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초년에, 사조(四曹)의 낭관을 남행(南行)과 무신(武臣)을 섞어서 쓰되 모두 이름 있는 자를 골랐다. 중년에는 더욱 그 사람 고르는 것을 삼가해서 일체 그냥 제수(除授)하지 않고, 대신이 경연(經筵)에서 그 선택하는 법을 회복하자고 청하여, 겨우 이경욱(李景郁)이 호조의 낭관이 되고 이경준(李慶濬)이 형조의 낭관이 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모두 승진해서 전직되었다. 난리 뒤에는 잡되게 등용하고 구차하게 자리만 채워서, 근래에는 사조(四曹)의 낭관 중 남행(南行)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문관으로서 녹을 얻지 못한 자가 모두 백여 명이나 되었다.
논의하는 자들이 온당치 않다고 하지만, 문관으로서 형조와 호조의 낭관이 된 자 대부분이 합당하게 뽑힌 것이 아니고, 무능한 자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당상(堂上)이 된 자는 기어코 남행 낭관을 구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지소록》
○ 인조 기사년에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낭청의 벼슬은 실상 음관(蔭官)으로는 극히 정선(精選)이었는데 근래에 정체(政體)가 엄숙하지 않고 사사로운 뜻이 크게 행해집니다. 잡되게 구차히 자리만을 채워서 삼조(三曹)의 낭관 20명 중에 음관으로 보충된 자가 4분의 3이나 되어 속초(續貂)의 기롱이 있으니 극히 한심합니다.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인망(人望)과 실적이 두드러진 자 이외에는 일일이 도태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이조가 ‘낭관은 다 이름있고 직무를 잘 행하는 사람이니, 부득이 그 중에 본래 이름 없는 자 한 사람만을 도태하겠다.’는 뜻으로 계사(啓辭)를 아뢰니, 전교하기를 “근래에 음관(蔭官)을 많이 쓰기 때문에 사족(士族) 중에 무과(武科) 공부를 하는 자가 전연 없다. 이는 비단 규정에 어긋날 뿐 아니라 그 폐단이 실상 적지 않을 것이다. 이번 대간(臺諫)의 논의는 진실로 합당한데, 한 사람만 도태시켜 책임을 면하려고 한다면 사체(事體)가 부당하다. 다시 더 도태시킨 뒤에 앞서 하교에 의해서 문무관(文武官)을 교체ㆍ임명하도록 하라.” 하였다. 《응천일기(凝川日記)》
[주D-001]속초(續貂) : 진(晉) 나라 조왕(趙王) 윤(倫)이 찬위(簒位)하였을 때에 관직을 남발하여 초미(貂尾)를 다는 고관(高官)이 많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초미가 부족하여 구미(狗尾)로 잇는다.” 하였다.
[출처] 총랑관(摠郞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