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 들면 / 신현임
숲엔 어김없이 작은 오솔길이 나 있다. 거친 풀숲을 헤치고 누군가가 발자국을 찍으며 길을 남겼기 때문이다. 숲길은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모여 길이 된 것, 인생길처럼 먼저 간 누군가의 발자취를 나란히 따라간다. 돌고 돌아드는 길, 가까운 입구만 조금씩 보여주는 숲길은 낯설다. 인생도 너무 멀리 내다보면 아득하고 캄캄하듯이 숲도 그렇다. 낯선 길에서 두려움을 만나듯 등줄기로 서늘함이 지나간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공포감이 주위를 점점 낯설게 한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조금씩 드러나는 길은 낯설음에서 친근함으로 서서히 바뀐다. 온 거리만큼 숲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지혜처럼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잔뜩 기대를 하고 오르는 산길은 힘이 덜 든다. 낯설음과 과감하게 대적하며 작은 희망을 붙잡으려 애쓰는 인생길과 숲길은 너무도 닮았다. 누군가 나처럼 척박한 삶에 한줄기 바람 같은 안위를 얻고자 힘겹게 헐떡이며 언덕을 올라왔을 정경이 눈에 보인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발길마다 간절한 기원과 염원을 담았을 것 같다. 사람들이 토해내던 기도와 바램들이 숲에 스몄다가 와르르 내게로 달려든다. 숲에 고여 있던 많은 기원들이 혼자라는 것을 잠시 잊게 해준다. 하늘을 우러르며 토해내던 간절한 내 기도도 아직 여물지 못해 숲에 갇혀 있을 것 같다.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몰아쉬면 나 또한 숲에 사는 한그루의 나무가 되어 있다. 제각각의 나무들 틈새에서 움직이는 나무 한그루이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가시나무는 가시나무대로 생긴 그대로 투정 없이 살아내는 모습이 정겹다. 태양을 향해 한마음으로 굽어지는 소나무나, 손 벌려 끝없는 사랑을 하늘 위로 쏘아 보내는 참나무나, 조물주의 위대함에 고개 끄덕이는 나나 땅을 디딘 창조물이다. 심장은 막무가내로 쿵쾅거리고 폐는 피톤치드를 들이 마시려 부풀어 오른다. 몸속의 짭짤한 체액들이 마구 분출된다. 무거워진 몸무게에 눌린 관절들도 숲에 깔린 나뭇잎들의 푹신함에 스프링처럼 튀어 오른다. 우두둑 소리를 내며 반항하던 걸음걸이가 차츰차츰 가벼워진다. 나무들이 이루는 숲은 몸의 건강지킴이요 마음의 치료사처럼 언제든 마주하고 거기 있다.
숲에서 커다란 바위를 만났을 때 생이 비로소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란 걸 보여준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무진 애를 쓰며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타고 넘으며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이다. 병정처럼 도열한 나무들은 헐떡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나무들의 표정이다. 그들이 걸을 수 있다면 어디로 걸어 나갈까. 사람들이 사는 정원의 한 귀퉁이는 아닐까. 허청거리는 발걸음을 바로잡기 위해 두툴두툴한 나무를 쓰다듬고 지나간다. 서늘하고 거친 감촉에서도 편안함을 느낀다. 때로는 두 팔로 끌어안고 같이 심호흡을 한다. 가지 끝으로 물 퍼 올리는 소리가 난다. 숲은 잊고 지내던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한 느낌이다. 천근의 무게로 답답하던 가슴이 한결 가벼워진다. 세상에서 덕지덕지 묻혔던 때를 가려주어 덜 부끄러웠던 적도 많았다. 숲에 숨바꼭질하듯 숨으면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무거운 죄도 사해질 것 같다. 신도 너그러워져선 죄를 논하지 않을 듯하다. 아니 숲에 있으면 신의 눈에 띄지 않을 것 같다.
숲에 들면 커다랗게 다가오던 걱정거리도 한 움큼의 무게로 작아진다. 막막하고 괴롭게만 인식되던 생이 조금은 뚜렷해지기도 한다. 달무리처럼 흐릿해지기만 하던 지혜로움도 솔솔 되살아난다. 꿈쩍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나무들의 의연함이 흔들리는 나를 책망한다. 다시 힘을 얻어 가던 길을 재촉하는 용기도 얻는다. 벌거벗고도 부끄럽지 않은 나무들처럼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나무처럼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로 인해 상처를 받으면, 소나무에서 흐르는 송진을 보면서 위로를 삼곤 한다. 소나무는 늘 상처에서 끈적거리는 눈물을 내어놓는다. 그리곤 눈물에 향기를 담아낸다. 완악한 마음이 아닌 향기로 숲을 채우는 것이다. 숲에 든 날은 향기가 졸졸 따라와선 이웃에 관대하고 너그러운 나로 거듭나게 한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타인에게 베푸는 마음이 곱절은 풍성하고 넉넉해지는 내가 있다. 어떤 향기로 세상을 채울까 고민하는 내가 거기 우두커니 나무처럼 서 있다.
숲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늘만 존재하는 숲에서 빠져 나오면 밝은 햇볕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인생도 너무 깊이 몰입하면 밝은 세상과 단절되는 오류를 범할지도 모른다. 그저 어쩌다 한번 숲에 들면서 지나쳐야할 많은 시련들을 경험하며 심장을 단련시키는 것도 살면서 해야 할 일이다. 숲은 그래서 인간 가까이 존재하며 언제든 팔 벌려 환영하는 것이다.
숲에 들면 죽어 쓰러진 나무도 만난다. 작은 곤충들에게 파 먹혀 죽어서도 단정하게 빈자리에 자신의 몸을 눕힌다. 비스듬히 누워 넝쿨식물이 타고 오르며 잎을 피우게 지주대도 되어준다. 덕분에 슬쩍 비루함과 남루함을 감출 수 있다. 자신의 몸을 내주어 숲을 푸르게 가꾸는 죽음도 시신을 기증하는 사람과 닮아있다. 의대에 사후 기증을 하고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생각난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어서 괴로웠지만 숲의 죽은 나무들을 보면서 차츰 깨달아갔다. 자식으로서의 체면치레만 중요한 게 아니라 본인의 뜻이 더 크고 소중한 가치라는 것을 말이다. 의학발전에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됐다면 큰 족적은 아니더라도 삶의 진정한 의미를 담고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숲은 나를 어떤 스승보다 더 호되게 가르치고 있다. 오늘도 숲에 들며 무엇을 깨달을까 설레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