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유목민 외 1편
송종국
폭설이 내리는 날
서울역 시계탑 아래 대형 스크린에서
툰트라 들소 우밍막이
눈 위를 걷는다
눈은 하염없이 내리는데
복슬복슬한 털이
발밑까지 치렁치렁한 우밍막이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사향을 뿜으며 걷고 있다
네네츠 유목민들이
북극해에서 남쪽까지
일천 킬로미터의 초야을 찾아
오로라 빛 휘황한
백야의 툰트라를 나서는 이 밤에도
함박눈 펑펑 내리는 서울역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신발장 위에서 자신의 영혼을 올려놓고
집을 나선 자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아니 애초부터 그들에겐 안식이 없다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간 그들은
아침이면 다시 짐을 꾸린다
잔뜩 옷맵시를 부리고
하이힐을 신고 뽐을 내며
안락한 보금자리인
집을 잊은 채
각자의 일터로 발길을 옮긴다
눈은 내리고 사람들이
먹이를 찾아 고층빌딩 회전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 아침에도
마지막 과업
― 봉은사에서 추사를 만나다
노구를 이끌고 남태령 너머
봉은사를 왕래한 지도
몇 해가 지났지만
집 떠나오면
과지초당瓜地草堂에는 별일은 없는지
소식이 궁금하다
오래전 부탁받은 장경각 현판을
써놓고 가야겠다 싶어
먹과 붓을 준비하라 일러두고
호봉虎峰스님이 내놓은
작설차 두어 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해가
병진년 음력 시월 초이렛날이었던가
시동의 부축을 받으며
나무 목木자를 쓰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고
기신氣神이 없어 십여 분 걸려
겨우 획을 그었다
아무래도 힘이 다 됐나 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얼굴을 떠오르고
어머니의 사랑이 그립구나
반反자의 삐침을 그을 때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 줄 알았다
다시 파임을 긋고 우又를 완성하는데
속적삼이 땀으로 흥건하다
갓 떠온 샘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니
한결 낫다
다시 기운 내서
주검 시尸를 쓰는데
붓끝이 비류직하飛流直下
삶의 순간이 아찔하다
함께 공共자를 쓰면서 죽음을 생각했다
몽둥이 수殳자를 쓰고
몰매를 맞은 지나온 시절이
영광과 비운의 그림자로 아른거렸다
말년에 맞닥뜨린
유배 또 유폐의 십여 년
말년의 고통이 그와 같았다
판전이란 글씨 왼편으로
일흔한 살 나이와
과천 땅에서 온 늙은이라 적고
병중에 쓴다고 밝혔다
내 삶의 마지막 과업이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황천을 건넜다
판전版殿이란 조박한 동자체 현판이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지금껏 세상에 남았으니
내 영혼이 외롭지만은 않구나
― 《생명과문학》 (2023 / 봄호)
*《생명과문학》 신인상 수상작(심사위원 공광규, 김윤환)
송종국
전남 고흥 출생. 숭실대학교 사학과 졸업. 〈소래문학〉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