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심각하다… 삼성만이 아닌 나라 전체의 문제” | ||
|
그러나 그런 재벌 총수들이 말하는 독자성이나 창조성 혹은 경쟁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 전제 조건들에 대해서 충분히 검토해 보았는지는 심히 의문이다. 그리고 다른 문제는 한국의 재벌들의 존립 자체가 실제로는 기업과 기술의 경쟁력을 좀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3-3-1. 재벌의 존재와 경쟁력
재벌은 한국 경제의 특수한 현상이다. 경제 전문가가 아니 필자가 재벌의 경제적인 의미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려우나 우선 “지배주주가 소량의 기업 지분을 가지고도 순환출자를 통해서 큰 기업 집단을 지배하는 기업의 소유-지배 형태”라고 일단 정의해 보자. 이런 한국의 재벌의 폐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토론, 연구가 진행되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이를 절약하기로 하자.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지적하는 것은 그 재벌들은 거의 다 자손에게 기업을 물려주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족주의, 기업의 귀족주의는 민주주의와 다른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함축한다는 것이 본 필자의 소견이다. 이는 필자의 고대 그리이스 연구에서 도출되어진다.
그런데 자기 아들에게 대 기업을 물려준다는 것은, 그것도 2대, 3대에 걸쳐 기업 경영을 전승시킨다는 것은 인간 평등, 재능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가설에 불일치하는 것이다. 인간의 재능은 그의 환경이나 가정을 불문하고 골고루 분배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전제이다. 인간 평등의 조건이 거기에 있다.
이런 면을 보면 재벌 기업가들이 말로는 독자성, 창의성, 기업 혁신(innovation) 운운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런 기본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거대 기업을 한번 일구었으면 이를 그 재능에 부합하는 사람에게 계승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한국의 재벌 기업가들의 사고방식은 전근대적 봉건주의, 가부장주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경영혁신, 기술 혁신을 부르짖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 봉건적인 사고구조에서 경영이나 기술의 혁신을 바라는 것은 자체 모순이다. 이는 단적으로 말해 기업의 문화가 심히 비민주적이며 전통적이라는 것이다.
필자의 기본 철학은 신자유주의에 입각한다. 즉 기업만이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보수적인 사회사상일 수 있다. 따라서 기업에 대한 의미부여는 그만큼 중대하다. 한나라의 부와 재화의 증대(增大)는 오직 민간인들과 기업들의 노력에 기인한다. 국가와 정부의 역할은 그와 다른 것이다. 필자는 노동자의 혁신적 기여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생존과 현상유지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 즉 새로운 일자리의 창출과 부가가치의 창출은 자본과 경영의 역할이다. 노동운동은 지식기반 사회에서 이제 그 의미를 대단히 상실하고 있다. 이는 현재 한국 대공장에서의 이기적인 노동운동의 양상에서 잘 파악할 수 있다. 진보와 노동운동 그리고 사회주의적 평등주의 등은 이제 그 역사적 맥락을 많이 잃고 있다. 거기다가 세계화(globalization)는 일국 단위의 사회복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기업의 역할은 각국의 경쟁력의 척도이다.
3-3-2. 경쟁력과 윤리의식
봉건적인 재벌의 지배를 많이 받는 한국의 기업과 경제는 위에서 말한 민주주의 원리와 부합하지도 않고 또 창의력이나 기발한 생각을 수용하기에 몹시 부족한 여건이다. 이는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집안에서 어떤 새로운 착상이나 개선책이 나오기 어려운 까닭과 같다. 봉건적-계층적인 사회질서 하에서는 무슨 새로운 사상이나 돈벌이 방법이 나오기 어렵다. 이는 민주주의 시대에 많은 기술과 과학의 진보가 일어난 것과 일치한다.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 문화야 말로 독창성과 창의력이 극도로 발전되는 시대라는 것을 말한다. 기업 문화 역시 민주주의 문화의 일부이다. 특혜와 특권을 인정하는 시회, 그것이 귀족과 같은 계층질서이든 혹은 가족승계와 같은 혈족주의이든 간에 이는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사상이다. 아들이라고 특권, 그것도 사적인 특권, 가령 사랑이라든지 혹은 교육 같은 것, 이 아니라 대 기업의 소유와 경영을 물려준다는 것은 인간평등, 재능평등에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다. 이른 가족 대물림의 근절 없이 한국의 대기업의 자기혁신과 거듭남은 기대할 수 없다.
그간 대기업들의 부정과 비리를 우리는 수없이 봐왔다. 최근 현대차 그룹 회장 정몽구씨의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김동오 부장판사)는 5일 비자금 693억원을 조성하는 등 900억원대 회삿돈을 횡령하고 계열사에 2천100억원대 손실을 끼친 혐의로 기소된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한겨레 2월 5일자)
|
불법 행위는 징역 3년의 중범죄였다. 이런 현상 역시 기업문화의 전근대성 내지 봉건성에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마인드로 기업을 운영하면서 어떻게 혁신과 창의성 운운 할 수 있는지 모른다. 물론 황제 경영 하에서도 작은 부분의 혁신과 개선은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이다. 즉 기업 전체의 체질을 바꾸거나 구조를 개선하는 데는 기업의 고유한 정신과 문화 그리고 분위기 등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런 독재적인 문화 아래에서 누가 감히 재벌총수의 비위를 거스를 수 있을까?
여기서 필요한 윤리는 공평무사(公平無私)이다. 자기의 기득권과 이기주의를 버리고 공적인 공정성을 가지는 것이 기업 경쟁력의 중대한 계기이다.
일본이나 구미 각국의 대기업들은 이런 면에서 한국의 대기업의 혈통이기주의를 완전히 벗어나 기업 자체의 고유한 생존력을 존중한다. 설령 어떤 창업자가 대기업을 만들었다고 해도 한번 공중 사회에서 자신을 설립한 기업은 그 자체의 고유한 존재의미를 가진다. 이는 그 창업자의 개인 사유물이 결코 아니다. 이런 면에서 아직 한국인들의 공적의식과 소유의식의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는 마치 내가 낳고 키운 나의 자식이라고 해도 그는 나의 소유물이 아님과 같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아직 한국 사회는 “기독교적인 청지기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기업가들은 항상 “내가 이 기업을 위한 최고의 적임자인가?”라는 자기질문을 퍼부어야 한다. 하물며 “나의 아들이 이 기업을 위한 최고의 적임자인가?”하는 질문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재벌총수들은 그런 문제의식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것이 한국의 아킬레스건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흔히 대기업은 경쟁력이 있으나 중소기업이나 공무원 혹은 정치인 등이 국가 경쟁력을 잠식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국가 지도자들의 무기력과 교육의 부패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비교적 잘한다고 생각되는 대기업 역시 그런 결함에서 벗어나기 불가능하다.
3-3-3. 공정성이 창의력의 초석이다.
위에서 열거한 면들을 보면 한국 기업들의 윤리의식이 얼마나 원시적이며 치졸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조ㆍ중ㆍ동 언론들이 대기업을 너무 칭찬하는 것을 싫어한다. 우리나라의 대기업들 그렇게 잘하고 있지 않다. 이게 필자의 소견이다. 따라서 삼성이 한국을 먹여 살린다 라든지 삼성 없으면 한국이 무너질 것처럼 기우(杞憂)를 하는 것 역시 잘못이다. 거기다가 요즘은 수출이 일자리 창출에 별 기여를 못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대기업의 고용창출 능력은 이제 그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요약한다면 이렇다. 윤리가 능력을 담보할 수는 없다. 이는 별개의 기능이다. 그러나 고도의 능력은 윤리의식 없이 불가능하다. 즉 공평성이나 사회의식 없이 어느 기업이 크게 성장할 수는 없다. 흔히 말하는 윤리경영이 필요하다. 이는 비단 고객이나 하청업체 관련 혹은 탈세 문제뿐만 아니라 기업의 고유한 자산과 잠재능력을 총동원시키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덕목이다.
가부장적 기업이 빨리 클 수는 있다. 그러나 어느 규모에 이르면 더 이상 이는 좋은 체계가 아니다. 의사소통과 사고의 유연성 그리고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사고의 크기와 깊이를 필요로 한다.
3-4. 어떤 저명 과학자의 지적 사기 행각 - 황우석 사건
소외된 교육의 결과 병든 영혼들의 사회가 만들어졌고 이런 병든 영혼들 중의 큰 별이 황우석이다. 그는 배아 복제 기술의 성과로 한국의 각종 언론과 심지어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까지 인용된 한국 과학자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연구 업적이 사기라는 것이 드러났고 그를 보고 과학의 꿈을 키워온 이 나라의 많은 아이들은 실망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이 나라에서 자행된 많은 지식인 관련 불법, 부정의 대명사가 되었다.
3-4-1. 황우석 신드롬, 그간의 역사
2005년 한국의 과학계와 정치, 문화 그리고 매스컴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기사가 이런바 서울대 황우석 교수의 인간 배아복제와 이에 기초한 줄기세포 복제의 진위 논란이었다.
이는 단순히 과학적 연구 성과의 문제를 떠나 이런 연구 성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보도와 취재 그리고 방송(PD수첩)을 한바 있는 한국의 오래된 방송국 하나를 폐쇄하라는 큰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는 과학과 기술이 이제는 과학자의 이론적 연구 영역을 떠나 생물학기술(BT)라는 첨단 산업기술과 유착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황우석 교수는 이미 2004년 1월에 인간 배아복제 기술을 성공시켰다고 보고되었고 2005년 5월에는 미국의 저명한 의학 전문 학술 잡지인 사이언스(Science)지에 총 11개의 줄기세포를 만들었다는 내용을 게재하여 세계를 경악시켜 한국의 생물-유전공학의 수준을 세계에 공포하고 그만큼 한국의 위상을 높인 인물이다.
이 사건은 그러나 황우석의 치밀한 논문조작과 줄기세포 사진의 합성으로 판정이 났었다. 차제에 이 사건이 불러일으킨 교육학적, 과학적, 인식론적, 윤리학적 문제에 대해서 한번 검토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여론과 언론은 이를 매스컴의 초점으로 다루었고 정부 역시 황우석 박사와 그의 유전공학 팀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이제는 황교수의 위치는 그가 몸담고 있는 서울대를 떠나 세계 줄기세포 연구 센터인 '세계 줄기세포 허브' (World Stem Cell Hub)를 설립하여 그를 연구소장으로 활동하도록 했었다.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복제의 의학적-산업적 의의에 대해서 왕규창 서울대 의대 학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줄기세포는 질병 치료의 새 장을 열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세포다. 줄기세포는 일반세포와 다른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는 무한 자가증식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세포의 환경을 조절해 특정 기능을 하는 세포로 분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특성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을 손에 쥘 경우 질병 치료에 필요한 줄기세포의 수를 원하는 만큼 증폭시킬 수 있으며 또한 줄기세포를 치료에 필요한 단계로 분화시켜 사용할 수도 있게 된다. 줄기세포는 손상된 세포나 기능을 대체 보완 재생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고 그 자체의 병소 지향성을 이용하여 치료 물질 전달체로 이용할 수도 있다.
올해 우리나라의 황우석, 안규리 교수팀이 환자 맞춤형 체세포 핵 이식 줄기세포를 세계 최초로 개발함으로써 세계 줄기세포 연구 분야에서 강자로 부상하였다. 맞춤형 줄기세포는 환자 자신의 체세포를 떼어 기증자의 난자에 삽입함으로써 환자 자신과 유전 정보가 동일하도록 만든 줄기세포며, 이를 이용하면 향후 면역 거부반응 없이 세포 치료가 가능해진다는 큰 의미가 있다. 또 환자의 개체 특이성이 반영된 세포 배양 또는 조직 환경을 만들어 이를 맞춤형 치료제 개발에 응용할 수도 있다. 이런 엄청난 잠재력을 갖는 체세포 핵 이식 줄기세포의 확립 기술은 우리나라만 갖고 있는 것으로 체세포 핵 이식 줄기세포에 관한 한 원천기술 보유국임을 전 세계 학자가 모두 인정하고 있다”. (중앙일보 [시론] '세계 줄기세포 허브' 에 부쳐)
이런 황우석 교수의 연구 업적에 대해 한국인들은 무한한 존경과 숭배의 감정을 표현하였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는 아마도 현재 정치적-경제적 난조에 빠진 한국의 상황에서 이를 타결한 유일한 구세주로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의 피츠버그 대학의 섀턴교수가 난자 기증의 윤리적 문제를 들고 나옴으로써 발단이 되었다. 즉 황우석 교수는 같은 연구소 연구원의 기증으로 난자를 채취했고 더욱이 황교수의 난자 채취에 크게 기여를 한 노성일 미즈메디 병원장은 난자 기증자들에게 돈을 주었다는 말을 함으로써 황교수 연구에 숨어 있는 윤리적인 문제를 부각했다. 전자의 경우 권력적 관계에 있는 부하직원의 자발적 난자 기증은 문제가 될 소지가 크며 후자의 경우 인권유린의 소지가 있다. 그리고 다 아는 것처럼 난자 기증이 인권손상과 별도로 상당히 심각한 여자 신체의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돈을 주고 난자를 구입했다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다시 말해 이는 인체장기 매매와 같은 문제를 범하고 있다.
2005년 11월 22일 / 제 659회의 PD수첩은 난자 채취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황우석 신화의 난자 의혹
스타 과학자 황우석. 그가 윤리 논쟁에 휩싸였다. 난자매매 업주
가 구속되고, 그 업체와 연루된 불임 전문 병원 중에 황우석 사단
의 핵심 인물이 이사장으로 있는 병원이 포함되었다는 뉴스가 전
해지면서,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에 사용된 난자의 출처를 밝히라
는 요구가 높아진 것이다.
황우석 교수와 공동 연구를 진행해 오던 미국의 과학자 섀튼 박사
마저 ‘난자 취득과정의 윤리적 의혹’을 들어 결별을 선언해, 의혹
은 더욱 커지고 있다.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에 사용된 수많은 난자는 과연 어디서 온 것
인가?
그리고 MBC는 이제는 이런 윤리적 문제를 넘어선 황우석 연구의 진위(眞僞) 문제를 거론하고 나썼다.
3-4-2. 윤리문제에서 진위문제로
그런데 이런 방송이 나간 후 MBC의 PD 수첩에 반대하는 인터넷 여론이 뜨겁게 달아 오르고 이른바 국익을 위해서 자진해서 난자를 기증하겠다는 여성의 수가 1천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MBC와 이를 지지하는 여론을 반국가 단체로 간주하는 넷티즌들의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MBC를 폐쇄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종교적인 열정을 거침없이 드러내었다.
MBC의 폐쇄를 건의합니다 | 백두산족님 05.12.01발의 - 06.01.01 마감. 마감일까지 23일 남았습니다.
MBC를 폐쇄시켜 주십시오. 63282명 서명 서명목표 100000명
이들의 열정은 이른바 국익(國益)을 위해서이다. 필자 역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바가 아니었다. 만약 황교수의 발견과 발명이 진실이라면 난치병 환자들의 구원을 위해서 얼마나 좋은 소식인가, 당뇨병이라는 필자와도 무관하지 않은 질병의 치료도 줄기세포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니, 이 얼마나 좋은 소식인가?
그러나 필자는 mbc가 황교수 연구에 의혹을 제기했을 때부터 불안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저들이 분명 내부 제보자의 기밀을 받고 저렇게 용감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국민적 영웅에게 칼을 겨누는 무모한 일을 감행할 수가 없다는 추측이었다. 황우석 교수를 지지하고 mbc를 죽이려는 네티즌들의 수(數)와 열정은 거의 광분한 상태라 이에 대항하는 어떤 세력도 용서할 수가 없어 보였다. 이런 집단적 확신의 맹목성은 진실의 발견에 대해서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 많은 네티즌들이 말하는 가능한 국익과 난치병 치료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직 황교수의 연구가 그런 성과를 가져온다는 보장이 없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런 성과를 다시 검증하자는 주장은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수용되어야 한다.
가치 선택의 문제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와 다수결의 원리가 타당하다. 그러나 사실과 진위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수의 힘은 종종 미신과 광기를 동반한다. 이런 다수가 승리할 때, 비이성적인 야만이 인간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3-4-3. 지식(知識)과 신앙(信仰)
이제는 황교수의 논문을 게재했던 사이언스지 마저 줄기세포 배양의 실험과 검증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서울대의 일부 교수들도 황교수 연구의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고 소리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황교수의 줄기세포 배양은 사기극으로 드러났다. mbs방송의 폐쇄까지 밀고 나갔던 황우석 교수의 열정은 오류인 것이 드러났다. 황교수 측의 큰 오류와 허위가 폭로되어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망신을 당했다.
사람의 야심과 열망은 진리와 성공의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허위와 거짓 혹은 망상을 낳게 하는 어두운 동굴과도 같다. 특히 순수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공적인 문제와 결부되는 개인의 생각과 열정은 가히 종교적이라고 할 만큼 치열하다. 그러나 이런 사실과 진실에 뿌리를 두지 않는 열정은 신앙이지 지식이 아니다. 지식은 객관적이고 상호주관적이다. 하나의 지식을 확립하기 까지는 엄청난 실험과 입증의 노력이 필요하고 타당성을 정당화하기까지 개인적인 주관을 넘어서는 진리에로의 초월이 필요하다. 정치적-실천적인 문제에서는 다수의 원리가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과 이론의 문제에서는 진리 대응설의 입장에선 객관적인 사실이 진리의 기준이다. 그렇지 않으면 목소리가 크고 힘이 센 다수의 입장이 항상 옳다고 할 것이다.
헤겔의 말처럼 인간의 열정과 욕망은 세계 역사 발전의 원동력일 수 있다. 때로 인간의 병리학적인 격정과 아집 역시 진리발견과 발전의 기관차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동력은 냉정한 이성과 합리성의 절차 위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검증의 요구를 마치 신성모독으로 간주하는 사회분위기는 이 사회의 미성숙을 말하는 지표가 될 것이다. 진리의 객관성, 이는 엄청난 주관성의 희생과 죽음 위에서 이루어지는 지고지선의 실체이다. 그것이 실험의 성공이건, 아니면 물리적인 새로운 발견이건 혹은 새로운 사회제도의 도입이건 아니 사소한 개인의 사업이건 간에 훌륭한 업적은 개인의 아집과 편견 그리고 욕망을 뛰어넘는 귀중한 전리품들이다. 황교수와 MBC 논쟁을 역사의 거울로 삼아 우리 사회가 한층 더 성숙하게 되기를 바란다.
3-5. 사회적 거짓말과 한국의 교육
학벌주의, 획일적인 정답주의, 시험주의로 수십년간 교육을 받은 한국의 영혼들은 그 도덕적 타락과 지적인 무능력이 그 큰 특징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본 저서의 집필의도가 있었다. 이를 증명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지식인들, 유명인사들에 의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저질러진 각종 학력위조와 논문표절의 사건들이다.
3-5-1. 신정아 게이트
신정아씨의 학력 위조 파문이 이제는 불교계와 동국대 그리고 미술계를 넘어서 나라 전체의 기강을 위태롭게 하는 이른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상태로까지 번졌다.한 여인의 욕망과 부도덕성으로 발단된 사건은 그녀를 둘러싼 숱한 남자들과의 관련을 통해서 더욱 국가적인 도덕과 법질서의 기본을 동요시켰다. 이는 과거 영국의 크리스틴 킬러 사건이나 박정희 시대의 정인숙 사건과 맞먹는 아니 그 이상의 여성성 범죄이었다.
신정아 사건은 처음에는 단순한 학력위조 사건으로 본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중에는 이 사건이 개인의 부정 비리 차원을 넘어서 청와대, 기획예산처, 교육부까지 불똥이 튀었다.
조선일보에서 정리한 이 사건의 흐름을 보면 이는 정말 대단한 스캔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신정아 사건' 히스토리
⊙ [7월12일] 미술계 신데렐라 '가짜 박사' 파문
⊙ [7월16일] '에어프랑스'타고 귀국한 신정아, 흔적없이 잠적
⊙ [7월18일] 동국대 윗선 '신정아 감싸기' 의혹
⊙ [7월20일] 동국대, 신정아교수 파면ㆍ검찰수사의뢰
⊙ [8월24일] 변양균실장, 장윤스님에 "문제삼지 말라" 두차례 회유
⊙ [8월24일] 변양균 "신정아씨 문제 개입한 사실 없다" 부인
⊙ [8월25일] 변양균"7월 장윤스님 두번째 만나…동국대갈등 확대말라 해"
⊙ [9월1일] 변양균 실장 "신정아 의혹과 무관" 거듭 주장
⊙ [9월4일] 노대통령 "정윤재·신정아 사건, 소설같다"
⊙ [9월10일] "변양균 실장, 신정아와 빈번한 연락"…전격 사의 표명
⊙ [9월11일] 노대통령 "난감하고 할말 없게 됐다"
⊙ [9월13일] 문화계 유력인사 집서 '신정아 누드' 사진 발견
-조선일보 9월 15일 인터넷 기사-
이런 일련의 국가적인 추문은 다시 신정아씨가 동국대에 임용되기 사흘전 동국대 땅의 용도변경을 승인해 주었다는 보도를 산출한다.
※ 신정아 교수 임용 사흘전 동국대 땅 용도변경 승인
교육부, 일산 6개 필지 교육용서 수익용 전환
- 변씨 ‘개입’ 가능성…김진표 前장관 “나와 무관”
신정아씨의 동국대 교수 임용 사흘 전인 2005년 8월 말 동국대 소유 경기도 일산 땅 1만1448㎡를 교육부가 교육용에서 수익용으로 변경해준 것으로 드러났다.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홍기삼 전 총장에게 신씨의 교수 임용을 부탁했으며, 당시 교육부장관이 변전실장과 알고 지낸 김진표 대통합민주신당 정책위의장인 점 등으로 미뤄 용도변경에 변전실장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었다. (경향신문 2007년 9월 15일 기사)
한나라당은 이 사건을 변양균 청와대 비서실장의 개인적인 비리로 치부하는 것은 반대하고 거대한 권력형 부정 사건, 즉 소위 게이트 사건으로 규정하고 특검은 물론 국조권 발동까지 고려하였다. 소문에 의하면 당시 이해찬 전 국무총리와 노무현 대통령까지 이번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도덕적 문제와 그 파장은 일반 언론에서 이미 자세히 보도되었었다.
신정아의 애인인 변양균 실장과 노무현 대통령은 사건의 초기에 이런 이야기를 완전히 지어낸 언론의 허구로 몰아치면서 법적인 대응을 불사하겠다고 언론을 협박했다. 그러나 그후 그들의 강변이 허구이며 적반하장임이 드러났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신정아-변양균 사건에 대해서 "난감하고 할말 없게 됐다" 라고 잘못을 실토했었다.
변실장은 곧 구속되었다. 그는 한 여자를 돕기 위하여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고 공직자의 책임과 의무를 위반했다는 죄책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일이 단순히 변실장 개인의 소행인지 아니면 게이트 사건인지는 곧 드러났다. 변양균은 구속되고 신정아도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정치인들의 반복되는 거짓말과 말 뒤집기는 정말 한없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사건은 또한 정경유착의 양상을 보여준다. 신문 기사를 보면 변실장이 개인적으로 신정아씨를 돕기 위해서 기업들을 압박 혹은 권유하여 후원금을 내게하고 또 정부기관에 그림을 사게 만들었다고 한다.
3-5-2. 기회주의자 순응주의를 키우는 한국의 교육환경
필자의 이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결국 교육문제라는 것이다. 즉 신정아씨도 변양균 실장도 노무현 대통령도 모두 잘못된 교육제도와 그로부터 탄생한 불량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양심과 도덕성을 포기한 패륜아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들 누구나 그런 범죄의 굴레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특히 정치인, 고위 공직자들의 경우 더욱 그렇다.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인 이명박씨를 보라. 그가 숱한 고생과 역경을 뚫고 일어선 드라마틱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 역시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부동산 투기와 위장 전입이라는 어두운 세력에서 자유롭지가 못하다.
그러므로 이들 개인들의 문제는 개인들에게만 돌려 질 수 없다. 그들 역시 불합리한 제도와 사회구조의 생산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권력형 비리가 여러 번 발생하였다.
그리고 학벌주의와 패거리주의 등의 집단 이기주의 역시 잘못된 교육, 즉 소외된 교육의 결과이다.
왜 그런지를 한 번 살펴보자.
인간 성장과 발전의 중요한 시기인 학창시절 한국의 청소년들은 타율적인 입시위주의 교육에 영혼이 깊이 상처를 입는다. 하기 싫은 공부를 어린 나이부터 강압적으로 해야 하는 아이들은 극히 이기적이고 타율적인 정신세계를 이루게 된다. 한 마디로 노예적인 정신 구조를 형성한다. 후진국 어디서나 권력형 부정부패가 많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좀 다르게 보인다. 그 차이는 일반 후진국 아니 저개발국에서는 학교와 교육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와 달리 교육 수준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경제력도 세계 10위권에 드는 높은 수준의 경제-사회 수준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정치와 교육은 극히 초보적인 상태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처럼 제도로서의 학교와 졸업자 수는 많지만 진정한 교육의 수준은 낮다는 점이다. 즉 교육의 형식과 내용이 불일치하는 점이다. 바로 이런 교육의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에서 신정아와 같은 학력 위조 현상이 발생한다. 학력이 실력은 아닌 데, 사람들은 학력과 실력을 혼동한다. 교육은 실력을 연마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을 실력과 동일시한다. 이런 학력과 능력의 혼동이 나타난 것이 학벌주의이다. 학력이 높으면, 혹은 좋으면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이다. 좋은 대학, 좋은 학과를 나오면 출세하고 안락한 생활을 한다고 국민들은 생각한다. 신정아 역시 학벌주의를 교묘히 악용한다. 그녀는 예일대학교 동문이라는 학연을 이용하여 변양균 실장과 연을 맺었으며 가짜 졸업장을 이용하여 동국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런 배경에는 누구 뒤를 봐 준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학력 위조를 통해서 그녀가 원하던 것을 쟁취했다.
행정고시를 통해서 정부의 고위 관직까지 올라간 변양균씨나 사법고시를 통해서 변호사가 되었던 노무현 대통령 역시 잘못된 교육제도의 결과이다. 행정고시나 사법고시나 할 것 없이 지독한 암기 시험이다. 그런 암기시험에서 수험생들은 판단력과 도덕성을 절대로 배울 수 없다. 이는 미친 듯이 암기만을 하면 된다.
“아이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상처를 주는 이런 입시위주의 경쟁교육의 또 다른 문제는 이런 교육이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일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산출하는 것은 모두 독창성 없는 베끼기나 모조품 등이다. 일류대, 일류학과를 나온 이 사회의 엘리트들이 하는 짓이 도둑질이요 부정부패요, IMF위기인 것이다. <주간 현대 2003년 8월 10일> 자에서 재미(在美) 정치 평론가인 조영환씨는 입시중심의 교육이 어떤 사회적 폐단을 끼치는지를 아래와 같이 신랄하게 비판한다 :
"기존 지식과 정보를 악랄하게 외워야 법대와 의대에 진학하는 교육은 개인 출세의 지름길이 될 지는 몰라도 국가 발전의 방해물이 될 수 있다. 한참 상상력이 높은 학생들을 몇 권의 교과서에 가두는 교육 자체가 곧 망국을 촉진할 수 있다. 입시교육에 필요한 것은 악랄하게 외우는 것이다. 소위 근면과 성실이 입시교육에서 성공하는 길이다. 그러나 근면과 성실은 디지털 시대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학습과정이 인간적 소외와 불신 그리고 인간성의 상실로 이어지는 교육제도, 학교제도가 남아 있는 한 한국의 온갖 사회적 모순, 즉 학벌차별, 지방차별, 정경유착 그리고 부정한 정치자금 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즉 교육에서의 인간소외는 사회적으로 불법, 부정, 비리 등의 이기적인 악덕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위의 <주간 현대>의 글에서 조영환씨는 또 "한국 교육은 학생들의 문제 해결 능력과 창의성을 제대로 키워주지 못한다. 한국 교육은 체제에 안주하는 순응주의자들을 키워내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살인적 암기경쟁에 의존하는 한국의 입시교육은 인간의 창의성과 즉흥성을 제거한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전적으로 필자의 입장과 일치하는 생각이다.
순응주의자(Conformist)들은 결코 기존의 관행이나 습관을 바꾸지 못한다. 이들은 진정 독자적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없다. 항상 그가 속한 집단이나 조직의 지침을 순종하고 특히 권력자나 상급자의 말은 비판 없이 수용한다. 이들에게 양심이나 상식 혹은 각종 윤리적, 도덕적 판단은 한갓 관념적인 유희에 불과할 뿐이다. 이들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다. 이들은 주로 한국의 공무원들이나 회사원들 혹은 교수들에게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순응주의자(Conformist)들과 비슷한 타입의 인간형으로 기회주의자(Opportunist)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 나라의 정치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형이다. 이들에게는 흔히 해바라기니 철새니 하는 수식어를 붙인다. 이들의 행동원리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입장이나 원칙을 바꾼다는 것이다. 즉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일구이언(一口二言)을 밥 먹듯이 하며 말 바꾸기, 식언(食言)하기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선에서 몇 번 실패한 후, 다시는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는 또 출마해서 부활한 김대중 전대통령이나 12대 대선 직전 노무현 진영에서 정몽준 진영으로 날아간 김민석 전의원 등이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김민석 의원은 최근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를 받고 구속영장이 발부됐음에도 불구하고 수사에 응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처음에는 개혁이니 변화니 하고 떠들지만 금방 현실과 타협하고 만다. 가령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 대선 직전에 그는 "반미(反美)면 어떠냐?"라고 호방하게 큰소리치더니 미국의 주한미군 재배치 내지 철수라는 협박을 받고 나서는 당장 친미(親美), 찬미(讚美)로 극적으로 전향했다. 그는 또 집권초기에 친노동(親勞動)성향을 보이더니 후에는 반노동(反勞動)로 전향했다. 그리고 선거 공약으로 재벌 구조 개혁을 외치고는 선거 후에는 경제 불안 때문에 못한다고 오리 발을 내민다.
이처럼 한국 정치인들의 약속파기와 말 바꾸기의 예는 끝이 없다.
그런데 이런 거짓된 정치 현상을 두고 국민들은 정치인들을 싸잡아 욕이나 하고 개탄만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행이었다. 그리고 한참 잊고 있다가 또 정경유착이니 비자금이니 하는 사건이 터지면 다시 한탄하고 '정치인들은 다 썩었어 하면서' 하면서 울분을 터뜨리는 것이 대한민국 사람들의 건망증이었다.
정치인들 스스로 매번 부정부패 없는 깨끗한 선거를 하겠다고 맹서하고 기업가들도 부정한 선거자금 , 정치자금 주지 않겠다고 다짐하건마는 매번 선거 치르고 난 뒤 마다 터져 나오는 엄청난 불법, 부정 금품수수 사건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싫증나게 한다.
이번 사건과 예전의 경우를 보면 노무현 대통령의 말 바꾸기와 측근 두둔 그리고 거짓말은 무척 많다. 이런 인간들을 더 이상 키우지 않으려면 대학 입시를 비롯한 각종 암기식 국가시험을 폐기해야 한다. 그리고 공무원이나 판사 등을 키우고 선발하기 위해서는 독일이나 기타 선진국들의 교육제도를 벤치마킹하여 새로운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최근의 법학 로스쿨제도에 대해서도 별로 기대할 수 없다. 입시나 선발시험이 중요한 변수가 되는 한 어떤 시스템도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3-6. 법조비리와 교육 그리고 평가제도
학벌주의와 맹목적 암기위주의 교육이 산출한 사회적 실패작이 이 나라의 법조인들의 부패와 무능이다. 2006년 발생한 <조관행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법조비리>라는 사건이다. 이런 개별적인 사건보다 법원의 전관예우가 더 보편적인 문제이지만 여기서는 서울고법 부장판사법조비리를 통해서 암기위주의 노예교육의 자초지종이 어떠한지를 살펴보자.
3-6-1. 강제 교육의 피해
필자가 교육평론에 2004년 8월부터 정기적으로 시평을 쓰면서 가장 많이 언급한 문구는 플라톤의 『국가』편에서의 이야기, 즉 ‘교육은 억지로 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24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의 이 문장이 현재 우리 현실에 어찌 그리 잘 맞는지 모른다. 대한민국의 모든 부조리와 사회문제의 근저에는 이 문제가 깔려있다는 게 필자의 소신이다. 물론 현존하는 각국의 교육시스템 중에서 완전한 것도 없고, 또 교육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한다고 해도 인간의 고유한 문제는 개인적/사회적 차원에서 계속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간의 항구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실질적인 문제들은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교육의 문제와 긴밀한 관련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번에 필자가 터치하고 싶은 문제는 바로 최근 불거진 법조비리이다. 이를 필자는 잘못된 교육의 탓으로 본다.
3-6-2. 고위 공무원들의 부정
노무현 정부에서 교육부총리까지 지내다가 결국 사임한 김병준 교수는 대학교수시절 논문을 학술지에 중복게재하는가 하면 연구실적을 부풀려 연구비 지원을 불법적인 방식으로 증대시켰고 심지어 자신의 제자의 논문 자료를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았었다. 이런 것이 학계의 오래된 관행이라고 하면서 김부총리는 사퇴압력에 대해서 시종 억울하다고 불평했다.
이런 교육계의 불미한 일이 약간 잊혀질만 하니까 이제는 사회의 실권을 잡은 법조인들이 대량으로 더러운 과거의 치부를 드러내었다.
이런바 김홍수 법조비리로 불리어지는 법적 지식인들이 대량으로 연루된 부정, 불법 활동이 우리 사회의 큰 이슈의 하나이다. 즉 강남의 한 카펫 장사에 불과한 김홍수라는 사람이 그동안 많은 법조인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법적 사건을 청탁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전직 부장판사, 검사, 변호사 그리고 경찰서장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동아일보 2006년 8월 10일자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수입카펫 판매업자 김홍수(58·수감 중) 씨의 법조계 로비 사건이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고 있다. 조관행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50·구속)가 8일 비공개 구속영장실질심사 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과정에서 다른 판사들의 이번 사건 연루 가능성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다칠 사람' 누가 있나=조 전 부장판사는 영장심사 때 "내가 유죄로 인정되면 OOO, OOO, OOO 판사도 유죄가 되는 것 아니냐", "검찰 수사기록에 내가 다른 판사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돈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판사들을 다 조사해보면 될 것 아니냐"고 말했다.
조 전 부장판사가 언급한 판사는 지방법원 부장판사급 3명. 이 중에는 대법원 재판연구관도 1명 포함돼 있고, 이들은 현재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조 전 부장판사가 다른 판사까지 거론하고 나선 데에는 "왜 나만 문제삼느냐"는 강한 불만이 깔려 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법원과 검찰 관계자들은 9일 조 전 부장판사의 발언에 대해 "억울하다는 점을 강조한 얘기"라며 '폭로'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해석했다.
문제는 조 전 부장판사가 김 씨와 친분을 맺은 기간이 16년이나 되는 데다 김 씨가 아는 판사들은 대부분 조 전 부장판사의 소개로 만났다는 데에 있다.
그렇게 소개한 판사가 몇 명이나 되는지, 김 씨와는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를 조 전 부장판사가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조 전 부장판사의 소개로 김 씨를 알게 된 몇몇 판사는 이후 김 씨와 '직거래'를 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차관급에 해당하는 서울 고등법원의 부장판사가 구속영장을 받고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의 판, 검사들에 대해서 국민들이 품어온 의혹과 불신이 이제 충분히 진실로 드러났다는 것을 말한다. 조관행 전 부장판사에게 걸린 구속영장의 사유를 보면 “김홍수 씨에게서 다른 판사가 맡고 있는 민사신청, 형사, 행정, 민사본안 등 총 4건의 사건이 잘 해결되도록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1억1000여만 원, 전별금 등 명목으로 2200만 원 등 총 1억3200만 원의 금품을 수수” 그리고 2002년 2월경 "'카드깡'을 하다 구속된 사람을 보석으로 석방되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보석 신청서를 담당 재판부에 내도록 가르쳐 줌. 실제로 석방되자 같은 해 5, 6월 7000만 원 상당의 수입가구 2점과 카펫 2장을 받음 등.
그는 법과 정의보다는 불법과 불의를 일삼는 악덕 판사였다. 그러나 그는 유능하고 양심적인 판사로 명망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런 위선자들이 판을 치는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악을 행하고 다시 이를 은폐하는 악독한 거짓말쟁이들이 바로 조판사 같은 사회의 지도자들이다. 단언컨대 한국이 그간의 외형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서민, 민중들의 삶은 그토록 피폐한 이유가 바로 이런 불법을 일삼는 거짓말쟁이들 때문이다.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나라가 한국이다.
이런 지도급 인사들은 자신의 불법행동이 발각되면 항용 하는 말이 자신의 잘못에 대한 시인이나 반성보다는 ‘다들 그러는데 왜 나만 재수 없이 걸려들어 심판을 받나’ 라는 푸념을 뇌까린다. 그들의 몰염치한 정신은 전혀 죄의식이 없고 자신들을 불우한 현행제도의 속죄양, 희생양쯤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이익을 위하는 동안 선량한 피해자들이나 법과 정의를 목말라하는 불쌍한 국민들의 권리를 얼마나 짓밟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병준 총리의 논문 실적 부풀리기와 중복 게재 덕분에 그 권리를 상실한 시간강사나 박사급 연구원들은 쓰라린 고배를 마시고 있었다. 조판사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의로운 재판장이기는커녕 불법을 편들어주고 불의를 조장한 사회의 부패한 곰팡이에 불과하다. 돈이 그토록 필요하면 차라리 사업이나 장사를 하지 왜 그렇게 모두 관직과 권력을 악용하여 치부하는지 모른다. 이게 한국 사회의 후진성을 말하는 지표라고 본다. 한국사회는 이처럼 아직 썩어빠진 지도자급 인간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3-6-3. 고등고시의 문제
고위 공직자들의 과거와 현재의 비리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런 사회 지도자들의 불법, 부정은 단순히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기인한다고 보면 아무런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교육계나 사법부에 자정의 노력을 하라고 언론에서 아무리 떠들어 봤자 ‘중이 제 머리 못 깍는 격으로 현상의 구제의 희망은 별로 없다. 특히 사법부나 입법부의 부정, 부패는 누가 감히 감시하거나 공갈로 겁을 준다고 해도 실효가 별로 없다. 이들 단체가 스스로 자정의 노력을 하도록 바라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사회의 구조적 악(惡)에 대해서 이를 원론적으로 예방하는 하나의 장치가 있다고 본다. 이는 곧 교육의 개혁이다. 잘못된 교육이 잘못된 인간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한국의 실정이다. 입시지옥의 노예교육이 인간을 병들게 하고 지도자들의 도덕성과 명예심을 파괴하는 주적이다.
이런 양상의 법조비리를 잘못된 교육의 탓으로 보는 것은 상당히 일반적인 분석, 즉 모두가 학교는 나왔고 그런 과정에서 도덕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보는 관점이다. 그렇다. 이는 한국의 부실한 도덕교육, 윤리교육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지나친 학과위주의 교육 혹은 입시위주의 교육, 살인적인 암기식 공부가 인간들에게 법과 자유 그리고 독립심을 심어주지 못하고 이기심과 탐욕의 노예가 되는 인간형을 양산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반적인 사실 외에 법조계의 경우 평가제도가 문제를 만든다.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법조인이 되는 관문인 사법고시이다. 필자도 신림동 고시학원에서 행정고시 과목을 강의한 경험이 있고 또 더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거기서 필자는 고시를 비롯한 각종 국가시험의 폐단을 다시금 확실하게 느꼈다. 가령 사법고시의 겨우 수험생들은 각종 법서, 참고서, 문제집, 판례집까지 합하여 수만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내용을 거의 암기해야 한다. 물론 암기문제가 그대로 출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을 몽땅 외우고 있지 않으면 문제를 풀 수 없고 따라서 답을 쓸 수 없다. 그리고 그 많은 양의 법서 내용을 2시간의 시험시간 내에 처리하고 나와야 하는 것이다. 이는 고시가 살아있는 법지식의 활용, 즉 재판이나 판단의 능력이 아니라 거의 암기식 지식의 경쟁에 도취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법의 개념과 법적 사고의 훈련이 아니라 각종 법의 이론과 판례를 외우고 이를 문제풀이에 응용하는 것이 사법고시 공부의 전부이다. 이는 한마디로 미친 짓이다. 그 많은 법과 조문에 걸친 판례는 거의 무한하다고 볼 수 있다. 이들 법적 자료들은 판결의 과정에서 법관이 시간을 내어서 찾고 읽고 거기서 암시를 받고 해당 사건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 참조하면 된다.
독일의 사법고시는 리포트 쓰는 식으로 집으로 문제를 가져와서 2-3주일씩 답안을 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사법시험이 바람직하다. 법의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필요한 법전과 판례 혹은 사례집은 자기 마음대로 찾고 또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사법고시는 그렇지 않다. 한꺼번에 대량으로 실시되는 국가고사는 짧은 시간 내에 아는 것을 모두 써내야 한다. 법전 외에는 어떤 참고서도 볼 수 없다. 따라서 수험생은 문제의 사례에 해당하는 중요한 판례를 거의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 시험 시간에 주어진 문제에 필요한 법이론이나 판례를 기억하고 이를 적용한 사람들은 시험에 붙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떨어진다. 한 마디로 법관이기 전에 암기의 천재가 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법고시에 붙고 떨어지는 것은 요행이라고 본다. 진정 법적 사고와 법적 판단력이 있는 사람을 획일적인 암기시험으로 결코 뽑을 수가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암기력과 판단력 혹은 추리력은 반비례 관계에 있다. 기계적인 능력과 창조적인 능력은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판사뿐만 아니라 검사와 경찰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심심하면 일어나는 자백, 고문 수사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경찰이나 검찰은 형사 콜롬보와 같은 법적 판단력과 추리력 혹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니 복잡한 범죄의 수사의 경우 피의자들을 강압적으로 조종하여 필요한 정보를 얻기를 원한다.
3-6-4. 객체적 지식인의 탄생
한국의 교육 시장에는 교육은 없고 평가만 있다. 이는 대학입시 수능시험나 고등고시나 매 한가지이다. 교육은 지식과 도덕의 두 가지를 포함한다. 그리고 교육은 기성의 이론과 지식의 매개와 전달을 통해서 학생들 하나하나의 실력과 창의성을 키워야 한다. 그러나 대량의 획일적 평가제도는 이를 거부한다. 모두가 똑같은 답을 써야 한다. 정답을 쓰지 못하면 틀린다. 요즘 어떤 기업은 ‘남과 다르지 못하면 죽는다’라는 모토를 사훈으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과 평가는 이를 무시한다. 한국의 교육은 ‘남과 다르면 죽는다’ 를 강조한다. 남과 같은 답, 남과 똑같은 행동을 교육은 요구한다. 그 때의 남은 미드(G. H. Mead)의 이른바 '일반화된 타자(generalized other)'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달리 말해서 교과서이고 참고서이다. 모범답안이다. 이 사회에는 ‘주체적인 나(I)’는 없고 ‘객체적인 나(Me)’만이 존재한다. 이런 객체적인 인간들이 펼치는 행동이 바로 불법과 배임이고, 권력적 부패이다. 왜냐하면 도덕성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요구한다. 도덕은 주체성이다. 도덕은 법칙정립적이다. 스스로 행동의 법칙을 따르려는 충동이다. 그러나 아무런 자각적 책임 없는 수동적 지식인들은 자율법칙보다는 동물적-이기적 충동에 몸을 맡긴다. 고통으로 가득 찬 주체적 결단보다는 환경(環境)과 구조(構造) 혹은 관행(慣行)에 매몰되어 버린다.
객체적 지식인들은 환경과 구조 혹은 관행을 그들의 이기심과 탐욕 혹은 동물적 본능을 행사할 기회로 간주한다. 그들은 니버(R. Niebuhr)의 집단이기주의를 부정한 행동의 변명으로 삼는다. 집단이 이기주의적이기 때문에 개인도 이기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잘못된 결론을 도출한다. 그들이 법과 정의를 부르짖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가소로운 이야기이다. 법과 정의를 불법과 불의를 위한 방편으로 삼는 자들이다. 이게 인류 사회의 가장 더러운 모습이다. 차라리 법과 정의의 치마폭을 떠나 불법과 비리를 일삼는 도둑놈들이나 강도들이 그들 객체적 지식인들보다 백배 낫다. 이들의 예전 이름은 탐관오리이다.
독일의 문학자. 철학자 횔덜린(F. Hölderlin)은 “법의 형식을 띤 불법”에 대해서 말했다. 인간 사회의 최대의 비극은 바로 법의 형식을 띤 불법이 한 사회를 주물럭거리고 있을 때이다. 오늘의 한국이 바로 그런 사회이다. 파출소나 경찰서에 가서 내가 불법을 당했다고 신고해 보라. 아마 관리들은 대부분 신고자나 고발자를 경시하고 불법 자체의 발생을 무시할 것이다.
이상의 사회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필자는 이미 여러 곳에서 발표했다. 이는 간단히 말해서 교육의 개혁이고 좀 더 말한다면 지금 거꾸로 선 교육과 평가의 위치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현재는 평가가 교육을 지배한다. 그러나 원칙은 교육이 평가를 지배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시험이 아니라 교육자가 학습자를 평가해야 한다. 물론 획일적-대량적 시험 방식을 이용할 수는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교육자의 재량 안에서이다. 그런 면에서 현행의 각종 국가고시는 폐지되어야 한다. 사법고시 역시 대학 졸업시험의 일부로 평가절하되어야 한다. 모든 자격시험이나 채용시험은 졸업시험(examination, Examen)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4. 사회 구조적인 질병
소외된 교육은 개인의 영혼을 파괴하여 인간이 그의 존엄성을 잃고 굴종적인 삶을 살도록 강요한다. 교육에서 소외된 아이들과 어른들은 폭력과 범죄의 유혹에 빠져 공동체를 파괴시킨다.
이처럼 소외된 교육은 인간성을 황폐케 할 뿐 아니라 한국의 노예적인 교육이 만족하지 못하는 돈있는 사람들은 자녀들이 조국을 떠나 교육을 받도록 한다. 조기유학과 기러기 아빠라는 희안한 한국적 신드롬이 세계화한 세계에 뉴스를 만들어 간다.
그뿐만 아니라 소외된 교육, 비싼 교육은 사회를 양극화시키고 지역간의 격차를 넓히고 농촌을 피폐하게 한다. 비싼 양육비와 교육비는 출산을 방해하고 사회를 노인들만 가득한 나라로 만들어 간다.
4-1. 학벌주의와 학력과잉 사회
4-1-1. 보수 언론들의 교육위기 상업주의 경계
최근 한국 사회는 학력의 인플레이션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대졸자가 예전의 고졸자들의 직장에도 가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가령 서울시의 환경미화원 뽑는데에도 대학졸업자가 줄을 썼다는 기사 등이 그러하다. 그 외에도 예전의 실업계 고교 졸업자들이 차지해야 할 직장들, 가령 은행의 창구직이나 동사무소의 9급 공무원 직까지 모두 대졸자들이 점령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졸자가 고졸자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얻기 위해 직업훈련학교에 대거 입학해 추가 교육을 받는 웃지 못할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경향의 반영으로 석사나 박사 학위 소지자들은 더욱 직장 구하기가 힘들어진다. 이른바 한국은 학력의 인플레이션과 그에 따른 학력의 가치 절하가 일어나고 있다.
"한국 사회의 ‘학력 과잉(overeducation)’이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지난해 말 현재 석사학위를 가진 취업자 10명 중 9명은 하향 취업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4년제 대졸 취업자 가운데 절반(49.5%)은 고졸 학력만으로도 충분한 업무를 맡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박사 출신 역시 절반에 가까운 44.8%가 하향 취업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
프랑스 파리 1대학에서 8년 만에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박모(37) 씨는 한국 내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 지방 수능학원 강사를 지내다 현재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 학사주점의 경리 겸 웨이터로 일하고 있다. (...)
학력 과잉은 당연히 국력의 낭비와 사회 전반의 비효율을 초래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추산한 2년제 및4년제 대학 졸업 비용은 6700만∼1억2000만 원. 이에 따라 대졸 출신 미취업자를 기준으로 산출한 사회적 비용만도 20조 원이 넘는다는 설명이다. 중앙고용정보원 박천수(朴天洙) 동향분석팀장은 "막무가내식 대학 진학으로 중소기업은 인력난, 대졸자들은 취업난을 겪고 있다"면서 "한국의 인적자원관리 시스템은 ‘학력 과잉의 덫’에 걸려 있다"고 진단했다". (동아일보2005 9.10 일자 기사)
그런데 신문 매스컴에서는 이런 학력 과잉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 미흡하다. 즉무엇이 이렇게 한국인들로 하여금 불필요한 많은 공부를 하게 만들었느냐는 질문와 그에 데한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조선, 동아를 비롯한 보수적인 신문들이 이런 이야기를 재탕 삼탕하여 독자들의 흥미를 붙잡으려고 하는 데에는 그들의 보수적인 교육철학이 뿌리박고 있다. 그들의 기본적인 전제는 평준화및 교육에 대한 국가적-획일적 통제가 그런 요인을 낳고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처방은 각 교육기관들의 자율화 및 통폐합 그리고 명문 엘리트 교육의 도입 등을 노리고 있다. 위의 동아일보 연재물 역시 점점 가면 갈수록 결론은 그런 교육의 시장주의 내지 엘리트주의를 요구할 것이 뻔하다. 이런바 교육 위기 상업주의이다. 예전에는 안보위기 상업주의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면 이제는 학력 저하 내지 고학력 인플레에션 등의 애드벌룬과 국가 경쟁력, 기업경쟁력의 약화로 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대학의 수준 향상을 위한 각종 대학의 자유-자율화 지지와 해외 명문대의 국내 도입 그리고 조기 교육, 교육시장 개방 등의 이슈가 나올 것이 예견되고 있다. 또 나온다, 즉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 일인당 지도 학생수가 8명이니 국립서울대의 경쟁력이 세계 100권이니 등 그들의 레파토리는 상당히 진부한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런 이야기를 듣고 또 듣고 해야 그 스토리의 상투적 결말에 대해 지칠 것인가? 이는 마치 텔레비 드라마의 스토리가 끝업이 반복되어도 보고 또 보고 하는 독자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유사하다.
4-1-2. 학력 인플레이션의 원인
위의 신문 기사의 보고처럼 대학졸업자가 9급공무원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고 박사학위 소지자가 학원 강사 그리고 웨이터 하는 현상은 반드시 나쁘게 볼 필요는 없지만 문제는 학업의 전공과 전문 분야에 관계없이 모두가 공무원 시험 준비에 매달리는 것은 개인적, 사회적으로 분명 손실이며 낭비이다. 즉 일인당 1억 이상의 교육비를 지불하고 그런 공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환경 미화직이나 경리직에 매달린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특히나 박사 학위를 소지한 고급 인력들의 불안정한 직업 현실은 이 나라의 장래와 인재 양성에 큰 손실이 되고 있다. 필자 역시 유학 출신의 시간강사의 한 사람으로서 그 고달픈 현실을 남들과 공유해 왔다. 그러나 개인적인 아픔을 떠나 공적인 차원에서 문제의 현실을 바라보고 그 해결책을 보려해 보아야 한다.
일언지폐지하고 말해서 현재 우리나라의 학력, 전공과 관련없이 무조건 아무데나 취업하려는 현상은 학벌주의 때문이다. 즉 공부하면 출세한다, 좋은 대학가면 그만큼 더 출세한다. 라는 맹목적인 학벌주의가 이런 대규모의 "학업-직업의 무관련성"을 초래한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학력과잉이라기 보다는 "학업-직업의 무관련성"이라고 개념을 분명히 잡아야 한다.
학벌주의, 그것은 "공부하면 출세한다"라는 유교적 문치주의 전통과 학력의 서열화, 시장화라는 미국식 교육자본주의가 결합한 한국적, 일본적 사회병리이다.
위의 신문 기사에서 말하는 "막무가내식 대학 진학"을 야기한 원인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대학 못가면 인간취급 못받는다는 학벌주의이다. 왜 우리는 "좋은 대학 = 좋은 인간 = 좋은 사회적 대우" 라는 맹목적 공식을 맹목적으로 신봉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한국인들의 절대적 신화이며 신앙이다. 그들의 유일한 종교가 바로 학벌주의이다. 기독교든, 불교든, 유교든 혹은 무속신앙이든 모두가 공통되는 것은 바로 그 믿음, 그 공식이다. 북한에 "유일사상"이란 것이 있다면 남한에는 "유일 교육"이란 것이 있다. 북한 사람들 역시 대놓고 말을 안해서 그렇지 학벌주의에는 남한사람들과 막상막하일 것이다. 학벌주의 그것은 이미 한국인의 유전자의 한 염기서열을 구성하고 있다.
이런 절대 종교적 학벌 앞에는 인간성이니, 개성이니 주체성 혹은 인격과 양심, 도덕성 등은 아무런 역할을 못한다. 인간이 죽고 학벌만이 전면에서 인간을 지배할 때, 그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하나 분명한 것은 학벌주의의 유전인자는 환경에 부적합하여 그만큼 생존에 불리한 치명적인 결함을 자체에 품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은 크게 봐서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으로 나눌 수 있다. 사회교육은 문자 그대로 회사나 직장 등에서 현장과 실무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교육을 말한다. 한국은 전자보다 후자가 낫다. 그래서 이만큼 경제적 부흥을 이룩한 것이다. 그래서 대학이 그렇게 무능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해도 삼성이니 하는 대기업들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얻은 것이다.
4-1-3. 대책
이는 우선 미국식의 단선적 학교제도를 지양하고 독일식 혹은 핀란드식의 복선적 학교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선적 학제는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학제라는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대학이전의 모든 교육단계를 대학에 가기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실업고등학교가 정립이 안되어 있고 우리나라 역시 실업고학교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모두 대학에 진학을 해야 대접을 받는 이른바 '학력과잉' 현상이 등장하고 있다.
상급학교가 하급학교를 통제하는 지배적인 교육시스템이다. 이런 제도 하에서는 무조건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인식이 그렇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급학교졸업 = 높은 보수" 라는 등식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제도는 가진자들이나 유한 계급에게 극히 유리한 제도이다. 다시 말해서 시장의 강자가 교육의 강자를 산출하는 시스템이다. 미국 교육이 앞세우는 무한 경쟁의 논리의 비극적인 결론을 우리는 최근 미국 남부의 대홍수의 참사에서 잘 목도한 바 있다. 거기서 교육받지 못한 흑인들은 이등 국민 아니 삼등 국민들이었다. 그런데 조지 부시 대통령의 어머니는 - 아버지 부시의 부인- 홍수로 집을 잃고 대피수용소에 피난 온 사람들을 보고 " 그들은 자기가 살던 곳보다 더 좋은 곳에 머무른다"라고 칭찬 혹은 비아냥거림을 했다고 한다. 물론 그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는 것은 미국 상류층의 하류층에 대한 인식의 구조이다.
경쟁의 논리를 절대화하면 사회는 결국 중세적 계급사회, 노예사회로 타락한다. 그런데 이를 모르고 교육의 무한 경쟁 운운 하는 한국의 일부 몰지각한 친미 절대적 인사들은 자신의 성장과 교육의 기반을 잃어버린 것이다. 부자들이나 기득권층이 그런 말을 한다면 이해를 하지만 자신도 서민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이런 무한 경쟁과 시장지상주의 교육관에 물든 것을 보면 결국 언론과 신문들의 경향이 얼마나 인민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지를 알 수 있다.
미국이 그런 고급학력-고등교육 지향적인 체제를 가지고도 그럭저럭 잘해나가는 이유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자유주의적인 사회풍조와 다민족적 문화구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 여기는 단일민족이고 역사가 유구하며 인구는 많고 좁은 국토에서 바둥거리며 살고 있다. 한국에는 미국의 흑인들이 없다. 그런데 미국식의 - 그들은 이를 가장 민주주의적 교육방식이라고 자랑한다- 단선제 학교제도, 즉 고등교육이 하급교육을 지배하는 구조에서는 흑인이 탄생하게 마련이다, 단 피부의 흑인이 아니라 학벌의 흑인, 학벌 나쁘고 가난한 사람이 바로 흑인이다.
상급학교의 하급학교 지배란 다시 말해서 입시위주의 교육을 말한다. 초,중,고 등의 모든 교육과 학습은 오직 하나 , 즉 명문대 입학을 목표로 한다. 이는 강남지역에서 초등학생부터 서울대 준비 통합형 논술 학원에 다니는 것을 보면 된다.
한국의 교육은 이처럼 미국식의 단선적 학교제도인데 이는 교육기관들 간의 수직적 통합과 수평적 서열화를 그 중요한 특징으로 한다.
이에 비해서 복선적, 다원적 학제는 교육의 단계들의 상대적 자율성과 독자성을 그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해 초등교육은 초등교육대로 그 고유한 목적과 기능이 있고 중등교육은 그 또래의 아이들의 성장 단계에 따른 고유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초등학교가 중등학교에 잘 들어가지 위한 수단이 되면 안되고 또 고등학교가 대학에 가기 위한 수단이 되면 안 된다. 인생의 각 단계는 모두 각각 중요하며 그 시절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지금 대학생들이나 어른 들에게 자신의 성장과정을 기억해보라고 하면 거의 대동소이하다. 학교, 학원, 그리고 시험 등이 거의 전부이다. 특이한 추억이나 인상적인 일들은 거의 없다. 이는 필자가 직접 많은 대학생들에게 그들의 성장과정과 교육과정을 기억해서 써 보라고 하였더니 그러했다.
이런 단순한 성장의 과정은 보수신문들과 이에 부응하는 교육시장주의자들이 말하는 국가 경쟁을 위해서도 대단히 해롭다. 왜냐하면 이는 다양성과 창의성이 없기 때문이다.
4-2. 고령화, 저출산 그리고 교육비
4-2-1. 고령화는 국운(國運)의 쇠퇴(衰退)를 말한다.
최근 언론의 초점이 되고 있는 문제의 하나가 고령사회와 저출산의 문제이다. 이는 언론뿐만 아니라 이제는 정부 여당의 긴급한 아젠다로서 설정되어 있다.
한 때 인구과잉을 줄이기 위해서 전국민적으로 가족계획을 강요하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온갖 혜택을 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 정반대로 출산 장려책을 쓰지 않으면 나라가 금방 휘청거릴 것같이 급박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국가의 정책을 근시안적으로 설정하고 조령모개식으로 뜯어 고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 사회가 늙어 간다는 경고음은 종종 울렸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책은 없었다.
우리 나라 여자 평균 수명이 80세를 돌파했다고 하나 노인 복지나 노인의 경제활동은 극히 미미한 편이다. 이처럼 고령인구의 증가는 일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일하지 않는 사람을 부양할 사회적 비용이 늘어 간다는 두 가지 부담 요인을 함축한다.
“통계청이 1일 발표한 고령자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고령화 속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단연 1위에 올라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 2000년 65세 이상 인구가 총인구의 7%를 넘어서면서 이미 '고령화사회(Aging Society)'에 진입했으며 오는 2019년에는 14%를 넘어 '고령사회(Aged Society)'가 될 전망이다. 또 7년 뒤인 2026년에는 노인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Super-aged Society)'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중앙일보 10월 1일 기사)
이런 고령화의 원인은 의료기술의 발달과 편리하고 복된 생활로 인한 인간수명 연장과 더불어 지속적인 출산률 저하로 인해서 어린이들의 수가 작기 때문이다. 지역에 따라 사망률이 출산률의 두 세배에 달한다고 한다. 즉 “태어나는 아기는 하루에 평균 한 명꼴이지만, 사망은 두 명꼴이에요”(조선 9.23)라는 슬픈 보고가 여기저기서 언급되고 있으며 신생아가 줄면서 그 지역 병원의 산부인과가 폐과(廢科)되고, 그 반대로 장례식장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한 사회의 노령화 혹은 출산 저하와 인구 감소가 결국 그 사회의 쇠망(衰亡)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짚어주고 있다. 따라서 이제 아이를 안 낳는 사회풍조를 그냥 바라보면서 출산 문제를 개인의 결정에 맡길 수는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출산 기피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탐구해 보고자 한다.
4-2-2. 출산은 애국이다 - 외국의 경우
2003년 우리나라의 출산률이 1.19이며 이는 일본의 1.32, 미국의 2.01보다 낮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6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이에 비해 65세 이상인 노인인구는 8.7%이며 농촌의 30개 시군구가 이미 노인 인구 비율이 20%를 넘어선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다. 작년 태어난 아이는 49만 3500명으로 1970년 통계청이 인구 통계를 낸 후 사상 최저를 기록했다고 한다.
한국의 출산률이 1.19라는 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사실이다. 왜냐면 이는 가임여성(15-49) 한명이 평생 낳는 아이 수를 말하기 때문이다. 출산률이 외환 위기 이전에는 그래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을 유지했는데 외환 위기 직후인 99년부터 급격히 곤두박질 쳤다. 83년까지 출산률이 2.1명 이상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근 결혼하는 부부의 출산률이 얼마나 저조한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평균적으로 한 명 이하의 아이를 낳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왜 여성들이 아이를 낳기를 기피하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대부분 알고 있다. 육아시설, 출산휴가, 양육 수당 등이 턱없이 미미하다는 점이 우선 거론될 수 있다. 이는 이미 다른 신문 기사나 매스컴에서 자주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 특별히 더 말할 것이 별로 없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경우 여성은 아이만 낳으면 국가가 다 키워주는 제도를 구비하여 출산률을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의 육아 장려금 및 각종 보조금의 실태를 상세히 다루기는 어렵고 단적으로 말해 아이 하나를 낳으면 모두 합하여 거의 100만원 이상의 보조금이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의 독일 유학시절 만난 한 프랑스 대학생 부부의 예를 들어서 유럽 국가들의 출산 및 육아 장려 실태를 묘사하고 싶다. 사비네라는 여학생은 필자의 아내의 친구였는데 프랑스에서 독일로 유학을 와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언어 과정(language course)에서 서로 만났고 필자는 아내를 통해 그녀를 알게 되었었다 - 필자의 아내 역시 독일에서 공부(노인학)를 했다-. 사비네는 그 당시 4살 먹은 딸이 있었는데 결혼을 하지 않고 낳은 아이였다. 그러면 그녀는 미혼모인 셈인데 한국에서와는 달리 전혀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당당함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재미있는 것은 그 애의 아버지가 있었고 그는 사비네에게 결혼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데 오히려 여자가 결혼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거기서 필자는 프랑스의 출산 정책의 편린을 엿볼 수 있었다. 즉 애의 아버지가 있건 없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임신하는 사람은 애국자이다’라는 인상을 주었다. 이렇게 출산과 탄생을 국가에서 축하하고 책임을 져주니 거기서는 한국에서와 같은 야만적인 현상, 예를 들면 가난이나 질병으로 인해 아이를 버리거나, 아이를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비인간적인 일이 유럽에서 발생할 수 없었다. 미혼모나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수치 현상이 거기서는 없다. 그리고 버려진 아이와 고아란 유럽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어린 생명이 그렇게 귀하게 여겨지는 사회는 인간적이며 도덕적인 사회이다. 이런 점에서 보아 경제 세계 11위국인 대한민국의 민도와 양식은 아직 한참 밑바닥을 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얼마 전까지 고아수출 세계 1위라는 치욕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아직도 한국고아의 해외입양은 별로 줄지 않고 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출산 및 육아 장려의 풍조에서 오는 다른 귀결은 출산을 경제문제의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독일 같은 경우 외국인이나 유학생들에게도 출산 보조금과 양육비를 지급했었다 - 지금은 이것이 중단되었음 - . 그래서 독일에서 공부하는 가난한 한국인 유학생 부부는 형편이 어려울 때마다 아이를 하나씩 낳아 재정문제를 타개했다는 우스운 사실도 있었다.
4-2-3. 아이 낳고 양육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권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육아에 대한 정부의 도움이 없기 때문에 출산을 기피한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는 해도 그 보다 더 큰 저출산의 이유는 아이를 잘 교육시킬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즉 잠깐 낳을 때 드는 비용보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드는 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출산을 억제하는 부인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만의 특수상황도 가세한다. 엄청난 사교육비 부담이다. 저출산의 최대 원인으로까지 꼽힌다. 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자녀 한명의 고3때까지 교육비는 약6200만원에 이른다. 전국 평균이 그렇다면 대도시는 1억원을 훌쩍 넘을 것이다. 이런 수치 앞에 정부 지원금 8만원은 너무 초라해 보인다. 도저히 감당해낼 자신이 없는 교육비 탓에 첫애는 부득불 낳더라도 둘째부터는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문화일보 10.4)
이런 사회 풍조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요즘은 아이 많이 낳는 것이 예전처럼 가난한 가정의 특징이 아니라 그 반대로 부유한 가정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즉 예전에는 ‘가난한 집에 아이가 많다’는 속담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산(多産)은 부자들의 사치(luxury)’라고 한다. 필자가 이 말을 한국에서 들었을 때, 상당히 놀랐던 것이 독일에서도 이런 문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가난한 사람들은 아이 가지기를 포기해야 하는 시점에 왔다. 서민적인 신혼부부는 애 낳기를 하나로 한정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나 혹은 영(零) 이것이 외환위기 이후 결혼하는 서민 부부들이 현실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자녀의 수(數)이다. 위의 신문기사처럼 자녀 한명의 고3때까지의 교육비가 평균 6200만원이라면 누가 감히 아이 낳기를 쉽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직업이나 취미 생활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아기를 갖지 않는 사람들이 서구에는 많이 있다. 우리 나라 역시 여성의 권리의식과 개성의 신장에 따라 출산을 결혼 생활의 필수로 보지 않는 여성들이 더러 있었다. 이처럼 개인의 가치관이나 주관적인 이유로 해서 아이를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개인의 자유의 영역이고 따라서 거기에 아무런 비탄이나 불만이 생길 수는 없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자식 가지는 것이 구속을 받는다면 그것만큼 비참한 일도 없다. 이는 자유가 아니라 필연이며 억압이고 불만이다. 이는 인간의 동물적 본능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모든 동물들은 번식을 위해 존재한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자기 모순이다. 비록 예전처럼 자녀가 직접적인 노후대책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후손은 사람들의 노후보장이다. 즉 힘없고 병든 노인들은 자립할 수가 없다. 설령 재산이 많은 노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어떻게든 노인들은 젊은 사람들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하물며 가난한 노인들은 말할 나위가 없다. 즉 인간은 유적존재(類 的存在, Gattungswesen)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은 사회와 역사 속에서 고유한 활동을 영위한다. 인간의 유아시절이 긴만큼 노인시절도 길다. 이것이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서 우월한 이유이다. 그런데 자손을 낳지 않거나 혹은 외적인, 필연적인 이유로 적게 낳아야 한다면 이는 인간성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기 개발이나 직업이나 혹은 개성을 이유로 아이를 갖지 않는 사람도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수업시간에 종종 “결혼해서 아이 낳고 키우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취미생활이다”라고 강조한다. 필자는 대학시절까지 남들이 하는 취미생활이란 모조리 다 해봤다. 그러나 결혼 생활15년에 그 취미생활은 거의 포기해야 했다. 아내와 더불어 같이 애들 키우느라고 바빠서 낚시나 테니스 혹은 영화도 즐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아이들을 키우고 그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무상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인간의 기본권에 넣어 주어야 한다. 물론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고 경제적 배려 때문에 아이 낳는 것을 억제하거나 스스로 금지해야 한다면 이는 인간의 기본권 유린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는 마땅히 서민들이 아이 낳고 키우는 데에 방해가 되는 원인을 소멸시켜주어야 한다. 국가의 존립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국가 역시 국민의 세대적인 삶이 축소되고 억압되면 국가는 결국 쇠망하게 된다. 하여간 아이를 낳지 않아 출산이 줄어드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것이며 자기 발등을 찍는 것이다.
4-2-4. 교육비 부담 - 저출산의 근본원인
위의 신문기사와 같이 한국의 특수한 사정은 지나친 사교육비용 때문에 젊은 부부들이 아이 낳는 것을 극도로 자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번영과 개인의 복리를 위해서 우리는 이제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사교육을 완전히 철폐시키고 공교육비도 완전히 폐지시켜 국민들의 교육비 지출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 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독일을 비롯한 서구 복지국가에서 행하는 교육제도이다. 덧붙여 지나친 사교육비의 근원이 되는 학벌제도와 대학서열을 완전히 뿌리뽑기 위해서는 전 대학과 교육기관을 공영화시켜야 한다. 설령 민간이 학교를 설립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국가의 감시와 감독 하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대학입시 수능시험의 폐지에 대해서는 필자가 평소에 강조했으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혹자는 미국 대학의 눈부신 발전을 보면서 (대학)교육의 민영화와 시장주의를 찬양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미국 대학의 영광은 실은 그 경제력에 기인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수구 신문들이나 한국 유명 사립대학들이 그토록 선망하고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미국 명문대학들의 경우 그 대학 재산이 기하학적인 액수라는 사실이다. 가령 하버드 대학의 경우 그 대학 재산(assets) 이 무려 20조 이상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한국의 전 대학을 다 팔아도 살 수 없는 액수이다. 만약 한국의 대학운영자에게 그만한 돈을 주면 그는 하버드만한 대학 아니 그 이상의 대학도 만들 수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우리에게 그만한 경제적, 재정적 능력과 여유가 없다면 미국식 대학을 우리의 이상으로 그리면 안 된다.
“세계 최고 부자 대학인 미국 하버드대에 대한 기부금과 기부금 투자수익 등을 합한 기부기금 누적총액이 200억달러(22조원)를 돌파했다. 이는 올해 우리나라 국방예산(19조원)보다 약 3조원 많으며 서울대(올 예산 3938억원) 규모의 대학 55개를 1년간 운영하고도 남는 수준이다”. (조선 9.15)
|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모델을 잘 골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