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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새 예루살렘의 회복
슥 8:18-23
18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20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다시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이 올 것이라
21 이 성읍 주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하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22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23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슥 8:18-23 / [슬픔이 기쁨으로]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내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19) `너희가 ㄱ) 4월과 5월과 7월과 10월에 슬퍼하며 금식하던 절기들이 이제 환희의 명절로 바뀔 것이다. 유다의 탄식이 환호성으로 바뀌고, 그 슬픔과 고통이 기쁘고 즐거운 잔치로 변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나와 진실한 관계를 유지하고 항상 모든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여라!'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ㄱ. BC 587년 4월 9일에 예루살렘의 성벽에 첫 돌파구가 뚫리어 적군이 들어 왔으며(왕하25:3-4), BC 589년 10월 10일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도성의 포위를 시작하였다(왕하25:1)) 20-22) [세계 만민의 성지 순례]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또 이런 일도 일어날 것이다. 온 세상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하고, 많은 성읍의 주민들이 와서 나를 온 세상의 주님으로 경배하며 내게 예물을 바칠 것이다. 한 성읍의 주민들이 다른 성읍의 주민들을 찾아가서 이렇게 권면할 것이다. `우리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갑시다! 우리는 성지를 순례하려 한다오!' 23)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다. `그때에는 이런 경험들을 하게 될 것이다. 세계 만민들 중에서 언어가 다른 열 사람이 와서 유다 사람 한 명의 옷자락을 붙잡고 `하나님께서 당신들 편에 계시다는 소식을 우리가 들었으니, 우리가 당신들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하고 간청할 것이다'
성전이 새로 재건되고 있는데 계속해서 금식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금식이 변하여 기쁨의 절기가 되고,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을 찾고 은혜를 구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금식이 변하여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라(18-19) 4월의 금식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주전 586년 4월에 예루살렘 정복전쟁을 시작하고, 성전 성벽을 파괴된 날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벨론에 3차 침략을 당한 예루살렘은 1년 6개월 동안 포위당하고 계속 항전하는 동안, 성 안의 사람들은 기아에 시달리며 귀부인들도 음식 찌꺼기를 찾기 위하여 거름더미를 뒤지고, 마침내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참상을 빚기에 이르렀습니다(왕하 25:1-3). 5월의 금식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주전 586년 5월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왕하 25:8,9). 7월의 금식은 유다 총독 그달랴가 암살당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왕하 25:25,26). 10월의 금식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성 중에 곤고가 시작된 주전 588년 10월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왕하 25:1). 그러나 이 금식 절기는 결코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아니었고, 백성들은 자신의 처지가 비통한 마음으로 이날을 기억하며 금식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슬픔의 절기가 변하여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은 지난날의 모든 곤고를 잊고 예루살렘에서 기쁨의 절기를 누리게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20-23) 하나님께서는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들이 올 것이며, 이 성읍 주민이 저 성읍에 가서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하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고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갈급한 심령으로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달은 결과입니다. 그 날에는 이방 사람 열 명이 유다 사람 한 사람의 옷자락을 잡고, 유다 사람의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적용: 만민이 붙잡아야 할 구원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당신의 슬픔이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으로 변화되었다면 이웃과 나누어 봅시다.
“나의 자녀여! 나를 위해 맡은 일 때문에 힘들어 하거나 어려움 때문에 낙심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 포도원에서 성실하게 일하면 그 몫을 얻게 될 것이다. 글을 쓰고 노래하고 탄식하고 침묵하고 또 기도하라. 온갖 불행을 기쁘게 감수하라. 하늘나라는 이 모든 것에 값하며 또 그 이상이다. 하나님이 아시는 한 날이 닥치면 평화가 찾아 올 것이고 밤도 없고 낮도 없을 것이다. 그 때는 끝없는 빛과 한없는 밝음과 변함없는 평화와 안식이 있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힘을 더하고 위로하겠다는 내 약속을 의지하라”(그리스도를 본받아/토마스 아 켐피스)
< 설 교 >
영광스러운 부흥의 조건
스가랴 8:18~23 / 피영민 목사
서 론
오늘은 스가랴 7장과 8장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부흥사입니다. 어둡고 좌절되며 낙망하던 시대에 유다 백성들에게 부흥사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격려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전건축을 격려하고 미래의 영광스러운 비전을 제시한 것입니다. 스가랴 1장부터 6장까지 8개의 환상을 받았는데, 그때가 B.C. 520년이었습니다. 스가랴 7장과 8장은 그때로부터 2년 뒤인 B.C. 518년 페르시아 왕인 다리오가 즉위한지 4년 만에 스가랴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스가랴 7장과 8장은 하나의 연결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 종자를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 대로 오월간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하매” (슥 7:2~3). 여기 나오는 벧엘 사람들의 이름은 사례셀, 레겜멜렉 등 바벨론식 이름입니다. 이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태어나 바벨론식 이름을 받아서 살다가 스룹바벨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1차로 귀향한 이들은 벧엘이라는 도시에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질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을 기억하며 금식하는 절기를 지켰는데 4월, 5월, 7월, 10월 이렇게 1년에 총 4번을 금식하였습니다. 4월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을 기억하며 금식하였고, 5월은 성전이 파괴된 것을 기억하며 금식하였고, 7월은 유대인의 학살을 기억하며 금식하였고, 10월은 예루살렘이 포위된 것을 기억하며 금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절기를 계속해서 지켜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질문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것은 참된 부흥의 징조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행해온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우리의 전통이 성경에 맞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은 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런 질문은 기뻐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1517년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와 1536년 종교개혁을 일으킨 존 칼빈과 같은 분들도 동일한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하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질문은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성경을 읽으시다가 영적인 질문을 많이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지금 이것을 똑바로 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성경적인가?’ 이런 질문을 우리는 종종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대단히 중요하게 받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스가랴 7장과 8장 두 장에 걸쳐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벧엘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그들에게만 하지 않으시고 유다 백성 전체에게 하십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스가랴 7장과 8장에서 하나님의 대답이 네 번에 걸쳐 오는데 대답이 올 때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7장 4절, 8절; 8장 1절, 18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우리가 읽은 본문인 스가랴 8장 18~23까지는 네 번째 답변이며, 벧엘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입니다.
금식하는 절기를 1년에 4번이나 지킬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에 첫째, 하나님의 대답은 과거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멸망을 기억하던 절기는 이제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금식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금식하는 절기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식하는 절기는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식하는 대신 오히려 먹고 즐기는 절기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루살렘은 사람들이 모여서 금식이나 하는 곳이 아닌 진실과 화평이 거하는 온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강대한 나라의 백성들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자 찾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백성들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단지 금식하는 절기를 지켜야 하는 질문을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부흥의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유다 백성뿐 아니라 온 세계 만민에게 미칠 큰 부흥을 약속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받으려고 하면 다른 사람들도 은혜를 받으러 따라와서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심을 들었으니 우리도 너희와 함께 가겠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부흥의 모습입니다. 신약시대 오순절 성령의 부으심으로 인해서 실제로 실현된 부흥의 약속을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네 번째 답변입니다.
Ⅰ. 첫째 조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명령하신 것을 행할 때 기뻐하신다
세 개의 답변은 네 번째 부흥의 약속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조건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영광스러운 부흥의 조건인 것입니다. 세 가지 조건 중 첫 번째 답변은 스가랴 7장 4~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명령하신 것을 인간이 순종할 때 기뻐하십니다. 명령하는 것을 행해야 기뻐하시지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행한다고 기뻐하지는 않으십니다. 스가랴 7장 5~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질문형태로 물어보십니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을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슥 7:5~6).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너희가 70년 동안 금식한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을 위하여 한 것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금식할 때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런 금식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한 적이 없습니다. 명령한 적도 없는 금식을 하나님을 위해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이 명령하지 않은 일을 행했을 때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에게 슈퍼마켓에서 두부도 사오고 간장도 사오고 어묵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돈을 받아서 사오라고 했던 두부, 간장, 어묵은 사지 않고 아이스크림, 과자, 감자튀김을 사온다면 부모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잘했다고 하겠습니까? 혼을 내겠습니까? 부모가 시킨 것은 사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사온 아이의 행동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것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사울에게 아각 왕과 아말렉 군대, 모든 짐승까지도 다 죽이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좋은 짐승을 죽이지 않고 남겼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와서 훈계하는데, 사울 왕은 하나님께 좋은 것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죽이지 않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 사람들이 아무리 자신의 뜻대로 착하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식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행해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역사를 보아도 순종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형통하게 하셨다고 증거해줍니다.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그 때에는 예루살렘과 사면 읍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남방과 평원에도 사람이 거하였었느니라” (슥 7:7). 성도들이 번창하고 번영하려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상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지상명령의 내용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분부한 것을 가르치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전통과 신학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되돌아보고 우리 교회의 전통과 신학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인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점검해보고 하나님의 분부대로 순종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반성해야 할 첫 번째 주제입니다.
Ⅱ. 둘째 조건: 하나님께서는 종교의식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보다 하나님의 도덕적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두 번째 답변은 스가랴 7장 8-1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의식에만 치중하지 말고 도덕적인 명령들을 중요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도덕적인 명령과 윤리적인 명령을 중요시하라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금식의 절기는 꼬박꼬박 지켰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도덕적인 명령들은 무시했습니다. 기독교는 윤리를 무시할 때 망하는 것입니다. 비윤리적일 때 배교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도덕과 윤리는 기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윤리와 도덕을 우습게 여기고 마음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구원 받고 나면 술을 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습관적으로 간음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그것을 끊고 가정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바람피우는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헌금을 하고 바람을 잘 피우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그 기도가 응답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도적질했던 사람은 도적질을 그만두고 남을 도울 수 있도록 자신의 손으로 일해야 합니다. 도적질한 것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며 사기를 치는 사람은 바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윤리성이 회복되어야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성령을 부으시고 부흥을 주시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가 끝나고 노아가 두 마리의 새를 보냅니다. 하나는 비둘기이고, 다른 하나는 까마귀입니다.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까마귀는 시체에 앉아 시체를 먹으며 살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옵니다. 성령의 비둘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윤리적으로 더러우면 앉지 못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도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무시하던 윤리적인 명령 네 가지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슥 7:9~10). 첫째, 재판하는 사람은 진실한 재판을 하라는 것입니다. 뇌물을 받고 판결을 하며 전관예우 때문에 선배 판사가 내린 판결을 뒤집을 수 없어 진실한 재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판하는 사람은 진실하게 해야 합니다. 둘째, 사람들은 피차 인애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과부, 고아, 나그네, 궁핍한 자와 같이 사회적 약자들을 압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재산을 빼앗지 말고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남을 중상모략으로 해치지 말고 심중에 음모를 꾸미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당한 요구입니까? 이것은 정상적이며 정당한 요구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은 매일 하면서 마음을 금강석처럼 강퍅하게 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청종하지 않았습니다. 불의한 재판을 하고 사람들 사이에 시기와 다툼이 있었고 약자를 압제하며 남을 해치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런 것들을 불신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비윤리적인 행동들을 유다 백성들이 서슴지 않고 행하였습니다. 이런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고 금식을 한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덕적인 명령을 무시함으로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었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은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 회리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헤치리라 한 후로 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으로 황무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슥 7:13~14). 금식을 1년에 4번이나 해도 비윤리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회리바람이 불어 유다 백성들을 열국으로 날려 보낸다고 했습니다. 열방이 쳐들어와 포로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가나안 땅을 황무하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흥을 보려면 윤리적인 명령을 중요시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윤리를 따라 자신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윤리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5계명, 부모를 공경하라. 6계명, 살인하지 말라. 7계명, 간음하지 말라.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9계명, 거짓말하지 말라. 10계명, 탐심을 가지지 말라. 이렇게 간단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윤리적인 명령에 불순종하면 아무리 금식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입니다. 윤리적인 잘못을 회개해야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부흥의 축복을 보게 될 것입니다.
Ⅲ. 셋째 조건: 과거의 영광이나 실패에 얽매이지 말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라
세 번째 답변은 스가랴 8장 1~17절에 나와 있습니다. 과거의 영광이나 실패에 얽매이지 않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과거지향적인 사람들이 되지 말고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유다 백성들 중에는 과거지향적인 사람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첫째, 노인들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스룹바벨 성전을 보더니 울며 탄식하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영광보다 스룹바벨의 영광이 더 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과거가 좋았다고 말하지 말고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아무리 영광스러웠어도 과거보다는 미래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미래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썩지 않을 영생할 몸을 입고 아름다운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죽고 난 뒤에 영광스러운 육체로 변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서 영생하는 부활의 몸을 입고 복을 누리며 하나님과 함께 사는 그런 비전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과거 영광이 아무리 크다 해도 미래의 영광보다는 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영광을 보며 그때가 좋았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유다 백성들 가운데 과거에 느부갓네살에게 함락당한 실패를 탄식하며 과거에 지었던 죄에 얽매여서 탄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으면 그 피로 과거에 지었던 죄를 씻어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실패에 너무 얽매지 않아도 됩니다. 실패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8장에 유다 백성들에게 영광스러운 미래의 비전을 제시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슥 8:3).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슥 8:5).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슥 8:7). “곧 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슥 8:12). “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 가운데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축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슥 8:13). “이제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지니라” (슥 8:15). 예루살렘으로부터 진리가 나와서 이방 족속들까지 모두 축복받는 신약시대의 위대한 축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유대인들이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그것들을 지키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한 가지 절기를 지킵니다. 그것은 주일입니다. 모든 절기를 주일에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주일을 지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로 그것을 기념하여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킨다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이시므로 우리 모든 성도들도 미래에는 영광스러운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항상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즐거움이 있고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결 론
우리는 영광스러운 부흥을 기도하면서 기대해야 합니다. 부흥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인데 우리는 세 가지로 준비해야 합니다. 첫째, 주님께서 분부하신 것을 행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 삶에 윤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셋째, 과거에 얽매여서 탄식하지 말고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켰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흥을 보내시고 성령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동안 죄가 있지만 회개하지 않은 성도들은 꼭 회개하여 은혜 받고 능력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슥 8:18-23 / 윤삼중 목사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은 인간의 머리로는 측량할 수 없는 참으로 기이합니다. 기이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상식과 사고를 뛰어 넘어서 우리가 도무지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도저히 은혜 받을 수 없는 자에게 크신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은 것이 유다 백성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베푸심의 결과입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달라졌기 때문이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상식과 이치대로라면 그들은 바벨론에서 더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까지 고생을 겪으면서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자격이 있다는 것이 우리 생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달라지지도 않은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생활 70년 후에 돌아오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말씀에 대한 성취입니다.
오늘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스가랴 선지자는 B.C. 520년에 포로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동시대 사람인 학개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신정 정치를 부활시키고, 마지막 때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포로 귀환으로 돌아온 유다인들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긴 하였으나 그 주변 사람들의 냉대와 조롱을 받았고, 그리고 그들 앞에 찾아온 것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때에 스가랴 선지자는 자기 민족, 새로운 유다 공동체를 도탄에서 구하고, 성전을 건축하여 다시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소망을 갖게 하려는 마음으로 불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유다 사회의 지도자들은 정치 지도자든 종교 지도자든 다같이 미지근한 태도로 성전 재건 문제를 보류하고 있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역사적 자리 확보를 위해서도 성전 재건은 필수적인 것이었으며, 하나님이 바벨론 포로귀환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건축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스가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 있음을 간파하였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한 회복을 강력하게 촉구하였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 재건사업에 참여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기대하고 소망했던 이스라엘은 지역경제를 살리고, 군사력을 강화해서 주변 이방 국가들에게 이스라엘의 회복된 국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의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올바른 삶을 살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은 다른 데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진리와 화평을 좇아 살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좋은 환경이나 국력의 회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거룩함에 대한 회복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진리를 추구하며, 이웃과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사회속에서, 또한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가르쳐주고 있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간절하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화려한 예배나 교회의 성장이 아닙니다. 사람들에 보여주기 위한 많은 공적과 업적을 만들어내는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리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거룩함을 본받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심령속에 영적 회복과 부흥이 임하는 것입니다. 영적 부흥이 임하면 성도들의 신앙은 살아나며, 자연스럽게 교회는 성장하고 부흥하게 됩니다. 영적 부흥은 사람의 프로그램이나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 부흥의 계절이 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과 영향력을 주어야 합니까?
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삶의 현장속에서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며, 추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속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며, 무슨 영향력을 주어야 합니까? 우리가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19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화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유다는 BC 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생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족의 비극적인 사건, 즉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 사건을 기념해서 4월과 5월, 그리고 7월과 10월, 한 해에 네번의 금식기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영광을 회복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예루살렘에서 고통스러운 금식이 변하여서 기쁨과 즐거움의 절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금식을 하러 모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찬송하며,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이 넘치는 절기를 누리기 위하여 모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루살렘은 저주가 변하여서 축복이 되었고, 고통과 슬픔이 변하여 찬송과 감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입은 백성들은 더 이상 금식이 필요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형식적인 금식에서 벗어나 '구원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즐거워하는 삶이 되게 할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직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진리와 화평을 사랑하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질에로의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진리대로 사는 것이 구별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분입니다. 또한 원수까지 사랑하며, 화평함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그들에게 주어진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베풀어지고 그들은 은혜로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은혜를 안다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힘으로 삼지 말고 약한 자, 병든자, 가난한 자를 무시하지 말고 그들을 도와주고 섬겨주는 사랑, 즉 화평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즉 삶의 현장속에서 진실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직하게 순종하며, 화평을 사랑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삶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입니까? 16,17절을 보면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행할 일이라는 것은 은혜를 받은 자가 행할 일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 받은 자가 행할 일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것이고,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행할 것은 은혜를 받은 만큼 내어 놓고 베푸는 것이라고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은혜 받은 자가 행할 일을 이웃과의 관계에서 말합니다. 너희가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이웃과 함께 진리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웃을 함께 진리를 나누고 진리의 길로 걸어갈 형제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푼다는 것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차별의식은 하나님 은혜의 은혜 됨을 알지 못하는 증거물이 되며, 화평을 깨뜨리는 주된 원인이 됩니다.
우리는 지금 이 구원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행하고, 화평을 위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은 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삶을 살아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믿는 성도들이 있는 곳에서는 어떤 다툼도, 어떠한 갈등도, 마음이 상하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저 낮아져서 섬기고, 양보하고, 배려하고, 오래 참고, 끝까지 이해하면서, 화평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하시고, 그곳에서 놀라운 은혜와 복을 내리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마5:13-14) “너희가 세상에서 행하는 착한 행실로 세상의 모든 불신자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우리는 어떠한 환경 어떤 대상이든지 우리의 진실함과 화평케 하는 삶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예수님과 함께하여 복 주시는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 보여야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외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2.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는 열정과 믿음이 살아나게 됩니다.
많은 백성들과 나라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무엇을 구하게 됩니까? 영적 부흥이 일어나게 되면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망한 후에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가정이 파괴되고, 열방 가운데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시를 당하고 비참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도 하나님만을 섬기지 아니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면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그들은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였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실재로 그렇게 살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최우선이 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힘들고 어렵지만 바사제국에서 무엇을 하던지 먼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드러내놓고 믿었습니다. 공개적으로 믿었습니다. 다니엘처럼 믿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면 죽인다고 해도, 도처에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고발을 당해도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드러내 놓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시고 어떻게 해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시고 저주 대신에 복을 주시며, 고통 대신에 기쁨을 주시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는 가운데 함께 하시는 것을 말이 다른 이방 백성들이 보게 된 것입니다. 무심히 보면 별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형통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 외에는 별로 뛰어난 것도 없는데, 이상하리만치 뛰어나게 잘하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하시고 복을 주셔서 그렇구나.”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하나님을 온전하게 경외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 주변에 있는 이방사람들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겠다고 선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은혜를 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놀라운 일이 바사제국에서 실제적으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일어났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나타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흘러 넘치는 것을 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신앙생활은 숨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들어내 놓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인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숨기지 아니하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 생활을 보고 세상의 모든 불신자들이 예수를 믿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우리를 먼저 불러서 주님의 백성을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삶을 온전히 살아가면 큰 복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그 날”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많은 이방 백성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교회로 오게 되는 날입니다.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까지도 예루살렘에 와서 만군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앞으로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가 세워가는 교회로 모여든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것입니다. 이 말씀의 예언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묻히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 세우신 교회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습니다. 할렐루야!
3. 하나님의 영광을 듣고 본 이방 백성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붙잡고 우리들도 너희와 함께 하나님께로 가려 하노니 데려가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듣고 본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붙잡고 무엇을 부탁합니까? 우리들도 너희와 함께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23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는 말이 다른 이방 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옷자락을 잡는다”는 말은 상대방에게 복종하고 간구하는 표현으로 고대 근동에서 많이 사용되던 표현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의 옷자락을 잡고 간청하는 대목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삼상 15:27)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옷자락을 잡는 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참된 하나님이라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의 축복이 참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하나님의 함께 하신다 즉 임마누엘이 은혜의 통로임을 듣고 깨달은 이들이 이제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먼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될 때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다 회복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면 다른 나라의 백성들까지도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려고 “우리들도 함께 가려 하노라.” 하면서 따라 나선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한 사람당 10명의 이방인들이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나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붙잡고 그의 성전에 함께 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열국 백성 열 명이 유다 백성 한 사람의 옷자락을 잡은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과 함께 하심을 들었을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삶 역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이 세상에 보여주는 거룩하고 신실한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과 유다는 많은 이방인들이 사모하는 나라가 될 것이며, 이들의 모습에서 영향을 받은 열국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이방인들이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이 확고한 결단의 음성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방 민족들은 자신들의 현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음을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평안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그들이 발견하게 되는 것은 헛되고 헛된 세상 뿐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오직 공허요 불안이요 허무한 것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겠다는 소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참으로 영혼의 갈증을 가진 자들은 교회를 향하여 소리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세상을 포기하겠노라, 우리는 이제 경건하고 영적으로 부요한 당신들을 위하여 불경건한 이 사회를 버리겠노라고 외치며,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실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속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보게 된 사람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23절에 보면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이방 사람들이 우리의 옷자락을 붙잡고 이제 믿음으로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교회로 나가고 싶습니다. 나를 제발 인도해 주십시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나도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기쁨과 축복과 특권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여러분이 복음으로 인해 당하는 어려움과 슬픔과 위험의 현장에도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 하나님의 소원, 바람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소원은 바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러 주의 전에 나아올 때면 많은 이웃들과 함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이웃들이 우리의 옷자락을 붙들고 “나도 당신과 함께 예배를 드리러 가려 하니 나도 좀 데려다 주시오.” 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도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사명자로서 세상 사람들의 간절한 음성을 듣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우리 교회에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야만 하겠습니까? 그것은 먼저 우리 교회에 주님의 축복이 충만해야만 합니다. 성령 충만, 은혜 충만함의 역사가 넘쳐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언어가 다른 이방 백성들도 저주가 변하여 복이 되고, 평강이 씨앗을 얻어 풍성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친히 복이 되어 구원의 은혜로 가득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넘쳐나는 놀라운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령님의 충만하신 은총이 넘쳐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고통은 변하여서 기쁨과 찬양으로 넘쳐나고, 빈궁함은 변하여서 차고 넘치는 풍성한 삶이 되는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떠한 환경이나 형편 가운데에도 하나님만을 온전히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 하시는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큰 복을 주시는구나!” 그리고 이방인들이 ‘나도 하나님 믿을 수 있도록 당신이 나가는 교회로 데려가 주세요.’ 라고 하며 여러분의 옷자락을 붙드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2018년 4월 27일에 남북정상회담을 통하여 우리는 온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판문점 선언을 보았습니다. 남북을 대표하는 두 정상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합의문을 통하여 분쟁의 현장을 평화의 현장으로 바꾸며, 전쟁의 막을 종전이 선언되며, 통일의 시대를 여는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는 놀라운 역사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이시며, 교회와 성도들의 부르짖는 기도응답으로 70년의 분단의 아픔과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주권하에 이루어지는 통일의 시대로 가는 첫 출발이며, 평화체계가 일어질 것을 믿고 확신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노래하며 찬송합니다.
영광스러운 부흥의 조건
스가랴 8:18~23
오늘은 스가랴 7장과 8장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부흥사입니다. 어둡고 좌절되며 낙망하던 시대에 유다 백성들에게 부흥사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격려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전건축을 격려하고 미래의 영광스러운 비전을 제시한 것입니다. 스가랴 1장부터 6장까지 8개의 환상을 받았는데, 그때가 B.C. 520년이었습니다. 스가랴 7장과 8장은 그때로부터 2년 뒤인 B.C. 518년 페르시아 왕인 다리오가 즉위한지 4년 만에 스가랴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스가랴 7장과 8장은 하나의 연결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 종자를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 대로 오월간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하매” (슥 7:2~3).
여기 나오는 벧엘 사람들의 이름은 사례셀, 레겜멜렉 등 바벨론식 이름입니다. 이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태어나 바벨론식 이름을 받아서 살다가 스룹바벨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1차로 귀향한 이들은 벧엘이라는 도시에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질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을 기억하며 금식하는 절기를 지켰는데 4월, 5월, 7월, 10월 이렇게 1년에 총 4번을 금식하였습니다. 4월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을 기억하며 금식하였고, 5월은 성전이 파괴된 것을 기억하며 금식하였고, 7월은 유대인의 학살을 기억하며 금식하였고, 10월은 예루살렘이 포위된 것을 기억하며 금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절기를 계속해서 지켜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질문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것은 참된 부흥의 징조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행해온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우리의 전통이 성경에 맞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은 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런 질문은 기뻐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1517년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와 1536년 종교개혁을 일으킨 존 칼빈과 같은 분들도 동일한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하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질문은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성경을 읽으시다가 영적인 질문을 많이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지금 이것을 똑바로 하고 있는 것인가?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성경적인가?’ 이런 질문을 우리는 종종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대단히 중요하게 받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스가랴 7장과 8장 두 장에 걸쳐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벧엘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그들에게만 하지 않으시고 유다 백성 전체에게 하십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스가랴 7장과 8장에서 하나님의 대답이 네 번에 걸쳐 오는데 대답이 올 때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7장 4절, 8절; 8장 1절, 18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우리가 읽은 본문인 스가랴 8장 18~23까지는 네 번째 답변이며, 벧엘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입니다.
금식하는 절기를 1년에 4번이나 지킬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에
첫째, 하나님의 대답은 과거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멸망을 기억하던 절기는 이제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금식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금식하는 절기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식하는 절기는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식하는 대신 오히려 먹고 즐기는 절기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루살렘은 사람들이 모여서 금식이나 하는 곳이 아닌 진실과 화평이 거하는 온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강대한 나라의 백성들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자 찾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백성들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단지 금식하는 절기를 지켜야 하는 질문을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부흥의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유다 백성뿐 아니라 온 세계 만민에게 미칠 큰 부흥을 약속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받으려고 하면 다른 사람들도 은혜를 받으러 따라와서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심을 들었으니 우리도 너희와 함께 가겠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부흥의 모습입니다. 신약시대 오순절 성령의 부으심으로 인해서 실제로 실현된 부흥의 약속을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네 번째 답변입니다.
Ⅰ. 첫째 조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명령하신 것을 행할 때 기뻐하신다
세 개의 답변은 네 번째 부흥의 약속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조건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영광스러운 부흥의 조건인 것입니다. 세 가지 조건 중 첫 번째 답변은 스가랴 7장 4~7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명령하신 것을 인간이 순종할 때 기뻐하십니다. 명령하는 것을 행해야 기뻐하시지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행한다고 기뻐하지는 않으십니다.
스가랴 7장 5~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질문형태로 물어보십니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을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슥 7:5~6).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너희가 70년 동안 금식한 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을 위하여 한 것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금식할 때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런 금식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한 적이 없습니다. 명령한 적도 없는 금식을 하나님을 위해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이 명령하지 않은 일을 행했을 때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에게 슈퍼마켓에서 두부도 사오고 간장도 사오고 어묵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돈을 받아서 사오라고 했던 두부, 간장, 어묵은 사지 않고 아이스크림, 과자, 감자튀김을 사온다면 부모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잘했다고 하겠습니까? 혼을 내겠습니까? 부모가 시킨 것은 사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사온 아이의 행동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것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사울에게 아각 왕과 아말렉 군대, 모든 짐승까지도 다 죽이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좋은 짐승을 죽이지 않고 남겼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와서 훈계하는데, 사울 왕은 하나님께 좋은 것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죽이지 않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
사람들이 아무리 자신의 뜻대로 착하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식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행해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역사를 보아도 순종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형통하게 하셨다고 증거해줍니다.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그 때에는 예루살렘과 사면 읍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남방과 평원에도 사람이 거하였었느니라” (슥 7:7).
성도들이 번창하고 번영하려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상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지상명령의 내용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분부한 것을 가르치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전통과 신학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되돌아보고 우리 교회의 전통과 신학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인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점검해보고 하나님의 분부대로 순종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반성해야 할 첫 번째 주제입니다.
Ⅱ. 둘째 조건 : 하나님께서는 종교의식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보다 하나님의 도덕적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두 번째 답변은 스가랴 7장 8-14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의식에만 치중하지 말고 도덕적인 명령들을 중요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도덕적인 명령과 윤리적인 명령을 중요시하라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금식의 절기는 꼬박꼬박 지켰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도덕적인 명령들은 무시했습니다. 기독교는 윤리를 무시할 때 망하는 것입니다. 비윤리적일 때 배교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도덕과 윤리는 기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윤리와 도덕을 우습게 여기고 마음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구원 받고 나면 술을 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습관적으로 간음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그것을 끊고 가정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바람피우는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헌금을 하고 바람을 잘 피우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그 기도가 응답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도적질했던 사람은 도적질을 그만두고 남을 도울 수 있도록 자신의 손으로 일해야 합니다. 도적질한 것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며 사기를 치는 사람은 바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윤리성이 회복되어야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성령을 부으시고 부흥을 주시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가 끝나고 노아가 두 마리의 새를 보냅니다. 하나는 비둘기이고, 다른 하나는 까마귀입니다.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까마귀는 시체에 앉아 시체를 먹으며 살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돌아옵니다. 성령의 비둘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윤리적으로 더러우면 앉지 못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도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무시하던 윤리적인 명령 네 가지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 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슥 7:9~10).
첫째, 재판하는 사람은 진실한 재판을 하라는 것입니다. 뇌물을 받고 판결을 하며 전관예우 때문에 선배 판사가 내린 판결을 뒤집을 수 없어 진실한 재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판하는 사람은 진실하게 해야 합니다.
둘째, 사람들은 피차 인애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과부, 고아, 나그네, 궁핍한 자와 같이 사회적 약자들을 압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재산을 빼앗지 말고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남을 중상모략으로 해치지 말고 심중에 음모를 꾸미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당한 요구입니까? 이것은 정상적이며 정당한 요구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은 매일 하면서 마음을 금강석처럼 강퍅하게 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청종하지 않았습니다. 불의한 재판을 하고 사람들 사이에 시기와 다툼이 있었고 약자를 압제하며 남을 해치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런 것들을 불신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비윤리적인 행동들을 유다 백성들이 서슴지 않고 행하였습니다. 이런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고 금식을 한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덕적인 명령을 무시함으로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었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은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 회리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헤치리라 한 후로 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으로 황무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슥 7:13~14).
금식을 1년에 4번이나 해도 비윤리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회리바람이 불어 유다 백성들을 열국으로 날려 보낸다고 했습니다. 열방이 쳐들어와 포로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가나안 땅을 황무하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흥을 보려면 윤리적인 명령을 중요시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윤리를 따라 자신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윤리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5계명, 부모를 공경하라. 6계명, 살인하지 말라. 7계명, 간음하지 말라.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9계명, 거짓말하지 말라. 10계명, 탐심을 가지지 말라. 이렇게 간단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윤리적인 명령에 불순종하면 아무리 금식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입니다. 윤리적인 잘못을 회개해야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부흥의 축복을 보게 될 것입니다.
Ⅲ. 셋째 조건: 과거의 영광이나 실패에 얽매이지 말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라
세 번째 답변은 스가랴 8장 1~17절에 나와 있습니다. 과거의 영광이나 실패에 얽매이지 않고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과거지향적인 사람들이 되지 말고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유다 백성들 중에는 과거지향적인 사람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첫째, 노인들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스룹바벨 성전을 보더니 울며 탄식하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영광보다 스룹바벨의 영광이 더 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과거가 좋았다고 말하지 말고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아무리 영광스러웠어도 과거보다는 미래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미래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썩지 않을 영생할 몸을 입고 아름다운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죽고 난 뒤에 영광스러운 육체로 변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서 영생하는 부활의 몸을 입고 복을 누리며 하나님과 함께 사는 그런 비전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과거 영광이 아무리 크다 해도 미래의 영광보다는 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영광을 보며 그때가 좋았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유다 백성들 가운데 과거에 느부갓네살에게 함락당한 실패를 탄식하며 과거에 지었던 죄에 얽매여서 탄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으면 그 피로 과거에 지었던 죄를 씻어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실패에 너무 얽매지 않아도 됩니다. 실패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8장에 유다 백성들에게 영광스러운 미래의 비전을 제시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슥 8:3).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슥 8:5).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슥 8:7). “곧 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슥 8:12).
“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 가운데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축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슥 8:13). “이제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지니라” (슥 8:15). 예루살렘으로부터 진리가 나와서 이방 족속들까지 모두 축복받는 신약시대의 위대한 축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는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유대인들이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그것들을 지키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한 가지 절기를 지킵니다. 그것은 주일입니다. 모든 절기를 주일에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주일을 지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로 그것을 기념하여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킨다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이시므로 우리 모든 성도들도 미래에는 영광스러운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항상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즐거움이 있고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결 론
우리는 영광스러운 부흥을 기도하면서 기대해야 합니다. 부흥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인데 우리는 세 가지로 준비해야 합니다. 첫째, 주님께서 분부하신 것을 행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 삶에 윤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셋째, 과거에 얽매여서 탄식하지 말고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켰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흥을 보내시고 성령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동안 죄가 있지만 회개하지 않은 성도들은 꼭 회개하여 은혜 받고 능력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금식 속의 구원
스가랴 8:18-23 / 이근호 목사
예루살렘이 다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남을 성사시키는 도성이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와중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간들이 포착이 됩니다. 그들은 파괴된 예루살렘을 보면서 통곡하고 금식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경건해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금식 덕분이었을까요? 예루살렘은 평화를 찾고, 그동안 예루살렘을 얕잡아보면 다른 나라들이 그 때가 되면 예루살렘의 존재를 부러워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대상은 관찰하므로서 그 대상을 자기 것으로 삼고자합니다.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번창한 예루살렘을 목격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 예루살렘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언의 집결은 땅에서 하늘로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몸을 향하여 쏠리듯이 모든 말씀이 향하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인간은 빛이 아니었습니다. 어두움이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빛이었습니다. 모든 말씀은 그 빛에게로 향해지는 쏠림현상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인간이 시도하는 ‘대상 갖기’는 성사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납니다. 인간들은 예언에 의해서 완성된 그 예루살렘을 갖지 못합니다.
닭 쫓던 개 입장이 됩니다. 그 뒤 ‘유사 예루살렘’, ‘유사 예언완성체’를 꾸미기 시작됩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금식 전문자 집단입니다. 4월의 금식은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성이 멸망당하는 때를 생각하면서 드리는 절기입니다. 5월의 금식은 그 예루살렘에 화재가 일어나면서 하나님께서 드리는 모든 제사 기구가 불타버린 것을 기억하면서 드리는 금식입니다.
예루살렘에 화재가 일어났다는 것은 일반 가정에서 불나는 것과 다릅니다. 제사 기구가 불탔다는 것은 곧 율법이 불타버렸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붙타버렸다는 말은 인간이 행하는 그 어떤 종교적 행위도 하나님과의 접촉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율법의 핵은 제사실시입니다.
제사를 날짜를 지정해서 드리기 위해 주어진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이는 곧 안식일 자체가 불탔다는 말입니다. 어떤 날을 잡아서 제사드려도 하나님께서는 안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란 이 제사일에 종사하라고 생활비 차원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에게 제공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사의 소멸은 곧 제사 행위의 소멸로 이어지고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의 할 일도 같이 소멸된다는 뜻입니다. 즉 십일조 받을 인물들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모든 율법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라는 그 한 사건으로 다 이룬 것이 됩니다. 안식일 지키지도 못해도 , 예수님의 죽으심이 곧 안식일이 완성된 상태임을 알아채는 자들에게는 인식일을 지켜야 받을 수 있는 복을 받아 챙기는 자들이 됩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를 다 이루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십일조를 온전하게 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이미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일조를 다 행하셨는데 거기에다 십일조랍시고 돈을 교회에 바치는 것은 십일조 위반 죄가 되어 스스로 저주를 유발하는 바가 됩니다.
‘십일조 안해도 된다’가 아니라 ‘십일조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안식일 안 지켜도 된다’가 아니라 ‘안식일이나 주일이라고 특정날을 지키면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모두다 예수님의 행하심에 대한 모독적 발상에서 비롯된 행위들입니다. 7월 달 금식은, 하나님의 심판이 예루살렘의 인재들을 임했다는 점에서 드리는 금식 절기입니다.
10월 달 금식은 기원전 588-589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포위당함’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런 슬픔의 절기가 도리어 기쁨의 축제날이 된다는 것은 예루살렘 자체에 새로운 변화를 통해 예언이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로마서 3:23-24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쉴새없이 금식일 일이 일어납니다. 밥 먹고 싶지 않는 상황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편치 못해 밥먹고 싶지 않다는 것은 따로 은근히 기대하는 상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기 만족스럽게 이루어지면 그때에 실컷 밥을 먹게 되겠지요.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이 늘 자랑스러운 거룩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성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금식은 바로 기대가 여지없이 수치를 품고 무너져내리면서 발생됩니다. 하지만 이런 금식날을 후대에도 계속 되풀이한다는 것은 단순한 심적 괴로움의 결과가 아니라 일종의 이벤트가 됩니다. 다같이 같은 주제를 두고서 밥을 굶어가면서 금식한다는 것은 그들 공동체를 결속하는 힘을 다지고 다시는 시간이 되는 겁니다.
즉 금식을 통한 ‘힘 모으기’를 시도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일이 자기 마음먹은대로 알 때, 금식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선한 동기의 행위가 신으로부터 동정을 따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18:12에 보면,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되어 있습니다.
즉 금식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성의 있는 예언성취를 촉구하고 싶은 충동을 품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금식자로부터 배격당하시는 형식으로 예수님은 살해당했습니다. 즉 ‘힘 없음’을 위한 금식을 그들은 해내지를 못한 겁니다. 반성과 회개가 곧장 ‘잃어버린 힘 축적’과 공동체의 결집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속성을 보이게 됩니다. 즉 기대한다는 것 자체로 인하여 온전한 ‘힘빼기’를 성사시킬 수 없게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바로 그 힘빼기의 자리에서 새로운 예언의 층이 등장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유일하게 받아주시는 금식자가 등장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은 이로서 그 예수님을 따라 땅에서 하늘로 이동한 겁니다. 오늘날 수많은 나라와 민족과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추방시키는데 있어 불의한 조력자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루살렘보다 더 즐겁고 기쁜 일들을 고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 즐겁고 신나고 흥겨운 일을 찾아다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도 예외없이 예언 자체로서의 예루살렘은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실정에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싫어된 바된 그 자리에서 출현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만나는 사람마다 배격당해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8장 18절에서 2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19페이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후에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거민이 올 것이라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 것이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예언된 바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 그 일은 뭐냐 하면 그동안 고생했던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이 되면서 다른 사람들이 시기를 하고 부러워해서 ‘나도 너희 하나님 믿을게. 나도 너희 하나님 믿을게.’ 하고 몰려온다는 겁니다.
‘그때는 금식했던 날이 축제일이 되고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함께 즐거워하면서 다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강한 나라가 될 것이다.’하는 예언을 스가랴 8장을 통해서 이렇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이 땅에는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예루살렘이 바뀌게 되면 예루살렘의 위치가 이 지상의 예루살렘 같으면 현재 이스라엘 거기로 우리는 이사를 가야 돼요. 주민등록을 옮겨야 됩니다. 주소 새 주소로 바꿨습니까? 주소를 바꾸는 게 아니고 예루살렘에다 우리의 주거지를 정해야 돼요.
그런데 여기 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위로 올라가게 되면 예루살렘을 겨냥해서 예언된 말씀도 같이 위로 올라가야 돼요. 비행접시(UFO)가 내려왔다. 지상에 안착했으면 UFO 뜸으로 말미암아 거기 납치된 사람도 같이 떠서 올라간다는 그런 UFO와 관련된 일이 있는 것처럼, 새로운 민족이 되면 같이 올라가게 돼 있습니다. 이렇게 올라가게 되면 예루살렘을 향하여 집중했던 모든 예언이 이 지상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지상에 있는 것은 존재 의미가 없지 않느냐? 우리는 있으나 마나한 게 아니냐? 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런 게 아니에요. 예루살렘을 떠나보내야 했던 그 당시 이스라엘과 모든 202국의 나라, 현재 월드컵에 가입된 나라가 202개국 나라입니다.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은 거죠. UN에 가입된 나라보다 많은 게 월드컵이고 월드컵보다 더 많은 나라가 따로 있으니까.
그 모든 나라들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옛날 예루살렘을 멸망케 했던 이스라엘의 기능을 그대로 한다는 의미에서, 그러니까 진짜 예루살렘을 쫓아내는 기능으로서의 존재의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냥 무의미한 게 아니고 괜히 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온 예루살렘을 ‘저리 가. 저리 가. 꼴 보기 싫어. 그런 소리 하지 마.’라고 후쳐 내는 역할로 이제는 이스라엘이고 모든 나라가 합세해서 동일하게 그 작업을 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나라와 이 국가를 통해서 이것이 이런 나라에 소속돼 살면서도 그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께서 괜히 유지시주는 게 아니라는 거죠.
이제 좀 있으면 소치 동계 올림픽이 있고 6월 달에는 월드컵이 있습니다. 4월 달 되면 류 현진이 야구한다고 던지고 추 신수 치고 난리 납니다. 예루살렘? 흥미 없습니다. 올해는 줄줄이 소치 올림픽에서 김연아 픽픽 돌면서 트리플 하고 있고 6월 달에 월드컵 하는데 거기서 우리가 왜 예루살렘을 찾아봅니까? 기다리는 스케줄이 꽉 차있는데. 죽이면 당할게. 그 기능을 해줘야 된다니까요.
2월 8일 날 김 을수 집사님 딸이 결혼식을 하는데요. 저한테 온 순서 지를 보니까 그 결혼 주례를 제가 합니다만 제가 해야 될 주례 본문이 벌써 와 있어요. 보니까 로마서 3장 23절에 보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게 결혼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아! 이게 결혼식하고 관련 있다는 사실을 제가 알죠. 죄 속에 결혼식도 포함되거든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는 것이 주례사로서 등장돼야 될 이유가 뭐냐? 그것은 예루살렘을 후쳐 내는 그러한 작업에 우리가 이미 놓여 있다는 겁니다. 즐거울 거리가 있기 때문에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칠 수밖에 없는 그런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성을 살아가면서 날마다 보여줘야 되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금식이라는 거예요. 여기 19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이 변하여” 여기 4월의 금식이라 하는 것은 기원전 588년 10월 달에 예루살렘이 2년 동안 포위를 당합니다. 그게 10월 금식이고, 그 다음에 나온 게 4월, 5월, 7월이 나오는데 4월 달은 예루살렘이 점령을 당해요. 588년 10월 달에 포위됐다가 586년 4월 달에 점령이 되고, 5월 달은 화재가 일어납니다. 다 타버려요. 예루살렘이 불났다는 의미는 집에 불나는 의미와 달라요. 불 이야기하니까 가슴이 내려앉습니다. 가스 불, 걱정스러운데. 화재가 일어난다고 할 때 우리 집에서 화재 일어나는 것은 그냥 가스렌지 몇 개 타고 이런 게 타죠.
예루살렘에 불이 나게 되면 거기에 법궤 타죠.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지시한 모든 것이 다 타버립니다. 모세 율법이 탄다. 이렇게 보면 돼요. 그러니까 예루살렘이 불이 탈 때 모세 율법도 홀라당 다 탄 거예요. 무슨 안식일이 있고 십일조가 왜 있습니까? 불 타버렸는데. 여러분, 십일조 안식일은 무엇을 위해서 있는 거냐 하면 지상에서 하늘로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서 있는 법 조항입니다. 특정한 장소를 지정했고 특정한 날짜를 정해서 ‘안식일’이라 하는 것은 금요일과 일요일 그 사이를 안식일로 정해놓고, 왜 정해놨는가? 그날은 특별한 날로 정해서 제사하는 날 이예요. 하나님의 율법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자기가 안식일의 주인공이라 했다 이 말이죠. 안식일의 주인공이 와서 안식일을 지킨 게 뭐냐 하면 ‘십자가로 모든 걸 이루었다.‘가 지킨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 믿으시면 안식일 없는 거고, 십일조 없는 겁니다. 십일조를 10% 내라 하는 것은 그 당시 농사짓지 않고 자기 직업이 없이 제사해야 될 그 일에 종사한다고 다른 생활비가 충당되지 않는 자에게 생활비 주라고 각출한 게 10%에요. 그래서 제사장 없는, 안식일 없는 제사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다 이루어져버린 거예요. 모든 말씀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할 때 다 이루어진 겁니다. 무슨 제사를 새삼스럽게 제사를 드립니까? 아직도 천주교에서는 미사를 제사라 하거든요. 아직도 제사를 드려요. 제사에 환장을 했어요.
제사는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신앙생활 하는 자체도 없어요. 믿음도 없고 소망도 없고 사랑이라는 거 없습니다. 하여튼 인간 쪽에서 할 수 있는 거 전혀 없어요. 없으면 신앙생활 어떻게 하느냐? 제공되는 거예요.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제공되는 겁니다. 누가 내 이름을 도용해서 대신 연금을 들어놓고 난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매달마다 연금이 은행에서 송달되는 거예요. ‘자, 너 밥 먹어라. 십일조 잘한 덕분이다.’ ‘제가 언제 십일조 했습니까?’ ‘네 대신 예수님이 다 했거든.’ 그게 십일조에요. ‘얘야 맛있게 먹어라.’ ‘왜요?’ ‘네가 안식일 지켰거든.’ ‘제가 안식일 지킨 적 없습니다.’ 예수님이 네 주인인데 안식일 다 지켰기 때문에 그 율법 잘 지켰다는 뜻으로 너에게 모든 것을 공짜로 주시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돼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든 율법을 지키든 어떤 인간도 제사 드린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제사함으로써 제사 짓는 죄를 또 범한 거예요. 십일조 함으로써 십일조 지은 죄를 범하는 겁니다. 이제는 말하고 싶다. 제가 지금 말합니다. 십일조 하면 그것이 십일조 한 죄를 지은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안 믿은 죄가 그 죄에요. ‘안 해도 된다.’가 아니라 하는 자체가 죄가 된다니까요. 안식일 지킨 자체가 죄가 돼요.
어쨌든 우리 쪽에서 어떻게 꿈지럭거려서 갈 수 있는 방법은 완전히 없어요. 그냥 누리는 거죠. 그런 복음의 은사를, 호사를 누립시다. 누려! 그걸 누려야 돼요. 복음의 자유를! 뭘 해도 죄가 되면서 동시에 뭘 해도 그게 의가 된다는 사실. 죄가 되는데 어떻게 의가 되느냐, 그건 세 가지의 바탕을, 한 장소에서 사건이 세 가지 사건이 중첩돼서 그래요. 예루살렘 사건에서 포위됐다. 점령됐다. 화재 났다. 한 가지 더 있는데요. 7월 달 금식은 뭐냐, 학살당할 때. 그래서 포위된 건 빼버리고, 점령됐다. 화재 일어났다. 학살 됐다. 또는 포위 된 것까지 합치면, 포위됐다. 점령, 화재 일어났다. 학살됐다. 이 세 가지 사건이 한 예루살렘에서 세 가지 중첩되는 겁니다.
세 가지가 중첩되면서 세 가지 중첩된 층을 통해서 그 자리에 합류된 사람은 엘리베이터처럼 올라오게 되면 죄인이었다. 우리는 잘난 인간이다. 그런데 마귀한테 포위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의인을 죽였다. 죽인 의인을 예수님께서 살려냈다. 살려 낸 것을 우리를 심판했다. 심판 속에서 우리는 구원받았다. 이런 작업들이 옛날 예루살렘의 작업과 동일한 작업으로 우리에게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천천히 다시 할게요. 처음에 인간은 인간의 만남 이예요. 예수를 만나든 누구를 만나든 똑같은 인간 이예요. 인간인데 그쪽에서 복음을 듣는 순간 졸지에 내가 죄인 돼 버렸어요. 그들이 하는 말이 ‘우리도 죄인이고 듣는 여러분도 죄인이다. 우리는 다 같이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한분 그리스도 은혜로 값없이(십일조 필요없어요.)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로우심을 받았습니다.‘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는 갑자기 인간에서 뭐로 변하느냐, 죄인으로 변합니다. 죄인으로 변하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은혜를 받는 입장에, 수혜자 입장이 되면서 새로운 층으로 달라지죠.
죄인이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자체적인 메카니즘에 의해서 죄인이 의인이 돼버린 겁니다. 그 가운데 매개로 등장하신 분이 누구냐, 바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피가 매개가 돼서 죄인도 의인으로 되어서 천국 간다는 사실이 복음으로 살펴지는 거죠.
이것이 로마서 3장에서는 짧은 문장으로 돼 있지만 스가랴 8장에서는 이거는 하나의 놀라운 전쟁 사건으로 사건화 되어서 역사적 현장으로 남아있는 겁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그 전쟁의 흔적, 잔재가 남아있다는 거예요.
돌이 있음이 현실이 아니고 저 돌이 왜 깨져있는가를 보는 그것이 의미의 현실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돌이 깨진 걸 볼 거예요. 하지만 ‘깨졌네.’ 라고 끝나면 안 돼요. 현실을 못 보고 온 거예요. 왜 깨졌을까? 하나님에 의해서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깨졌다. 불 타버렸다. 그럴 때 그거는 우리에게 새로운 현실 체계를 구성케 하는 겁니다. 요소가 되는 거예요. 그것이 현실이 되려면 우리 자신도 그 새로운 사건에 의해서, 성령의 역사죠. 성령의 역사에서 우리 자신도 바뀌어 지고 달라져야 되는 겁니다.
금식을 이야기해야죠. 그러면 여기 4월의 금식은 점령된 것이고 5월의 금식은 이건 화재로 인해 완전히 불타버린 것이고 7월의 금식은 이제 하나님께 심판받는 것이고, 심판받는다는 것은 그 당시 예루살렘의 고관대작들이 다 죽었어요. 화재 일어나고 그 다음에 다 죽었거든요. 그걸 의미하고 10월의 금식은 포위된 것이고, 10월의 금식이 제일 앞 선 것입니다. 나중에 줄줄이 4월, 5월, 7월 이렇게 처참하게 예루살렘은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죠. 하나님과 매치가 되는, 하나님과 접촉이 되는 그 장소는 사라져 버렸어요. 하지만 사라졌다는 그 흔적이 우리에게 의미로서 새로운 현실로서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금식하느냐? 금식이란 뭐냐 하면 금식은 잃어버렸기 때문에 금식하는 겁니다. 그런데 금식이 하나의 반복적인 행사가 돼 버리면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 힘을 모으는 하나의 행사가 돼 버려요. 처음에 금식할 때는 밥 맛이 없어서 금식하죠. 뭘 잃어버렸으면 밥맛이 없어요.
저도 그런 일이 많은데 지갑을 잃어버린다든지 휴대폰을 잃어버리면 밥맛이 없어요. 그런데 잃었다가 지갑을, 실제로 서울에 책 사러 가서 지갑을 공중전화에 놔두고 왔는데 나중에 파출소에서 전화가 와서 가보니까 어떤 여학생이 돈 7만원 들은 그 지갑을 그대로 찾아준 거예요. 아직도 그런 여학생이 있다는 사실에, 과연 죄를 범했으매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착한 사람이 있다는 게. 그래서 너무 고마워서 경찰들에게 오뎅 사먹으라고 2만 원 주니 안 받데요. 지금 생각하니 너무 짰어.
잃었다가 찾고 난 뒤에는 기분 좋다고 금식해도 괜찮은 거예요. 금식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이 금식한 것 자체가 실수가 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실수가 되는 이유가 뭐냐, 금식함으로서 행여 잘 보여서 ‘하나님, 우리가 이렇게 죄 지은 걸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니 다시 옛날로, 옛날로 다시 돌아가게 하옵소서.’ 하면서 금식하는 것, 이거는 일종의 힘을 집결시키는 그러한 행사가 돼 버리는 겁니다.
금식한다고 구원되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기껏 할 수 있는 한계가 그 정도에요.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기념일이라 해요. 기념일, 교회 기념일이 뭐냐 하면 유대인을 금식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고난 주일, 고난 기념일, 부활절, 맥추절, 추수 감사절, 그리고 성탄절, 다섯 가지 특징은 전부 다 봉투 돌리는 특징이 있죠. 예산 펑크 나면 메우는 거예요. 보통 맥추절에도 예산이 펑크 나면 맥추절에서 한번 건지고, 그게 추수감사절까지 견디기만 하면 여분의 것은 성탄절에서 여분의 것으로 건지고 내년 예산에 여분의 돈을 마련하는 그 방식을 하는 거예요. 이거는 힘을 모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금식하는 이 자체를 없애버립니다. ‘금식하지 마.’ 라고 없애는 것이 아니고, 요런 점이 어려워요. 제가 복음 전하면서 참 어려운 점이 뭔가 명령으로 ‘해, 하지 마라.’ 나타나는 게 아니고 그런 것을 하지 마라. 금식을 하게 함으로서 금식하는 쪽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오히려 죽음을 당하는 어떤 새로운 사건을 금식 가운데서 새롭게 발생시킨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갔을 때 그때 바리새인이 자랑 질하기를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한다.’ 했어요. 금식하는 사람들의 집합은 힘을 모으는 거예요. 금식 빼버립시다. 나머지 남는 게 뭐냐, 우리는 이만큼 힘 있다. 어느 정도로? ‘우리는 하나님 뜻이라면 얼마든지 금식할 정도로 우리는 자기를 낮출 정도로 대단한 종교적인 힘을 갖고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고난주일? 3월 말 되면 맨날 고난주일 해요. 고난주일 하게 되면 직장 없이 집에 노는 주부들 거기 매달립니다. 교회가 직장이거든요. 맨날 불러내니까. 맨날 가서 그냥 노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이벤트가 되면 힘이 생기면서 내 힘으로 순적하게 이렇게 자식을 잘 키웠다는 겁니다. 아, 지금 누굴 의식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내 힘으로, 내 기도 힘으로, 다른 사람은 돈, 돈해서 키웠지만 나는 기도해서 이만큼 자식을 잘 키웠다는 거예요.
아! 그 힘, 무채색으로 바뀌어야 돼요.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종교의 힘을 무채색으로, 없는 걸로 바뀌는 거예요. 모든 물질의 중심에는 원자로 돼 있는데 원자는 핵과 전자가 구름처럼 형성하고 있다 보거든요. 그 전자가 양성자 중성자로 돼 있다 했습니다. 학자들은 양성자 중성자로 돼 있는데 그게 끝이라 했는데 그 소립자가 과속으로 입자를 때려보니까 거기 코르크란 세 가지로 돼 있어요. 학자들은 여기서 고민했습니다. 왜 세 가지냐 하는 거예요. 그게 나중에 밝혀지기를 빛을 옷으로 입기 때문에, 빛으로 옷을 해 입으면 빨강색, 노랑색, 초록색이 돼서 이게 무색이 돼 버려요. 아주 신기해요.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근원은 빛이라 했습니다.
지금 대전 강의를 미리 앞당겨서 하는 겁니다. 거의 참석을 하지 않으니 답답해서 내가 해야지, 모든 것은 빛으로 시작해서 빛으로 끝나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빛이 있는데 실제는 모든 게 무색 이예요. 빛이 무색 이예요. 빛은 무색인데 우리는 지금 검은색, 파란색을 갖고 있습니다. 요게 가짜에요. 검은색, 파란색, 빨간색, 요게 가짜라니까요. 사실은 색이 없는 것이 받쳐줘서 색깔이 있다는 말은 색깔은 사라져야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은 사라져야 돼요. 요기까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금식을 시키는 것은 가봉하기 위함입니다. 가봉, 가봉이란 나라 이름이 아니고 옷 해놓고 가봉하러 가잖아요. 가봉을 왜 하느냐 하면 옷을 맞출 때에, 요새는 옷을 그냥 사니까 가봉을 안 하는데, 옷을 맞출 때 맞는지 가봉하잖아요.
하나님도 자기 백성을 가봉을 하는데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답답해서 금식하게 합니다. 이거는 밥 먹고 싶어도 밥이 안 먹힐 정도로. 왜, 너무 충격이니까. 항상 우리 인생에는 매일같이 파도처럼 밥이 안 먹힐 일들이 계속 일어나요. 밥 좀 먹고 싶다 하면 뭔가 또 일이 일어나요. 왜 사람들이 스스로 이렇게 밥 안 먹힐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느냐 하면 은근히 기대하는 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김 연아가 돌 때 넘어져 보세요. 밥 먹다 넘어지면 밥이 안 먹혀요. 온 국민이 성원하는데 넘어지면 안 돼. ‘가산점이 없습니다. 감점 있습니다. 아사다모에게 집니다.‘ 이렇게 나오면 밥이 안 먹히는 거예요. 요거는 조그만 거지만 우리의 모든 인생은 반드시 고대하고 기대하고 은근히 노리는 게 있어요. 그게 될지 안 될지 모를 때는 밥이 안 먹히다가 일단 되면 밥이 먹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 가지고는 천국에 못 갑니다. 이걸 가봉을 해야 돼요. 가봉을 해서 이제는 얼음판에 넘어지든 어떻게 되든 월드컵 16강 못 나가도 관계없이 나라가 망하든 석유 값이 올라가든 내려가든 관계없이 늘 밥 잘 먹히는 사람으로 가봉하기 위해서 먼저 금식을 유발하는 사태를 해놓고 ‘네가 금식했다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미래의 계획은 모르고, 네가 경험했던 과거에 누적된 것을 가지고 네가 은근히 뒤에 꽁무니 붙어서 은근히 구원받고자 하는 그 시도 자체가, 그 구조를 네게 그걸 놔버리란 말이죠.
'내가 이만큼 행했습니다.’라는 것에서 네가 손을 놔버려야 돼요. ‘하나님이여, 과거에 이만큼 내가 열심히 주를 위해서 봉사했습니다.’ 그걸 놔버리세요. 처음 온 사람이나 나중 온 사람이나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그게 똑같이 되는 무채색, 나는 빨간색, 너는 노란색, 빨간색, 노란색 없어요. 우리는 원래 색깔이 없는 사람이라고 놔버리자 말이죠.
그렇게 되려면 금식을 해봐야 돼요. 금식을 하고 난 뒤에 은근히 금식했으니까 좋은 일 있을 거라고 기대하다가 좋은 일은 개 코, 금식하나 뭐하나 참, 금식 괜히 했어. 해도 소용없는 걸 가지고, 그걸 느끼면서 아! 구원은 나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가봉하는 그러한 계기가 매일같이 일어납니다. 매일같이 밥 안 먹히는 짜증나는 일이 벌어지면서 짜증나는 일을 통해서 매일같이 아! 괜히 엉뚱하게 은근히 노렸기 때문에 내가 말려들었구나. 그런 되도 않은 세속적인 일에 내 마음을 다 빼앗겼구나. 하는 후회스러움과 함께 새로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깨닫게 하는 그것이 이런 가봉되는 일이 매일같이 일어나는 것, 그것이 매일의 금식이고 금식 안 해도 되는 금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백성 선배들 금식했습니다. 울었습니다. 다시 힘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힘은 이미 왔습니다. 온 힘도 감당 못 하는 저희들, 어리석은 저희들 세상에 살면서 어려움 당하면서 구원의 죄 용서 힘은 다른데서 온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