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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3일 화요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아버지와 나는 하나 (요한10,22-30)
제1독서<그들은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사도11,19-26)
19 스테파노의 일로 일어난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20 그들 가운데에는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면서 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다.
21 주님의 손길이 그들을 보살피시어 많은 수의 사람이 믿고 주님께 돌아섰다.
22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23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24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5 그 뒤에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26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 그들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 신자들을 만나며 수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화답송>시편87,1-3.4-5.6-7(◎117,1ㄱ) ◎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 거룩한 산 위에 세운 그 터전, 주님이 야곱의 어느 거처보다 시온의 성문들을 사랑하시니, 하느님의 도성아, 너를 두고 영광을 이야기하는구나. ◎
○ 나는 라합과 바빌론도 나를 아는 자로 여긴다. 보라, 에티오피아와 함께 필리스티아와 티로를 두고, “그는 거기에서 태어났다.” 하는구나. 시온을 두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여기서 태어났으며, 지극히 높으신 분이 몸소 이를 굳게 세우셨다.” ◎
○ 주님이 백성들을 적어 가며 헤아리신다. “이자는 거기에서 태어났다.” 노래하는 이도 춤추는 이도 말하는구나. “나의 샘은 모두 네 안에 있네.” ◎
복음<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22-30)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사도 11,19-26)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로 가라고 보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22~24)
사도행전 11장 22절의 '그들에 대한 소문'은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방인 회심사건을 말한다.
예루살렘은 안티오키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 이방인이 주님께 돌아온 사안이기에, 예루살렘 교회는 그 소식에 관심을 갖고 들었던 것이다.
'교회는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교회의 귀들에 소문(말)이 들렸다'이다.
원문에서는 '귀들'(the ears)에 해당하는 '타 오타'(ta ota)를 써서 예루살렘 교회보다는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 개개인들이 안티오키아 교회에 대한 소문에 큰 관심을 갖고 들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듣고'에 해당하는 '에쿠스테'(ekusthe)는 '아쿠오'(akuo)의 수동태로서 어떤 소문이 외부에서 들려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소문의 내용은 안티오키아에서 복음 선포자를 통하여 복음이 수많은 이방인에게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안티오키아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은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게 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관심사에 대하여 점검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를 파견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들이 중심이 된 모교회로서 다른 교회를 보살피려는 사랑과 관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사도8,14).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이미 베드로 사도를 통한 경험으로 이방인에 대한 편협한 편견을 버렸기에, 바르나바를 멀리 떨어져 있는 안티오키아에까지 보낼 수 있었다.
여기서 '보냈다'에 해당하는 '엑사페스테일란'(eksapesteilan)의 원형 '엑사포스텔로' (eksapostello)는 어떤 사람에게 임무를 맡기어 어떤 장소로 보낸다는 의미로 '파견하다', '파송하다'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바르나바를 선택하여 파견한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선교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롭게 개종한 자에 대한 관심과 염려와 더불어 안티오키아에 있는 믿는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형제들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서 예루살렘 교회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인 바르나바를 보냈던 것이다.
'바르나바'(Barnabas)는 '휘오스 파라클레세오스'(hyos parakleseos), 즉 '위로의 아들', '권면의 아들'이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권면과 위로의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사도4,36) 안티오키아 교회 파견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서 출중한 교사였고 선교사였으며, 사도 바오로의 협력자로서 초대 교회 복음 전파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였다(사도9,27; 11,30; 12,25; 13~15장; 1코린9,6; 갈라2,1.9.13; 콜로4,10).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견된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도착해서 그곳의 회심한 이방인들과 몇몇 복음 전파자들을 함께 만나보고, 그곳에 하느님의 은총, 곧 성령께서 임재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기뻐한다. 그리고는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한다.
여기서 '격려하였다'고 하는 '파레칼레이'(parekalei)는 여러 말로써 '권면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파라칼레오'(parakaleo)의 미완료 과거 시제이다.
희랍어에서 미완료 과거 시제는 반복과 계속을 나타내므로, 이러한 표현은 바르나바의 권고가 그들에게 계속되고 반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르나바의 따뜻하고 세심한 기질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는 뜻은 '마음에 분명한 목적과 뜻을 가지고 주님께 확고부동하게 늘 헌신하고 있으라'는 것이다.바르나바가 이렇게 권면하는 이유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에게 많은 박해와 시련들이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르나바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보다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지속성을 갖는다는 것은 받은 축복과 은혜를 상실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한다는 의미이며, 제자로서의 기본자세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사도행전 11장 24절의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실한 사람'이라고 나온다. 여기서 '사실'로 번역된 '호티'(hoti)는 '왜냐하면', '~때문에', '~이므로'라는 뜻을 지닌 접속사이다.
이 단어는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 교우들에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가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착한'에 해당되는 단어 '아가토스'(agathos)는 '놀라다', '경탄하다', '높이 평가하다'의 '아가마이'(agamai)와 '감탄할 만한', '훌륭한'의 '아가스토스'(agasthos)의 같은 계열의 단어로서 주위 사람들이 경탄하고 높이 평가할 정도로
바르나바의 성품이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바르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원문은 '플레레스 프뉴마토스 하기우 카이 피스테오스'(pleres pneumatos hagiu kai pisteos)인데, 여기서 '플레레스'(pleres)는 물이 가득 차서 넘치는 정도까지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형용사이다.
이 단어는 바르나바에게 있는 성령과 믿음이 그의 언어, 표정, 사고, 삶을 통해 외적으로 넘치도록 표현이 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르나바는 영적으로 풍부한 은혜를 소유한 사람으로서 그의 삶 가운데서 이러한 사실이 입증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여기서 '인도되었다'는 '프로세테테'(prosethete)의 원형은 '프로스티테미'(prostithemi)로서, 수효를 '더하다', '가입시키다', '부과하다'는 뜻이다. 루가에게 있어서 이 단어는 교회 성장을 의미하는 전문 용어로 쓰였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르나바로 말미암아 안티오키아 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을 이루신 주체가 하느님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프로세테테'(prosetethe)가 수동형이라는 사실이 증명해준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가 성장했다고 해서, 지도자들이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여 그 배후에서 역사(役事)하시는 하느님을 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절망해 본 적이 있나요? 깊은 좌절에 신음해 본 적이 있나요?
살다 보면 죽을 만큼 힘겹고 어려운 시간이 우리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둠과 절망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따뜻하게 건네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와 축 처진 어깨를 감싸 주는 누군가의 손길은, 우리가 다시 힘을 내어 살아갈 용기와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렇게 깊은 절망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이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한 사람을 보여 줍니다. 바르나바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시 사울은 그동안 굳건하게 믿어 온 자신의 신념과 믿음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자에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선포하는 이로 회개와 변화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였지만, 그것도 녹록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변절자인 사울을 찾아 죽이려 하였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조차 박해자였던 사울을 두려워하여 그를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고향 타르수스에 칩거하며 어둠과 좌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를 바르나바가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를 빛과 희망의 세상으로 이끌어 냅니다.
그렇게 해서 바르나바가 사울과 함께 일군 안티오키아 공동체 구성원들은 인류 역사에서 맨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영예를 얻게 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가 행하고 실천하는 일들이 우리의 신원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던 사울에게 위로와 용기의 손길을 건네 준 바르나바를 기억하며, 오늘 하루 말과 행동으로 세상에 위로와 희망을 건네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부활 제4주간 화요일]
홀대 받으시는 예수님
(요한10,22-30)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 마카베오가 더렵혀진 제단을 허물고 새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다(마카상4,36~) 그러나 마카베오의 정신보다 하느님 앞에 자신들의 뜻을 세우기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인간들을 대표하는 것이 성전 봉헌 축제이다.
그것은 부서져야 할 성전 앞에서(요한2,19-22) 참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홀대를 받으시는 축제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때’를 겨울이라고 밝힌다.
(예레8,20) 20 수확이 끝나고 여름이 지났건만 저희는 아직도 구원받지 못하였습니다.
= 여름이 지나고 수확이 끝난 겨울이다. *수확이 끝나고- 즉 구원을 얻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율법을 열심히 지킨 그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여 이 세상의 것을 얻어내는 것 만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 추수(구원)할 때를 지나고 겨울로 넘겨져 있는 것이다.
*성전은 하느님이 계심을 뜻한다. 하느님은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성전을 통하여 죄인들과 하느님의 ‘거룩’이 어떻게 만날 수 있고 함께 있을 수 있게 되는 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성전구조, 기물들, 성전의 제사, 제물, 사제. 모두 예수 그리스도(대속)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보이는 성전에 눈이 멀어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 참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모형으로서의 성전이 봉헌되어지는 그 날에, 성전 밖으로 밀려나 있는 형국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맨 끝자락에, 서 있는 솔로몬 주랑에서 계시는 모습이 그것이다. 인간들의 믿음 없음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 예수님은 6장부터 10장 21절까지에서 당신이 메시아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요한6,35.37.51)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8,28-29) 28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29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 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인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그들에게 주려 하셨고 인간들은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한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법(제사와 윤리)을 열심히 지킨 그 자가 의로움을 의지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양이 아닌 것이다.
(로마10,1-4) 1 형제 여러분, 내 마음의 소원,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는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2 나는 그들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한 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열성입니다.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ㄱ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 예수님께서 하늘의 생명을 주신다는 것은 인간들의 자격을 보고 주신다는 것이 아니다. 4장의 사마리아의 여인, 5장의 벳자타 못 가의 38년된 병자, 8장에 간음한 여인, 그 모두 예수님의 자비(慈悲)로 그냥 고쳐 주셨듯이 구원은 하느님께서 준비하시고 택하신 이들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에페1,4.7)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티토3,5)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말씀)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28ㄴ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다 이루신, 그 아버지의 뜻과 하나 이신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히브9,15) 1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율법)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완벽하게 창조하신 그 전능하신 하느님의 구원의 계획이 인간들의 말(법)에 의해서 좌지우지 될 수 없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 들어 있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법)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 그것은 인간들의 의로움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기에 창조 이전부터(에페1,4)흠도 티도 없는 깨끗한 피, 그리스도를 예비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뜻(말)을 버리고(부인), 곧 우리의 머리(생각)가 잘리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그분의 지체가 되어 받는 구원이다. 그러나 자기 버림(부인)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건, 시련을 통해 이끌어 내신다. (히브12,7 야고1,12참조)
(로마8,30) 30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 구원(救援)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으로 계획하시고 그리스도로 다 이루셨다’ 그것을 믿는 것인 ‘그리스도인’이다.
☨은총의 천주 성령님!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정하심으로 부르심을 받고 거저 의로운 자가 되어 구원 받았음을 믿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늘 함께 해 주소서~아멘!!!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복음(요한10,22~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30)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간접적으로 밝힌 예수님과 성부 하느님의 일체성이 여기서는 명시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성부 하느님과 본질과 근본에서 일치됨을 밝히신 것이다.
여기서 '하나'로 번역된 '헨'(hen; one)은 중성이며, 여기서 중성이 사용된 것은 희랍어 어법을 잘 반영한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 철학에서 '토 헨'(to hen; the one)은 존재의 궁극적인 통일성, 영원성, 불변하고 파생되지 않는 단일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서, 구별이 없는 존재의 동일성(oneness)을 나타낸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배경을 지니는 '헨'(h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임을 밝히셨는데, 아버지와 아들은 협력자의 관계 이상이며, 본질상 본래 하나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는 존재의 통일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실은 '~이다'로 번역된 '에스멘'(esmen; are)이 '에이미'(eimi)의 현재 시제라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희랍어에서 현재 시제는 현재와 계속, 그리고 변함없음을 나타내므로,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이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심을 알게 한다.
예수님의 이같은 주장은 모여 있던 유대인들로 하여금 당장 돌을 집어들어 던지게 할 만큼 커다란 분노를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의 선언은 신성(神性) 모독의 극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실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실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강수원 베드로 신부)
성전 봉헌 축제(하누카)는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가 우상 숭배로 더럽힌 예루살렘 성전을,
기원전 164년 유다 마카베오가 다시 정화하여 하느님께 봉헌한 일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자신을 ‘에피파네스’(신의 현현)라 일컫던 안티오코스 4세가 저지른 신성 모독을 모든 이가 뼈저리게 되새기던 그날 그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선언하신 것은 목숨을 건 정면 승부였습니다.
이러한 ‘도발’을 서슴지 않으신 것은 유다인들과 나누는 마지막 대화이며, 그들이 진리와 생명으로 돌아서기를 간절히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목숨을 앗아갈 셈이오?(직역)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그 대답은 이미 예수님께서 지금껏 거듭 밝혀 오셨습니다.
유다인들이 그분의 대답을 듣고 난 뒤 돌로 치려고 한 것을 보면(10,31 참조) 그들은 처음부터 불신과 완고함을 거둘 뜻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불신앙을 주님 탓으로 돌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을 ‘내 숨통을 조이시는 분’으로 여기며,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듣거나 보면서도 자신을 더 설득해 보라며 멀찍이 서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도 실천 없이 기대만으로 미온적인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주님의 양들은 당신 곁에서 귀 막고 있는 유다인들이 아닌, 용기와 결단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지난날의 삶을 돌이켜 응답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제1독서 참조).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을 따르는 사랑받는 양으로 살아갑시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 95[94],7-8).
(강수원 베드로 신부)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믿는다)
복음(요한10,22-30)
22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 관습에 따른 축제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된다.(루가2,42-45 참조) 그래서 그 축제의 때가 생명이 죽어있는 겨울이라고 한 것이고, 참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성전의 중심이 아닌 성전 끝자락에 머무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23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 (전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신 일들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으로 완성되는 구원을 공부했다. 오늘은 성전으로 완성되는 메시아의 구원을 보자.
(요한2,13) 13 *유다인들의 *(과월절)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 성전에서 올바른 기도가 아닌 자신의 뜻, 소원을 위한 전례 행위의 그 거래에 열심을 부리는 이들에게~
(요한2,16.18-21)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 우리가 여러 번 공부했듯이 ‘사흘 안에’를 직역하면 ‘세번째 것으로’다. 첫째- 건물(建物) 성전이 허물어지고, 둘째- 육(肉)의 성전이신 예수님이 허물어지시고, 곧 모든 죄인들의 죄로 십자가, 그 피의 새 계약을 이루시기 위해 죽으시고, 세 번째 것- 다른 보호자, 곧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일)이다. - 믿었을 때, 성령께서 우리 생명이 되어 살리신다.
(티토3,6) 6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로마8,9-10)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26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의 영을 믿지 않아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믿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아멘)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아멘)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1코린6,19-20) 19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20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바위 소나무>
바위틈에 뿌리를 길게 뻗고 자란 소나무는 운명을 탓하지 않는다. 옥토였으면 좋으련만 틈새에 던져진 운명, 절망의 눈물로 싹틔우고 모진 삶을 온몸 비틀며 생명주신 신을 향하여 긴 세월 살아온 흔적들이 그대로 드러난 자태는 정녕 신의 걸작이로다.
우아한 균형미에 마디자라 옹골진 가지는 근육미를 겸했구나. 인생인들 다르랴, 돈, 명예, 권력이 본질인 듯, 미망 속에 살아온 세월은 허풍이라고 너는 말하는 구나. 바위틈보다 옹졸한 내 안에도 하늘 씨 하나 심겼으니 운명 탓하지 말고, 허송세월도, 자책도 말고, 오늘부터 하늘만 향한다면 신은 나를 빚어 걸작 만드시리라. (이석)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내가 나 자신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 성전이라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그에 합당한, 어울리는 삶을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2024년 04월 23일 화요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오늘 독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기원을 전하여 줍니다.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안티오키아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를 파견합니다.
그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고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나자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고백하는 이’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성장하고 생활하셨지만(인성) 동시에 그리스도이신 하느님(신성)이심을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그리스도’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밝히시도록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시며 무기력한 불통을 지적하십니다.
서로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소통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으며, 견제와 위협만 되풀이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상대의 소리를 알아들어야 하고(어제 복음), 그 소리를 따라야 하며(오늘 복음), 그 따름으로 상대방의 진정성과 아름다움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소리를 구별하여 알아듣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믿고 따르며, 그 관계성을 증언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을 때,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처럼 아무리 “분명히” 말한다 하여도 다시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며 똑같은 의심만 되풀이하게 됩니다.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니 아무리 말하여도 알아듣지 못하고, 의심을 붙잡고 있으니 믿음도 생겨날 리 없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