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적소에서
“추사가 제주 대정에서, 다산이 강진 초당에서 - 상처는 고통이 수반되고 결핍은 허기를 느낄지라도 여러 예술가들은 상처와 결핍에서 명작을 남겼습디다. 거제에서 이방인으로 지내보니 추사와 다산이 적소에서 어떤 심정이었을지 조금은 헤아려집니다. 간밤 지세포로 나가보고, 이른 새벽 연사들녘으로” 인용부호 안의 내용은 아침에 출근해 자리 앉자마자 지기들에게 보낸 문자다.
문자만이 아닌 몇 장면 사진을 곁들여 카톡으로 날려 보냈다. 어제 퇴근 후 금세 어둑해왔는데 밤 시간이 무료해 저녁 식사 전 산책을 나섰더랬다. 연사정류소에서 구조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지세포를 앞둔 옥림에서 내렸다. 고갯마루는 어둠이 내려 캄캄했고 성근 빗방울이 흩날렸다. 비탈길을 내려서 옥화선창과 해안 산책 데크를 걸었더니 건너편 지세포 포구 야경이 운치 있었다.
인적 없는 갯가를 산책하면서 지세포 야경을 폰 카메라에 담았다. 와실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 사진을 몇몇 지기들에게 보냈다. 적막한 와실에 들어 저녁밥을 지어 먹으면서 참이슬로 반주를 곁들였다. 일찍 잠에 들어 한밤중 일어나 간밤 다녀온 산책길을 ‘지세포 야경’이라는 제목을 달아 탈고했다. 그 원고는 몇 그룹으로 묶인 지인에게 보내고 문학동인 카페 내 글방에 올렸다.
익히 알려진 얘기다만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왜적이 쏜 조총에 숨을 거두는 순간 남긴 말이 생각난다.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다. 바다에서 왜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이순신이 아니던가. 패퇴하여 물러가던 적들이 장군의 죽음을 알면 더 기세가 올라 아군의 전세가 불리해질까 봐 죽음의 순간에서도 멸사봉공과 우국충정을 엿볼 수 있는 극적 상황이다.
한갓 범부에 지나지 않은 나하고 성웅 이순신을 견줄 수 있으리오. 이순신은 적에게 자신의 죽음조차 알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럼에도 난 매일매일 시시콜콜한 일상을 다 노출시키고 있다. 그 방법이 두 갈래다. 어디든 걸으면서 포착되는 정경을 폰 카메라로 사진에 담아 실시간으로 지기들에게 보낸다. 주로 들꽃이나 계절감이 드러난 자연의 모습들이다. 이젠 밤 풍경까지 남긴다.
체험을 본 대로 느낀 대로 글로도 남긴다. 창원에서는 주로 주말 다녀온 산행이나 산책에서 남겼는데 거제로 건너와선 주중도 가리질 않고 적어간다. 어제는 아침 출근길 ‘여명의 연사리’와 저녁 산책을 다녀와 ‘지세포 야경’으로 두 편이었다. 메일로 넘긴 글을 읽어본 퇴직 선배는 ‘어느 사람은 하루 두 편의 글을 올리기도 하는데 그기에 댓글 한줄 쓰기도 어려우니’라는 회신이 왔다.
내가 산행이나 산책으로 남들보다 많이 걸음은 주변 지기들이 잘 알고 있다. 거기다가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시야에 들어온 풍경을 폰 카메라로 담아 글감의 보조 자료로 활용하기도 한다. 글이야 넉 잠을 다 잔 누에가 실을 뽑듯 마음만 먹으면 술술 적어나간다. 펜으로도 메모가 되긴 하나 독수리 타법으로 워드로 작성한다. 한 편의 글은 한두 시간이면 완성이 된다.
이렇게라도 무념무상 걸으면서 사진을 남겨 글로 써서 그걸 지인들에게 보냄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남이 갖지 못한 능력을 지녔다고 드러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이순신은 위대한 성웅이었지만 나는 용렬한 범부에 지나지 않는다. 수신자 입장에선 내가 스토커나 진드기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내 입장에선 사진이나 글을 보내지 않으면 우울이라도 걸려 약을 먹지 싶다.
오늘 아침 출근길 찍지 못한 장면을 하나 소개하련다. 여섯 시 반 와실 문을 나섰다, 해가 짧아져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아 컴컴했다. 어둔 골목을 빠져나가 연사삼거리로 나가니 날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횡단보도를 건너 연사들녘으로 나가니 경작지가 아닌 덤불에서 짐승 두 마리가 겅중겅중 사라졌다. 건너편 산에서 하천을 건너 들판으로 와 돌아가지 못한 고라니 녀석인 듯했다. 19.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