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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을 선포하시는 하나님
습 1:1-6
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3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5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6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습 1:1-6 / 여호와께서 스바냐에게 하신 말씀이다. 수신인 : 구시의 아들이며 그다랴의 손자이며, 아마랴의 증손자이며, 히스기야의 고손자인 스바냐. 때 :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 통치 시절. 2) [멸절 선포]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내가 완전히 쓸어 버리겠다. 3) 인간과 짐승들,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를 쓸어 버리고, 인간들이 불순종의 길로 이끈 모든 악한 것들을 내가 멸절시키겠다. 그렇다,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소멸시키겠다.' 4)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 선언]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내 손을 펴서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을 치고 이 땅에 만연된 우상숭배를 뿌리 뽑아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겠다. 바알의 제사장이니 ㄱ) 승려 나부라기니 하는 소리도 더 이상 기억되지 못하도록 하겠다. (ㄱ. 또는 `그마림이니') 5) 지붕 위로 올라가서 일월성신을 숭배하는 자들과,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ㄴ) 밀곰을 걸고 맹세하는 자들을 내가 모조리 없애 버리겠다. (ㄴ. 암몬 족속의 민족 신으로 `밀곰'을 낮추어 부르는 이름이 `몰록'이나 `몰렉'이다) 6) 또 전에는 여호와를 섬기다가 지금은 더 이상 섬기지 않는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않고 여호와께 묻지도 않는 자들을 내가 모조리 멸절시키겠다.'
스바냐는 유다에 나타난 종교적 타락의 모습을 열거하면서 이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함을 보여줍니다.
선지자 스바냐(1) 스바냐는 자신의 출신 배경을 4대까지 밝히면서 자신이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히스기야 왕의 후손인 것을 설명합니다. 이는 그가 선지자로서 어느 시대에 활동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선지자로서의 역할이 요시야의 종교개혁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가 활동하던 때는 유다 왕국에 우상 숭배가 만연하던 시대였습니다. 타락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스바냐는 그의 출신과 관계없이 선지자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스바냐의 이름에는 "여호와께서 숨기시다"라는 뜻이 있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나타내 주고, 앞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실지 암시해 줍니다.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2-6) 스바냐가 선언하는 하나님의 심판 대상은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타락에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할 때 다른 피조물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스바냐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인간의 타락한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스바냐가 언급하고 있는 유다의 타락한 모습은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방의 신들을 성전에 끌어들였고, 이방신을 섬기는 제사장(그마림)들이 활동하게 했습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자연물을 경배했으며, 하나님과 이방신을 동시에 섬기는 혼합주의의 모습도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자신들의 신앙적 근본을 망각한 것이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이와 같이 유다의 타락한 모습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하였고,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찾는 이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손이 이제는 타락한 이들을 심판하기 위해 들려졌습니다.
적용: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온 인간의 종교적 타락은 광범위하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노력 없는 대가는 없습니다. 있더라도 그것은 “독”(毒)이 될 수 있습니다. 미술계에 갓 등단한 젊은 화가가 거장을 찾아가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2, 3일 동안 하나의 작품을 완성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팔리기까지 2, 3년은 걸리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거장은 청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지었습니다. “자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네. 한 폭의 그림을 2, 3년 걸려 그려 보게나. 그러면 그 그림은 2, 3일안에 팔릴 수 있을 걸세.”
< 설 교 >
유일신과 우상숭배
스바냐 1:1~6 / 이필재 목사
구약 성경에 조명된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 신앙생활에 많은 어려움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나타났듯이 하나님이 심판하겠다고 하시는 말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내가 사람을 진멸하겠다.” 하셨는데 이 말은 다 죽이겠다는 뜻이잖아요? 마치 하나님은 전쟁을 즐기는 군인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사랑과 자비의 속성이 오히려 잔인스러운 하나님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토록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렇게 심판과 진노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우리가 하게 됩니다. 이것을 충분히 이해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이 문제를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의 내용을 보면 사람 이름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결국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 사람의 조상은 매우 훌륭하다. 훌륭한 조상의 후손이다.” 보통 성경에 나오는 것을 보면 어떤 예언자를 말할 때는 “아버지, 누구의 아들, 누구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다.”라고 아버지 정도를 소개하는데, 오늘 말씀은 고조할아버지까지 나옵니다. “스바냐의 아버지는 구시오 할아버지는 그다랴요 증조할아버지는 아마랴요 고조할아버지는 히스기야라.” 결국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직계손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 42명이 나왔었는데 그 많은 왕들 가운데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선했던 왕은 2~3사람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그 중의 한 사람이므로 “이 스바냐는 그 훌륭했던 히스기야의 왕손이다. 그런데 그가 지금 예언자가 되었다.”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이름의 족보를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조상 덕에 괜히 괜찮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몽주 선생의 후손들은 그분의 올바른 삶의 철학 하나 때문에 후손들이 어디 가서나 다 인격 대우 받지 않습니까? 정몽주 선생의 후손이십니까? 비록 지금은 깡패일지라도 조상이 훌륭하면 자신도 똑같이 인정을 받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히스기야가 누군가? 또 히스기야의 후손 가운데 스바냐 예언자가 나오는데 그는 누구인가? 이 족보를 통해서 조명해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 스바냐의 예언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누구인가? 히스기야 왕의 직계손이다.” 그래서 무시 못 할 혈통 배경이 이 말씀을 경청하게 되었는데, 2절과 3절에 그의 예언의 시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게 되는데, 스바냐의 예언은 마치 노아 때 물 심판 예고와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 하나님이 “내가 이 지면에 숨 쉬는 모든 것을 다 진멸하고 사람이고 짐승이고 다 진멸하리라.” 그런 말씀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에도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들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다. 내가 사람을 진멸해서 멸절하리라.”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짓말 하실 리는 없고 하나님의 종을 시켜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 당대 사람들은 지금 큰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뭐 그렇게 잘못한 것이 많다고 왜 진멸에 가까운 심판을 내린다고 끔찍한 선언을 하시는 것인가?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그 이유가 4~5절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4가지의 단어가 나타나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말이 나옵니다. 바알, 그마림, 일월성신, 말감! 이것 때문에 그런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도대체 뭔가? 이것은 유대 민족의 정신사를 지배했던 우상들의 이름입니다. “하나님께 축복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은 경배하지 않고 그런 우상들을 섬기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해서 벌을 내리겠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심판해서 진멸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우상입니다. “나는 이 땅에 우상을 다 진멸해 버리겠다.” 거기에 사람을 넣어서 그렇게 해야만 그들이 정신 차리고 하나님께 돌아오기 때문에 역설적 패러독스 진리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은 뭔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상 숭배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내용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구약에는 십계명입니다. 열 가지 계명 중에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똑같은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고 그것에 경배하지 말라.” 그러니까 십계명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문맥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가 있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다른 죄는 하나님이 참기도 잘하시고 용서도 잘하시고 덮어주시기도 하는데 우상 숭배는 아닙니다. 진노가 빨리 오고 참혹하며 오래 갑니다. 그것이 우상 숭배의 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토록 진노하셔야 했던 여기 나타난 우상 종교들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을 우리가 살펴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여기 먼저 바알 종교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바알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표현됩니다. 바알, 바알갓, 바알브올, 바알세불, 바알헤르몬, 이런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데 이것이 다 바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알신은 다른 신과 아주 특이한 다른 점이 있는데 부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세라 여신이라는 것이 그겁니다. 그래서 바알 종교의 교리는 소유주, 다산의 신, 농신, 풍요의 신 이런 말로 표현하는데 반드시 형상을 만들어 놓습니다. 나무로 목신을 만들기도 하고 청동으로 만들기도 하고 돌멩이를 쪼아서 만들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머리에는 투구를 썼는데 다산의 상징인 황소의 뿔로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허리에는 칼을 찼는데 그것은 정복자라는 뜻이고, 한 손으로는 몽둥이를 높이 치켜들고 있는데 능력과 힘의 상징이며 한 손에는 나뭇잎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농경지의 소유주라는 뜻으로 그런 형상을 만들어 놓습니다. 이 종교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앗시리아를 비롯한 가나안 원주민들의 종교로서 이러한 독특한 교리 때문에 확산이 빠릅니다. 이 교리가 들어가면 누구도 꼼짝 못하고 거기에 굴복하고 맙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구약의 유명한 이야기! 아합왕의 왕비 이세벨은 바알 종교 신자입니다. 그런데 왕비로 들어와서 아브라함 후손들이 믿는 야훼에 대한 신앙의 문화를 없애버리고 바알 종교를 국교로 만드는데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해서 성공을 합니다. 성경에는 엘리야 하나만 남았다고 그랬습니다. 다 바알 종교로 갔습니다. 그러면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이란 도대체 뭔가? 바알 종교를 현대어로 표현하면 섹스교입니다. 모든 교리가 부인을 데리고 사는 신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남성신과 여성신의 만남으로 세상이 이루어졌다고 가르치는데 남성신인 바알이 여성신 바알롯, 혹은 아세라 신의 부부 생활을 통해서 비를 내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아기가 탄생하잖아요? “그것이 식량과 생산의 신이다.” 이렇게 하니까 예배의 절정은 예배자들끼리, 그런 일을 하므로 바알 신에 대한 최대의 경배를 그렇게 표현하니까 젊은이들이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고 좋은 종교가 있구나!’ 하면서 다 그곳으로 몰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바알의 대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모압 평지까지 왔을 때 이스라엘 남자들이 하루에 간음죄를 지어서 23,000명이 벌을 받아 죽었다는 기록이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하루에 23,000명이 그런 일을 합니까? 바알 예배에 참여한 겁니다. 바알 종교 여인들이 떼를 지어서 이스라엘 남자들을 바알 예배에 초대했습니다. 바알 축제를 열어 술 먹고 춤추며 마지막에 너도 나도 허겁지겁 그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광야에서 그런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엄격한 율법주의에서 살아오다가 이 바알 종교를 만나니까 세상 살 것 같은 겁니다. 그래서 일순간에 수만 명이 몰려와서 바알 축제에 참여했습니다. 예배드리고 바알 예배인 비 내리는 축제에 다 참여하고 말았습니다. 성경 말씀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여자들이 모압 여자들입니다.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 백성을 청합니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하버드 대학의 하비 콕스(Harvey Cox)가 지적했습니다. “바알의 문화는 지금도 현존한다. 세상에 얼마든지 깔려있는 게 바알의 문맥이다.” 예를 들면 브라질에서 카니발 축제를 하는데, 나중에 카니발 베이비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우리 한국 민속학자, 신학자들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한국의 칠월칠석, 비 내림의 축제, 묘지 명당자리 문화, 이것도 바알 문맥이다.” 그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한번 오작교 다리에서 한번 만나잖아요? 그러면 일 년 그리웠던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무엇을 하겠어요? 잠자리를 같이 하잖아요? 그래서 비 내림의 축제! 그래서 칠월칠석에 비가 내리면 다산의 신, 풍요의 신이 농경문화를 흡족하게 적시어서 생산이 잘되고 풍요하고 풍년이 드는, 그런 문화가 아닙니까? 로스앤젤레스에 로즈힐(Rose Hill)이라는 묘지가 있는데 세계에서 제일 클 것입니다. 수만 명이 묻혀있습니다. 그렇게 큰 묘지가 있는데 중국 사람들이 그 근방에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묘지를 사러 많이 옵니다. 저도 교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그 묘지에 가서 장례식 집례를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묘지를 팔고 사는 사람 중에 제 후배 하나가 있어서 그 후배를 통해서 묘지 문화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목사님! 중국 사람 하나가 와서 묘지를 쭉 둘러보더니 이 자리를 나한테 팔라고 해서 그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이 소유했다고 하니 그 소유한 사람에게 얼마가 되던 그 돈의 백배라도 도로 돌려주고 나에게 이것을 팔라고 하면서 달라는 대로 돈을 다 주겠다고 해서 제가 농담을 한번 했습니다. 10만불 내라, 100만불 내라 농담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100만불 주겠다고 하는데 그건 10억입니다. 사고팔았습니다. 그래서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나라에서도 좌청룡 우백호 하며 따지는데 중국 사람들도 묘지를 구할 때 두 가지 면에서 찾는다고 합니다. 산을 보면 용이 구불구불 꼬랑지를 사리고 누워있는 모습이 명당이고, 또 그 사람이 산 자리는 용의 눈자리인데 그 자리가 명당자리라는 겁니다. 먼 세상을 이 높은 세상에서 다 바라볼 수 있어서 보이는 천지가 다 후손들이 될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직원을 데리고 와서 그 자리를 십억에 샀다는 겁니다. 그것이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그 자리가 어디냐며 구경을 많이 가고 그랬습니다. 또 하나는 여인의 잘생긴 몸 자리를 찾는 겁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곳에다 씨를 묻으면 거기에서 수없이 많이 생산되어서 자손이 번성하고 뭐든지 잘된다고 하는 풍요의 신! 바알신은 부인을 데리고 사는 신이기 때문에 이런 교리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느 나라에나 문화화된 것이 아주 많다는 겁니다. 남성신 바알이 내려주는 비를 밭이 받아서 생산이 풍요로워진다는 그런 종교의 교리인데 우리나라에도 보세요. 지금도 할머니들은 남편을 가리켜서 무엇 같은 남편이라고 하지요? “하늘같은 남편”이라고 합니다. 남편은 하늘이요, 여인은 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늘같은 남편이 비를 내려주면 밭은 그것을 받아서 풍요해지는 원리! 그러니 젊은이들이 그 매력 있는 종교를 안 찾아가겠습니까? 이래서 바알 종교가 구약에 이렇게 하나님과의 싸움이 계속되어져 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기에 물 들은 사람은 내가 다 진멸하겠다.” 이렇게 패러독스 진리를 가지고 때려잡지 않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내가 다 죽일 것이다. 진멸할 것이다. 심판할 것이다.” 이렇게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알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두 번째는 일월성신 숭배가 있는데, 원시인 때 사람들은 생활 주변에 나타나는 가장 위대한 힘을 보았을 때 그 자체를 신격화하기를 시작했습니다. 태양을 바라보니까 태양이 위대합니다. 태양이 빛과 열을 내어줌으로 우리가 농사짓고 먹고 삽니다. 그래서 태양신 숭배가 생긴 겁니다. 캄캄한 밤에 갈 길을 인도하는 달을 바라보니 너무 신기하고 그래서 월신 숭배가 나타나 것이고 바다 신을 믿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바다 신을 달래기 위해서 무엇을 갖다 집어넣었습니까? 심청이를 갖다 집어넣었잖아요? 폭풍우를 보고 바람신을 만들었고 땅을 보고 지신을 섬기게 되었고 더 발전해서 큰 바위를 보면 바위 신을 믿었고 오래된 나무를 보고 목신을 섬겼습니다. 더 나아가면 동물숭배까지 나옵니다. 우리나라에서 옛날 호랑이가 산신령이었습니다. 그래서 호랑이가 다닐 수 있는 길목에다 신령제로 돼지를 잡아놓고 드렸잖아요? 먹이를 주면서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습니다. 집안에 커다란 구렁이가 돌아다니면 집주인은 섬기면 섬겼지 절대로 해치지 않았습니다. 서낭당에 돌무더기를 쌓아놓고 떡 한 그릇이나 냉수 한 그릇을 갖다놓고 주문을 외우죠? 열심히 소원을 외우잖아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 지신이요 일월성신이여 오방신장 후토신령 화우동심 하옵시고”, “굽어 살피사 불초소생의 소원을 박대 마옵시고 하늘 품에 안으사 성취케 하옵소서.” 하고 절을 100번씩 합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신명기 4장 19절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많이 생겼잖아요? 저는 오래 전에 오려둔 신문기사 하나가 있는데 “서울 시장과 돼지머리”라는 글을 신문 기자가 써서 발표를 했습니다. “천만을 지도하는 서울 시장님께서 서울시의 그 큰 공사를 위해서 시장님과 간부들이 돼지머리를 앞에 두고 거기에 절을 하며 서울시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이것이 문명국 지도자의 갈 길인가? 이것이 문제다.” 그러면서 신문에 냈어요. 보십시오. 요즘에는 컴퓨터로 첨단 과학을 이용해서 건축물을 빈틈없이 잘 짓고 있는데도 상랑식할 때는 틀림없이 북어 대가리 하나가 매달려 있습니다. 북어 대가리나 돼지머리로 대신하는 것을 봤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이 작업인 우상숭배를 내가 멸절하리니, 땅에서 없애버릴 것이니 만약에 이게 끝까지 가담하면 함께 멸절될 것이다.” 이렇게 염기적 교훈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유일신이십니다. 한분 밖에 안 계신 하나님! 인간들은 고대로부터 눈에 보이는 신을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 놓기를 즐겨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의 방향이 우상숭배와 일월성신 숭배로 신격화 했다는 것입니다.
우상의 개념이 뭐냐? 하나님 아닌 것을 신격화 하는 것입니다. 옛날 시골에 이 분당 지역에서는 뭐가 많았는지 아십니까? 터주까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있습니다. 집을 지키는 주재신입니다. 이것을 터줏대감이라고 부릅니다. 이름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주, 제석, 삼신, 문신, 오방지신 이런 집 지키는 이름이 많이 있는데 터주신이 뭐냐? 중앙신입니다. 사방의 모든 신을 다스리는 집안의 안전과 번영의 중앙에 서있는 것이 터주신인데 그 모양이 어떤가 하면 조그만 항아리가 있습니다. 그 항아리 안에는 언제나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하얀 쌀이 언제나 가득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만약에 그 항아리에 벌레가 생기면 쏟아버리고 새로 채워놔야 합니다. 그 쌀은 얼마나 귀중한지 집안 식구들 굶어죽어도 그 쌀은 건드리지 못합니다. 우리말에 신주 위하듯 한다는 말이 그 항아리입니다. 그리고 하얀 새끼줄로 꽈서 모자를 만들어서 그 항아리를 덮어놔야 합니다. 옆에는 날카로운 죽창을 하나 꽂아놔야 되고 죽창 맨 끝에 짚신 한 켤레가 매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터줏대감, 주재신, 터주까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상 군비입니다. 옛날에 현명한 임금님이 부족들의 침략이 하도 심하니까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 집집마다 이것을 대비해 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일이 터지면 누구의 집에 들어가도 쌀은 군인들이 먹을 분량입니다. 거둬들여서 자기가 밥해 먹고 죽창은 무기입니다. 짚신을 신고 모자는 뒤집어쓰고 전쟁에 임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왕의 명령으로 집집마다 그렇게 위하다 보니까 그것이 문화화 되고 신격화 되어 예배의 대상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런 터주까리 문화가 근래에까지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말감 숭배라는 것이 나옵니다. 말감이라는 말은 밀곰, 몰렉, 몰록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솔로몬이 한창 타락할 때 이방 여인들이 솔로몬을 유혹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밀곰신을 섬기라 해서 했다는 말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종교의 특징은 인신제사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가면 남서쪽에 음침한 산골짜기 하나가 버려지다시피 있습니다. 그 골짜기 이름이 힌놈의 골짜기 혹은 도벳이라고 말합니다. 불구덩이란 말입니다. 암몬 족속과 모압 족속이 자기들의 신, 밀곰신을 섬기던 장소였습니다. 어린이를 데려다가 불을 피워놓고 지나가게 하고 나중에 어린이를 잡아서 신을 즐겁게 하는 그런 종교입니다. 사실 어린 아이 죽여서 신에게 제사 드린 문화는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아브라함도 사실 어려서부터 그런 문화 속에서 자랐습니다. 어느 날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 ‘내가 어렸을 때 봐오던 그런 것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이삭을 데리고 갔을 때 하나님이 “다시는 어린 아이 잡아서 신께 드리는 것을 하지 말라!” 그런 뜻으로 이삭을 살려내고 대신 양을 잡아서 제사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때부터 양 잡아서 제사 드리는 문화가 형성되잖아요? 이러한 종교의 액운 풀이는 지금 우리 한국에도 있습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정월 대보름이 오는데 그날 불을 피워놓고 동네 사람들 다 오라고 해서 어린이부터 시작해서 다 불을 통과하고 지나가라고 합니다. 일 년 동안에 액운을 때우는 종교 행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신앙교육 시켰습니까? 아담 때부터 아브라함 때부터 40년 광야에서 실천신학! 그런데 그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그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강력하게 종교교육, 신앙교육 시켰는데도 불구하고 바알신을 따라가며 그 모양을 하니까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이 “그렇게 되면 나는 멸절하리라. 나는 다 멸망시켜버릴 것이다.” 이렇게 스바냐를 통해서 주신 말씀이고, 예언자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현대에는 이런 것이 다 없어졌다고 보십니까? 더 많습니다. 바벨탑 사건이 뭡니까? 하나님과 힘겨루기입니다. 그렇게 서구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세운 찬란한 1000~200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도 왜 주일날 예배도 안 드리고 텅텅 비어있는가? 과학의 힘이 있잖아요? ‘오늘과 같은 첨단 과학 시대에 교회에 나가서 무릎을 꿇고 눈물 흘리며 기도를 하는가? 그것이 성숙한 인간의 모습인가? 이제는 필요 없다. 과학의 힘으로 우주까지 정복하는 이 시대에 눈물 흘리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필요한가? 하나님과의 힘겨루기에서 인간이 승리했다.’ 바벨탑은 오늘도 쌓아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단 한순간에 이 모든 것이 다 무효로 돌아갈지 모릅니다. 금송아지 사건이 뭡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더 좋은 가치! 금덩어리만 있으면 될 거 아닙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우리를 인도하시니라.” ‘날마다 헌금이나 내고 예배드리고 뭐하려고 평생 그런 것을 하냐? 이것만 있으면 평생 훌륭하게 살 수 있다.’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안 나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사건은 뭡니까? 즐거움의 극치가 하나님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하나님 믿는 것은 날마다 하지 말라는 것이 많지 즐거운 것이 뭐가 있냐? 세상 나가면 이렇게 즐거운데 뭐 하나님 믿느라고….’ 그래서 다 그 자리로 가버렸잖아요? 오늘 날이 우상 숭배가 더 심한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하나님이 명령하신 예배를 거부하고 있는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내게 왔기 때문입니다. ‘이거면 됐지 인간 사는데 그 이상의 무엇을 추구해?’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네가 지금 섬기고 있는 우상이 무엇인가? 나는 멸절시킬 거야! 만약 네가 끝까지 그것을 놓지 않으면 나는 심판할 거야!’ 하나님은 스바냐의 입을 통해서 그렇게 예언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예언자들의 소리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틀림없이 말씀을 하십니다. 보십시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하나님의 소원은 인간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모든 우상 숭배는 인간을 비인간화해서 마침내는 멸망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인고로 하나님의 형상답게 이 땅에 살아서 영원히, 영원히 빛이 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는 우상숭배는 너희에게서 멸절되어야 돼! 씨도 없어져야 돼!” 그러는 겁니다. 옳은 신앙만이 인간을 하나님 형상되게 하고 위대한 진리를 가진 민족이 위대하게 됩니다. “너희가 어떻게 될 거야?”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 여러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아멘 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스바냐의 입을 통해서 예언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조명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 가치관을 대신하는 것들을 내가 무엇으로 숭배하고 있는지 우리 영혼의 진단을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간답게 살아가고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아갈 수 있는 진리가 내 영혼을 가득 채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주간 하나님이 주신 시간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복된 성경적인 리더십
습 1:1-18 / 이한규 목사
스바냐 1장 1-18절
< 희생하는 문화를 만드십시오 >
요새 우리 경제가 큰 위기입니다. 그래도 왠지 한국인의 저력이 믿어지고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크게 쓰실 것이란 믿음은 변함없습니다. 그런 쓰임 받는 나라가 되도록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희생시키는 문화를 청산하고 희생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특히 리더와 권력자가 희생을 선도하면 그 공동체가 얼마나 복된 공동체가 되겠습니까? 지나친 이상주의 같지만 우리 민족은 이미 그런 전통이 있습니다.
역사상 전 세계에서 거의 유례없이 오래 지속된 왕조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이씨 왕조’입니다. ‘이씨 왕조’는 1392년 개국 이래 1910년 멸망할 때까지 519년간 세계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한 국가가 그 이상 지속된 경우는 있어도 한 왕조가 그렇게 오래 지속된 예는 거의 없습니다.
그 기간 동안 연산군이나 광해군은 신하들의 반정으로 왕좌에서 쫓겨났지만 그때 신하들이 새 왕으로 내세운 사람은 쿠데타의 주모자도 아니고, ‘다른 성씨’나 ‘다른 이씨’가 아니라 왕족 혈통의 ‘이씨’였기에 ‘이씨 왕조’는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씨 왕조’가 지속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씨 왕조’가 집안 단속을 잘하고 ‘왕도정치’의 규범에 비교적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이씨 왕조’는 왕자와 왕손과 왕의 증손까지 벼슬길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왕손이나 왕의 증손들은 왕가란 명예만 있을 뿐 초가집에 살며 끼니를 걱정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 왕손들 중에는 학문이 탁월한 사람도 많았지만 왕손이란 이유로 과거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처럼 왕의 주도로 왕손들의 벼슬길을 철저히 막은 이유는 왕가가 희생해야 백성들의 모범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바른 정신입니까? 그 왕손들은 선왕들이 내세운 ‘왕도정치’의 규범에 충실히 따랐기에 그들의 희생은 큰 희생으로 미화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전통이 확립된 것입니다. 그런 희생정신으로 집안 단속을 철저히 했기에 ‘이씨 왕조’가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일전에 어떤 전직 대통령은 퇴임 후 친인척 비리가 밝혀졌을 때 그 비리의 범위가 구족의 범위를 넘어 종형제의 처가에까지 미쳤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겠습니까?
지금 경제는 어렵지만 앞으로 ‘한국의 때’를 예상하는 미래학자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현대사 최고의 이념 격전지로서 6.25전쟁의 고난을 통해 최고의 삶의 노하우를 배양한 나라입니다. 또한 정보화시대에 다양한 정보를 보유하기에 빠르고 편한 세계 최대의 문자인 한글을 가지고 있고 고학력의 인력도 많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나라이기에 우리의 미래는 찬란할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부족한 점은 세계를 품는 큰 그릇이 되지 못한 점입니다. 지금 여러 종류의 갈등이 곳곳에서 표출되는데 그 갈등들의 가장 큰 원인이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하면 ‘희생시키려는 태도’는 크고 ‘희생하려는 태도’는 작은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세계 주역국가가 되고 또한 개인적으로도 반전의 역사와 회복의 역사를 만들어가려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희생정신’입니다. 그 사실을 본문은 강력하게 도전합니다.
< 여호와의 심판을 피하는 길 >
스바냐는 유다 16대 왕 요시야 시대의 선지자로 히스기야의 현손(고손)이고 아마랴의 증손이고 그다랴의 손자이고 구시의 아들이었습니다(1절). 구약 예언서 중에 예언자의 계보가 4대에 걸쳐 기록된 책은 스바냐뿐입니다. 그렇게 기록한 것은 스바냐의 고조할아버지가 히스기야 왕이었음을 나타내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스바냐는 왕족 출신으로서 예루살렘의 기득권층의 타락을 알고 그 타락한 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는데 그 메시지는 나중에 요시아의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하나님의 심판’이란 스뱌나서의 주제대로 본문 1절의 서론이 끝나자마자 바로 스바냐는 땅 위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철저히 진멸하고 특별히 우상숭배를 하고 하나님을 배신한 사람들을 멸절할 것이란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2-6절).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 심판을 피할 길을 본문 곳곳에서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거룩한 희생양이 되십시오
왜 본문 7절에서 하나님은 심판을 목전에 둔 백성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희생을 준비하고 희생양이 될 사람들을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날’은 ‘희생양이 드려지는 날’입니다(8절). 그날에 하나님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또한 강압과 속임수로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집과 권력자의 집과 하나님의 집을 채운 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벌하겠다고 하셨습니다(9절).
요새도 악한 종교 리더들은 미혹과 거짓으로 양떼를 헐벗게 하고 자기재산과 교회재산을 불리지만 선한 리더들은 스스로 희생하면서 자기 것을 나누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남을 희생시키면 성공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서 대개 그 성공이 잠깐의 성공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스스로 희생양이 되면 오래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바른 성공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희생물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2. 심판의 때를 대비하십시오
심판의 날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예루살렘 곳곳이 파괴되고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은 복도 내리지 않고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다 찾아서 벌할 것입니다(10-12절). 또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재물과 집과 포도원까지도 모두 빼앗길 것입니다(13절). 요새 무리하게 빚으로 집을 샀다가 집을 빼앗기고 더 나아가 무리하게 빚으로 불필요한 교회 건축을 했다가 교회건물이 경매로 넘어간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도 일종의 심판의 표시일 수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무리하게 교회건축에 욕심을 낸 것을 용서하소서! 이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그때부터 다시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그런 회개도 없이 계속해서 교회재산과 교회건축에 연연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을 더욱 재촉하게 됩니다. 그런 심판의 날이 가까워졌고 빨리 찾아올 것이란 의식을 가지고 늘 심판을 대비하며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14절).
3. 우상숭배를 멀리하십시오
심판의 날은 무서운 파멸과 고통의 날입니다(14-17절). 왜 그런 무서운 심판이 있게 되었습니까? 본문 18절에 나오는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진다.”는 표현을 보면 심판의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죄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우상숭배입니까? 18절 전반부에서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건지지 못한다.”는 표현을 보면 특히 물질을 우상으로 삼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의 권력자와 종교 리더들은 폭력과 미혹과 거짓으로 물질을 쌓았지만 심판의 날에는 그 많은 물질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에도 최대의 우상은 역시 물질인데 어떻게 그 물질주의의 우상을 극복합니까? 끊임없이 나눔을 결단하고 실천하고 습관화해야 합니다. 나눔이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물질적인 희생입니다. 결국 희생은 심판을 면하게 최대 요인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축복을 예비하는 최대 요인입니다.
< 희생시키는 리더십의 부작용 >
한국 사람들은 충성과 의리를 중시합니다. 성도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처럼 충성스럽고 의리 있는 삶은 훌륭한 삶이지만 그 충성과 의리의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랑과 정의와 희생과 나눔을 모르는 리더에게 보이는 충성과 의리는 리더의 배만 불려서 공동체를 더 망칩니다. 그러므로 리더의 카리스마를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카리스마에 현혹되어 ‘희생하는 리더십’이 아닌 ‘희생시키는 리더십’에 정신없이 휩쓸리면 양떼들의 피를 담보로 카리스마적인 리더만 배부르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보면 몇 십 명 교회에서 사모를 희생양으로 삼아 카리스마를 키우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모들은 안쓰러운 정도로 성도들 앞에서 희생양이 되어 모욕을 당합니다. 그것을 보면 안타까운 탄식이 나옵니다. “굳이 저렇게까지 해서라도 교회성장을 이루고 싶은가?” 그렇게 해서 교회가 성장한들 사모에게는 남모르는 깊은 아픔과 상처가 남고 그 성공은 남편 혼자만의 성공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처럼 아내를 희생양으로 삼아 카리스마를 키운 목회자는 조금만 외적으로 성장하면 카리스마로 칼을 휘두르는 습성이 더 커집니다. 특히 교인이 몇 백 명이 되어 인력과 재정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면 남을 희생시키는 습성이 더 노골화되면서 부교역자를 그 다음 단계의 희생양으로 삼을 때가 많습니다. 몇 십 명 단계의 교회와는 달리 몇 백 명 단계의 교회가 되면 부교역자가 사임해도 새로운 부교역자를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부교역자를 희생시키고 때로는 성도들 앞에서 창피를 주면서 그것을 훈련이란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만 결국 그것은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모습입니다. 그런 리더들은 희생을 강조하지만 대개 자신의 희생은 외면하고 교인들 희생만 요구합니다. 그런 목회자들은 원래부터 남을 희생시키면서 교회를 성장시켰기에 나중에 교회를 도저히 남에게 넘기기가 아까워서 아들에게 세습할 때가 많습니다.
왜 교회세습이 생깁니까? 그 목회자에게는 원래부터 자기희생이란 개념은 없고 남만 희생시키는 개념으로 목회를 해왔기에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남에게 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인 얘기지만 교회를 세습시키는 모습으로 그 목회자가 ‘희생하는 목회자’인지 아니면 ‘희생시키는 목회자’인지 거의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특히 지금처럼 교회세습을 반대하는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서도 세습을 강행하면 그 목회자는 더욱 ‘희생하는 리더’가 아닌 ‘희생시키는 리더’임이 분명합니다. 희생하는 리더십이 있고 한국 기독교와 한국 교회를 위한 양심이 있다면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참된 목회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들아! 사위야! 너의 탁월한 능력을 내가 잘 안다. 그러나 내가 이제까지 섬겨온 교회는 결코 눈독을 들이지 말라. 혼자서 일어서라. 나도 네가 일어설 수 있도록 다른 쪽으로 많이 돕겠다.”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멋진 모습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남을 희생시키면서 교회를 성장시킨 목회자는 그런 개념과 인식과 양심이 결여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그런 목회자는 부교역자도 동역자로 여기기보다는 자기를 위해 희생시키는 소모품처럼 여깁니다. 그렇게 부교역자를 희생시켜서 교회가 몇 천 명 교회로 성장하면 그때부터는 대개 장로에게까지 대범하게 칼을 휘두릅니다.
몇 백 명 교회에서 그렇게 칼을 휘두르다가 장로가 반발하면 교회가 상당한 데미지를 입지만 몇 천 명 교회에서는 장로가 반발하고 나가도 교회에 큰 영향이 없기 때문입니다. 몇 천 명 교회에서 장로가 30명이라면 목사에게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그 30명의 장로가 뭉쳐도 그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 한 명의 리더십을 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왕정 시대에 신하 30명이 뭉쳐도 왕 한 명을 당하기 힘든 것과 유사한 이치입니다.
그 사실을 체감하니까 장로들은 카리스마를 가진 목회자들에게 굴종의 단계로 들어설 때가 많습니다. 결국 교회가 커질수록 장로들의 의미와 영향력은 현저히 줄어듭니다. 그것도 모르고 목회자가 교회를 끊임없이 외적으로 성장시키려는 시도에 장로도 같이 편승해서 교회가 비대화되는 것을 막지 못하면 그것은 결국 자기의 존재의미나 보람이나 역할 문제에서 점차 왜소해지는 길로 가는 셈이 됩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결국 몇 천 명 교회가 되면 그때부터는 카리스마적인 목회자가 휘두르는 칼에 장로가 희생되는 사례가 심심찮게 벌어집니다. 부흥회를 하면 부흥사가 장로들에게 “일어서시오!” 하면 일어서고 “앉으시오!” 하면 앉습니다. 그렇게 성도들 보는데서 순종훈련을 한다고 창피를 주고 기를 죽입니다.
그때 그런 창피를 당하면서도 교회에 잘 붙어 있으면 잘 순종하는 장로로 높여집니다. 그때 반발하면 교회에서 거의 왕따를 당합니다. 왕따를 견디다 못해서 교회를 나와도 자기와 함께 움직여줄 사람은 거의 없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됩니다. 결국 칼을 휘두르는 목회자 밑에서 대개 굴종하며 지내게 됩니다. 보통 교회는 대개 그렇지 않지만 이단 교회 장로들은 대개 그런 굴종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이단에 가면 안 됩니다.
그처럼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이 겉으로는 대단해 보여도 얼마나 많은 상처와 후유증을 동반하고 예고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 카리스마적인 리더의 칼이 끝까지 잘 통할까요? 그런 착각과 오해 때문에 겁 없이 카리스마를 행사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휘두르는 칼은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을 향하게 됩니다. 어느 공동체든지 굴종적인 희생의 강요는 나중에는 반드시 역작용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사모를 희생양으로 삼으면 나중에 어떤 잘못으로 목회자의 리더십에 위기가 생기거나 나이가 들 때 결국 오래 참았던 사모가 반발해서 그때는 심한 말로 거꾸로 상처를 주는 경우도 종종 목격됩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처럼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으로 남을 희생시킨 칼은 인생 후반기에 결국 다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면서 대개 비참한 종말을 재촉합니다.
부교역자에게 훈련이란 명목으로 칼을 휘두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중에 어떤 사건으로 그 칼을 휘두른 목회자가 누군가의 공격을 받거나 힘이 빠지면 어떤 부교역자도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젊은 부교역자들은 나중에 다 같은 교단의 중진이 될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나중에 다 돌아서서 칼을 겨눈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처럼 리더가 힘이 있을 때 휘두른 칼은 힘이 빠질 때 다 자기에게로 되돌아옵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장로에게 휘두른 칼도 마찬가지입니다. 칼을 든 목회자가 힘이 있을 때는 다 잠잠히 있지만 목회자가 은퇴를 앞두거나 어떤 일로 힘이 빠지면 그때부터는 오히려 역으로 칼을 맞게 됩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처럼 대를 이어서 철저히 백성들을 통제하면 모반의 기회가 없을 것 같지만 언젠가는 모반의 기회가 반드시 옵니다. 그때는 밑에서 굴종하던 사람들이 되돌아서서 칼을 휘둘렀던 리더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 인간사회의 보편적인 현실입니다.
< 복된 성경적인 리더십 >
요즘 조용기 목사님을 그 밑에 있던 몇 백 명의 장로들이 고소한 것을 보십시오. 외형적인 숫자놀음과 힘 과시가 얼마나 허무해지는 모습입니까? 힘이 있을 때 휘두른 칼이 나중에 되돌아와 자신이 그 칼침에 맞으면 얼마나 회한도 많겠습니까? 그래서 소수의 길을 갔던 프랜시스가 대 권력을 가진 교황보다 더 행복하고 더 이름을 떨치고 더 선한 영향력을 후세에 남기는 복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희생시키는 카리스마 리더십은 유한하지만 희생하는 예수님의 리더십은 무한합니다.
그런 상황을 외면하고 요즘도 끝없는 탐욕으로 외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초대형 교회들을 봅니다. 작은 교회가 바르게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존재 및 생존과 관련해서 꼭 필요한 복된 일이지만 초대형 교회의 탐식적인 교회성장 추구는 복된 일이 되기보다는 수많은 불행의 예고편이 될 때가 많습니다. 요새는 외적인 성장을 위한 수많은 세미나와 프로그램들이 생깁니다. 사실 교회에서 그런 세미나와 프로그램이 성행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만은 아닙니다.
셀 체계도 굉장히 좋아 보이지만 그것도 역시 교회의 공룡화를 위한 교묘한 수단으로 이용될 때가 많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셀이란 조직을 무수히 만들어서 거대한 공동체를 유지시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냥 깨끗하게 분립교회들을 개척해 내보내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면 자기 아성이 약화되고 지경이 축소되니까 약간의 독립적은 활동은 보장하되 그 셀들을 전체로 묶어 큰 공동체를 유지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셀 체계도 거대한 유형 교회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활용되는 단점과 위험성도 있음을 깊이 인식하고 동참해야 합니다.
교회가 너무 공룡화되어도 안 되고 또한 그런 공룡화의 방편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 너무 생각 없이 추종되어도 안 됩니다. 교회가 적절하게 커지면 기쁘게 분립교회들을 많이 개척해 내보내서 한 명의 인간 리더에게 너무 큰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대형교회들은 자발적인 슬림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왜 그것을 못합니까? 사람이 명예욕과 권력욕과 물질욕을 버리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입니다.
복된 성경적인 리더십은 ‘희생하는 리더십’이지 ‘희생시키는 리더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평생을 따를 리더를 찾을 때 가장 중점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희생하는 리더십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희생하는 리더십을 가지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완벽한 리더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리더십 스타일이 어떤 스타일인지 정도는 대략 파악하고 리더를 선택해야 나중에 눈물짓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너무 리더의 카리스마를 좋아하지 마십시오. 그런 카리스마에 휘둘리다가 자신이 누군가의 이용도구가 되었음을 한탄하고 그때 그런 희생시키는 리더십을 가진 사람에게 반발해보지만 그때는 이미 때가 많이 늦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회한에 빠진 장로님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며칠 전에도 그런 장로님 한 분을 만나서 눈물의 하소연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누굴 탓하겠습니까? 결국 외형주의와 군중 속에 함몰된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교회 밖의 공격과 더불어 교회 내부문제로도 많이 진통하고 있습니다. 그 외적인 공격과 내적인 진통을 자세히 보면 거의 대부분 교회 외형주의의 후유증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교회가 너무 희생을 모른다는 비판입니다. 그 비판에 대해 성도들은 깊은 찔림을 느껴야 합니다.
저는 선교사들의 기도요청을 많이 받기에 그들의 힘든 현실을 너무 잘 압니다. 우리의 나눔은 그들의 사역은 물론 생존 문제까지 좌우합니다. 선교지 원주민의 현실이 비참해서 무엇인가 뜻있는 일을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빠듯하게 시작했기에 일을 진행하면서도 계속 긴급하게 필요한 것들이 생겨납니다. 그런 기도제목을 받으면 저희 재정집사님들도 그저 하늘만 바라보는 현실입니다. 그런 문제의 안정적 해결을 위해 네트영어가 빨리 축복받으면 좋지만 그때까지는 우리 후방 성도들의 희생적인 나눔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제 한국교회에 희생하는 리더가 많이 일어나도록 기도하고 무엇보다 자신부터 남의 희생만 바라지 말고 먼저 희생하는 희생양이 되기를 힘쓰십시오. 그러면 심판이 목전에 있고 고난 중에 있어도 그 희생을 보시고 하나님이 극적인 상황반전의 역사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희생시키는 카리스마 리더십’을 추구하는 사회와 영혼은 미래가 없지만 ‘희생하는 예수님의 리더십’을 추구되는 사회와 영혼은 미래가 있습니다. 항상 성경적인 복된 리더십을 추구하고 그런 희생적인 삶을 자신부터 힘써 실천함으로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심령들이 되십시오.
멸망받을 대상자들은 누구냐?
습 1:1-6
1: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
선지자 스바냐가 사역을 하던 때는 요시아 왕시대였다. 당시 국제적으로는 강대국 앗수르가 본국 사정으로 인해서 서쪽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때였으며, 국내적으로는 요시아 왕이 철저한 개혁을 시행하고 국토를 넓혀가려던 때였다(왕하 22:1-23:20).
1:1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다른 선지서와는 달리 본절에는 선지자의 조상이 사 대까지 언급되어 있다. 다른 선지서와는 달리 이토록 스바냐의 조상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한 것은 아마도 스바냐의 사 대째 조상인 '히스기야' 때문인 듯하다.
본절의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선한 왕 중의 하나였던 '히스기야 왕'을 가리킨다(왕하 18:3-8.).
1:2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
'지면에서'(페네 하다마)는 노아의 홍수 때를 상기시키는 단어로(창 6:7; 7:4) 특별한 수식어가 붙지 않는 한 지역적인 땅의 한계를 넘어선 세상을 가리키는 표현이다(L.L.Walker).
'진멸하리라'(아소프 아세프)는 문자적으로 '완전히 쓸어버리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철저하며, 그 정도가 매우 심한 것임을 시사한다.
1:3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본절에서 심판의 대상을 말씀하신다.
여기서 '거치게 하는 것'은 우상을 가리킨다(Von Orelli).
하나님은 사람과 짐승,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그리고 우상을 악인들과 더불어 파멸시키실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특별히 저자는 '진멸하고'를 두 번 반복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매우 엄격하며 정도가 심한 것으로 철저한 파멸을 초래할 것임을 암시한다.
1:4,5,6 본문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심판에 대한 내용인데, 그 대상자들은 누구인가?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손을 펴서
'손을 펴서'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실 것을 시사한다(사 5:25;9:12,17,21).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은 크게 다섯부류로 나뉘어진다.
①바알의 남아 있는 것을 그곳에서 멸절하며
'바알'은 가나안 사람들의 귀신으로, '주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알은 농경신으로 다산을 주관하는 풍요의 신이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우상 숭배를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주민들이 섬기던 바알을 섬겼다. 여기서 '바알의 남아있는 것'은 개혁을 추구했던 요시아가 많은 바알 숭배 사상이 남아 있었음을 암시한다(L.L.Walker).
하나님은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바알 우상을 파괴하실 것이다.
②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그마림'은 히브리어 '케마림'을 음역한 것이다(왕하 23:5; 호 10:5). 이것은 바알을 숭배하는 가나안의 제사장들을 가리키던 명예로운 칭호였다. '그마림'에 이어 기술된 '그 제사장들을' 70인역에서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그마림'을 보충 설명하고자 부연된 것 같다(Smith). 하나님은 바알의 남은 것들만 파괴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민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이방 제사장들조차 모조리 파멸시키실 것이다.
③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 성신에게 경배하는 자
이들은 별과 달을 숭배하는 자들이다. 별과 달을 숭배하는 자들이다. 별과 달을 숭배하는 의식은 가나안과 바벧론에서 흔히 행해졌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가나안과 바벨론의 영향을 받아 왕정 시대가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별과 달을 숭배하였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신 4:19; 왕하 21:3,5; 렘 8:2; 19:13; 44:8-10). 하나님은 선지자 스바냐를 통해서 별과 달을 숭배하는 자들도 예외없이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셨다.
④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
'말감'(말캄)은 문자적으로 '그들의 왕'을 의미한다. 그래서 혹자는 가나안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이며 왕으로 섬겼던 바알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Sabottka). 그러나 70인역과 수리아 역본, 벌게이트 역본에서는 이것이 암몬 족속의 신이었던 밀곰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본문의 '말캄'은 바알을 지칭하기 보다는 암몬 족속의 신인 밀곰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이러한 '말감'은 솔로몬이 후궁들을 위해서 산당을 지은 것에서 시작되어(왕상 11:5-8,33; 왕하 23:13)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악에 빠지게 했던 우상 중의 하나이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맹세한 후에도 말감을 섬기는 종교적 혼합주의를 행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혼합주의는 아하스 왕과 므낫세 왕 때에 예루살렘에서 흔히 자행되던 죄악이었다(왕하 16:3.Lange).
⑤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심판하기로 결정하신 대상은 배교자들과 불신앙자이다. '찾지도'(비케쉬)와 '구하지도'(다라쉬)는 흔히 제의를 드리는 것과 연관되어 사용 되기도 하나 신명기서와 예언자들은 이것을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과 연관시켜서 사용하기보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과 연관시킨다(신 4:29; 암 5:4-6).
여호와를 찾고 구하는 자는 내적으로, 도덕적으로 여호와만을 바라며 그 계명을 즐겨 행한다. 그러나 예루살렘과 유다 거민들 중에는 하나님을 바라기는 커녕 도리어 내면적, 도덕적으로 배교하거나 불신앙에 빠진 자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였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스바냐 1:1-18
스바냐는 요시아 왕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로 포로 기간 중에도 살아 있었습니다. 스바냐는 임박한 예루살렘의 파멸에 관해 백성에게 경고하고, 다가오는 구원을 예언하였습니다. 1장은 여호와께서 온 땅과 유다 백성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멸절시키신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2장에서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예고합니다. 3장에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재앙을 알리고 다가오는 구원을 선포합니다. 스바냐는 유다 민족이 이방 민족들과 함께 파멸을 당할 것이지만 때가 오면 그들이 해방의 기쁨을 누린다는 약속의 말씀으로 격려해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전 우주적인 심판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날’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여호와의 날은 역사적으로는 바벨론을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날을 가리킵니다. 종말론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심판장으로 재림하실 날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날은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요,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의 큰 날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어떤 자들에게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I.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1-6)
1절을 보십시오.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 스바냐는 유다 왕 요시야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였습니다. 요시야는 8살에 왕이 되었고, 어려서부터 여호와 앞에 정직한 왕이었습니다. 20살에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26살에 성전을 수리하던 중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성경을 읽다가 유다가 쇠락한 것이 언약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임을 깨닫고 온 백성들과 함께 애통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개혁을 이루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앗수루의 국내 혼란을 기회로 국토를 넓혀나갔습니다(왕하 22:1-23:20). 그러나 유다에는 선왕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스바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사 대 조상인 히스기아까지 언급함으로서 자신의 예언이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노아 홍수 심판 때에 세상을 진멸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심판하시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심판하십니까? 3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지면에서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십니다. 공중의 새, 바다의 고기, 거치게 하는 것을 진멸하십니다. ‘거치게 하는 것들’은 우상을 가리킵니다. 우상들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하십니다. 땅 위에서 사람을 멸절하십니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을 심판하시되 그들에게 맡기신 짐승,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들까지 함께 심판하십니다. 그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악인들과 더불어 파멸시키십니다. 저자는 '진멸하고' ‘진멸할 것이라’ ‘멸절하리라’고 반복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엄격하며 철저함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우상숭배자들을 진멸하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하나님은 심판의 손길을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거민 위에 펴십니다. 그래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합니다. 바알은 가나안 사람들의 농경의 신이요, 다산을 주관하는 풍요의 신이었습니다. 유목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이 농경생활로 접어들면서 농사의 신 바알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농사 월력이 모두 바알 숭배와 관련되었습니다. 점차로 백성들의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나 바알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요시아 왕은 철저하게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거부하고, 은밀히 바울을 숭배하는 자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마림이란 바알을 숭배하는 가나안의 제사장들을 가리킵니다(왕하 23:5; 호 10:5).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절하시고 바알 제사장들까지도 모조리 파멸시키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들에게 경배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별과 달을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천채숭배 의식은 가나안과 바벨론에서 흔히 행해진 우상숭배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왕정시대가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별과 달을 숭배하였습니다(신 4:19; 왕하 21:3,5; 렘 8:2; 19:13; 44:8-10). 이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죄악입니다. 이는 피조물을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 끌어올리는 신성모독의 죄입니다. 하나님은 스바냐를 통해서 이들도 예외 없이 심판하실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또 어떤 자들을 멸절하십니까? 5b,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말감은 암몬 족속의 신이었던 밀곰을 지칭합니다. 밀곰 숭배는 솔로몬이 후궁들을 위해서 산당을 지어준 데서 비롯되었습니다(왕상 11:5-8,33; 왕하 23:13).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맹세한 후에도 돌아서서 또 밀곰을 섬겼습니다. 이런 종교적 혼합주의는 아하스 왕과 므낫세 왕 때에 흔히 자행되었습니다(왕하 16:3).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자들을 멸절하십니다. 이들은 배교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영적인 무관심이야말로 가장 타락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스바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 온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람과 가축과 코로 숨 쉬는 모든 생물을 진멸하신 것처럼 멸절시키십니다. 노아시대에는 물고기들은 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장차 임할 심판 때에는 바다의 물고기까지도 멸절시키십니다. 이는 우주의 종말에 있을 철저한 심판을 보여줍니다. 처음 창조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처음 창조된 모든 것들이 진멸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것들만이 살아남습니다. 또한 그날에는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이 거민이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이 펼쳐집니다. 그날에는 회개를 거부하고 타락한 본성을 따라 행하던 은밀한 일들까지도 다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혼합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맹세를 하면서 속으로는 밀곰을 숭배하는 거짓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이 보이면서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임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주여, 주여”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위선과 가식적인 신앙생활을 가증히 여기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속이고 기만하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롬 12:3).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자들은 다 하나님을 기만하는 우상숭배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준엄하는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II. 주 여호와 앞에 잠잠할지어다(7-13)
7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스바냐는 온 백성들에게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라고 선언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이 침묵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불의를 심판의 날입니다. 그 심판의 날이 임박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희생을 준비하셨고,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희생은 유다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가 청할 자들은 유다를 심판하는 도구로 작정한 바벨론 군대입니다. 그들은 심판의 도구로 유다 거민들을 멸망시킬 자들입니다(사 13:1). 하나님은 이들을 구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벌하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먼저 방백들과 왕자들을 심판하십니다. 방백들은 유다 거민들의 지도자들을 가리킵닌다. ‘왕자들’은 요시아의 친족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종교 개혁을 반대하고 대적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벌하시고, ‘이방인의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들에게 경건한 옷차림을 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항상 말씀을 기억하며 살도록 옷 술을 달도록 명하셨습니다(민 15:38; 신 22;11,12). 의복은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방백들과 왕자들이 이방인들이 입는 의복을 즐겨 입었습니다. 이는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날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불신자들처럼 살아하는 자들을 벌하십니다.
또 어떤 자들을 벌하십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문턱을 뛰어넘어서 포악과 거짓을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그날에,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의 문턱을 뛰어 넘어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문턱을 뛰어 넘는 자들은 왕자들과 방백들의 하수인들입니다. 이들은 남의 집의 문턱을 침입하여 포악과 거짓으로 재물을 약탈하여 자기 주인의 집을 채운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포악한 자들을 반드시 벌하십니다.
또 하나님의 그들을 벌하실 때의 상황이 어떠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제 이 구역에서는 울음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어문은 다메섹 문 가까이에 있는 북쪽 성문을 가리킵니다(대하 33:14; 느 3:3; 12:39). 이는 적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부르짖는 소리가 들입니다. 제 이 구역은 어문 가까이에 있는 성읍 안쪽에 있는 문인데 그 구역에서도 울음소리가 일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작은 산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여호와의 날’에 이방 군대의 침략으로 예루살렘 성읍이 파멸되고, 그곳 거민들은 곡하게 될 것입니다.
스바냐는 호소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막데스 주민들아 너희는 슬피 울라 ”예루살렘 남쪽 저지대에 사는 막데스 주민들을 향하여 슬피 울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막데스는 상업으로 이름이 난 지역입니다. 그런데 상거래의 중심이 되었던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했습니다. 더 이상 은을 거래하는 자들도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모든 것이 황폐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찾아내어 심판하십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여호와를 멸시하는 말을 하는 자들을 등불로 두루 찾아내어 벌하십니다. 찌꺼기같이 가라앉는다는 말은 쾌락에 취해있고 악을 조장하며 숨어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세상에 숨어서 계속적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그들은 여호와는 살아계시지 않으며, 생화화복을 주장하지도 않으신다고 합니다.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복을 내리지도 않고, 거역하는 자에게 화도 내리지 아니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이들은 포도주와 독주로 만취되고 내일도 오늘 같으리라고 생각하며 사는 자들입니다(사 56:1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숨어있는 곳을 아시고 등불을 들고 두루 찾아내어 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신 30:15-18) 우리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는 분이십니다.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복을 내리고 불순종하는 이들에게는 저주를 내리시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고, 하나님은 자신들의 삶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큰 교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등불을 들고 찾으시는데 누가 그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에게 어떤 벌이 내려집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재물이 노략질당하고, 그들의 집이 황무하게 됩니다. 그들은 집을 건축하지만 그 집에 살지 못합니다. 포도원을 가꿀 것이지만 포도주를 마시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는 완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자신들이 받았던 축복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들이 ‘여호와의 날에’는 재물을 약탈당하고, 집이 불타고, 포도원까지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드러내십니다. 그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입니다.
III.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14-18)
1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여기에서는 여호와의 날을 ‘여호와의 큰 날’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날에 임할 심판이 너무나 심각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심판이 가까이 왔습니다. 너무나 가까이 왔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미 여호와의 날의 소리가 들립니다. 심판의 소리가 들입니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울고 있습니다. 이만큼 여호와의 심판은 우리 가까이 와 있고, 긴박하게 일어날 것을 알고 항상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도 심판의 긴박성을 경고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녹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 3:10) 히브리서도 말합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 심판이 있다”(히 9:27). 주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것인데 그날과 그 시간을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날과 시는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습니다. 이는 심판의 긴박성을 인식하고 하루하루 오늘이 심판의 날이라고 생각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긴장하고 언제라도 주님을 만날 준비된 상태로 살아야 함을 깨우쳐 줍니다.
그날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그날은 하나님에게는 분노의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 대한 진노가 너무 커서 멈출 수 없습니다. 동시에 백성들에게는 환난과 고통의 날입니다. 온 땅은 황폐하고 패망하는 날입니다.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현현과 임재하심이 진노로 나타나십니다(출 19:16; 20:21;신 4:11). 여호와의 날은 구원을 받을 사람에게는 은혜의 날이요, 형벌을 받을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또 16절을 보십시오.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그날에 그들은 나팔을 불어 경고할 것입니다. 견고한 성읍들을 치는 날이요, 높은 망대를 치는 날입니다. 견고한 성읍이 무너집니다. 높은 망대가 무너질 것입니다. 그날에 전쟁의 나탈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전쟁처럼 처절하게 임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리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같이 행하게 하십니다. 맹인들은 고난의 날에 피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큰 날에 아무도 그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의 피가 쏟아져서 티끌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같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상 섬기기를 즐겨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 엄정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그들이 의지하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합ㄴ다. 그들은 은과 금을 하나님처럼 섬겼습니다. 유다 지도자들과 하수인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강포를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지하던 은과 금도 그들을 구원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날에는 이 온 땅이 여호와의 분노의 불길에 삼켜질 것입니다.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집니다.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바냐는 유다 거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다가 모든 세계 만민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선포했습니다. 이 예언은 역사적으로 40여년 후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해 실현되었습니다. B.C. 587년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온 땅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질투의 불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 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장으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때에 일어날 모습을 다음과 같에 기록했습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에 여호와의 큰 날입니다. 재림 나팔이 울려 퍼질 때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던 사람들 모두 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였습니다. 모든 징조들이 급박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고도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더욱 더 깨어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상숭배는 패망의 길입니다. 여호와를 찾지도 안고 구하지도 않고, 거짓과 위선으로 살면 반드시 살면 패망합니다. 우리가 이방 풍조에 휩쓸리지 않고, 언약의 백성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은과 금이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온전히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