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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27일 목요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말씀을 실행하는 이 (마태7,21-29)
제1독서<여호야킨과 건장한 모든 사람을 바빌론으로 데려갔다.>(2열왕24,8-17)
8 여호야킨은 열여덟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석 달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느후스타인데 예루살렘 출신 엘나탄의 딸이었다.
9 여호야킨은 자기 아버지가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10 그때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도성을 포위하였다.
11 이렇게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이 도성에 이르렀다.
12 그러자 유다 임금 여호야킨은 자기 어머니와 신하들, 대신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빌론 임금에게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바빌론 임금은 그의 통치 제팔년에 여호야킨을 사로잡았다.
13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네부카드네자르는 주님의 집에 있는 모든 보물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물을 내가고, 이스라엘 임금 솔로몬이 주님의 집에 만들어 놓은 금 기물들을 모조리 떼어 냈다.
14 또한 온 예루살렘 주민과 모든 대신과 모든 용사 등 포로 일만 명과 모든 장인들과 대장장이들을 끌고 갔다. 그리하여 나라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15 네부카드네자르는 여호야킨을 모후와 왕비들, 내시들과 나라의 고관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그들을 끌고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데려간 것이다.
16 바빌론 임금은 또 훌륭한 사람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천 명 등, 전투할 수 있는 건장한 모든 사람을 바빌론으로 데려갔다.
17 그런 다음에 바빌론 임금은 여호야킨의 삼촌인 마탄야를 그 뒤를 이어 임금으로 세우고, 이름을 치드키야로 바꾸게 하였다.
<화답송>시편79,1-2.3-5.8.9(◎ 9ㄴㄹ) ◎ 주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구하소서.
○ 하느님, 민족들이 당신 유산의 땅에 쳐들어와,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었나이다. 당신 종들의 주검을 하늘의 새들에게, 당신께 충실한 이들의 살을 땅 위의 짐승들에게, 먹이로 내주었나이다. ◎
○ 그들의 피를 물처럼 예루살렘 둘레에 쏟아부었건만, 묻어 줄 이 아무도 없나이다. 저희는 이웃에 우셋거리가 되고, 주위에 비웃음과 놀림감이 되었나이다. 주님, 언제까지 마냥 진노하시렵니까? 언제까지 당신의 격정을 불태우시렵니까? ◎
○ 선조들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소서. 어서 빨리 당신 자비를 저희에게 내리소서. 저희는 너무나 불쌍하게 되었나이다. ◎
○ 저희 구원의 하느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를 구하소서. 당신 이름 위하여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
복음<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마태7,21-29)
21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28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29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제1독서 (2열왕24,8-17)
"또한 온 예루살렘 주민과 모든 대신과 모든 용사 등 포로 일만 명과 모든 장인들과 대장장이들을 끌고 갔다. 그리하여 나라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14)
열왕기 하권 24장 13절에서 남부 유다에 대한 바빌론의 물질적 약탈을 보도하였다면, 열왕기 하권 24장 14절부터 16절까지는 인적 자원의 약탈, 즉 남부 유다의 주요한 인물들의 바빌론 유배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또한 ~끌고 갔다'에 해당하는 '웨히글라'(wehiglla; and he carried into exile; and he carried away)의 원형 '깔라'(galla)는 기본적으로 '드러나다' 내지는 '옷을 벗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런데 여기에서처럼 사역형으로 사용되면, '포로로 잡아가다'라는 뜻이 되어 옷을 벗긴 노예처럼 수치와 모욕을 주며 끌고간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바빌론은 이렇게 남부 유다 왕국을 완전히 무력화하기 위해 반란의 구심점이 될 소지가 있는 고위층 인사들과 노동력과 전투력을 보유한 용사들 그리고 기술이 있는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열왕기 하권 24장 14절에서도 예루살렘 주민과 대신과 용사들을 합하여 일만 명의 포로를 잡아갔고, 기술자들도 데리고 갔음을 기록하여 이 사실을 명확히 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온 예루살렘 주민'은 실제로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모든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대신들과 모든 용사들을 합한 일만 명의 인원을 가리키는 중복적 표현이다.
이들은 남부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 남부 유다를 움직이는 핵심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온 예루살렘 주민'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대신'으로 번역된 '사르'(sar)는 높은 계급을 가진 사람들에게 제한없이 사용되는 보편적인 명칭으로(묵시6,15) '군대 장관','고관'이라는 뜻 이외에도 '사령관', '총독'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여기서 '사르'(sar)가 용사들과 함께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들은 단순한 예루살렘의 귀족들이라기보다는 용사들의 우두머리로 추정된다.
그리고 '용사'로 번역된 '낍보레 하하일'(gibbore hahail)은 '혈기왕성한 무리'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은 정예병들의 무리'로 보는 것이 옳다.
또한 '장인'으로 번역된 '하라쉬'(harash)는 '돌이나 금속 또는 나무를 다룰 줄 아는 숙련된 기술자'를 뜻하며, '대장장이'로 번역된 '마쓰께르'(masger)는 '각종 무기를 만들 줄 아는 기술자'를 가리킨다.
한편, 이처럼 정복국이 패전국의 국민들 다수를 포로로 잡아가 자국의 영토에 다시 배치하는 일은 당시 고대 중, 근동에서 전쟁의 승패 여부와 관련해서 일반적으로 시행되던 관습이었다.
이것은 승전국이 패전국에게 조공이나 배상금을 요구하는 방식의 처분보다 훨씬 잔혹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은 정치적인 목적에서 반란이나 저항 세력을 일소하는 한편, 그들의 세력을 분산시키는 데에 첫째 목적이 있다.
북부 이스라엘의 경우 사마리아 성의 함락으로 인한 멸망과 동시에 백성들 대다수가 앗시리아 여러 지역으로 끌려가는 조치를 당했는데(2열왕17,6), 이 조치로 인해 북부 이스라엘이 다시는 역사적으로 재기하지 못했다.
남부 유다 역시 바빌론에 이러한 포로 유배를 당하였고, 이런 조치로 인해 남부 유다 역시 오랫동안 재기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두번째는 경제적인 목적에서 이러한 조치를 취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대제국의 경우, 지금의 형편과는 달리 영토는 넓지만 인구는 적은 지역이 많아서, 본국의 경제적 유익을 위해 패전국에서 유용한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와서 그 땅을 개척하고, 경작하고, 개발하게 함으로써 자국내의 효과적인 발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같은 포로 유배와 관련해서 남부 유다는 3차에 걸쳐 바빌론으로 포로 유배를 겪게 된다.
먼저 제1차 포로 유배는 여호야킴의 재위 3년경(B.C.605년)에 바빌론의 1차 침입과 관련하여 이루어졌다(2열왕24,1).
열왕기 하권에서는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지만,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는 이 당시에 남부 유다의 왕족과 귀족 다수를 잡아간 것으로 보이며, 이때 포로로 잡혀간 이들 중에는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이 포함된다(다니엘1,1~7).
그리고 제2차 바빌론 포로 유배의 상황(B.C.598년)은 열왕기 하권 24장 14절이하 16절까지의 내용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어린 임금 여호야킨과 그의 모친, 그의 궁중 내시들과 성전 및 왕궁의 보물들은 물론이고, 대신들과 백성들을 포함한일만여 명의 포로가 바빌론 땅에 사로잡혀가게 된다.
또한 마지막 제3차 바빌론 포로 유배는 치드키야 임금의 운명과 남부 유다의 멸망과 관련해서 이루어지며, 열왕기 하권 25장 8~21절에 기술되어 있다(B.C.587년).
한편, 열왕기 하권 24장 14절ㄴ에 '그리하여 나라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남부 유다 땅에서 바빌론에 맞설 수 있는 세력이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실은 남부 유다의 제19대 임금인 여호야킨 이후 제20대 치드키야 임금 집권 시기에도 '대신들', '고관들', '군대 장관들'이 남부 유다 땅에 존재하였다(예레38,4; 38,7; 40,7).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여기 '가난한 이들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라는 말은 과장된 표현이며, '아무도'라는 말은 숫자적 의미라기보다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끌려갔다는 것을 드러낸다.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7,21-29)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21)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22)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23)
마태오 복음 7장 15절~20절이 열매를 통한 거짓 예언자의 분별과 경계에 관한 가르침이라면, 마태오 복음 7장 21절~23절까지는 그리스도를 거짓으로 추종하는 자들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나에게'로 번역한 '모이'(moi; to me)는 일인칭 대명사 단수 여격인데 '바로 나 자신에게'라는 뜻이다.
그리고 '주님'에 해당하는 '퀴리오스'(kyrios; Lord)는 하느님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자주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을 창조주시요, 구세주이시며 만물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고백 내지는 기도의 문맥인 것이다.
동시에 '주님'이라는 호칭이 두번 거듭 사용된 것은 매우 큰 종교적 열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주님께 대해 신앙고백을 하고 열정적으로 기도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열정이 아닌, 위선 내지는 가식이거나 자신의 현세적인 복만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실천적인 신앙을 가져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아주 충격적인 가르침을 주시고 있다.
이것은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다'는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10장 13절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태오 복음 7장 21절에서 '주님, 주님!' 하는 자가 진정으로 주님을 바로 알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입술로만 고백하는 거짓된 신앙을 가진 자를 지적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2)
여기서 '그날에'에 해당하는 '엔 에케이네 테 헤메라'(en ekeine te hemera; on that day)는 미래에 주어질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묵시문학적 표현인데, 하느님의 정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종말의 날을 가리키며, 함께 섞여 있던 밀과 가라지, 알곡과 쭉정이가 완전히 구분되는 날을 가리킨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에 해당하는 '토 소 오노마티'(to so onomati; in your name)가 한 절안에 세 번이나 반복되어 쓰였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악용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고대 사회에서 임금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그 명령은 임금이 직접 한 것과 같은 효력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무엇을 했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의 힘을 빌어 행한 것이므로, 모든 영광은 예수님께 돌려야만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7장 22절의 거짓 추종자들은 애덕의 실천과 같은 말씀의 실천없이 예수님의 이름만을 빌려 기이한 일을 행하고는, 그 영광은 자신이 가로챈 삯꾼 목자와 같은 자들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23)
여기서 '도무지 알지 못한다'에 해당하는 '우데포테 에그논'(oudepote egnon; I never knew)에서, '우데포테'(oudepote)는 부정문에 사용되는 접속사로서 '~도 아닌'이라는 뜻을 지닌 '우데'(oude)와 부정어 뒤에서 '일찍이 단 한번도' 라는 뜻을 지닌 '포테'(pote)의 합성어인데, '일찍이 한번도 그러한 적이 없는' 이라는 뜻을 가진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의 이름'을 많이 사용하고, 사람들이 놀랄만한 큰 권능을 행했다고 하더라도, 이전에 단 한번도 그를 알았던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불법을 일삼는'에서 '일삼는'에 해당하는 '에르가조메노이'(ergazomenoi; work)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불법을 습관적으로 행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물러들 가라'에 해당하는 '아포코레이테'(apochoreite; depart)라는 현재 명령형을 사용해서 강력하게 떠나가라고 촉구하신다. 주님의 구원 사업이 계승되는 교회 안에 소속되어 있고, 하느님의 일꾼으로 여겨지던 자들에게 행함이 없는 신앙이 얼마나 헛된 것이며,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마음에 드는 행동
예수님께서는 반석위에 집을 지으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니 탈입니다. 입으로는‘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바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면 나는 종입니다. 그러나 종노릇 하기는 싫습니다. 그러니 나는 위선자입니다. 위선의 탈을 쓰고 어찌 천국을 바라고 있는지 한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하늘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어떤이는 말합니다. “실천 없는 종교는 그림의 떡이다!”예수님의 말씀은 들음에서 시작하여 가슴에 새기고 손발로 실천하는 가운데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 종교인은 위기가 닥칠 때 그 허상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행동에서 믿음을 봅니다.
어느 날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지혜와 행동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제자들이 한결같이 대답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행동입니다. 아무리 지혜로워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종이호랑이와 무엇이 다를 게 있겠습니까?”스승이 제자들에게 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롭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은 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말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사람들 가운데는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행동이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말이 아닙니다”(교부 야고보).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행동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 안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 행동의 원천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진리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행동이 요구됩니다.
“우리는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행하는 가운데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속빈강정의 삶으로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신 사랑을 행함으로써 천상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2024년 06월 27일 목요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아서 산상 설교 부분에 배치합니다.
마치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 하느님의 계명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가르침을 전하여 주고 계십니다. 산상 설교는 참행복을 시작으로 율법의 완성에 관한 가르침과 그 밖의 여러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모든 가르침의 결론으로서 오늘의 복음 말씀을 듣게 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자신이 가르침을 많이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들은 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참된 믿음에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실천 없이 당신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실 실천은 우리 믿음을 반석 위에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실천 위에 세워진 믿음만이 더 굳건하게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몸소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만이 하게 되는 체험이 있고 그 체험 안에서 믿음은 더 굳건해집니다.
말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 믿음이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어려움과 고통이 닥칠 때 쉽게 무너집니다.
좋은 말씀은 우리 주변에 넘쳐납니다.
유튜브, 블로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등으로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묵상 글과 아름다운 글귀들을 서로 나눕니다.
이는 아름다운 일이고 우리 구원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이제 더 중요한 것이 남았습니다. 서로 나눈 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었던 아름다운 말씀은, 나아가 참사랑의 실천으로 나누어져야 합니다.
이 실천 위에 자리 잡은 믿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06월 27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目的)을 알고, 믿고, 누리는 것이 실행(實行)이다.
복음(마태7,21-29)
21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루가6,45)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 구원의 능력인 새 계약의 그리스도로 채워져 있는 것, 선한 것이다. 그 선한 마음에서는 하늘의 생명을 주는 십자가의 복음이 자연스럽게 흘러 넘쳐 나온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루가6,46) 46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 ‘착하게 살자고, 살라고 종교 행위에 열심하라’고 권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 하늘의 용서로, 거저 의로움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것, 실행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착함, 선함이다. 선(善, 그리스도)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착하게 사는 것만이 신앙의 목적이었다면 예수님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으셨다. 예수님의 대속은 창조 이전부터 구원의 계획, 계약 안에 있었음을 기억하자(에페1,4~)
(창세3,17-18) 17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18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 아담이 먹은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나쁜 나무다. 생명을 줄 수 없는 가시덤불만 내는 가시나무다. 그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ㅏ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무화과는 구약으로 율법(제사와 윤리)을 뜻하고, 포도는 신약으로 진리를 뜻한다. 곧 하느님의 지혜인 십자나무의 예수 그리스도다.(요한14,6)
(로마3,20-24) 20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 율법으로 자신의 죄(악)를 깨닫고, 그 악을 대속하신 ‘십자나무의 그리스도로 건너와 생명을 얻으라’는 에덴동산과 성경 전체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뜻이다. 그래서 죄를 알게하는 율법(무화과)과 그 죄를 대속해 생명을 주는 진리(십자 나무), 모두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나무인 것이다.
그런데 율법(제사와 윤리)에 멈춘 그 자기 의로움을 위한 신앙을 살게 되면 하늘의 용서, 생명을 얻지 못하기에 그 자신이 가시나무, 나쁜 나무가 된다.
인간의 의로움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인간의 의(義)는 도리이지 신앙의 목적이 아니다) 율법, 그 옛 계약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시고 치워버리신 그 새 계약의 그리스도께로 건너와야 한다.
(히브9,15) 1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 옛 계약의 나를 비우고 새 계약이신 그리스도를 담는 것, 좋은 나무로 좋은 열매를 맺는 선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착하게 사라고 가르치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를 대속하신 당신으로 하늘의 용서, 생명을 받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래서 무지랭이 같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그 사랑을 절절히 깨닫고 믿기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착한 삶이다. 인간의 계명을 지킨 착함, 선함과는 다른 것이다. 그 착함, 선함은 구원의 힘이 없다, 무력하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루가6,47-48) 47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가 어떤 사람과 같은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48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 사람이 자신의 본질, 곧 땅(흙), 그 없음(죽음)의 존재임을 알고, 반석(생명의 물)이신 예수님만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달아 그 예수님 위헤 집(나)을 지을 때, 곧 그분과 하나가 될 때 그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그 끝은 영원한 승리, 생명임을 믿기에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 믿음, 누림이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다.
(요한6,68) 68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루가6,49) 49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 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다. 그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 땅, 그 사람의 의로움, 곧 구원의 힘, 능력이 없는 열심한 활동(행위), 그 위에 집(나)을 지으면 시련이 왔을 때, 절망에 빠지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사람(흙- 없음)의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못되어 허물어져 없어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 자신의 열심, 의로움의 자신을 믿는 것,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28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29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티토3,5) 5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말씀)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로마10,4) 4 사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의로움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 보호자 성령님! 오늘 주신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죽으러 오셨음을 알고, 그분 십자나무의 열매인 용서, 자유, 생명을 누리는 그 말씀을 실행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