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읽는 오늘의 詩 〈1567〉
■ 침묵이 말을 한다 (박노해, 1957~)
때로 침묵이 말을 한다
사람이 부끄러운 시대
이상이 몸을 잃은 시대에는
차라리 침묵이 주장을 한다
침묵으로 소리치는 말들,
말이 없어도 귓속의 귀로
마음속의 마음으로 전해지는
뜨거운 목숨의 말들
아 피 묻은 흰옷들 참혹하여라
아직 말을 구하지 못한 이 백치울음
그러나 살아 있는 가슴들은 알지
삶은 불을 잉태하고 있다는 걸
진실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침묵 속에 익어가고 침묵 속에 키워지고
마침내 긴 침묵이 빛을 터트리는 날
푸른 사람들, 소리치며 일어설 것이다
침묵이 말을 한다
침묵이 소리친다.
- 1993년 시집 <참된 시작> (창작과 비평사)
*때로는 말하지 않고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것이 말을 하는 것보다 더 강할 때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침묵이 미덕임을 강조한 말들이 많은 이유겠지요.
우리 속담에도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고, 춘추전국시대의 현인 한비자(韓非子)도 ‘모든 화근은 입에서 비롯된다’고 하였으며, 서양의 대문호 세익스피어는 ‘말이 적은 남자가 가장 훌륭하다.’라며 침묵의 중요성을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 詩에서처럼, 무거운 침묵이 가벼운 웅변보다 더 많은 것을 시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까지 고교 교과서에 수록된 이 詩는, 불합리한 사회에서 침묵하는 민중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뜨거운 소망에 대해 노래하는 작품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가는 1980년대 상황을 ‘사람이 부끄러운 시대’라고 말합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독재 세력에 아부하여 입지를 챙기려 하고, 언론 탄압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상과 표현이 억압당하던 시대에는 차라리 침묵이 올바르게 말을 한다고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런 시절에도 ‘침묵으로 소리치는’ 뜨거운 소망은 가슴 속에 살아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민중들의 소망은 가슴 속에 뜨겁게 살아 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고, 마침내 소리치며 일어날 것이라고 말이죠.
그러나 오래전 민주화가 시현되었고 이제는 선진국으로 진입한 현시점에서 그러한 시절은 이미 잊혀져, 이런 詩를 읽을 때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아득한 추억이 되고 말았군요.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