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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비밀(2)
엡 3:1-13
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 설 교 >
복음으로 말미암은 상속자
창세기 15:3-5(P.17),에베소서 3:5-7(P.312) / 이성희 목사
서 론
랍비 조셉 텔르슈킨의 ‘유대인의 상속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오늘날까지 유대인을 생존시켜 온 두 가지 요소를 꼽으라면 하나는 물질적 자산이고 또 하나는 정신적 유산이다. 그중 한 가지만 꼽으라면 그것은 당연히 정신적 유산이 될 것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물질적 자산은 시대나 환경에 따라 쉽게 잃거나 강탈당하곤 했지만 정신적 유산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빼앗길 염려 없이 그들의 머릿속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완전한 소유물이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은 정신적 상속, 특히 신앙적 유산과 상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독특한 민족입니다.
상속(권)이란 일정한 친족관계에 있는 사람 사이에서 한쪽이 죽었을 때 다른 한쪽이 호주권이나 재산에 관한 권리와 의무 일체를 이어받는 것을 말합니다. 상속은 어느 시대나 가족사의 아주 중요한 일로 여겨져 왔습니다. 상속에 대한 전통과 관념은 현대뿐만 아니라 고대에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에는 상속권 혹은 장자권을 아주 중요하고 특이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장자권이란 정해진 몫의 두 배를 받을 수 있는 장자에게 주어진 권리를 말합니다. 성경에는 먼저 태어난 형이 아니라 동생이 장자권을 갖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의 쌍둥이 아들 가운데 먼저 태어난 에서가 아니라 동생인 야곱이 장자권을 가지고, 야곱의 큰 아들 르우벤이 아니라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이 장자권을 가집니다. 역대상 5:1에는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상속이란 장자이기 때문에 얻는 권리가 아닙니다. 성경은 먼저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영적인 계승자를 말합니다. 성경의 상속은 물질이 아니라 영혼, 정신, 믿음의 상속과 계승을 강조합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상속권은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옮겨집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어 하나님의 상속권을 계승합니다. 히브리서 12:23에는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라 합니다. 현대 교회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로마서 8:17에는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합니다. 상속은 권리인 동시에 책임입니다. 상속은 기쁨인 동시에 고난입니다.
복음을 받은 자는 상속자가 됩니다. 복음을 받으면 어떻게 상속자가 됩니까?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므로 상속자가 됩니다. 자녀는 상속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상속권이 있습니다. 복음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상속은 양이 풍성하며 질이 엄청납니다. 우리 모두가 상속자의 권리를 누리고, 책임을 잘 수행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은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3:6 상반절에는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라고 합니다. 이전의 율법적 상속자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복음적 상속자는 복음을 믿은 자입니다. 더구나 바울은 복음을 믿은 이방인들까지 상속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입니다.
복음을 믿은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은 상속자가 되는 유일한 범위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상속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상속권이란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자녀는 상속 권리를 요구하지 않아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으면 요구하지 않아도 하나님 나라의 상속권을 얻게 됩니다. 상속권이란 자녀에게는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위대함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참 좋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0에는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육이 아니라 영으로 받는 나라입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힘이 아니라 복음으로 상속 받는 나라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위대합니다. 복음의 역사는 다양합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미치지 않을 것 같은 이방인에게까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게 하는 능력이 복음에는 있습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져야 하리라는 것은 땅 끝에 있는 이방인까지 다 복음을 받을 수 있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복음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합니다. 로마서 8:1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절대 죄가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4:15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복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갈라디아서 3:26에는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아들이 누리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함께 상속자가 되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슁클레로노마’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자’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통하여 상속자가 된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상속한 ‘유업’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그 유업이란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할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큰 은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낮이 아닌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나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는 따르지 않다가 돌아가신 다음에 나타난 아리마대요셉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기엔 비겁해 보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 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삭개오는 로마의 앞잡이였고, 유대인의 공공의 적인 세리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눈에는 이방인보다 더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영접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게 되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하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왔던 백부장에게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헬라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십니다. 상속에서 제외될 뻔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게 되고 소유하게 됨을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28에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복음은 이방인과 죄인이 다 상속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까지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아멘!
1922년 바티칸에서 공부하던 프랑스 출신의 장 라고스트는 아픈 어머니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어느 해에는 장학금도 받지 못했고, 일자리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동안 뒷장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하게 되었씁니다. “필라조 디 지우스티치아의 주스티치아 궁전에 가서 LJ 14-57 서류를 찾으시오. 위대한 선물을 드리겠소. 저자로부터.” 그가 궁전에 갔을 때에 실제로 그 서류가 존재하였습니다. 그 서류에는 “나는 동물학자인 저자 에밀입니다. 이 책은 나의 인생을 전부 바친 책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 책을 읽어주지 않습니다. 나의 이 책을 다 불에 태워버리고 이 한 권만 남아 있습니다. 나의 책을 끝까지 읽어 주심에 감사드리며 나의 유산을 모두 드립니다.” 에밀은 23만 달러의 돈을 남겨 놓았습니다. 장은 유산상속을 신청하였지만 은행에서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유산상속권을 가지고 있다고 소송을 하였지만 재판에서 친혈육이 아니라는 이유로 패소하였습니다. 장은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자신의 얘기를 다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처녀 때의 이름이 아만다 드 후에브리에였고, 에밀 드 후에브리에의 딸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은행에 가서 친자확인을 한 다음에 상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책 한권이 유산상속을 하게 해준 것입니다. 우리는 한 권의 책 성경으로 위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유산이며, 성경에 기록된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가 위대한 유산입니다.
둘째, 복음의 상속자가 되면 함께 지체가 됩니다.
에베소서 3:6 하반절에는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상속하는 자가 되는 것은 함께 지체가 되는 것이고,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상속자가 되면 하나님의 몸과 피를 나눈 사이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함께 지체가 되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쉿소마’라는 말인데 ‘육체에 함께 하다’는 말입니다. 즉 피를 나눈 사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 교회의 지체가 됨을 의미합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는 말의 ‘약속’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것입니다. 과거에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언약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속함’으로 생명과 구원의 약속에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 종, 사생자와 같은 우리에게 열린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합니다. 복음을 듣지 못할 자, 상속자가 되지 못할 자, 지체가 되지 못할 자, 약속에 참여하지 못할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양자’란 말은 우리에게 큰 용기를 주는 말입니다. 로마서 8:15에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합니다. 친자가 아닌 양자라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권리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양자이지만 하나님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오래 전 뉴스에 보도된 사건입니다. 어떤 돈이 많은 분이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였고 그 아들에게 많은 재산을 상속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상속을 받은 다음 늙은 부모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아들에게 상속하였던 유산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하였지만 패소하였습니다. 양자라도 아들과 같이 상속의 권리를 가지고 있고, 이미 상속한 유산을 반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가 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를 치르는 동안 웬 남자가 나타나 자신이 양자라며 상속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입니다.
남북통일을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북한 재산 포기운동입니다. 분단 이전에 가지고 있던 북한의 재산을 찾겠다고 나서면 다시 피 흘리는 싸움이 벌어질 것입니다. 또한 이미 그런 일이 있었지만 북한의 자녀가 상속자로 나타나 유산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유산을 상속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시대에 닥칠 가장 복잡한 문제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패리스 힐튼은 힐튼호텔의 창설자인 콘래드 힐튼의 증손녀입니다. 그녀의 행적이나 생각이 별나서 엽기적인 모델녀로 통합니다. 그녀는 3억 달러의 유산을 상속 받았습니다. 그런데 흥청망청 돈을 마구 쓰고 허비하여 지금은 한 푼도 안 남았다고 하네요. 돈이 주인을 잘 못 만나면 돈이 달아납니다.
재물의 상속으로 얼마나 자녀를 잘 되게 하겠습니까? 최근에 붉어진 롯데그룹의 형제의 난을 보세요. 추하기 짝이 없고 사람으로서 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돈에는 형도 동생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은 롯데그룹만이 아닙니다. 삼성, 현대, 한진, 두산, 금호, 모두가 경험한 난입니다. 물질 보다 정신 특히 기업정신, 기부정신을 상속했더라면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구미(歐美)에서는 아들이 아니라 능력 있는 자에게 기업을 상속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업은 내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며 국가의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교회의 목회 대물림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생각되어야 합니다.
상속자가 되면 무엇을 상속합니까? 첫째는 함께 지체가 되는 것을 상속합니다. 한 몸이 되고, 한 핏줄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5:4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늙은 엘르에셀이 아니라 독자 이삭이 아브라함의 상속자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에서 난 자가 상속자요 복음의 상속자라면 몸에서 나지 않은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지 않은 자가 있다면 이들이 이단이며 무신론자일 것입니다.
둘째는 약속에 참여하는 것을 상속합니다. 약속이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1:43에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합니다. 육으로 된 상속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얻지 못하고 영으로 된 상속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아들이기에 아버지의 나라에 아무 제재 없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친구와 함께 놀다가 친구의 집에 밤늦게 들어갔는데 문소리에 친구의 아버지가 방에서 나와서 “누구야?” 하고 부릅니다. 친구는 거침없이 “아빠, 저예요”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두말하지 않고 “그래, 어서와” 하고는 방에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를 “그래, 어서와”라고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에 맞아주십니다.
결 론
유대인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재력이나 무력이 아니라 지력과 의지 때문입니다.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유대인들은 지구상에서 일신교,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 하나님께 대한 신앙, 그들의 성경을 대대로 유산으로 상속한 민족입니다.
저는 저의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엄청나게 상속받았습니다. 물질의 상속을 받지 못했지만 신앙의 유산을 받아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믿는 자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물질 보다 정신의 유산을 받았고, 세상의 명예보다 신앙의 유산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신앙의 유산을 잘 물려주는 신앙의 상속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인물이었던 디모데는 바울이 아들이라고 칭한 훌륭한 일꾼이었습니다. 디모데가 훌륭한 일꾼이 된 것은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신앙의 유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서 칭찬받는 자였습니다.
복음은 참 좋은 것입니다. 좋은 복음신앙을 대물림 받으므로 나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감사무지입니다. 상속자는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상속받습니다. 피로 맺은 하나님과의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산으로 가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의 상속자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유람선인가? 구조선인가?
엡 3:1-13 / 양인순 목사
오늘은 성지교회가 창립 30주년이 되는 뜻 깊은 주일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오늘의 모습이 있기까지 많은 성도들의 수고의 땀과 눈물의 기도가 성전에 스며있습니다.
성지교회는 1978년 7월 30일 성산동에 있는 이용일 집사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유신독재 치하에서 민주화의 열망이 뜨거운 시기입니다.
다음 해에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는 역사의 격동기였습니다.
무더위 속에서 총 34명이 모여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대부분이 친지와 친구들로서 다음 주일 겨우 두 가정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때 모여 기도하고 예배드렸던 분들이 가운데 지금 성지교회를 섬기고 있는 분들이 홍석원 장로님 부부, 김무일 장로님 부부, 김정자 권사님입니다.
다음 해인 79년 1월에 <성지교회>로 이름을 정했습니다.
거룩할 성(聖), 뜻 지(志),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 땅에 이루고자 큰 꿈을 품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성산동에서 6개월 동안 열심히 전도한 결과 30여명의 성도로 부흥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신촌역 앞에 위치한 개인주택으로 이전했습니다.
그해 9월에 대치동 은마 아파트 입주 시기에 맞춰 은마 상가로 이전을 했습니다.
당시 은마상가에는 12개의 교회가 세워져 교회 백화점을 방불했다고 합니다.
다른 교회는 대부분 목사님이 목회를 했지만 성지교회는 신학생이 목회를 하는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말씀을 배우고, 밤을 지새워가며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뜨거운 복음전도의 열정으로 소문난 교회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에는 어린이 선교를 목적으로 성지 선교원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집사님들 가운데도 성지 선교원 출신이 있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가졌습니다.
이제 성지 선교원은 지역사회에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하는 좋은 선교원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1983년, 은마상가를 떠나 개포동 이곳에 208평의 상가부지를 구입하여 그해 6월에 착공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믿음으로 극복하여 12월에 가슴벅찬 입당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웠지만 많은 부채로 인해 온갖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84년 11월에 홍석원, 조병재 장로의 장립으로 당회가 구성되어 조직교회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교회의 부채로 인한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온 성도가 단합하여 87년 용천노회 체육대회에서 종합우승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역사적인 해에 우리 성지교회는 감격적인 성전봉헌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89년에는 남선교회 전국연합회로부터 모범적인 구역예배와 지역사회 섬김의 본이 되어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도 성지교회 남선교회와 소그룹이 활성화되어 매주 구역예배를 드리는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990년에는 유년부, 소년부, 중등부, 고등부의 교회학교를 조직하여, 교회학교 부흥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우리는 지금보다는 다음 세대가 더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 교회학교를 위해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1992년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하기 위해 황창선, 김교향 선교사를 인도네시아에 단독 파송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 결과 지금 황창선 선교사는 싱가폴 한인교회의 담임목사로서 동남아 선교의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4년도에는 최루디아 선교사를 미얀마에 파송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최루디아 선교사는 14년째 미얀마에 결혼도 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금번 8월 마지막 주에는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데 성지 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기공예배를 드릴 예정입니다.
1998년은 성지교회 창립 20주년이 되는 해로서 기념비적인 사역이 진행되었습니다.
당시는 IMF 이후 국가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기념교회를 세우는 의미있는 일을 했습니다.
수원 영통지역에 보배로운 교회(류철배 목사)를 창립하여,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이용일 목사님께서 죽전성지교회를 개척하여 한 해에 2개의 교회가 세워지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약 5년 동안 담임목사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온 교우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성지교회는 든든히 자리를 지켰습니다.
2001년 10월 1일, 부족한 제가 성지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가슴 속에 초대교회 공동체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을 주셔서 “사도행전의 비전을 이루는 교회” 라는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한 사역이 에스더 전도대를 발족하여 전도하는 일과 일대일 제자양육을 통해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생명잔치를 통해 지역사회에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전도운동을 펼쳤습니다.
첫 번째 예수생명잔치의 열매가 바로 이종갑 집사입니다.
그 이후로 매년 가을 추수감사주일을 전후로 예수생명잔치가 진행되고 있고, 많은 분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내에 있는 어르신들을 섬기기 위해 효도관광을 시작하여 올해 7번째 어르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특별히 올해는 시각장애를 가진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함으로 더욱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역주민들과 함께하기 위해 가정의 달 5월에 푸른 음악회를 개최하여 6년째 진행하고 있습니다.
2004년부터 젊은이들에게 선교의 비전을 심어주고자 인도네시아 바탐을 중심으로 매년 청년 단기선교 사역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는 알파코스를 도입하여 불신자 전도와 새가족 정착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벌써 9기 수료자를 배출함으로써 교회의 핵심 프로그램으로 정착을 했습니다.
알파코스를 통하여 새가족들이 교회 내에 쉽게 정착을 하고 있고,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알파 소그룹이 형성되어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비전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실행하고 있는 목표가 바로 <삼삼삼 비전>입니다.
삼백명의 헌신된 리더를 세우고, 삼백개의 건강한 소그룹을 통하여, 30명의 사역자를 전 세계에 파송하는 일입니다.
이 사역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력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제자대학 훈련입니다.
일년동안 집중훈련을 통하여 열방을 구원하고 회복하는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리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는 바로 주님의 위대한 명령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대 위임명령은 바로 마태복음 28장 19-2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선교는 크게 동일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와 타 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지역사회를 구원하기 위해서 많은 사역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도대를 통한 전도와 달터마을 섬기기,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우들을 위해 실로암 아이센터 건립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 병원이 세워지면 이 땅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 있는 수많은 분들에게 눈을 뜨게 하는 놀라운 사역이 진행될 것입니다.
그리고 국내 미자립 교회 14곳을 지금 후원하고 있고, 선교기관 10곳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13명의 해외 선교사를 또한 후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방송 ‘날마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통해 방송 선교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3세계에서 온 학생들을 교역자로 청빙하여 훈련을 시킨 후 그 나라에 선교사로 파송하는 새로운 선교모델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결실이 바로 미얀마에 파송한 Mang 선교사입니다.
그리고 후임으로 인도에서 온 Lian 목사를 교육목사로 청빙하여 함께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역들이 바로 여러분들이 정성껏 드리는 선교헌금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작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큰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주장이 아니라 다른 목사님들이나 언론에서 우리 성지교회를 그렇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졌지만 교회하나 개척하지 않은 교회도 많습니다.
창립기념주일 헌금을 지역사회를 섬기기 위해 전액 헌금하는 경우도 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라 우리 성지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든든히 서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우리는 지나온 30년을 돌이켜 보면서 다음 30년을 준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공동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과거의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계속해서 사도행전 29장의 역사를 써내려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성지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오늘은 창립 기념 주일을 맞이하여 건강한 교회 세우기 시리즈 네 번째 시간으로 “유람선인가 구조선인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교회는 유람선이 아닙니다.
옛 어르신들이 여행을 갈 때 유람을 간다고 합니다.
유람은 말 그대로 보고 즐기는 행위를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이 모여서 단지 즐기는 곳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총에 대해서 감사하며 축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충성되이 감당하고 난 후에 이루어지는 뒷풀이입니다.
만약 어떤 일을 할 때 본래 일보다 뒷풀이에 관심을 갖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느 해안가에 자주 배가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이 모금을 해서 인명 구조소를 세웠습니다.
이들의 사랑의 수고와 헌신으로 많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이곳이 점점 소문이 나면서 많은 후원금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화려한 건물을 세우고, 구조대원을 위해서 휴식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명을 구조하는 일보다는 자신들이 모여 교제하고 즐기는 사교장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에는 그곳을 지나는 배들은 침몰하였고, 다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정신을 차린 몇 사람이 이래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이 다시 인명구조소를 세워 처음의 마음으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인명 구조소는 사교클럽처럼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지나는 배들은 침몰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다시 죽게 되었습니다.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인명 구조소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목적은 바로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으로 죽어가는 자들, 세상의 세파에 침몰하여 허우적거리는 자들을 건져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참 진리의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여기서 벗어나면 교회는 자칫 사교클럽처럼 변질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람선을 타고 즐기는 신앙생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비밀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비밀의 경륜은 이방인들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지체가 되게 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고, 지체가 되고, 약속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런 놀라운 신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그 사역을 위해서 주님의 일군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전하는 것이 부족한 자신을 불러주신 주님의 소명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불러주신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곳에 성지교회를 세우신 이유입니다.
아직도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어둠 가운데 방황하고 있는 영적 이방인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성지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만약 구원받은 한 사람이 교회를 세우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면 그 효과는 미미했을 것입니다.
이 교회를 시작하신 이용일 집사님이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혼자 예수님을 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명을 주셔서 성지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지교회를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지교회 출신 목회자만 약 30여명이 됩니다.
이 교회에서 세례 받고, 다른 교회를 섬기는 분들은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불신 영혼들에게 우리가 복음을 전함으로 세례 받는 자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를 통해서 극대화됩니다.
만약 우리 성지교회만을 통해서 복음을 전했다면 지금 이대로의 수준에 머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IMF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보배로운 교회와 죽전성지교회를 설립했습니다.
그 결과 영통지역에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계속해서 교회를 이 땅에 세워 나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세계적인 교회 성장학자인 피터 와그너 박사는 “최고의 전도는 바로 교회를 세우는 것” 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30주년 기념교회로 동탄에 성지교회를 세우려고 합니다.
4년 동안 함께 사역한 이약로 목사님이 파송을 받게 됩니다.
교회에서 1억원을 지원하고, 2년 동안 월 2백만 원씩 약 5천만 원을 지원합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은 창대케 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만 명 모이는 대형교회 하나보다는 1천명이 모이는 10개의 교회가 더 좋다고 믿습니다.
큰 교회는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지만 여러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동네 앞 큰 정자나무의 속은 비어 있습니다.
비바람이 불면 넘어지기 쉽습니다.
큰 한 그루의 나무보다는 작은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룰 때 더 아름답습니다.
우리 성지교회가 앞으로 더 많은 개척교회를 세우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번 동탄 성지교회가 세워질 때 온 성지가족들이 기쁨으로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집이 없던 분이 자기 집을 마련하면 얼마나 기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워지는 교회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다윗에게도 허락지 아니하신 성전을 솔로몬이 짓고 봉헌식을 할 때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역대하 7장 11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고,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에서 하는 모든 기도를 들으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피 값을 주고 세우신 교회에 온 마음을 쏟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기도할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문이 열리고, 축복의 문이 열리는 줄로 믿습니다.
동탄 성지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단순히 교회의 수가 하나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온 땅에 선포하는 겨자씨를 심는 일입니다.
그 나무가 자라면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큰 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지 가족 여러분!
지금부터 열심히 동탄 성지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적극 동참해 주십시오.
8-9월 두 달 동안 개척교회 특별 헌금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여러분이 직접 그 교회에 가셔서 섬기는 일입니다.
장로님 가운데 기도하시다 감동이 오시면 동탄 성지교회를 섬기셔도 좋습니다.
안수집사, 권사님 가운데도 얼마든지 가셔서 섬겨도 좋습니다.
서리집사님들 가운데도 감동이 오시면 개척교회를 섬기십시오.
든든히 서 있는 교회에서 편안하게 신앙생활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영적 소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개척교회에는 너무나 많은 일군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작은 힘이 하나님 보시기에 큰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 교회가 세워질 때 본 교회 교인들이 따라 갈까봐 쉬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개척하는 목사님이 전화를 걸어서 권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사명이 있는 분들은 누구나 가셔셔 섬기십시오.
우리는 축복을 해서 파송할 것입니다.
항존직이 계속 그 교회를 계속 섬기시기 원하면 이명을 해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섬기시다가 본 교회로 돌아오고 싶으시면 얼마든지 돌아오십시오.
언제든지 저희는 환영해서 기쁨으로 맞이하겠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지 한 교회를 큰 교회로 만드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까?
바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입니다.
주님의 기쁨은 바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주님 품으로 돌아올 때 주님은 기뻐 춤을 추십니다.
주님을 춤추게 하는 교회가 바로 건강한 교회입니다.
우리 성지교회는 더 이상 여행객을 태우고 관광하는 유람선이 아닙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구원선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생명을 살리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창립 30주년을 맞이한 우리 성지교회가 다음 30년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힘차게 생명을 살리기 위한 영혼의 닻을 올리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 생명을 살리는 구원선에 올라 복음의 그물을 던져서 지역을 살리고, 민족을 살리고, 열방을 구원하는 어부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위대한 명령에 위대한 순종은 위대한 교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교회, 주님을 춤추게 하는 교회, 주님의 마음에 기억되는 건강한 교회로, 성도로 거듭나는 결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고통과 은혜의 이중주
에베소서 3장 7-13절 / 이규헌 목사
성경 안에 흐르는 거대한 두 주제로, 우리 삶에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고통과 은혜입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 삶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이것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두 주제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은혜는 해독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과응보적 법칙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행함에 대한 보상과 처벌의 원리를 예외 없이 적용하고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원리, 잘하면 상을 받고 실수하면 실수한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원리에 아주 익숙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법칙에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욥기를 보면 욥은 너무나도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재산과 자녀들, 건강까지 다 잃는 초특급 재난을 당합니다. 이때 욥의 친구들은 그 고난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욥을 도와주려고 하지만, 욥에게는 아주 아픈 이야기입니다. “욥, 회개해야 돼. 네가 분명히 잘못한 것이 있는 것 같아. 죄 없이 망한 자가 어디 있느냐?” 이것이 인과응보적인 해석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통에 대해서 너무 쉽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 속을 뒤집어 놓는 경우입니다. 그럴 때는 조언을 하기보다 손을 잡고 함께 울어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인과응보적인 법칙에 익숙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고난이 있을 때 노골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지만, 은근히 저 사람에게 무슨 숨은 죄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무엇인가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고통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복잡하고 난해해서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다면체입니다. 한 가지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수많은 고통에 연관됩니다. 태어날 때부터 고통으로 시작됩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찾아올까? 암에 걸리고 싶어서 걸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암이 찾아옵니다. 이것을 해석할 수 있을까요? 유전자의 문제? 형제라고 다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담배를 피우는데도 폐암에 걸리지 않고 잘 삽니다. 교통사고도 그렇습니다. 자동차들이 중앙에 선을 하나 그어놓고 수없이 오고 갑니다. 알고 보면 아찔한 일입니다. 술 먹고 중앙선을 넘어오면 언제든지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운전을 잘하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10여 년 전에 <지선아, 사랑해>로 알려진 이지선 자매도 교차로에 가만히 서 있는데 음주운전을 하던 사람이 일방적으로 박아 전신 55%에 3도 화상을 입고 꽃다운 나이에 온몸이 녹았습니다. 인생이 고통의 한가운데로 들어간 것입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 나와 전혀 상관없이 닥치는 고통의 문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어떤 때는 고통을 해석하려는 것 자체가 잔인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날 때부터 난치병을 앓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100만 명 중의 한 명 정도가 걸리는 병에 걸린 아이를 기르는 부모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예상이나 했을까요? 이 고통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해 이해할 만한 설명이 붙지 않습니다. 욥기서에서 욥이 당하는 진짜 고통은 고통의 이유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매를 맞아도 이유라도 알고 맞아야 하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은 더 깊은 고통으로 몰고 갑니다. 그런 순간에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 살아 계세요?”, “내가 고통을 당할 때 어디에 계셨습니까?”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고통에 대해서 침묵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깊은 곳에 있을 때, 하나님이 고통에 대해서 설명을 하신들 우리가 납득이 될까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자식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는 부모의 아이가 말썽을 피우고 속을 썩이는가 하면, 불신자 가정의 엄마는 날마다 놀러만 다니고 자식이 고 3인지 고 2인지도 모르고 신경을 안 썼는데도 일류대학에 들어가서 장학금을 받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설명이 잘 안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날 동안 고통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류가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인간에게 고통은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 세상은 거대한 고통의 도가니와 같습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고통은 불가피합니다. 고통은 우리를 절망하게 하면서 문제가 지나면 또 하나의 문제가 파도처럼 다가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다루지 못하면 인생이 한순간에 침몰할 수 있습니다. 고통이 폭군처럼 거칠게 몰아치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무릎을 꿇습니다. 욥은 그에게 닥친 고통으로 태어난 것을 저주했습니다.
문제는 고통 자체보다 고통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의 태도입니다. 고통을 바로 다루지 못하면 인생이 침몰하게 됩니다. 고통 때문에 원망과 자학과 저주로 가득 찬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이 고통이 저주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내 인생에 다가오는 축복인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이 더 이상 저주나 불행으로 끝나지 않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을 때가 많지만, 설명 대신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고통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놀라운 것은 그 고통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를 집어삼키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내가 해석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은혜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필립 얀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은혜는 기독교에서만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신학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 서신을 읽다보면 끊임없이 듣게 되는 단어가 바로 ‘은혜’입니다. 바울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8~9절에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와는 상관없이 살았던 자신이 어찌하여 사도가 되었고, 이 복음을 깨닫게 하셨는지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모든 삶의 이유는 그분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세상, 무엇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이 은혜의 원리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만, 그 은혜를 깜빡깜빡 잊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다 보면 “그래도 내가 구원받을만하니까 하나님이 택해주셨지”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저런 인간이 우리 교회에 오면 어떻게 하나. 나 정도는 돼야 예수를 믿지.” 합니다. 구원 얻을 만한 근거를 나에게서 찾습니다. 건강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은 하지만 가만히 보면 자기가 매일 운동을 하기 때문에, 또는 어떤 건강식품이 좋다고 합니다. 은혜가 무색해집니다. 은혜라는 단어를 알긴 하지만 은혜를 깊이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저 인사치레로, 형식적으로 말끝에 붙여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골수에 사무치는 단어가 은혜입니다. 그래서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은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정말 구원받았다는 것은 미스테리입니다. 은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기치 않는 고통으로 인생의 밑바닥을 기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한다면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줄 믿습니다. 설명이 안 되는 고통으로 절망하는 우리에게 설명이 안 되는 은혜가 덮어지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은 고통의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의 크기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은혜 없이 고통만 당하면 진짜 죽습니다. 그러나 고통 자체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고통을 압도하면 고통은 저주가 아닙니다. 은혜 없이 당하는 고통이 저주입니다. 은혜 안에서 고통이 다루어지면 그때부터 고통은 더 이상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 풍성한 세계로 이끄는 비밀이 됩니다. 이 비밀을 아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선아, 사랑해>의 이지선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고난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고난이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비밀이 무엇일까요? 은혜입니다.
인생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한국 역사 속에 수많은 절과 무당, 유교문화로 가득 찼는데 내가 예수를 믿고 이 자리에 앉아 예배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예수를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불교 가정에서 예수를 믿게 되어서 그런지 너무너무 신기합니다. 살아오는 동안 지은 죄가 좀 많습니까? 죄를 다 열거한다면 그 분량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행동이 아니라도 말이나, 생각으로 지은 죄는 얼마나 많을까요? 그 중에 100분의 1이라도 드러난다면 내 가족이라도 용서를 해줄 수 있을까요? 따져보면 벼락 안 맞고 산 것이 다행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따진다면 살아남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것이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왜 이런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밀고 들어왔을까요?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남성다운 에서는 놔두고 교활하고 질이 안 좋은 야곱을 선택하셨을까요?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실까요? 해석이 잘 안 됩니다. 다윗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그렇지, 밧세바 사건을 둘러싼 일들을 보면 그는 재기불능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평가는 ‘내 마음에 합한 자’였고, 그 계보를 통해 메시아가 나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신기하고 이해가 안 됩니다. 베드로를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이지만 사고치고, 배반하고, 도망쳤는데 사도행전에서 기가 막히게 사용됩니다. 요셉은 어릴 적부터 노예로 팔려가서 그 정도의 어려움을 당했다면 심각한 문제아로 자라나 사고를 쳤어도 수없이 쳤을 것입니다. 출세를 했어도 수많은 사람들의 목이 날아가게 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시련과 배신을 당한 사람 같지 않게 부드럽고 반듯합니다. 무엇이 그의 인생에 들어왔기에 고통 속에서도 그런 모습으로 일어설 수 있었을까요? 모세는 모든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죽이는 그 서슬 퍼런 시대에 갈대 상자에 담겨 나일강으로 정처 없이 떠내려가다가 어떻게 바로의 궁에 들어갔고, 왕실의 보호 속에서 그것도 엄마의 젖을 먹으며 자라게 되었을까요? 설명이 안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처럼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 고통에 짓눌려 자학하고 원망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고통을 그대로 두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의 고통을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야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가 알고 있다”고 하신 것은 그 고통이 하나님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고통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아들을 외면하셨습니다. 아들은 외면당하고 홀로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하게 죽으셨습니다. 그 순간에는 버림받은 것이고 그 고통은 해석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침묵은 고통 안에 감추어진 또 다른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더 큰 축복을 위한 일시적인 외면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도 우리가 온전히 다 알 길이 없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그 아들을 매달고 외면하셔야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은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아버지의 고통을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구원의 빛이 새어 나와 우리를 덮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통도 신비이고 은혜도 신비입니다. 알 수 없는 고통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겪는 고통을 다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일방적으로 주셨습니다. 왜 나를 택해주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한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험하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고통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이 좋은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카메라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선포하는 것을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그 선수가 흘렸던 땀과 눈물, 숱한 세월 동안 고통스러운 훈련을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라니 기가 막힙니다. 내가 아무리 피눈물 나는 훈련을 했다 해도 그 메달을 걸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했다는 진심 어린 고백은 은혜가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알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설명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거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내 인생을 붙들고 있기에 내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고통이 다가오겠지만, 그 고통보다 더 큰 은혜가 내 인생을 세우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깨닫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식은 부모의 은혜를 깨닫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진짜 부모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면 부모님은 안 계십니다. 내가 깨달았다고 해도 모르는 것입니다. 어찌 알겠습니까? 한 생애 동안 자식을 위해 가슴을 조아리며 눈물과 땀으로 희생한 부모의 은혜를 자식이 어찌 깨달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까요? 너무 크면 모르는 것입니다. 제 아들이 어릴 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으면, 한 입만 달라고 하면 안 주려고 합니다. 누가 사줬는데, 또 사주고 사줄 것인데 안줍니다. 아이는 자기 손에 있다고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자기의 손에 있는 것이 전부인줄 압니다.
은혜를 깨닫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배은망덕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그 속까지 파고드는 존재 이유를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온 삶으로 깨닫고 있습니다. 맛을 본 사람은 압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는 그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것이 없습니다. 그것보다 더 황홀한 것,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놀랍습니다. 이지선 자매는 사고 후, 10면 만에 <다시 새롭게 지선아 사랑해>를 냈습니다. 그녀는 얼굴과 몸은 일그러졌지만, 자신이 지금 누리는 행복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는 “재처럼 타버린 나에게 하나님께서 화관을 씌워주셨다”고 간증합니다. 바로 은혜의 힘입니다. 고통보다 더 큰 은혜가 그의 인생을 덮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이 나에게 찾아오지 않는 것, 나에게 주어진 고통이 빨리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세상은 아름답게 변합니다.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인생에서 고통의 문제는 힘들고, 아프고, 때로는 죽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고통을 아름답게 바꾸는 위력이 있습니다. 이제 더이상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라고 하지 말고,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다면 축복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의 노력, 능력, 잘남이 아니라, 예기치 않는 순간에 다가와 나의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만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5:28)」
오늘 내가 내 힘으로 인생을 버티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과 재주와 노력, 그런 것들은 한방에 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고통이 난무한 세상 가운데 삽니다. 피해 갈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우리를 절망하고 좌절하게 할 수 있지만, 또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그 고통을 에워싸는 고통과 은혜의 이중주 속에서 우리는 고통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비상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수 있는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는다면 우리는 넉넉히 이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통 속에 혼자 몸부림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로 나오셔서 그 은혜를 누린다면, 고통이 영광이 되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 고통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습니다.
은혜로 됨을 가르쳐 지켜 행학 하라
엡 3:7 / 강성찬 목사
길리기아 다소라는 곳에서 태어나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 중에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한사람으로(행22:25-29),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써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었고 당시의 최고 선생이었던 가말리엘이라는 선생 밑에서 엄격한 유대 율법을 공부하기도 했고(행22:3;빌3:4-6),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그 자리에 있었고(행7:58),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이방인의 사도로써 복음을 땅 끝까지 전했던 사도였으며, 신약성경의 13권을 쓰기도 한 사람은 바울인데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로 사울이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 구했다', '큰자'라는 뜻이며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울은 율법을 철저하게 믿고 따랐던 바리새파 사람으로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인 자신들만 구원을 받을 것으로 믿고 있었기에 유대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은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을 시기하며 미워했으며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이후에는 기독교회를 핍박하는데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사울은 기독교인을 없애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붙들어다가 감옥에 가두고 핍박하기 시작하여,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매 맞고 감옥에 갇혀야 했으며 심지어는 죽기까지 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 기독교인들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잡아오기 위해 대제사장에게 찾아갔습니다. "다메섹에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저에게 그들을 체포해도 된다고 하는 구속영장과 군사를 허락해 주시면 다메섹으로 가서 예수 믿는 자들을 다 붙잡아 가지고 오겠습니다." 사울의 말을 들은 대제사장은 사울이 다메섹에 사는 기독교인들을 붙잡아도 된다고 하는 구속영장과 군사들을 허락해주었습니다. 이에 사울은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나타나더니 사울과 함께한 군사들을 비추는 것이었습니다(행26:13). 그 빛이 얼마나 밝았는지 해보다 더 밝았습니다(행26:13). 사울과 군사들이 땅에 엎드리자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너는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행할 일을 가르쳐 줄 사람이 그곳에 있느니라!" 그 음성은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사울은 정신을 차리고 땅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눈이 비늘 같은 것으로 가려져 있었으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지금가지 자기가 예수님과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던 일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쳤습니다. 사울은 볼 수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온 후 3일간 먹고 마시는 것을 하지 않고 금식을 하면서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며 기도만 했습니다. 그 때에 다메섹 성안에는 아나니아라는 주님의 제자에게 예수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아나니아야! 너는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 사람의 집으로 가거라! 그 집에는 사울이라는 자가 기도하고 있을 터인데 그를 위해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어라!"라고 하시자,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찾아갔다가 혹시 체포당하지나 않을까 걱정괴어 "주님! 사울이라고요? 제가 여러 사람에게 듣기에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믿는 많은 성도들을 가장 괴롭혔던 사람이며 이곳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체포할 수 있는 자격을 대제사장으로부터 받았다고 들었습니다."라고 하자 "아나니아야! 나도 다 알고 있느니라! 그러나 사울은 나의 복음을 다른 나라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일꾼이며 앞으로 내 이름을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해야 할 사람이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므로 아나니아는 즉시 일어나 사울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다메섹의 직가라는 거리의 유다 사람의 집에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도하고 있는 사울에게 "저는 예수님의 제자 아나니아라고 합니다. 당신께서 이곳 다메섹에 오는 길에 나타나셨던 예수님께서 나를 당신에게 보내셔서 당신의 눈을 뜨게 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과 인사를 나눈 후에 사울을 위하여 기도하자 사울의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사울의 눈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사울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후 음식을 먹고 건강을 회복한 사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각 회당을 다니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한 일이었습니다. 사울의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저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며 못살게 굴던 사울 아니야?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까?" 사람들 중에는 사울의 행동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으로 알고 믿는 사람도 있었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롱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박윤선 주석). 그러나 사울은 사람들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더욱 힘을 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못살게 하는데 앞장섰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변화되고 새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만 전하는 큰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일꾼이 된 바울은 자신이 사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소개하면서 그 이유가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기 때문임을 밝히며 자신이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치 못하겠다고 겸손해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모든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음을 진술하면서, 자신이 그와 같이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자신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간증하였습니다. 그러한 자신을 고백하기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모세는 히브리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바로의 궁에서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최고의 영광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동족이 학대를 받는 것을 보고 분에 못 이겨 살인을 저지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치게 됩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이드로의 집에서 살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양떼를 돌보며 평범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이 모세에게 하루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모세가 양떼를 데리고 호렙산에 이르러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애굽으로 내려가 네 동족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라고 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 말씀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온갖 변명을 합니다. 제가 무엇인데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 잘하는 형 아론도 붙여 주시고 능력의 지팡이도 주시는 은혜를 베푸시었습니다.
은혜를 선물이라고 하는데 이는 이미 받은 선물로서의 직분마저도 권리로 여기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그분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역하게 된 일을 ‘특권’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 된 뒤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신적인 은혜의 역사 하나님의 섭리의 은혜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주님이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고 합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막 3:13-19)
초대 교회 일곱 집사도 은혜로 세움 받았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행 6:3-6)
바울은 디모데에게 직분을 얻으려는 일이 선한일을 사모하는 은혜임을 말씀 하였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 3:1-7)
‘일꾼’(디아코노스)은 일꾼(고후 3:6) 하인(요 2:5) 사환(마 22:13) 사역자(롬 13:4;고전 3:5) 섬기는 자(막 9:35)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자(디아코노스)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자들은 그 직분을 통해 자신이 높임을 받거나 섬김을 받으려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다른 이들을 섬기는 종의 자세로 그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평생을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기는 종으로 사셨고 이룰 위해 최후의 순간에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주셨음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런데 일꾼은 입교인 이어야 하는데 입교는 교회에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입교인은 세례교인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입교의 절차는 세례나 입교 예식을 통해서입니다. 세례는 학습 받은 자에게 문답과 서약 후 세례를 베풉니다. 입교예식은 믿는 부모의 자녀에게 만 2세까지 유아 세례를 베풀고 만14세 이상이 되면 분별력이 있다고 보고 입교 문답 후 서약하고 입교예식을 행하게 됩니다.
세례(밥티제인)는 "잠기다"(왕하 5:14, 시 67:23)는 뜻이며 구체적으로는 "물로 씻는다"는 뜻으로 신약에서 사용되었고(막 7:4, 눅 11:38, 딛 3:5) 비유적으로는 "거리에 백성이 쇄도하다", "전신에 충만하다"(마 3:11)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세례란 교회라는 공동체에로의 입문을 의미하며 따라서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하며,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우리 신앙의 성장이며,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칼빈).
세례는 신약의 성도가 구원받은 표지가 되기 때문에(벧전 3:21), 이 증거로써 외적인 물세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아도 회개와 믿음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그 외적 의식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명령이며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위대한 복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세례를 받으셨고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분부하신 후 공생애를 마치셨습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사도 바울에 이르기까지 신약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이 성스러운 예식에 참예했고 제자들에게 가르치며 실천하였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내적 신앙의 외적인 고백이며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자기의 백성 됨을 인 처 주시는 것입니다.
세례는 본질적으로 은혜 언약의 예식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이 눈에 보이는 행위로 표시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집니다. 세례는 영적 진리와 신앙고백의 사실인 외적 형식이 결합하여 일치된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는 본질적으로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는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세 자체가 어떤 실효를 갖는 다기보다는 이것은 단순히 성령의 내적 사역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악을 속죄하고 그리스도에게 결합하는 표징과 인침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을 인치는 것입니다. 교회에 속하여 그리스도께 붙은 자가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마 28:19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심은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제자가 되게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로 삼은 후 혹은 제자 됨과 동시에 세례를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요 4:1)었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와 십자가는 죽음과 동일 시 했음이 분명합니다.(고전 1:13) 세례의 본질이 십자가의 죽음과 직결되어 표현의 일치성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을 합당하게 여기신 것은 고난의 종으로서 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심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세례는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치는 일로 칭의는 죄 사함을 받은 것과 직결됩니다.(롬 4:6-8, 10) 예수는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롬 4:25) 베드로가 죄사함 받을 것을 설교한 것(행 2:38)은 참으로 믿고, 주의 죽으심과 함께 세례를 받으면 그와 함께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성결케 합니다. 세례는 단순히 법정적, 객관적 칭의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적 성결에 이른 것을 인친 것이므로, 반드시 이에 이르도록 각자가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고, 심지어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선언합니다. 성결은 물로 씻듯이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물세례가 성령 세례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옛사람의 죽음과 새로운 생명의 태어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6:3-7)
그러므로 세례증서는 나의 옛사람의 부고장이며 새로운 세계의 시민등록증과 같고,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결혼증서와 같습니다.
세례는 성도가 받을 위대한 복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세례를 받은 분들도 이 놀라운 복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하고 세례를 받으실 분들은 세례의 중요성을 인식하시고 경건 된 마음으로 이 복에 이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교회가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 행하며 일꾼을 세우기 위해 선출하고 세례를 베푸는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은혜를 따르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엡 3:7 / 강성찬 목사
두 소년이 포도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소년이 '포도 맛이 좋지?'하자, 또 다른 소년은 '그렇긴 한데 씨가 너무 많아'라고 신통치 않게 대답하였습니다. 꽃밭을 지나며 첫 번째 소년이 '저 크고 예쁜 빨간 장미 꽃송이 좀 봐!'하고 감탄하자, 같이 가던 다른 소년은 '가시만 잔뜩 있잖아!'하고 불평했습니다. 그 날이 더운 날이어서 청량 음료수를 사려고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꿀꺽꿀꺽 몇 모금 마신 후 두 번째 소년이 불평하기를 '내 병은 벌써 반이 비었네'라고 불평을 하자, 첫 번째 소년은 '내 병은 아직도 반이나 남아 있군'하고 얼른 응수했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부정적인 생각만 하는 소년을 닮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언제나 검은 색 안경을 통해 삶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함에도 불평하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고 고백하는 삶을 살았고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밀레도로부터 항해를 계속하여 고스와 로도 섬을 거쳐 소아시아 남서부의 한 항구인 바다라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타고 온 배는 소아시아 남부 해안을 따라 계속 항해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들 일행은 배를 갈아타기 위해 바다라에 내린 것입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동지중해를 가로질러 곧장 베니게까지 가는 배로 갈아탔습니다.
이 배는 두로에서 정박했는데, 배의 짐을 내려야 했기 때문에 7일 간 머물렀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 일행은 두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나눌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이 타고 온 배의 종착지는 돌레마이였습니다. 바울 일행은 그 곳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가이사랴까지 여행했습니다. 유월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까지 아직은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이사랴에서 여러 날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숙소는 전도자 빌립의 집이었습니다. 빌립은 예루살렘 과부들을 돕는 일곱 집사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가이사랴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로마적인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 정착하여 거의 20년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결혼하지 않은 딸 넷이 있었습니다.
선지자 아가보는 예루살렘이 고향이었으며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내려왔습니다. 그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묶일 것인지를 극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아가보는 바울의 띠를 사용하여 자기의 손발을 묶으면서 바울이 결박당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 예언을 들은 사람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을 것을 각오했다고 말하면서 예루살렘 행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나손의 집에 머문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바울 일행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다음 날 야고보와 교회의 장로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기쁨과 감사로 바울 일행을 영접했습니다. 바울은 야고보와 교회 장로들에게 이방인들 가운데서의 복음 전도에 대한 긴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이 보고를 듣고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때문에 어떤 사건이 발생할 것을 예측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울에게 모세의 율법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서원한 다른 네 사람과 함께 성전에서 결례를 행하라고 권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권하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기로 하고 바울은 다른 네 사람과 함께 서원하고 머리를 깎고 결례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결례의 기간은 7일이었습니다. 그런데 7일째 되는 날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백성을 자극해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폭동은 바울이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갔다는 거짓 비난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비난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었던 것을 본 것 외에는 다른 근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순식간에 유대인들은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바울은 성난 군중에게 맞아 죽게 될 상황에서 때마침 출동한 로마 군에 의해 구출되었습니다. 군인들은 바울을 유대인들에게서 빼앗아 어깨 높이의 층계참으로 데려갔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3년 전에 반란을 일으켰던 애굽인이라 생각하고 결박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신이 길리기아 다소 사람임을 밝히고 군중에게 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폭도가 아닌 것을 확인하자 천부장은 바울에게 군중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바울은 층계 위에 서서 백성들을 조용하게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선지자들의 예언과 형제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결국 이방인 드로비모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갔다는 조작된 죄목으로 체포되어(행21: 27-36) 가이사랴에서 로마에 이르기까지 미결수의 신분으로 수감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감옥 에서 옥중 서신 즉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이었다고 합니다.
(엡 3: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황감한 마음이 듬뿍 묻어나는 말씀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소명은 바울 개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해서 큰 은혜의 경륜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복음 증거를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크신 뜻을 하나님의 계시로 깨달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3,4절; 행9:15).
또한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도 어떻게 전혀 동요하는 빛도 없고,담담하고,담대할 수 있는지를 알게 해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도 바울은 그렇게 옥에 갇혀서도 담담하고 담대한 것입니까? 옥에 갇히고서도 무엇이 그리도 황감한 것입니까?
이 놀라운 은혜의 경륜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만세 전에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에게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하나님이 세우신 구속 사역을 완수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각 사람들에게 이것을 깨우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셨습니다. 그런데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사역 가운데서도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에 바울을 불러 참여시키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의 경륜의 사실에 어찌 바울이 황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 이전에‘사울’은 어떤 자였습니까? 다른 사람의 말을 빌릴 것도 없습니다. 그 자신의 고백을 직접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딤전1:13)으며“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훼방자요,핍박자였습니다. 포행자요”죄인 가운데서도 괴수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무죄하고 거룩한 성도들이 그에 의해 죽음과 고초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그로 인해 신앙을 버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세상 그 어떤 죄가 이보다 크다 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러한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그것도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친히 찾아가 구원하셨습니다.
그 사실만도 얼마나 황감한 일입니까? 그런데 어떻게 하셨다고요?
그러한 그에게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은혜의 경륜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로마 감옥에 갇힌 몸이 되어 있으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담담하고 담대한 아니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황감해하는 바울의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몸이 갇혀 있으면서도 편지를 써서라도 복음 전파의 일을 계속하는 그의 불타는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을 이해할 때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 또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한 거룩한 도구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의 경륜을 따라 도구로 삼으신 것은 사도 바울만이 아닙니다. 또 목회자들만도 아닙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합니까?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성도를 통해 자신의 은혜의 경륜을 이루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통해 자신이 세우신 그 은혜의 경륜이 성취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운 경륜에 따라 도구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분명한 소명 의식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이 찾아온다 한들 못 견뎌 할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큰 고난과 시련이 오고 억울한 일이 닥쳐온다 해도 분통을 터뜨리고 원망으로 날을 지샐 일이 없습니다.
요셉을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그처럼 억울하고 원망스런 일을 아주 많이 그것도 오랫동안 경험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그가 원망합니까? 불평합니까? 아닙니다. 그가 사람을 향해서든지 하나님을 향해서든지 원망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고난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선민의 조상인 야곱 가족을 비롯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또 심히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의 도구가 된 줄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는“하나님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었나이다”(창45:5)라고 한 요셉의 고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에 따라 세워진 도구라는 분명한 소명 의식을 지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에서 찬란히 빛나는 요셉이나 바울과 같이 위대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에 따라 계시로 비밀을 알게 하시므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게 된 복음이 구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엡 3:3-4)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고 받은 복음은 사실상 깊고 오묘한 그리스도에 관한 비밀입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복음이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복음이 비밀이라고 하는 말을 쉽게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알려졌다고 해서 인간 스스로 복음의 진수를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은 인간의 지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지성을 갖고 있고,또 거기에 더하여 종교적인 노력과 열심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 스스로는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복음의 진수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에 찾아온 유대인의 관원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요 3:10)하셨습니다.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아무리 예수님께서 말씀을 들려주셔도 그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스스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무엇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선생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복음을 어린아이들이 깨닫는 역사가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아니 꼭 어린아이가 아니더라도 좋습니다.
당시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지성이나 학식이 높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사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자체가‘학문 없는 범인’(행4:13)에 불과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복음의 진수를 깨달아 알았습니다.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이겠습니까? 복음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깨닫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진수를 깨닫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됨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자신의 그 많은 학문을 통해 깨달았다고 합니까? 아니면 자신의 많은 기도를 통해 깨달았다고 합니까? 아닙니다.‘계시로’알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오시기 무려2천 년 전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에 관해 이렇게 증거 하셨습니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알았고,보았고,믿었고,환영했고,기뻐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일입니까? 지성이나 지능으로 되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계시로만 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것은 동일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만 알 수 있고,깨달을 수 있고,기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복음의 진수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쉽게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간단하게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마치 신비에 깊이 싸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싶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고,보게 하시기에 우리가 알고,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 가운데 깊이 들여다 보고,생각하고,묵상할 때 비로소 거기에 머리가 숙여지고,나의 죄가 보이고,겸손해 지지 않을 수 없고,나의 생을 주 앞에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증거 하기를“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딤전3:16)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비밀을 아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성령의 조명하심이 우리 가운데 임한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우리가 구원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엡 3:6)고 합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똑똑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복음을 듣고 보아도 그 진수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큰 은혜를 입은 것입니까?
물론 우리는 복음을 대하면 그것이 쉽게 이해되고 가슴에 와 닿기 때문에 그것이 은혜 중의 은혜인 줄을 잘 모르거나 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비밀의 복음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복음을 듣고 볼 때 마다,그리고 그것을 이해할때마다 깨닫게 하시고 진리로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따라 계시로 그리스도의 비밀인 복음이 구원임을 깨닫고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일꾼이 되었(엡 3:7)다고 합니다.
우리가 늘 주시하는 것은 언제나 나타난 결과가 많습니다. 바울이 복음의 대적자에서 사도가 된 것만을 보고 그러한 결단과 변모를 보여준 바울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에 대하여‘그의 능력이 역사하는 대로’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복음의 대적자에서 위대한 복음의 일꾼으로 변모하는 과정에는 자신의 지성이나 인격 따위가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신 은혜의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조금도 틀림없고 거짓이 없는 사실입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입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렘 이17:9). 그렇습니다. 세상의 부패한 그 어떤 것보다 더 부패하고 가장 더러운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 15:15-20)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타락과 부패 상태를 인간 스스로 압니까? 모릅니다. 몰라도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누가 능히 알리요 마는.”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부패해 있으면서도 그 부패의 실상을 모릅니다.
현대의 가장 위대한 사회학자나 심리학자에게 가서 물어보면 그들 역시 인간의 부패상 자체를 모릅니다. 그러니 인간 세계 문제의 해결책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일진대 스스로 죄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회개할 수 있습니까?
더 나아가 사람을 살리는 이 거룩한 사역의 일꾼이라고 스스로 자처할 수 있습니까? 어림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대적자의 자리에서 복음의 일꾼이 된 것은 신적인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 귀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귀한 직분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가 된 것은 내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닙니다.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서 일꾼 하나 길러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자신도 많은 노력과 투자를 해야 하지만 사회와 국가적으로도 상당한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투자와 역사로 길러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일꾼된 우리의 뒤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신적인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식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땀과 피와 눈물과 통곡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 된 이 고귀한 직분을 가볍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쉽게 유기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 일꾼 됨의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알았기에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당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고 합니다.
이런 수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도리어 감사하며 여전히 그 직분을 고귀하게 여겼습니다. 가장 존귀하게 생각 했습니다. 그 직분을 위해 자신의 온 생애를 불살랐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일꾼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직분을 고귀하고 거룩하게 생각하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에머슨 파스틱이라는 설교가는 미국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는 데는 4가지 동기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생활 습성이나 관습 때문에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떤 목사님의 설교 때문에 그 설교를 듣기 위하여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교회란 좋은 곳이라 교회에 나가서 활동하면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기 때문에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일시적인 위안을 얻기 위하여 교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동기들은 교회에 나가는 주체적인 동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은혜를 받는 곳입니다. 왜, 그 무엇 때문에 교회에 참석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좋은 일꾼되되 은혜를 따르는 좋은 일꾼되는 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따라 계시로 그리스도의 비밀인 복음이 구원임을 깨달아 알고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르는 좋은 일꾼 되는 모두가 됩시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
엡 3:7-9 / 석원태 목사
미국 맥도엘 항공기 제조회사의 부사장인 월터 버크(Walter F. Burke)는 달나라 여행을 위한 아폴로 계획의 예비단계인 2인승 우주비행의 총책임자였습니다.
그는 어느 주일에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는 중에 인터뷰 요청을 받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기자의 첫 질문은 “우주선 계획을 총 지휘할 위대한 과학자로서 성경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그는, “과학이나 우주개발 계획에 있어서 나에게 성경을 버리도록 하는 어떤 오류나, 내가 믿는 나의 구세주 예수를 부인하게 할만한 것들을 전혀 발견할 수 없소. 그렇기에 나는 그전보다 더 열심히 성경을 읽으며, 내가 과학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 즉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성경에서 얻고 있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성경 속에서 과학이 줄 수 없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과학적 지식 속에서 얻을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생명의 지식, 하나님의 무비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를 얻고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에베소 교회를 향한 바울의 영감 표현 속에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받았다는 말을 보게 됩니다. 그는 이것을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엡 3:2), 「비밀」(엡 3:3), 「복음」(엡 3:6)이라는 말들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Ⅰ. ‘측량할 수 없다’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에베소서 3장 8절에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측량할 수 없는(ajnexicnivaston)’이라고 하는 말은 ‘파악을 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찾아낼 수 없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존재자체나, 존재의 근원이나, 존재의 내용이나, 존재의 의미나 목적, 계획, 경륜을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파악하거나, 이해하거나, 찾아내거나,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의 사상으로나, 사람의 언어로나, 사람의 지식으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사실을 묘사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Ⅱ. 측량할 수 없는 내용이 무엇인가?
1.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통치와 섭리를 다 측량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욥기 5장 9절에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나 천지통치나 천지섭리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편 145편 3절에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서 31장 37절에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아래로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렘 33:22). 사람은 「하나님의 오묘」를 측량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욥 11:7).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전 3:11).
하나님이 창조하신 전 피조세계의 공간과, 그 가운데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의 존재와 기능과 생태와 내용들을 사람은 결코 다 측량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주과학과 유전공학(DNA) 그리고 폭발하고 있는 전자공학들이 제아무리 드높은 만세소리를 부르고 하나님을 도전하여도, 하늘에 계신 자는 웃으십니다. 저희를 비웃으십니다(시 2:4). 결코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그의 통치와 섭리는 여전히 측량할 수 없는 불가해의 풍성 속에 싸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다 측량할 수 없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의 풍성을 측량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3장 8절 중에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풍성」이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죄인된 인류에게 베푸시는 예수 구원의 풍성을 가리킵니다. 그 예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구원은 측량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고린도후서 9장 15절에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1장 33절에는 깊고 부요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측량치 못할 하나님의 판단, 찾지 못할 영원한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말해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에게 베푸신 속죄 은혜, 구속의 은혜, 사죄의 은혜, 영생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 대속의 피, 보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입니다(창 9:4). 히브리서 9장 22절에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인류의 죄 값은 무죄하신 예수의 피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였습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와 관계된 ‘피’라고 하는 말이 700번 이상이나 나오고 있을 정도입니다. 죄 없으신 자의 피 외에는 속죄받을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예수의 피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라는 말입니다.
① 그 피는 구속의 피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에 우리가 구속된 것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② 그 피는 죄와 사망에서 살린 해방의 피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5절에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단 한번의 해방이 영원한 해방으로 풍성해져 버린 것을 가리킵니다.
③ 그 피는 우리의 사죄를 성립시킨 피입니다.
마태복음 26장 28절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였습니다.
④ 그 피는 사죄의 결과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신 피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⑤ 마침내 그 피는 우리를 의롭게 한 피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5장 9절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고 하였습니다.
⑥ 그 피는 우리로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에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고 하였습니다.
⑦ 그 피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⑧ 그 피는 우리로 하여금 거룩케(성화) 하십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에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⑨ 그 피는 우리로 하여금 성소(교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⑩ 그 피가 우리의 최후승리를 보장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7장 14절에서는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함을 받은 자들이 14만 4천인의 무리가 되어 시온산(새 하늘 새 땅)에 서게 됨을 봅니다.
이 예수의 피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본질이요 극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감 속에서, 죄인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은 그 아들의 죽으심인 십자가를 통하여 확증되었다고 하였습니다(롬 5:8). 바로 예수의 피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1,000배 이상의 표현입니다. 모든 행복, 모든 승리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3장 18절 중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3장 19절에는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랑의 넓이를 알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엡 3:19). 여기 ‘사랑의 넓이’란 그리스도의 속죄 사랑이 미치는 모든 민족을 총망라한 말입니다. 전 세계의 아브라함의 자손된 모든 자에게 미치는 사랑의 영향력을 가리킵니다. 사랑의 초공간성, 초혈통성을 가리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에게 미치는 사랑의 폭을 말합니다. 측량 이상의 것입니다(갈 3:28).
그 사랑의 길이를 알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엡 3:19).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시대(時代)에 미침을 가리킵니다. 창세 전에 예정, 창세 후에 구속 그리고 영원한 내세에 이르도록 시간을 초월하여 효력을 발생하는 영원한 사랑, 불변의 사랑을 말합니다. 시간적으로 측량 못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 사랑의 높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엡 3:19). 이는 마치 독수리가 그 날개에 자기 새끼를 업고, 그 어느 짐승의 추종도 불허하는 고공의 세계를 날음과 같습니다. 사망의 지옥에서 교회로,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의 신분과 생명을 영화로운 단계에까지 올리고 마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고상함을 말합니다.
그 사랑의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엡 3:19). 우리는 흔히 높음을 말할 때 산을 연상하고, 깊음을 말할 때 바다의 수심을 생각합니다. 이는 하나님 자기 사랑의 심오함을 말합니다. 잠잠히 하는 사랑, 무궁한 사랑, 전혀 측량이 불가한 은닉된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 십자가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는 결코 측량할 수 없는 무비(無比)임을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놓을 정죄자, 송사자, 대적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롬 8:31-3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날인가, 불과 열네 살짜리 소녀가 명장 나폴레옹의 막사에 나타났습니다. 그 소녀는 장군의 발치에 자기 몸을 던지면서 “폐하,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 아버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나폴레옹은 “네 아버지는 누구이며, 너는 누구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소녀는 “제 이름은 라욜라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눈물을 비오듯이 흘리면서 덧붙여 말하기를 “그런데 폐하, 제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나폴레옹이 대답하기를 “오, 귀여운 소녀여! 나는 너를 위해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구나. 네 아버지가 국가 반역죄를 범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소녀는 “예, 폐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폐하께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탄원하고 있습니다. 오, 폐하! 간구합니다. 제 아버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잠깐 동안 눈을 감고 망설이던 나폴레옹은 그 어린 소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 얘야! 내가 너를 위해서 네 아버지를 용서해 주마. 이제 됐으니 돌아가거라.”
그 소녀는 나폴레옹에게 정의를 요구함이 아니라 ‘용서’를 탄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정의가 아닌 용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죄인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구합니다. 죄인에 대한 사망 선고를 구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죄의 자비를 구합니다. 그것은 예수 자신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에서 속죄 성취를 선언했기 때문입니다(요 19:30).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롬 4:25).
우리는 2001년의 첫 달을 맞이하여 보내고 있습니다. 금년에도 우리에게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필요합니다. 현재보다 1,000배나 많은 은혜와 축복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고후 9:15) 곧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입니다(엡 3:8). 온갖 생명과 형통과 행복의 풍성은 오직 그리스도 자신에게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예수여! 현재보다 1,000배나 많게 하소서!” 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사죄와 용서가 많게 하소서! 믿음과 사랑이 많게 하소서! 은혜와 축복이 많게 하소서! 승리와 감사가 많게 하소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 현재보다 1,000배나 많게 하소서!”
이것만이 2001년을 이기는 축복의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스러운 신분, 성도
엡 3:7-9 / 윤영택 목사
지난 번 런던에서 노회가 열렸을 때 집사직에 대한 주제로 장시간 토론이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서리 집사라는 명칭이 없는데 유독 우리 한국 교회에 서리 집사라는 직분이 있고 또 권사라는 직분도 있습니다. 본래 성경에서 말하는 집사는 안수하여 세운 집사 즉 안수집사를 말합니다. 안수집사는 한 번 그 교회에서 안수하여 집사로 세움을 받으면 항존직으로 그 교회의 집사로 섬기는 반면 서리집사는 임시직으로 매년 임명을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연초에 직분자 임명을 할 때 어쩌다 서리집사 명단에서 누락이 되면 마음에 상처를 받아 교회를 나오지 않거나 아예 다른 교회로 옮겨가버리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서리집사라고 이름하느냐 물으니 좀 불경스럽긴 하지만 어느 분이 우스개 소리로 말하기를, 가을 낙엽이 서리를 맞으면 우수수 떨어지듯 된서리를 한 번 맞으면 언제라도 떨어져 나가는 시한부 집사니까 서리집사라고 하여 한 바탕 웃은 적이 있습니다.
왜 한국교회는 성경에도 없는 서리 집사직을 만들어 집사 직분에 대한 오해를 가지게 하고 또는 그 소중한 의미를 가볍게 만들고 있느냐는 지적을 받곤 합니다. 서리집사라는 이런 독특한 이름이 왜 나왔을까 배경을 생각해보면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의미로서는 일군을 준비시키는 훈련의 단계입니다. ‘서리’(署理)라는 말이 어떤 조직에서 결원이 생겼을 때 그 직무를 대신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니 안수집사가 없는 교회에 서리 집사가 그 직무를 대신하기 위하여 임명될 수 있는 셈입니다. 또는 어떤 분이 아직은 나이도 어리고 예수 믿은 연수도 길지 않아 안수집사로 세우기에는 이르지만 교회의 훌륭한 일군 노릇을 하고 있으니 서리집사로 임명하여 훈련 기간을 거친 다음 언젠가 안수집사로 세우는 준비 과정으로 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좀 궁색한 변명처럼 보입니다만, 교회를 오래 다니는 사람인데 딱히 부를 호칭이 없어서 집사라고 불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기 편하게 너도나도 그냥 집사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경우입니다. 교회 밖에서 사용하는 ‘아저씨, 아줌마’ 보다 훨씬 부르기 좋고, 세상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사장님, 사모님’ 보다 더 거룩해 보이는 호칭이라 교회 안에서 통상 그렇게 부르는 습관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박사님들도 많고 교수님들도 많아 여기저기서 ‘김 박사, 이 박사...’ 부릅니다만 교회 안에서는 그보다 더 좋은 호칭이 ‘김 집사, 이 집사...’ 입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 박사님들, 교수님들 머지 않아 집사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교단에서는 교회 안에 목사, 장로 , 집사 등 직분이 없고 모두가 동등하게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곳도 있습니다. 연세 드신 분을 부를 때 장로님인지 집사님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잘못 부르면 상대방에게 실례가 되어 우물쭈물할 때도 있는데 그 교회에서는 나이가 많든 적든 누구나 형제와 자매이니 어쩌면 부르기도 수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정서에서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부모님 같은 연세 많은 어른을 ‘형제님, 자매님’ 하고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낯설고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승주 형제가 박 장로님을 ‘박현철 형제님’ 하고 부른다면? 대단히 다정할 것 같은데 왠지 어색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교회 출석 1년만 되면 자동적으로 서리집사로 임명하여 집사라고 부르니 한결 편하더랍니다. 결국 편리위주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집사직에 대한 책임의식이 흐려지고 직분의 가치도 소중이 여김을 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집사는 말 그대로 일을 잡은 사람이라는 뜻이니 열심히 봉사하는 일군입니다. 성경 본래의 의미는 수종드는 사람을 가리켜 집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열심히 섬기고 수고하는 일군이 되어야 마땅한데 집사로 임명을 받았지만 이름만 집사일 뿐 아무런 책임도 의무도 못하고 일년을 지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목사와 장로, 집사 등 교회의 직분은 말 그대로 교회의 일군을 부르는 직분명입니다. 그리고 그 직분에 걸맞는 헌신과 봉사를 기대하는 전문적인 일군을 일컬어 부르는 이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직분은 세속적인 계급이 아니고 그 어떤 직분도 가볍게 여기고 아무렇게나 나누어주는 명예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교인들이 자주 오고가는 해외 이민교회에서 일군으로 세우면 금방 떠나곤 하기 때문에 일군을 임명을 할 때 고민을 많이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공식으로 임명은 하지 않았지만 전에 다른 교회에서 집사로 일하시던 분이 오시면 편의상 집사 호칭을 합니다. 금년 우리 교회에 년초에 임명한 열 분의 서리집사님들이 있습니다. 우리 집사님들이 모두 주의 교회에서 맡은바 사명에 성실함으로 섬겨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칭찬듣는 일군들로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운영위원회를 모여 교회의 재정 운영에 대한 보고를 듣고 토의하는데 우선 이런 일부터 앞장을 서보시는 것이 어떨지요?
오늘 아침에 직분에 대한 말씀이 중심 주제가 아닌데 서두가 좀 길어졌습니다. 성경에서 교회의 직분 말고 일반적으로 신자들을 부르는 용어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신약의 서신서들을 기록한 사람들이 교회와 개인에게 편지를 보낼 때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의 주제인 ‘성도’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지만 ‘형제들아’ 라는 호칭을 더 많이 사용합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주로 ‘사랑하는 자들아’ 하였고,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는 말을 사용합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또는 ‘형제들아’를 주로 사용하는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라는 용어를 12회 사용합니다.
구약에서 성도는 택한 백성,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성도란, 혈통적 또는 지리적으로 구별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사도 바울이 주로 사용한 호칭입니다. 바울은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서두에 안부를 전하면서 성도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로마서 1:7) 라는 식입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에베소서에서 성도라는 용어를 아홉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성도란, 거룩한 무리 혹은 구별된 무리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풍성한 영광을 함께 나누는 특별한 무리들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있는 신령한 복을 받는 사람들(엡1:3)이며,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엡1:4-5).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도록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며(엡1:6),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거룩과 사랑의 삶을 살도록 요청을 받는 무리들입니다(엡4:1).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G8 정상들 모임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이 교황을 만나 우리 나라 천주교 초기에 순교한 분들에 대한 시복시성(諡福諡聖)을 청원하였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설명드리면, 조선조 천주교 신유박해(1801년)를 전후하여 순교한 천주교인들을 성인으로 추대해달라고 청원했다는 말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덕행이 뛰어났던 사람이 죽은 후 그 사람을 기리기 위하여 성인으로 추대하는데 성인으로 선포되면 전 세계 천주교 신자들이 공적으로 공경하는 대상이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명예로운 성인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교황청 전례위원회에서 추기경들과 주교들의 엄격한 심의를 거쳐 교황이 최종 결정을 합니다. 이만하면 성인 추대가 대단히 영광스런 일입니다.
물론 천주교가 말하는 성인과 오늘 성경이 말하는 성도는 같은 차원은 아닙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초기 기독교 교회를 세워갈 때 그런 제도를 만든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성인이 될까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성도라 부름을 받았음은 무엇인가요? 교황 어르신이 재가를 해줘야 하나님이 부르신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닐텐데요. 하나님이 우리를 정하여 부르시고 부르신 우리를 또한 의롭다 하시며 의롭다 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셨으니(롬8:30) 이보다 분명하고 또 영광스런 일이 있을까요?
까다로운 교황청 심의도 안 받고 거저 얻은 것처럼 너무 쉽게 성도 호칭을 받으니 이 영광스런 신분이 귀하게 생각되지 않은 것 아닌가요? 박사 학위를 따고, 금뱃지를 얻으며,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것처럼 고된 과정을 통과한 후 얻은 신분은 그 자리를 얻은 사람에게 뿌듯한 성취감도 있고 자긍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수고한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성도 곧 ‘거룩한 무리’ 에 포함되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싱겁게 여겨집니다. 자수성가 하고 모험심과 도전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내가 노력하고 땀흘려 수고하여 얻은 열매를 자랑스러워 합니다. 그렇게 얻어야 내 얼굴이 서고 큰 소리도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거저 주셨다고 하니 별로 매력이 없어보입니다. 거기에 내 공로와 땀이 배어 있지 않으니 남보기에 생색이 나지 않아 성도라는 이 영광스런 신분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바울은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신 은혜의 영광(엡1:6)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고 하였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도라고 부름을 받은 것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그것을 스스로 자랑하지 못합니다. 혹 자랑한다면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자랑할 뿐입니다. 예수 믿고 새롭게 변화된 나의 인생을 돌아보고, 예수 믿고 전혀 달라진 내 삶의 자세를 보고 내 스스로 놀라워 자랑하고픈 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 나를 영 딴 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나의 것처럼 자랑할 수 있는 이것이 성도가 가지는 특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3:8) 하였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부르는 직분명이고, 바울은 사도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성도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성도 아무개이지 목사, 장로, 박사, 회장 아무개 혹은 대통령 아무개가 우선이 아닙니다. 그만큼 성도라는 신분이 영광스럽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처럼 풍성한 은혜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하고 이 영광스런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찬송하자고 권합니다.
본래 흉악한 죄인이었던 자신을 불러 성도의 반열에 서게 하신 것도 감지덕지한데 모든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를 불러 이 놀라운 복음의 비밀을 이방 사람에게 전하는 일군으로 세워주심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감사고백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John Netwon은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이런 찬송이 우리 모두의 감사고백이길 바랍니다.
영어 성경에서 saints는 세상에 알려진 유명한 성인, 성자만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 평범한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영광스런 이름입니다. St Paul 또는 St Peter 그리고 St Augustine 등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 이름 앞에 Saint 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둡니다. 사도 바울이 대단한 분임은 틀림없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감히 따라잡기 벅찬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분처럼 될 수 없으니 처음부터 포기하고 다만 그런 성인들을 우러러보며 우상시하는 것이 옳은가요?
옛 성도들이 우리보다 훨씬 믿음의 진보를 이루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들의 거룩한 삶에 이르도록 분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보다 훨씬 경건한 삶을 살았던 선배들을 본 받아 그들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옳지만 더 나아가 우리의 최종 목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바로 이것을 위함이며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비에 ‘대통령 노무현’이라는 딱 여섯 글자만 새겼다고 합니다. 그걸 가리켜 사람들은 소박한 묘비라고 말합니다. 유명한 사람들의 묘를 호화롭게 꾸며놓은 것에 비교하면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분의 묘비로서는 정말 소박하다고 아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세상적으로 볼 때 이 세상에서 대통령 호칭보다 더 화려한 호칭은 어디 있을까요? 아무리 묘비를 소박하게 만들었다지만 거기에 대통령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놓으면 그 자체로 묵직한 느낌이 있습니다. 대통령이라는 신분이 주는 무게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날고 뛰는 사람들이 그렇게들 그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보다 우선이 ‘성도 아무개’ 라는 거룩한 신분입니다. 하나님 앞에 누구나 차별 없이 동등한 신분이 바로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특권을 가짐과 동시에 성도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이 따릅니다. 에베소서는 성도로 부름을 받은 개인들과 그 성도들이 모인 교회의 영광이 어떠함을 상세하게 설명한 후 그러므로 은혜로 부름을 받은 성도 혹은 교회로서 이 은혜의 복음을 나누는 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명령합니다. 각 성도들이 몸 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거룩한 백성의 도리를 다하고 영적 싸움터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라고 격려합니다.
에베소서 4장1절에, 부르심을 받은 성도답게 살라고 강조합니다. 성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거룩한 백성답게 산다는 것인데, 술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지 않으면 거룩할까요? 성경 많이 읽고 성경 공부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고 가끔 금식도 하면서 기도하면 거룩한가요? 겉으로 보이는 그런 삶도 성도답게 사는 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것만이 성도의 표준은 아닙니다. 버려야 할 더러운 습관과 어두움의 일들이 있고, 힘써 따라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세상이 인정하는 윤리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이고, 보다 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신 것처럼 형제와 이웃을 향한 사랑을 행하여 하나님을 본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성도는 가정에서부터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가정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현장이어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 성도로서 구별된 삶의 모습을 실천하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되는 가정이 성도의 마땅한 삶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일터에서 거룩한 백성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종들은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눈가림만 하여 거짓으로 일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일하듯 정직하고 성실한 자세로 일하며 사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예수를 믿는 상전들은 종들을 대할 때 자신들 역시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정직과 공평으로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음을 무기 삼아 아랫사람들을 협박하고 괴롭게 하여 불의한 이익을 취하는 것은 성도로서 마땅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라면 사람들이 알아주는 사장 , 회장, 박사, 국회위원 그리고 대통령 혹은 장로, 목사 이전에 성도로서 올바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도의 신분을 소홀하게 여기고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는 직책만 앞세우고 살려고 할 때 우리를 통해 드러나야 할 하나님의 거룩함이 훼손되고 높임 받아야 할 그리스도의 이름이 빛을 가리움을 당합니다. ‘교회는 다니는 것 같은데 사는 모양은 우리나 별로 다를 바가 없네, 예수 믿는 사람도 별 수 없구만, 사람 사는게 다 같지 뭐. 적당히 타협하고 눈감아 주면서 누이 좋고 매부 좋으면 되지....’ 이런 방식으로 살다보니 성도가 세상과 구별된 모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다가 실망하면 사람들은 정반대로 다른 사람들보다 몇 갑절 더한 멸시와 험악한 비난을 퍼붓고 맙니다.
옛날 로마시대에 자신의 정직과 고결함을 말할 때 ‘나는 로마인이다!’ 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는 그보다 훨씬 고상한 구호가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성도다!’ 알렉산더 왕의 이름과 똑같은 병사가 있었는데 그 병사의 행실이 대단히 좋지 못하여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살았답니다. ‘알렉산더 이 바보 같은 놈’, ‘알렉산더 이 나쁜 놈....’ 한 번은 알렉산더 왕이 부대를 방문하러 왔다가 이 병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겁에 질린 병사가 왕 앞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제 이름은 알렉산더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왕은 ‘알렉산더, 너는 오늘부터 네 이름에 합당하게 살든지 아니면 이름을 바꾸라’ 명령했다고 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광스런 그 신분과 그 이름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마음에 두고 한 주간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성도로서 얼마나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인가 생각하는 기회를 가집시다. 성도와 그리스도인으로 살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떼고 그냥 자연인으로 내 살고픈대로 마음껏 살 것인가? 이 땅의 것에만 관심을 두고 아둥바둥 싸우며 살 것인가, 오늘 내게 주어진 기쁨과 슬픔 영광과 치욕 이 모든 것들을 감사함으로 받으며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 것인가? 거룩한 고민을 하는 한 주간이 되기 바랍니다.
환란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엡 3:8-13 / 박덕기 목사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힌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당한 여러 환난은 그에게 있어서 그의 소명과 그리스도의 제자 된 신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였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떤 형태로든 신앙으로 경건하게 살고자 하다가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인 줄 알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는 말씀을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복음의 일군이라고 했으며, 그것을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직분들이 귀찮은 짐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축복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일군, 곧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복음의 제사장임을 한 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무엇을 위하여 일하며, 누구의 일군 노릇을 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일군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사명을 위하여 사는 사람보다 귀한 인생이 없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일군보다 더 영예롭고 가치 있는 직책이 없음을 깨달아서, 많은 이방인 곧 불신자들을 전도하여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수 있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고전 1:30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곧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들이야말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서 어리둥절해 할 때가 많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왜 인간이 현재와 같은 상태에 있는가?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시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시지 않으시는가?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잘 알게 되면 시편 112:7의 말씀처럼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지식과 지혜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시기”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고통 중에 처하게 되며, 삶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며,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들입니다.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가 되십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까지 죄악의 생활을 살아왔다 할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바로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써 옷을 입고, 하나님의 면전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의’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거할 수 있습니까? 비록 우리가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죄가 있으며, 마귀가 여전히 우리의 원수라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악과 죄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대답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가 되실 뿐만 아니라, 거룩함도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때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흠과 티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거룩함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구속함이 되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몸을 부활시키시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구속은 완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조금도 결핍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바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의 가장 큰 필요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가장 큰 필요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좋은 남편이나, 좋은 아내나, 좋은 친구를 갖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아주 귀중한 재산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며 그와 교제를 나누는 것이 최고로 귀중한 보화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화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부요와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의 생활 속에, 마음속에 오셔서 거주하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영광의 소망이 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온 우주의 모든 풍요를 다해도 족히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남은 생애를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이 같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에 관심을 갖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이 세상 재물이나 집이나 가구나 자동차 등과 같은 세상일에만 관심을 갖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부요가 있고,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믿는다면, 얻을 수 있는 개인적인 축복을 다루어 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부름 받은 목적이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의 메시지와 기독교의 구원은 단지 개인적이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것을 초월하여, 훨씬 더 크고 넓게 계속해서 확장되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항상 고난과 시련과 전쟁과 살육과, 그리고 죄악으로 가닥 찬 세계 속에 전파되어야만 합니다. 기독교는 세상 상황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 기독교는 인류가 오늘날과 같이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야 합니까? 기독교는 어떠한 희망을 제시해야 합니까? 인류가 처해 있는 고통스런 상황에 복음은 어떠한 빛을 주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은 정말로 당연하고 타당한 질문들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문제에 있어서 숨겨진 비밀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역사는 참된 발전도 없이 사람들은 단지 계속 원을 그리며 순환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세속 역사가가 말하는 역사의 흥망성쇠에 대한 설명입니다. ‘휘셔’라는 역사학자는, 자기 전 생애에 걸쳐 역사를 연구한 후에, 아주 정직하고 솔직하게 말하기를 “어떠한 역사에서도 그 역사의 목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과 역사에 대하여 이와 같은 염세주의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사건들은 단지 일어날 뿐이며, 왜 또는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가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한 ‘소망이 없는’ 이방인들의 상황이요, 온 인류가 처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정치가나 철학자나 사회학자나 인도주의자나 괘락주의자들에게서 구원의 빛을 얻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받았던 그 빛은 이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위해서 목적과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이 세상을 위해 위대한 계획과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그 계획이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비밀을 나타내시기 전까지는 그것을 감추셨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이 인간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늘에 있는 정사와 권세들인 천사들에게까지도 감추어졌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이름을 말할 때 왜 ‘만물을 창조하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결국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세상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세상이 아닙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세상입니다. 만약 우리가 오늘날의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알기 원한다면,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세상은 원래 오늘날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단지 죄악으로 험악해진 세상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을 현재의 상태로 만들어버린 것은 죄악입니다. 죄는 분쟁과 살육과 악의와 원한과 시기와 증오와,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야비하고 더러운 것들을 초래했습니다. 원래의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그야말로 완전하고 낙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사단이 유혹하는 대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한숨과 고통과 눈물과 슬픔과 질병과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복음의 영광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은 그것을 다시 구속하여서 완전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10절에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매개체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위대한 메시지 중 최고의 부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후로 이제 새로운 인류가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자가 되고, 우리 모두는 형제가 되는 새로운 가족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웅대한 목적이시며, 그 계획이 완성될 때까지 이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 일이 완성될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 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로서, 구름을 타고 이 땅에 다시 재림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셔서 그리스도를 거절한 모든 사람들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모든 악과 부정이 소멸되고, 온 우주는 깨끗하게 되고 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우리는 참된 평화와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11절에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12절에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자 하는 참된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약속의 언약으로부터 이방인이며 외국인이고 나그네였던 우리들이,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늘나라의 상속자들이 되었고, 동일한 시민이 되었으며, 위대한 약속에 함께 참여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면전으로 ‘담대함과 당당히 나아감을 얻는’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면전으로 담대함과 당당함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하나님이 자기의 아버지이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소망을 가진 사도 바울인지라, 에베소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견디어내야만 하는 환난과 시련으로 인하여 상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기 때문에 낙심하거나 괴로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에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환난의 연속입니다. 누구도 환난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육체적인 질병, 고통, 이별, 슬픔, 배신, 경제적인 손실, 사업의 실패, 가정의 어려움 등 연속되는 환난의 매일 매일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난 속에서 사도 바울은 고난으로 끝나는 비참한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큰 영광을 현실로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굶주리면 배가 고프고, 몸이 아프면 신음하고, 역경이 휘몰아치면 고뇌하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을 바꾸어 살았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면 감옥을 별장으로 바꾸었습니다. 고난이 휘몰아치면 그 고난을 영광으로 바꾸었습니다. 가난에 처할 때는 가난을 하늘의 부요로 바꾸었습니다. 눈에서 눈물이 흐를 때는 찬란한 미래를 보는 영롱한 빛으로 바꾸었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후 4:17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니” 사도 바울은 환난을 잠시 받는 것으로, 가벼운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또한 환난을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얻는 기회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환난을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대한 것을 이루려는 목적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사도 바울처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장차 나타날 영광이 얼마나 찬란한 것인가를 바라보는 소망이 있을 때 여러분은 어떤 환난도 이길 수 있을 것이며,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말씀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찬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 사랑 안에 살면 나 두렵지 않고/또 그를 신뢰하면 늘 요동치 않네./저 폭풍 몰아쳐서 내 마음 떨려도/주 나의 곁에 계셔 겁낼 것 없어라/저 넓고 푸른 동산 내 앞에 열리고/그 검은 구름 걷혀 새 하늘 보인다./끝없는 나의 소망 저 환한 생명 길/참 보배 되신 주님 늘 함께 합소서!♪
마지막으로, 여러분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역사는 결코 무의미하게 돌고 돌며 반복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은 결코 무의미하게 내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역사는 반드시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웅대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선택하셨으며, 마침내 풍파가 없는 천국의 항구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소망을 갖고서, 질병과 고통과 가난과 배신과 사랑하는 가족과의 사별의 아픔 같은 모든 환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