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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4일 수요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세상에 빛 (요한12,44-50)
제1독서<나를 위하여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사도12,24-13,5ㄱ)
24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25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수행한 다음,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돌아갔다.
13,1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르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메온, 키레네 사람 루키오스, 헤로데 영주의 어린 시절 친구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다.
2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3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
4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 셀레우키아로 내려간 다음,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
5 그리고 살라미스에 이르러 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화답송>시편67,2-3.5.6과 8(◎4) ◎ 하느님,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찬송하게 하소서.
○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고 저희에게 복을 내리소서. 당신 얼굴을 저희에게 비추소서. 당신의 길을 세상이 알고, 당신의 구원을 만민이 알게 하소서. ◎
○ 당신이 민족들을 올바로 심판하시고, 세상의 겨레들을 이끄시니, 겨레들이 기뻐하고 환호하리이다. ◎
○ 하느님, 민족들이 당신을 찬송하게 하소서.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찬송하게 하소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세상 끝 모든 곳이 그분을 경외하리라. ◎
복음<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요한12,44-50)
44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45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48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49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50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사도12,24―13,5ㄱ)
사도행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은 1장~7장까지로 예루살렘 교회 설립 및 성장을 다룬다.
둘째 부분은 8장~12장까지로 유다 중심의 복음 전파 활동에서 중심의 복음 전파 활동을 위한 과도기로서 팔레스티나와 그 인근 주변으로 까지 복음이 확장되는 역사를 다룬다.
셋째 부분은 13장~28장까지로 본격적인 이방인 중심의 복음 증거의 역사를 다루어 복음이 안티오키아에서 로마까지 미치는 역사를 기술한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사도행전의 셋째 부분을 시작하는 장이다. 그리고 복음 증거의 중심 인물로 볼 때도 지금까지는 열두 사도의 대표격으로 유다인의 사도로 불리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복음이 증거되어 왔으나 이제부터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은 바오로(사도9,15)를 중심으로 선교 활동이 진행된다.
또한 이제까지는 예루살렘 교회가 선교의 중심축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이방 땅에 세워진 시리아 안티오키아 교회가 선교의 중심축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13장은 바야흐로 복음이 전세계를 향하여 확장되는 장대한 역사의 막을 여는 중요한 전환의 장이라 볼 수 있다.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13,1)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방선교의 중심축으로 부상한 안티오키아 교회에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다고 보도한다.
여기에서 '예언자들' 에 해당하는 '프로페타이'(prophetai)의 원형 '프로페테스'(prophetes)는 '발언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프로페미'(prophemi)에서 유래한 말로서 문자적으로는 '발설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통상 그리스어적 용례로는 신탁이나 감추어진 일들을 선포하거나 해석하는 자를 가리키며 성경적 용례로는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해석하는 자를 가리킨다.
즉 이들은 미래의 일을 예언하기도 하였고(사도11,28), 성령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사도21,10.11).
이러한 예언자 직책은 사도직과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 당시에만 있었던 한시적 직분으로 교회가 굳게 서 가고 성경의 기록이 완성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교사들'에 해당하는 '디다스칼로이'(didaskaloi)의 원형 '다디스칼로스' (didaskalos)는 문자적으로 '가르치기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특별히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고 말하기도 했는데(2티모1,11). 시 교사는 탁월한 지혜로써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여 이를 교회 구성원들에게 가르치는 자를 지칭했다(에페4,11참조).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말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 보냈다. (2-3)
여기서 '그들' 로 번역된 '아우톤'(auton)은 3인칭 복수 대명사로서 1절에 언급된 다섯명의 예언자와 교사만이 아닌 안티오키아 교회 신도들 전체를 가리킨다.
그들은 주님께 예배드리고 단식하였다.
여기에서 '예배드리고'로 번역된 '레이투르군톤'(leiturgunton)의 원형 '레이투르게오'(leiturgeo)는 어원적으로 국가를 위해 자비(自費)로 봉사하며 사회를 위해 공적 봉사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 성경 희랍어 번역본인 70인역(LXX) 에서는 만남의 천막(성막)이나 성전에서 거룩한 의식에 종사한 대사제들과 레위인들이 봉사하는 것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샤라트'(sharath)의 역어로 자주 사용되었다(민수18,2 ; 요엘1,9).
본문에서는 종교적인 용례로 쓰였으므로 후자의 의미와 더불어 기도와 예배와 가르침과 이에 상응하는 기타 다른 방법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을 나타낸다.
전례를 가리키는 라틴어 'Liturgia'(Liturgy)가 이 단어에서 파생되었음은 이 단어가 주로 예배와 관련되어 주를 섬기는 것에 관계된 용어라는 것을 말해준다.
한편 그들은 단식하였다. 이것은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생각하고 영혼을 해방시키기 위해 금욕의 방편으로 단식을 하였던 초대 교회 당시의 영지주의자나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자들이 하는 단식(콜로2,20-23)이 아니었다.
또한 국가적인 재난(1사무31,11-13)이나 대속죄일과 같은 절기(레위16,29)을 맞아 민족적으로 단식하는 구약 시대의 단식이나 자신의 경건을 자랑하기 위해 일주일에 두번씩(월요일과 목요일)단식하였던 바리사이인들의 정기적인 단식(루카18,12)도 아니었다.
이것은 육체적 쾌락을 이겨내고, 하느님으로부터 영적 감동과 말씀을 받기 위한 뜨거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발적인 단식이었다.
이러한 그들에게 성령께서는 행하실 일을 지시하였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2ㄴ)
본절은 '성령께서 파견하신'이라고 기록된 4절 말씀과 더불어 초대 교회 당시의 선교활동의 중심에 성령이 계셨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성부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따라 이 땅에 오셔서 당신 몸을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전하는 일을 이제는 성령 하느님께서 주도해 나가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따로 세워라'고 번역된 '아포리사테'(aphorisate)의 원형 '아포리죠'(aphorizo)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경계를 지어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하다' 는 의미이다.
사도 바오로가 로마서 1장 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이라고 말할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용례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본절에서 이 단어는 성령께서 바르나바와 사울에게 복음 전하는 특별한 임무를 부과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라고 번역된 '데 모이'(de moi)에서 '데'(de)는 명령어와 함께 그 명령이 즉각 시행되기를 원하는 것을 나타내는 불변사이며 '모이'(moi)는 '나에게'라는 의미를 지닌 1인칭 단수 여격 대명사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바르나바와 사울을 '자기 자신(성령)에게 즉각적으로 구별하여 따로 세울 것'을 명령했음을 보여준다.
본문은 선교사 파견이 인간의 자발적인 열심이나 원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 사업의 주체이신 성령 하느님의 주권적 선택과 사명 부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늘날 많은 선교사들을 선교지로 파견하는 문제를 결정할 때에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이 바로 성령 하느님의 뜻을 묻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 보냈다."(3)
본절은 안티오키아 교회가 성령의 지시에 따라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구별하여 세운 뒤 들에게 안수하여 선교사로 보내는 장면이다.
본절에서 '그래서'로 번역된 '토테'(tote)는 '바로 그 때'라는 의미로서 성령의 지시가 있자 마자 안티오키아 교회의 전 신도들이 바로 단식하고 기도한 사실을 나타낸다.
다시말해서 안티오키아 교회는 성령의 지시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의 성공적인 선교 활동을 위해 단식하며 기도한 것이다.
한편 '떠나보냈다' 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파견하다' 라는 의미의 단어 '아포스텔로'(apostello)(2티모4,12)가 아니라 '아펠뤼산'(apelisan)이다.
이 단어의 원형 '아폴리오'(apolio)는 '~로 부터'(from)라는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 와 '풀다'(to loose)라는 의미의 동사 '뤼오'(lyo)가 합성된 동사로서 '~로 부터 풀어 놓아 자유롭게 보내다'라는 의미이다.
바르나바와 사울은 안티오키아 교회를 놀랍게 성장시킨 위대한 지도자들이다(사도11,22-26). 따라서 안티오키아 교회 신도들에게 있어서 그들을 이방 선교사로 보냈다는 것은 교회 입장에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르나바와 사울을 이방 선교를 위해 안티오키아 교회에만 매이도록 하지 않고 부담없이 자유롭게 떠나도록 보내 주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이 '아펠뤼산'(apelisan)이라는 단어에 잘 나타나 있다.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사람은 오직 마음으로만 제대로 볼 수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거든.”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이 말처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무엇이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지를 계속 혼동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표현을 만납니다.
교회가 성화 상 공경과 관련하여 ‘눈에 보이는 형상 저 뒤편에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하여 말하는 부분입니다.
실제로 성화 상 공경은 성모상이나 성인의 이콘을 공경하고 신성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형상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실체, 곧 성모님과 성인에 대한 공경, 다시 말해 그들의 신앙이 보여 준 모범적인 삶에 대한 공경의 행위입니다.
이는 교회가 거행하는 성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성체성사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질료와 형상인 빵과 포도주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몸과 피로 실체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통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고 믿으라는 초대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진리를 가슴에 새기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선물을 안겨 주시는 분을 마음으로 보고 굳게 믿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성경에서 말씀을 ‘로고스, 레마’로 쓴다
‘로고스’가 겉, 그릇이라면 속,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레마’이다. 겉, 보이는 문자가 ‘로고스’이고 그 문자 속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뜻, 진리가 ‘레마’다.
(요한12,44-50)
44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45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담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역사속에 보이는 예수님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원속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1베드1,20) 20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에페1,4)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1코린1,30)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 예수님 안에 그리스도, 그리고 하느님의 지혜, 의로움, 거룩을 봐야 한다.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 예수님을 생명의 빛으로 믿는 것이다. 그래야 세상이 어둠임을 알게 된다.
(요한1,1.4.14)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14 말씀(로고스)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 그분은 말씀(로고스)이다. 예수님 안에 우리의 생명이, 그리고 하느님의 진리, 은총, 영광을 깨달아야 한다. 곧 보이는 로고스 안에 보이지 않는 진리, 그 ‘레마’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47 누가 내 *말(레마)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 레마는 하느님의 뜻이다.(진리, 존재의 선언이다) 레마는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아 간직하는 것이다. 레마, 그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救援)이다. 곧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간직하는 것이 구원인 것이다. 그러나 문자(로고스) 그대로 도덕과 윤리, 그 인간들의 계명으로 지켜버리면 하느님의 뜻(진리)과 상관없는 하느님을 헛되이 믿는 헛된 신앙을 사는 것이다.(티토1-14참조)
48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로고스)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 여기서 말은 로고스다. 말씀을 로고스, 곧 보이는 그대로 문자로만 보면 법(法)이 된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레마), 진리를 깨닫지 못해 도덕과 윤리, 그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레마), 진리를 깨닫지 못해 도덕과 윤리, 그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아담이 법으로 받았다.
(창세2,16-17) 16 그리고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 하느님의 뜻, 말씀을 사람의 善, 惡의 기준으로 받으면 법, 심판이 되어 죽음을 준다. 선이 악을 덮어(대속) 생명을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 진리다. 선, 그 진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다.
49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50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 福音 말씀을 文字 그대로 ‘로고스’로 보면 인간의 知慧로 보게 된다.
(1코린2,4-7) 4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5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6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는 우리도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것도 아니고 파멸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우두머리들의 것도 아닙니다. 7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 하느님은 말씀(로고스) 안에 레마(은총, 은혜, 자비, 사랑)를 담아서 주셨다. 우리가 이해해 사유해서 능력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능력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1코린2,10)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 하느님의 지혜이신 성령님! 당신이 아니시면 신앙을 살 수 없나이다.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멘!!!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12,44-50)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46)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머무르지 않게'에 해당하는 '메 메이네'(me meine; should not stay)는 '그가 머물러 있지 않게' 혹은 '그가 그대로 남아 있지 않게'로 번역된다.
'메이네'(meine)는 '메노'(meno)의 부정(不定) 과거 가정법인데, 기본적으로 사람이나 물건이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뜻을 전달한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사람들의 본래 있던 자리가 바로 '어둠'이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에페5,8)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도 있지만, 여기에는 모든 사람이 다 포함된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어둠속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로마3,23).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요한1,5)라는 사도 요한 복음사가의 증거는 이러한 사실을 더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어둠 가운데 있다는 것은 절망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것을 '여러분도 전에는 잘못과 죄를 저질러 죽었던 사람입니다'(에페2,1) 라고 묘사하고 있다.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해 주심으로써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참 빛이시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절망적인 인간의 현실 속에 직접 오셔서, 우리에게 어둠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지 않고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을 일러 주셨다.
한편 '어둠'으로 번역된 '스코티아'(skotia; darkness)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호셰크'(hoshek)이다.
'호셰크'(hoshek)는 '흑암'(darkness)이라는 일차적 의미 외에도 '무지'(ignorance; 시편18,29), '악'(evil; 이사5,20), '숨는 것'(시편18,12), '눈이 먼 것'(욥기12,25), '심판'(시편35,6) 등을 나타낼 때 쓰였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그들이 실상이 어떠한지 충분히 알게 된다.
이 사람들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며, 참되게 사는 법도 알지 못한다.
이들은 영적 지식이 전무하며, 이들 속에는 참된 기쁨(요한15,11)이나 평화(요한14,27)가 없고, 선행을 행하려는 갈망(에페2,10)도 없다.
한마디로 불행하고 절망적인 상태가 '어둠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밝은 빛으로 오셔서 어두운 절망에서 우리를 구해 주셨다.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빛이 없는 재물, 명예, 건강이 무슨 소용~노예가될 뿐이다.
복음(요한12,44-50)
44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 나(예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그리스도)를 보내신 분(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다.
(요한3,16-17)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속죄제물, 새계약)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45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 지혜, 힘, 말씀이다.
*(요한10.30)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 빛은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이다. 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는 것은 이 세상의 빛(목숨)이 어둠이라는 뜻이며, 믿는 사람은 이 어둠의 세상에서부터 빛(생명)을 살게 한다.
<어둠이란 영적(靈的) 어둠입니다. 이 영적인 어둠은 믿음의 결여(缺如)를 뜻하고 절망(切望)을 뜻하며 기쁨이 없음을 뜻하고 죽음을 뜻합니다. 우리의 방패(防牌)가 되어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사제의 글>
(요한12,35)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루가11,35) 35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갈라3,22) 22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 죄(罪)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어둠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지 아는 사람만이 빛을 찾고 갈망(渴望)한다.
(시편142,6) 6 주님, 당신께 부르짖으며 말씀드립니다. “주님은 저의 피신처 산 이들의 땅에서 저의 몫이십니다.”
(시편119,114) 114 당신은 저의 피신처, 저의 방패 저는 당신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 우리의 행위(行爲)가 구원의 근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에페2,9) 말씀을 깨달아,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기 때문이다.
(로마3,30) 30 정녕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할례 받은 이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고, 할례 받지 않은 이들도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 무엇을 믿나?
(로마3,23-25)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새 계약)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 믿지 못하면?
48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면 말씀ㅇ리 심판이다. 십자가의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의 효과인 하늘의 용서(容恕), 의(義)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3,18) 18 아들(피의 새 계약)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빛-생명)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49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 (다시) 예수님은 하느님의 구원의 뜻, 힘, 지혜, 말씀이다.
(요한6,38)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50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 말씀은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이다.
(마태4,4)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 종교행위(宗敎行爲)의 신앙(信仰)이 아닌, 말씀을 영원한 생명으로 얼마나 먹을까? 육(肉)의 밥(빵)은 정성들여 준비해서 매일 세 번씩 꼭 챙겨먹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말씀 안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믿는 것이다. 그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는 행위, 행실은 헛된 것이다. 인간의 지혜, 뜻에서 나온 자기 의로움의 행위, 행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祈禱) 또한 마찬가지다.
(마태6,7)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 세상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재물(財物), 명예(名譽), 건강(健康), 자기 의(義), 등을 구(求)하는 것, ‘빈말 기도’다.
(마태6,33) 33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로마10,1-3) 1 형제 여러분, 내 마음의 소원,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는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2 나는 그들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한 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열성입니다.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깨달음 없는 인간의 열성(熱誠), 그 사람의 의(義)를 위한 말씀으로 결론지어 듣고 말하고 가르침을 주면 그리스도의 대속, 그 구원(救援)의 의로움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큰 죄(罪)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어둠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지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빛을 찾고, 빛 안에 들 수 있도록 말씀 안에 머물게 하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그에 합당한, 어울리는 삶을 살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2024년 04월 24일 수요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본문도 “나”라는 말이 절마다 등장할 정도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직접적으로 알려 줍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당신께서 ‘하느님과 완전히 일체’이신 분이심을 선언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계시하고자 보내지셨고,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어 빛과 어둠, 구원과 심판이라는 ‘대조 개념’을 통하여 당신의 두 가지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우리가 어둠 속에 방치되지 않고 구원받게 하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뒤 예수님께서는 다시 ‘일체’라는 주제로 돌아가십니다.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당신의 말씀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언제나 진리이고 생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독서는 이 ‘말씀’이 얼마나 살아 있고 역동적 생명력을 가졌는지를 증언합니다.
“그 무렵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라고 옮긴 그리스 말 ‘크라조’는 비명을 지르듯이 격하게 소리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아무리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끝없이 증거와 표징만을 요구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당신께서 누구이시며 무슨 사명으로 오셨는지 격렬한 어조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둠에 있지 않게 빛으로 오셨지만, 우리가 여전히 소모적 의심으로 어둠을 붙잡고 있으면 그 빛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날마다 말씀을 통하여 단단하고 격렬한 어조로 경고하신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