를 함부로 굴리면 방아 귀신이 붙는다고 믿었기에 못 쓰게 된 방아도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할 정도였다.19 충청북도 제천시 일대에서는 경신일과 경신시를 성스럽게 여겨 디딜방아를 고쳐 걸거나 새로 놓을 때 반드시 이날 이 시간에 맞췄다.20 이러한 풍습들에는 경신을 살(煞)을 누르는 간지(干支)로 믿고 자손이 건강하고 장수하기를 바라는 염원과 방아가 탈 없이 오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21 이렇게 경신일과 경신시를 중요하게 여겼던 풍습은 살을 막아주는 강태공의 능력에 대한 믿음과 결합하여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 조작’이라는 글귀가 탄생된 것으로 생각된다.
▲ 거창디딜방아상여액막이소리, 2015년 3월 제56회 한국민속예술축제, 사진자료 출처: 민속곳간
▲ ‘경신년경신월경신일경신시 강태공하마처’ 글귀가 적혀있는 디딜방아, 온양민속박물관 소재
이상에서 경신 연월일시와 연관된 강태공의 이름이 디딜방아에 적혀 내려왔던 우리나라 풍습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 풍습에서 우리 조상들은 강태공이 경신이 가진 강력한 금(金) 기운을 가지고 살을 막아준다고 믿었던 것 같다. 상제님께서는 “강태공이 부국강병의 술법을 천하에 내어 놓아 그 덕으로 대업을 이룬 자가 있되 그 공덕을 앙모하나 보답하지 않고 다만 디딜방아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강태공 조작(庚申年庚申月庚申日姜太公造作)이라 써 붙일 뿐이니 어찌 도리에 합당하리오.”라고 말씀하셨다. 강태공의 덕을 입은 사람들이 공덕에 대한 보답 없이 그의 이름을 디딜방아에 써서 살을 막는 수호신 역할로만 이용하는 것은 그에 대한 합당한 보답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사실 우리나라는 상제님께서 인정하실 정도로 신명을 잘 대접했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강태공을 기리는 사당이 하나도 없다.22 그래서 상제님께서는 “이제 해원의 때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신농과 태공의 은혜를 보답하리라”라고 말씀하시며 공사를 행하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