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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요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길이요 진리요 생명 (요한14,1-6)
제1독서<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약속을 실현시켜 주셨습니다.>(사도13,26-33)
바오로가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에 가 회당에서 말하였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27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28 그들은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목도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29 그리하여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그렇게 다 이행한 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모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 뒤에 그분께서는 당신과 함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32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33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화답송>시편2,6-7.8-9.10-11(◎7ㄷ) ◎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 “나의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내가 나의 임금을 세웠노라!”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
○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 너는 그들을 쇠지팡이로 부수고, 옹기그릇 바수듯 바수어 버리리라. ◎
○ 임금들아, 이제는 깨달아라. 세상 통치자들아, 경고를 받아들여라. 경외하며 주님을 섬기고, 떨며 그분 발에 입 맞추어라. ◎
복음<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1-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 (사도13,26-33)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히였습니다.(27) ~~~ 그리하여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그렇게 다 이행한 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모셨습니다." (29)
'예언자들의 말씀'에서 '말씀'으로 번역된 단어는 '로고스'(logos)가 아니라 '목소리'를 뜻하는 '포네'(phone)의 복수형 '포나스'(phonas)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대해 예언한 구약의 예언자들의 목소리가 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외우는 그 입을 통해서 현장감있게 생생하게 들려온다는 뉘앙스를 전달해 준다.
즉 사도 바오로가 '로고스'를 쓰지 않고 '포네'를 쓴 것은 유대인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현재 듣고 있는 것처럼 암송하면서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안식일마다 봉독되는'에서 '봉독되는'으로 번역된 '아나기노스코메나스' (anaginoskomenas)는 '암기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큰소리로 읽다', '낭독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나기노스코'(anaginosko; 루카4,16; 사도8,28)의 현재 수동태 분사형이다.
따라서 계속과 반복의 의미를 살려서 '읽혀지고 있는'이라고 번역하는게 좋다.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을 큰소리로 낭독했다.
'이루어지게 했습니다'로 번역된 '에플레로산'(eplerosan)는 '플레로오' (pleroo)의 부정(不定; indefinite) 과거 3인칭 복수형이므로, '그들은 이루었다' (they have fulfilled)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의미상의 목적어는 예언자들의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된 예언자들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 뜻을 알지 못하며, 그들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를 단죄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오히려 그 예언자들의 말씀을 성취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찍이 예언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배척받게 될 것을 예언한 바 있다(이사53,5.12).
유대인들이 생명의 주님을 죽인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무지 때문이었다. 사도 베드로도 사도행전 3장 17절에서 그렇게 말하였고, 사도 바오로도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거에 자신이 훼방자요, 핍박자요, 학대자였던 것을 그가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1티모1,13).
이처럼 무지는 진리를 죽이고, 진리에 대하여 훼방하고 대항하는 죄악이다. 그러나 이 무지가 죄은 죄에 대한 면죄의 사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다 이행한 뒤'에서 '성경에 기록된'으로 번역된 '게그람메나'(gegrammena)는 '기록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그라포'(grapho)의 완료 분사형으로서 '기록된' (was written)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한 죽음에 대한 예언을 말한다(시편22편; 이사53,3~12). 무죄한 예수님을 죽인 일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예언을 성취하는 수단이 되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예언의 말씀이 인간의 자발적인 사악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뜻을 성취한다는 생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자기들의 사악한 의지와 자발적인 동기로 행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나무'에 해당하는 '크쉴루'(ksilu)는 뿌리와 잎이 있는 살아있는 수목이 아니라 잘려서 가공된 목재를 뜻한다. 사도 바오로가 예수님께서 달린 것을 십자가라고 하지 않고 나무라고 한 것은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라는 신명기 21장 23절의 말씀을 염두에 두었기 떄문일 것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나무에 매달려 죽으심으로써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음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다(갈라3,13; 사도5,30; 10,39참조).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33)
사도 바오로는 시편 2장 7절의 말씀을 메시아의 부활에 관한 예언으로 해석하였다. 시편 저자가 시편 2장 7절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육화(강생)를 염두에 두고 기록했다고 할 수 있으나, 여기에서 사도 바오로가 인용할 때는 문맥으로 보면,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이기심으로써 원수 사탄에 대하여 완전히 승리하고, 인류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으며, 그의 부활은 그의 두번째 탄생이었던 것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에 해당하는 '에고 세메론 게겐네카 세'(ego semeron gegenneka se)에서 '낳았다'에 해당하는 '게겐네카'(gegenneka)란 동사에 이미 인칭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사실상 1인칭 단수 대명사 '에고'(ego; 내가)가 없어도 된다. 그럼에도 '에고'가 쓰인 것은, 낳으신 주체 '하느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오늘'로 번역된 '세메론'(semeron)이라는 단어는 희랍어 구약 번역본인 70인역(LXX)에는 '오늘날'로 번역되어 있지만, 본문의 단어와 동일하다. 여기에서 '오늘'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켜 부활하게 하신 때를 의미한다.
이것을 굳이 '오늘'로 표현한 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하느님께 있어서는 모든 시간이 '오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첫 번째 말씀입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태, 마음이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 어지럽고 어수선한 상태를 ‘산란하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저마다 걱정과 근심을 안고 있으며, 또 그 때문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산란하다’라는 동사의 주어가 예수님인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친구 라자로의 죽음에 그의 동생들과 지인들이 슬피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해지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 당신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아시고 또다시 마음이 산란해지십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도 다시 한번 산란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시고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13,2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그 산란한 마음을 다잡으시고 다시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근심과 걱정을 아버지 하느님께 내어 맡기신 채,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고 완수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이십니다.
그렇게 하시어 그분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되시고, 우리가 따라야 할 ‘진리’가 되시며,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라는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 곧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깁시다.
하느님을 믿고, 또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믿으며, 흩어지고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고 오늘 하루도 한 걸음 한 걸음 정성을 다하여 나아갑시다.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산란한 마음, 근심, 걱정의 반대말은 믿음입니다.
(요한14,1-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 인간은 원래 근심, 걱정이 없는 존재로 창조 되었다. 그 근심의 동기들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통제하시는 분이 인간들의 삶을 전적으로 책임져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매한 인간(아담)들이 그 존재의 자리를 거부한 것이다. 그때부터 인간들은 근심으로 이어지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인간은 결핍과 부족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삶의 우리를 否認하고 미래를 하느님께 맏기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에 관해 상세히 적힌 책이 성경(聖經)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믿음의 내용을 반복해서 공부하고 확인을 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굳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속적으로 이행되지 않을 때, 우리는 계속 근심과 걱정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居處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 하느님 나라에는 거처 할 곳이 이미 많은데 무슨 자리를 또 마련하신다는 것일까, 그 말씀은 하느님 나라는 흠도 티도 없는 깨끗한, 곧 더러운 죄인들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대속(代贖)의 십자가를 지시러 가신다는 말씀이시다. *다시 와서 - 예수님 당신께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오시겠다는 말씀이다(요한14,6.18참조)
(예레17,9) 9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 가망이 없는 인간들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로 만들어 하느님을 뵙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마태5,8)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히브9,14) 14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하느님께서 당신 외 아드님(獨生子)을 세상의 속죄 제물로 내 주신, 그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 길의 예수님이 생명(구원)의 眞理이신 것이다. '진리는 하나' 이다.
(사도4,12) 12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 그 누구도 예수님의 대속을 입지 않고서는 하늘의 용서, 생명의 빛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십자가의 원리란 - 무조건 남을 위해 나의 것을 손해 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먼저 2,000년 전 골고타에 선(立) 십자가에서 죽었어야 할, 곧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품으시고 예수께서 대신 죽으셨음을 아는 것부터 시작 되어야 한다.(마태6,33참조)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과 화해, 곧 하느님께 돌아감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다른 민족들처럼 인간의 욕심, 만족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마태6,31-34참조)
하느님을 떠나 죽음의 증상들로 근심, 걱정,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인간들이 하느님께 돌아가 다시 하느님이 주시는 풍성한 복을 누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신앙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 어떤 인간의 수고와 노력, 업적, 공로도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만 이야기한다.
기억할 말씀~
(티토3,5)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말씀, 약속)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 하늘의 것으로 받는 구원이다.
(요한3,3) 3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골로3,1-2)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진리)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영성체송~
(로마 4,25) 25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성령이시어! 주님의 피로 모든 언어와 백성들 가운데에서 저희를 속량하시어 합당한 삶을 살게하소서 ~아멘!!!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복음 (요한14,1-6)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2)
'거처할 곳'으로 번역된 '모나이'(monai; mansions; rooms)는 '모네'(mone)의 복수형이다. '모네'(mone)는 목적격 단수로 여기와 요한 복음 14장 23절에서 쓰일 뿐, 신약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단 한번도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모네'(mone)의 의미가 무엇 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이것은 여행 중에 잠시 들러서 휴식을 하는 임시적 공간의 의미라기 보다는, 제자들과 더 나아가서는 모든 믿는 이들의 희망을 견고히 하는 항구적 거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여기서 갑자기 하느님 나라의 거처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인가?
이것은 제자들에게 당신과 비록 헤어지더라도,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거처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 시킴으로서,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이다.
또한 있다가 없어질 이 땅에 희망을 두지 말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처소에 희망을 두게 하기 위해서 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하고, 성령 강림 이후 성령 충만을 체험한 후 하늘 처소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때, 이 세상의 일에 대해 근심하지 않았으며, 주님과 교회를 위해 순교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굳센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 요한복음 14장 2절의 후반부에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중요한 이유에 대해 언급하신다.
'내가 ~간다'로 번역된 '포류오마이'(poreuomai; I go)는 '포류오' (poreuo)의 현재 시제 중간태 로서 '내가 스스로 간다'는 뜻이다.
이것을 '미래적 현재'라고 하는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내는 용법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죽음을 신적 통찰력과 예지력으로 미리 아셨고,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예고해 주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라는 말을 덧붙이셔서 그 처소를 마련하러 가시는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신다.
당신 자신의 죽음이 제자들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며, 그들 뿐만 아니라 영원으로부터 선택하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반드시 지불하셔야 될 대가임을 밝히고 계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영혼들이 영원히 거처 할 처소를 마련하는 이 일은 오로지 십자가 상 대속의 구속사업을 통해, 믿는 이들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만 유보 된 일인 것이다(사도4,12).
2024년 04월 26일 금요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오늘 복음에서 선포된 이 말씀보다 우리가 더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있을까요?
이 내용 바로 전에는,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 가운데 마지막으로 주시는 당부가 전해집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슬픔과 상실감으로 복잡해진 것을 아시자 그들의 ‘산란한 마음’을 진정시키십니다.
‘산란하다’에 해당되는 그리스 말은 ‘타라소’로, 마치 바다가 폭풍우에 휩싸여 모든 것이 휘저어진 상태, 심연과 표면이 완전히 뒤집어진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요동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재가 그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러 가는 것이라고 안심시키십니다.
이때 쓰인 그리스 말 ‘모나이’는 ‘머무는 장소’, ‘방’을 의미하는데, 하느님 나라를 아버지의 ‘집’, 방이 많은 ‘가정’으로 은유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뒤 당신께서는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이시며, 그 길은 “진리”를 선택할 때 걷게 되고,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참된 “생명”을 준다고 선언하십니다.
독서는 예수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삼아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바오로의 모습을 전합니다.
지금은 진심이어도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것이 ‘관계’이고, 지금은 행복해도 언제든지 불행해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산란하고 평온하지 못합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삶에 끊임없이 노출된 우리가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에서 보호되고 도착지로 인도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분께서 몸소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부활 제4주간 금요일]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를 믿지 않는 것이다.
복음(요한14,1-7)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제자들의 뜻, 소원이 이루어지기 전에 성경말씀대로 죄인들의 구원자(피의 새 계약)로 파견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독서(사도13,26-33)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27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 모든 말씀은 하느님의 뜻이며 하늘의 안식인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인간의 뜻, 소원을 이루어 주는 하느님의 말씀이(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 하느님의 나라, 그 안식의 거처는 이미 다 이루어져 있는데 무슨 자리를 마련하러 가신다는 말씀인가?
(히브4,3) 3ㄴ 우리는 믿었기 때문에 그 안식처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도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에 일을 다 마치시고 쉬셨습니다.
= 하느님께 들어갈 수 있는 길, 그 자리다. 곧 창조 이래 모든 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까지, 더러운 양심까지 모두 씻어줄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을 다 이루실 십자가(十字架), 그 한 곳이다. 그 한 곳뿐이다.
(2사무7,10) 10 또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이 머무를 *곳을 정해 주어 그 곳에 뿌리를 박고 전처럼 악한들에게 억압당하는 일이 없이 안심하고 살게 하리라.
(로마8,38-39)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피의 새 계약)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1요한4,10) 10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속죄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오늘 분명하게 다시 말씀하신다. ~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죄인들의 저주로, 그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으시는 그 길이 구원의 진리(眞理), 생명(生命)이시라는 말씀이다.
* 사제의 가르침 중~
창세기28장을 보면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는 죄를 짓고, 자기가 살던 집에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갑니다.
돌 하나를 베고 누워서 자다가 꿈을 꿉니다. 땅에 층계(사다리)가 세워져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있습니다.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층계는 바로 나의 능력으로는 닿을 수 없는 것을 닿게 해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로 이 층계를 통해서 당신께로 올라오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꿈에서 깨어납니다. 그의 ‘깨어남’은 잠에서 깨어남이지만 실제로 깨어남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깨달음’입니다.
여태까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살아 왔던 야곱이 이제는 하느님을 자신의 삶의 중심으로 모시는 순간이 됩니다. 그는 이 순간에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창세28,16) 하고 고백합니다.
야곱의 이 깨달음이 이제 신약으로 넘어옵니다. 야곱에게 층계를 통해서 하느님께로 이르는 길을 보여 주셨던 하느님께서 잊데는 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께로 갈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신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가시는 사다리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상.~
그래서 피의 새 계약인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 이전에 계획하셨던 하느님의 뜻, 지혜시다.
7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 그런데 예수님과 하느님을 올바로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곧 사람의 뜻, 생각, 지혜로, 사람의 계명, 법의 예수님과 하느님으로 알고 하는 그 헛된 신앙을 사는 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뜻,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산란해져 ‘행위신앙’에 더 열심을 부린다.
그것은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곧 예수님을 새 계약(契約)으로, 구원(救援)의 길, 진리(眞理), 생명(生命)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나’를 믿는 것이다. 나의 열심, 행위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의(不義)불법(不法)이다.(마태7,21-23 참조)
(1요한3,18-19) 18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나 혀 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9 우리는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 진리(眞理)- 그리스도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이다. 그 피의 새 계약을 진리로 주는 것이 마음의 쉼, 안식을 주는 사랑이다.
(1요한3,20-21) 20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때에는 하느님 앞에서 떳떳합니다.
=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에 대한 믿음이 마음을 단죄하지 않게한다.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피의 새 계약, 그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의 더러운 양심, 마음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 이전 사랑하는 당신 외아들, 그 *‘크신 그리스도’를 ‘죄인(罪人)들의 속죄(贖罪) 제물’로, ‘약한 모습의 구원자’로 세우셨음이다. 사람의 지혜로는 깨달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하느님의 뜻, 지혜다. 오히려 어리석어 보인다.
(1코린1,21-25) 21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2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24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25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오늘 모든 말씀이 믿음으로 자라나게 하소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소서. 바오로 사도처럼(필리3,7-11) 육신의 강한힘을 쓰레기로 여기며, 약한 자로, 크신 하느님, 예수님만 의지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내버려두지 마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