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의 <세실리아(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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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미상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초상>, 대리석 릴리프, 지름 54.3cm.
밀라노 공화국은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할아버지 용병대장 무지오 마텐돌로가 세운 나라입니다. 그는 둘째 아들이자 정실소생인 프란체스코(1410~66년 재위)로 하여금 자신의 대를 이어 밀라노를 통치하게 했습니다. 프란체스코의 큰아들 갈레아조 마리아는 공작위에 올라 막강한 힘을 행사했고, 어머니를 독살하는 것을 비롯해 부덕하고 사악한 일을 많이 자행했습니다. 기록에는 “그는 기록으로 남길 수 없을 만큼 매우 부끄러운 일들을 저질렀다”고 적혀 있습니다.
갈레아조 마리아가 살해되었을 때 대를 이을 그의 큰아들 지안 갈레아조는 불과 여덟 살이었습니다. 프란체스코의 넷째 아들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당시 바리의 공작에 불과했지만, 어린 왕자의 어머니가 섭정에 실패하자 왕자의 보호자를 자청하고 밀라노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루도비코는 “내가 권력의 짐을 지고 영예를 조카에게 남긴다”는 위선적인 말을 천명했습니다.
1451년 비제바노에서 태어난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보다 몇 달 손위였습니다. ‘무어인 the Moor(아프리카 북서부 사람)’이라는 그의 별명은 머리카락과 피부가 검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레오나르도는 루도비코를 13년 혹은 14년을 섬기게 되며 그도 루도비코가 검은 피부색임을 노트북에 적었습니다. 루도비코는 형제들과는 달리 잔인한 성격이 아니었으며, 피를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아 적을 교수형에 처하지 않았습니다. 두터운 이중 턱의 그는 자기만족에 빠졌고, 실용적이었으며, 미신을 믿었고, 식도락가였습니다. 토스카나에서 수년 동안 망명생활을 한 그는 충분히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라틴어를 알고 웅변에 능했으며, 그리스 문화에 정통한 유명한 학자를 비서로 채용해 학교를 세우면서 밀라노를 새로운 아테네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을 모방하여 보석을 아로새긴 값비싼 것들을 수집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문화정책에 관심이 있음을 과시했습니다.
루도비코는 밀라노의 최고 권력자가 되자마자 열네 살인 밀라노 귀족의 딸 을 유혹했는데, 이름은 세실리아 갈레라니였습니다. 그녀는 류트를 연주했고, 시를 쓸 줄 알았으며, 미모가 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모던 사포 Sappho(기원전 600년경의 그리스 여류 시인)’라고 불렀습니다. 루도비코 주변의 미인들을 하나씩 물리치고 루도비코의 가장 사랑받는 여인이 된 그녀는 루도비코가 비트리스 에스테와 결혼하던 해 루도비코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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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세실리아(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1483-85년경, 패널에 유채, 54.8-40.3cm.
세실리아의 초상은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로 배경이 어두우며, 복원자가 거칠게 다뤄 머리, 어깨, 손 부분이 손상되었습니다. 앞 머리카락이 턱 아래로 내려와 있지만, 본래 투명한 베일이 있었으며 왼손은 색을 칠해 본래의 묘사 부분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엑스-레이 투사 결과 세실리아의 어깨 뒤로 문 혹은 창문이 있었지만, 복원자가 색을 발라 없애버렸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루도비코의 여인 <세실리아(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의 초상을 그린 후부터 루도비코와 가까워졌습니다. 담비는 루도비코를 상징하는 여러 상징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담비는 그리스어로 갈레gale로서 세실리아의 성 갈레라니의 앞 글자와도 일치합니다. 그녀의 초상은 레오나르도가 앞서 그린 지네브라 데 벤치와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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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로조 데 프레디스의 <성 세바스천 모습을 한 젊은이의 초상>, 1494년경, 31.8-26.7cm.
이 그림을 그릴 때 암브로조 데 프레디스가 레오나르를 도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담비와 여인의 피부는 레오나르도의 솜씨임이 분명해보이며, 의상과 머리는 암브로조가 그렸을지도 모릅니다. 두 사람의 솜씨가 전혀 다르지만, 작품을 미리 주문받아 그리기 때문에 기일에 맞춰 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다른 기교를 구사하는 화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시로서는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남의 작품을 모방하고 남의 기교를 답습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남의 이름을 도용하는 사기행위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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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아름다운 페로니에르>, 1490-95년경, 패널에 유채, 63-45cm.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은 ‘밀라노 여인의 초상’으로도 불립니다.
레오나르도는 비슷한 시기에 <아름다운 페로니에르>를 그렸는데, 18세기에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이름을 ‘Leonard d’Awincj’라고 표기했으므로 일부 학자들은 레오나르도가 그린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델이 세실리아를 닮았으며, 또한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이 <동굴의 성모>에서의 오른쪽 천사를 연상시키고, 레오나르도의 작품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작품 또한 암브로조의 협력으로 완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체적인 구도와 모델의 앉은 자세와 표정은 레오나르도가 의도한 것이겠지만, 짧은 머리와 부자연스러움은 암브로조의 솜씨로 보입니다. 암브로조는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의 첫 경쟁자였지만, 얼마 후 더 이상 레오나르도의 경쟁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 궁정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1485년이며, 1487년에는 밀라노의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