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발 짚은 붉은 달*
최형심
전생에 당신은 눈이 없었다. 전생에 나는 당신의 얼굴에 눈알 대신 별을 박아두었다. 그리하여 암전이었다.
이생에 당신은 무거운 종소리를 업고 왔다. 푸른 녹을 입고 당신이 왔을 때, 적막보다 깊은 침묵이라고 당신을 읽었다.
전생에 우리는 달그림자 둥근 소반에 둘러앉아 침묵을 훔쳤다. 등꽃 환한 저녁이었다. 슬픔은 이마를 지나 입술을 지나 어깨로 옮겨갔고 물의 방, 깊은 잠 속으로 허공이 흘러들었다.
당신은 푸른 멍울과 작은 소모품들, 빈자의 계보를 사랑했었다. 나는 은사초와 세설(細雪) 내리는 지붕을 사랑했고, 환상통 속에 당신을 묻었다.
이생에서 내 손이 자주 휜다는 것은, 금어기엔 목소리가 낮아진다는 것은, 소낙비 올 조짐에 감청빛 상처가 덧난다는 것은, 기대고 마주하는 일이 여전히 서툴기 때문.
이 밤, 가문비나무 가슴에 매달린 목어(木魚)가 허공을 헤엄쳐 내게로 오고 있다. 한 백 년 비밀을 키워온 저녁, 샐러드 볼 가득 담긴 숲속이 환하다. 녹슨 못에 달린 음표를 하나씩 걷어내야겠다.
* 키키 스미스
계간 『포엠피플』 2023년 여름호 발표
최형심 시인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박사과정 수료. Universit y of Dayton School of Law 수료. 2008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심훈문학상 수상시집 『나비는, 날개로 잠을 잤다』가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 2009년 아동문예문학상 동화부문 수상 및 2012년 한국소설신인상, 2014년 제4회 시인광장 시작품상, 2019년 제23회 심훈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