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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 칠십 인을 세움
민 11:16-23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17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18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19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스무 날만 먹을 뿐 아니라
20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계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가 함이라 하라
21 모세가 이르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22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민 11:16-23 / [지도자 칠십 명을 세워라] 그러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 백성을 지도해 온 장로 중에서 일흔 명을 뽑아 내게 데려오너라. 너는 그들을 만남의 장막문 앞에 나와 서게 하여라. 그리고 너도 함께 내 앞에 나오너라. 17) 내가 내려가서 너와 이야기를 나누리라. 또 네게 내려 주었던 영을 그들에게도 나누어 주리라. 그래서 너 혼자만이 아니라 그들도 너와 같이 책임을 지게 할 것이다. 그들이 너를 도울 것이다. 18) 또 무리에게는 이렇게 일러라. `내일 너희에게 고기를 먹게 해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몸을 깨끗이 하고 고기 먹을 준비를 하여라. 너희가 누가 고기 한점이라도 먹여 줄까? 애굽에서 살 때가 얼마나 좋은 시절이었던가? 하고 불평하는 말을 나 여호와가 다 들었다. 이제, 나 여호와가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19) 하루 이틀만 먹고 마는 것이 아니라 닷새, 열흘, 스무 날, 20) 한 달 동안 신물이 나도록 먹게 해주겠다. 냄새만 맡아도 지겨울 정도로 실컷 고기맛을 보게 해주겠다. 너희와 함께 있는 나 여호와를 너희가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였기에 너희는 내가 듣고 있는 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무엇 때문에 애굽에서 나왔는가 하고 후회하지 않았느냐?' 21) 모세가 여호와께 여쭈었다. `주님, 여기 우리와 같이 움직이는 사람이 무려 60만 명이나 되는데 어떻게 이 무리에게 모두 고기를 먹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하루 이틀도 아닌 한 달 동안이나 신물 내도록 먹여 주신다니요? 22) 이 엄청난 사람들이 한 달 동안 실컷 먹을 고기가 대체 어디 있다는 말씀입니까? 양떼를 잡는다고, 소떼를 모조리 잡는다고, 또한 바다에 사는 물고기를 모조리 잡아들인다고 이 사람들이 모두 다 배부를 것 같습니까?' 23)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크게 노하셔서 모세를 꾸짖으셨다. `나 여호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모르느냐? 내 말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이제 네가 곧 두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
본문은 모세의 탄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모세에게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할 70인의 지도자를 세우겠다 하십니다.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16-17)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잘못된 인식으로 하나님께 원망하듯 하는 기도에도 자비와 은혜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혼자 백성의 짐을 담당하지 않도록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중에 70명을 세워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간구하는 자의 필요를 채우시고 당신의 일꾼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을 주셔서 성령 안에서 각 사람이 받은 은사대로 하나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슥 4:6). 하나님은 부르시고 부르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함께 일할 동역자를 붙여주십니다.
여호와를 멸시하고(18-22)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날마다 새롭게 베푸신 만나를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의 원망에 그들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불손했음을 자각할 수 있도록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고기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보행자 육십만 명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20세 이상을 말합니다. 모세는 퉁명스럽게 출애굽 당시 데려온 양 떼와 소 떼와 바다의 모든 고기를 잡아도 먹기에 부족하다 말합니다. 여전히 하나님 앞에 불신앙의 모습을 가진 모세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음을 기억해야합니다(고전 1:25).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23) 손은 능력이나 권세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본 단락의 여호와의 손은 여호와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며 보이셨던 능력과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시던 하나님의 능력을 잊은 그들에게 책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감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신하는 그들에게 너희들의 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모든 문제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크심을 믿어야 합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으로 갈구하면 뜻이 이루어지더라도 그 끝이 좋지 못할 것입니다.
적용: 혼자 일을 감당하며 원망하며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 안에서 동역자를 세우고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성령의 일하심을 제한하지 맙시다(고전 3:9).
세상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우직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우리를 이렇게 조롱합니다. ‘넌 잘못 살고 있는 거야. 세상을 그렇게 살아서 되겠니? 정직하다고 누가 알아줘? 즐기며 살아. 다들 그래!’ 그러나 성령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옳다. 네가 가는 그 길이 정답이다. 기죽지 마라. 너의 삶이 바람직한 삶이다. 이런 의미에서 넌 작은 자가 아니라 누구보다 큰 사람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 주시는 이 위로의 말씀을 들으며 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 설 교 >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민수기 11:16-17 / 서양훈 목사
17절 “...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살전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아버지의 뜻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머나먼 인생 길을 혼자 걷도록 내 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또한 우리를 지키십니다. 우리 곁에서 자상하게 인도하시되, 지금부터 영원까지 변함없이 지키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혼자가 아니랍니다.
시121:5-8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또한 동역해 주십니다.
우리 홀로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십니다.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도 열어 주십니다. 그는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감당치 못할 일들과 능히 감당할 일들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살아왔습니다. 즉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주의 은혜로 살아갈 자들입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우리 가운데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필요치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도우심을 사모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도우심의 손길이 어느 예배 시간 보다 더 많게, 더 충만하게 임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몸은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를 가고 있지만 ......
마음은 아직도 애굽을 잊지 못하고 있기에 (민11:1-6) 일어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1절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
3절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
@ 백성은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1절) 하나님은 이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이들이 원망하는 말을 들으신 하나님은 진노하사 저들이 생활하는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십니다. 진영에 불이 불었습니다.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었습니다.
또 하나의 소리가 들려 옵니다. 모세의 귀에도 들려 옵니다.
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들의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10절)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이 위험도 경험하면서 홍해를 건너게 하신 것은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도록 길들이시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 있는 섭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애굽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때를 비교하면서 불평, 불만으로 믿음 없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애굽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애굽에서 나온 섞여 사는 무리들은 탐욕을 품고 있다.(4절)
섞여 사는 무리들은 누구인가요?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향해 가는 길에는 포로로 잡혀 끼어든 사람도 있고 출애굽 할 때 함께 나온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4절 “이스라엘 중에 섞여서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 사람들은 대열에 함께 움직이고는 있지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믿을 생각도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계속하여 탐욕을 일삼으니 이스라엘이 같이 지내면서 그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썩은 사과 하나가 싱싱한 사과 10개를 썩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싱싱한 사과 10개는 썩어가는 사과를 막지는 못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섞여 사는 무리들의 탐욕의 영향을 받아서 울면서(5절)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민11:4하반절~5)
@ 하나님의 종 모세도(12-13절) 원망하며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하셨는데
기쁨이나 즐거움의 감격의 소리는 다 없어지고 불평의 소리 원망의 소리가 울음소리와 함께 이 백성들의 맘을 어디로 인도 받고 있나요?
질서도 없고, 기쁨이나 즐거움도 없이, 구별된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나 섞여 사는 이방인들이나, 일반적인 백성들이나 지도자 모세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들이 십자가의 군병인가요? 정예군병은 아닌듯 합니다. 오합지졸이이네요.
2. 백성들이 먹고 싶은 고기를... 모세의 어려운 지을 나눠지게 하시다.
17절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18절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 게하랴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을 묵상해 봅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소원앧로 먼저 들어 주셨습니다. 16절에서 광야교회의 조직을 새롭게 하시는 시도를 보여주십니다. 모세 혼자서 그 많은 사람들의 욕구 불만, 불평을 해결해 나갈 재간이 없다고 항의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의 짐을 나누어지게 할 장로 70명을 세우시는 장면입니다.
17절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할렐루야!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모세에게 비밀을 알려 주십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하나님의 방법을 일러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성막을 건축하고 시은좌를 설명하실 때도 거기서 너와 만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를 말씀을 일러 주시리라 약속하셨지요.
[지성소에서 만나주시다.]
출25:21-22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회막문에서 만나주시다]
출29:42-43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하게 될지라.”
만나주심으로 모세를 위로하시고 알려주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만나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성령안에서 새롭게 만나셔야 합니다.
만나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도 만나야 정이 싸이고, 오해도 풀립니다.
18절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 게하랴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다”
그것도 백성들에게 고기의 냄새도 싫어질 만큼 한달 동안 먹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저들의 소원을 이뤄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두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높이 찬양합니다.
3. 성령의 권능으로 감당하라. (민11:31-32)
하나님께서 70명의 장로들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다 듣게 하셔서 모세의 존재를 그들이 재인식하도록 만드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데리고 온 70명에게 모세가 받은 것과 똑같은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즉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예언합니다. 이제 장로들이 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예언은 모세만 하게 돼있었지만 장로들이 모세와 같은 성령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도 예언을 한번씩 하게 해주시고 모세는 목자의 지위에 올리시고 장로들은 봉사자의 지위에 세우십니다. 하나님과 모세와 장로들의 사이가 저절로 정립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70명의 장로들은 광야교회의 그 누구보다도 모세의 입장을 더 깊이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짐을 나누어지는 봉사를 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를 위하여 70명의 장로들에게도 성령을 주셨습니다.
@ 하나님의 권능을 신실하게 믿어라. 애굽에서 종으로 살면서 가마 곁에서 먹던 고기가 생각나서 고기를 원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달동안 고기를 먹여 주시겠다는 하나님께서 @ [바람으로]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저편에다 펴 두시었습니다.
[한 달간 먹여주시겠다.] 할 때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며 항변하던 그대는 믿음이 흔들리고 있지는 않는가? 민11:33엔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됩니다. 고기를 손질하고 요리를 해서 저녁을 먹는데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셔서 욕심을 낸 백성을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끝까지 믿지 아니하고 불평, 불만, 시비만을 일삼는 무리들을 다 벌하신 사건이다.
@ 70명의 어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매 저들이 예언하다.
민11:26 “그 녹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에 머물고 회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신이 임하였으므로 진에서 예언한지라.”
장로로 세워진 자가 예언한 것을 보고 한 소년이 모세에게 보고 합니다. 이들이 예언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의 한 소년은(27절) 이들을 과소평가하고, 여호수아는 이들에게 예언하는 일을 못하도록 모세에게 건의하는 말을 들었던 모세는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어떤 특정한 사람의 몫으로 돌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힘이나 지혜로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보리며, 오직 주의 신으로 가능하다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칠십명의 어른들에게도 성령을 주셔서 이들이 모세의 입장을 더 깊이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짐을 나누어지는 봉사를 할 수 있었음을 기억하시고 이 일에 쓰임 받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 일도 하나님이 가능케하셨습니다.
민11:31-32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
하나님께서 한 달간 먹여주시겠다고 했는데도 그들은 매일같이 주실 것을 믿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대로 욕심내어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이것이 탐욕입니다.
민11:33을 참조하면 [고기를 손질하고 요리를 해서 저녁을 먹는데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셔서 욕심을 낸 백성을 죽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끝까지 믿지 아니하고 불평, 불만, 시비만을 일삼는 무리들을 그곳에서 다 벌하신 사건입니다.
지도자로 세운 모세를
너무나 힘들게 하고 행패를 부렸던 무리들을 하나님께서 다 치셨습니다.
하나님은 매일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가 영적으로 더욱 깊어지기를 기대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로 욕심내어 챙기기에 바빴던 것입니다. 결국 불평하고 원망한 사람들은 다 죽었고 조용히 믿음으로 따른 사람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성도들은 같은 교회에서 목자와 함께 천국 길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길에서 때로 어려움을 당하고 물이 없어 목이 타고, 배불리 못 먹어서 허기가 진다 하더라도, 원망하고 불평하며, 불만, 시비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그의 신의 가까이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는 소리 고기가 먹고 싶습니다. 애굽이 생각납니다. 거기서 값없이 먹던 고기가 생각납니다.
이런 불평의 소리도 들어 주셨습니다.
모세의 불평도 들으셨습니다. 모세에게 너무 과중한 짐을 짊어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70명의 장로들을 세우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들어야 할 차려입니다.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 주셔서 저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맘을 이해하고 백번이라도 이해하게 될것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칠십 장로들에게도 성령을 주셔서 이들은 모세의 입장을 더 깊이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짐을 나누어지는 봉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들도 한 성령 안에서 목자를 통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적극적으로 돕는 자들로, 온전히 성령의 믿어지게 하심을 따라 기쁨으로 신앙 생활하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안수 집사님들을 여러분 게십니다. 이들은 벌써 장로가 되실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분들입니다. 존 경할만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들 중 3분을 선출하여 당회원으로 함께 믿음생활 하도록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고 공동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시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성도 여러분들을 대표하여 일하실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다.
이를 위하여 성도 여러분과 제가 이번 한 주간 동안 열심히 기도하며 주의 뜻을 이루어 드리길 원합니다. 할렐루야 ! 아멘.
크신 하나님을 작게 여기지 말라
민 11;16-23. / 강문호 목사
미국 텍사스 광야를 달려 본 적이 있습니다. 동쪽끝 안토니오에서 서쪽 끝 엘파소까지는 쉬지 않고 14시간입니다. 500km를 달려도 광야가 있습니다. 농장이 있었습니다. 피곤하고 지루하여 내려서 농장에 들렀습니다. 주인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 농장은 얼마나 크나요?”
주인이 물었습니다.
“당신 나라 한국 제일 부자는 누구입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 주영인 것같습니다.”
“그 분의 재산이 얼마나 되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농장 주인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 분의 돈은 아마도 우리 농장 말뚝값밖에 안 될 것입니다.”
미국이 상상을 초월하게 큰 나라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나는 휴스톤 Nasa에 들렀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내에서 안내원 설명을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우주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크신 분이십니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우주가 큽니다. 지구상에 있는 모래알보다 하늘의 별이 더 많습니다. 빛이 일년동안 가는 거리를 1광년이라고 합니다. 9.5조 km입니다. 가장 가까운 별을 빛의 속도로 가려면 4광년입니다. 이루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런 우주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크실 수 없이 크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작게 여기는 이가 있습니다. 본문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와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40년 동안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서 먹고 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매일 만나만 먹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종살이 하던 애급이었지만 그 곳에서 먹던 음식이 그리웠습니다. 부추, 마늘, 파, 오이, 참외 그리고 고기가 먹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급으로 돌아 가고 싶어 하였습니다. 애급에서 살던 때가 재미있었다고 회상하며 그리워 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 있었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18)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일만 먹을 뿐 아니라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개월 간을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고 함이라 하라”(19-20)
이 말을 듣고 모세가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명이온 데 주의 말씀이 일개월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21-22)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23)
모세는 당시 최고 지도였습니다. 모세는 당시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사람입니다. 신명기 34장 10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 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입니다. 구약에 하나님이 쓰신 믿음의 사람 가운데 16명을 뽑아 넣은 것이 믿음장입니다. 이들은 나무로 말하면 거목입니다. 별로 말하면 거성입니다. 돌로 말하면 거석입니다. 사람들로 말하면 거인들입니다. 40절에 16명을 넣었습니다. 한 사람당 두 절씩 넣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만 7절을 할예하였습니다.
모세는 확실히 믿음의 거성이었습니다. 그런 모세도 크신 하나님은 작게 여길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기를 주신다고 할 때 말했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명이온 데 주의 말씀이 일개월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21-22)
당시 출애급 인구는 약 200만명, 장정만 60만명이었습니다. 보통 두 명이 한 근을 먹는다고 계산하면 한 달 먹을 소가 3000만 마리가 됩니다. 모세는 풀 한 포기 찾기 힘든 광야에서, 소 한 마리가 기를 수 없는 광야에서 그 많은 고기를 하나님이 먹일 수 없다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였습니다. 크신 하나님을 작게 보았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떤 성격의 사람입니까?
1. 과거를 말하지 말고 미래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실패자는 과거를 말하고, 성공자는 미래를 말합니다. 안 되는 사람은 과거를 그리워하고, 잘 되는 사람은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애급 사람들은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과거 고기 먹던 시절을 그리워 하고 있습니다. 부추, 마늘, 파, 수박을 먹으며 노예생활하던 그 시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재미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것을 모두 재미있고 즐겁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은 모두 고통스럽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영국은 지금 시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한 때 대영제국이었습니다. 영국 땅에는 해가 지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계 최 강국이었습니다. 온 세계를 영국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민족이 일본입니다. 영국에 가서 성막 책을 찾으려고 서점에 들러 보았습니다. 책들이 모두 과거 지향적이었습니다.
<대영제국의 흥망> <영국 땅에 해가 지지 않던 시대> <세계를 제패하던 17세기>
모두가 과거지향적입니다. 그러나 일본 서점도 들러 보았습니다. 모두 미래 지향적인 책이었습니다.
<21세기를 전망한다> <21세기 경영 전략> <세계를 제패하는 기업>
모두가 미래 지향적이고 의욕적인 책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 이야기만 하여야 합니다.
어제 재미있었어도 어제는 잊어야 합니다. 어제 아팠어도 어제는 잊어야 합니다. 미래는 우리의 것입니다. 어제는 부도 수표이고, 내일은 약속 어음입니다. 놀라운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잘 되는 믿음의 사람은 과거를 말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개척하여 나가며 지금은 비록 광야같은 어려운 삶을 살고 있어도 내일을 힘차게 개척하여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고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제2차대전 때 헤럴드 레셀이라고 하는 청년이 공수부대원으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어느 날 전투에서 그 청년은 폭탄을 맞았습니다. 두 팔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불구가 되었습니다. 그는 낙심하고 절망하였습니다. 두 팔을 잃어 버리고 살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절망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래도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지 않느냐?”
레셀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기에게는 잃은 것보다 남아 있는 것이 더 많았습니다. 두 눈이 있었습니다. 아직 두 귀가 있고, 두 발이 있었습니다. 정말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아직도 많습니다. 그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나는 잃은 것보다 남은 것이 더 많다. 잃은 것은 겨우 두 팔뿐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다 그대로 남아 있다.”
그는 의사에게 부탁하여 의수를 만들었습니다. 열심히 타이프 치는 것을 연습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내온 생활을 잘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것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화화되었습니다. 그 영화에서는 자기가 직접 주연과 연출을 맡았습니다. 인기가 절정에 올랐습니다.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이 영화가 바로 “우리 생애 최고의 해”입니다. 어느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신체적 조건으로 인하여 절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나의 육체적인 장애는 도리어 가장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잃어버린 것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로부터 받은 것, 얻은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것을 사용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잃은 것의 열매를 크게 보상해주십니다. 더 많은 가능성이 그 앞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말하지 말고 미래를 말해야 합니다. 어제를 말하지 말고 내일을 말해야 합니다. 미래지향적인 사람이 축복을 받습니다.
2. 크게 말하지 않고 더 크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크게 말하는 차원을 넘어 더 크게 말합니다. 모세가 얼마나 크게 말하고 있습니까?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명이온 데 주의 말씀이 일개월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21-22)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23)
양 떼와 소 떼를 잡을 들 족하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 들 족하겠느냐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얼마나 큰 생각입니다. 이 세상에 물속에 있는 물고기를 다 잡는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모세외에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큰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크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람을 불게 하셔서 날라가는 메추라기들을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 사는 곳에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31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편 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 쯤에 내리게 한지라.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민 11;31-33)
하루길은 백리 40 km를 말하고 있습니다. 두 규빗은 1m 가량됩니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1m로 메추라기가 쌓였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모세는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만큼 크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크신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크게 보아도 하나님의 생각만큼 크지는 않습니다.
어느 여자가 산속에서 브래지어를 떨어 뜨리고 잊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날 개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야! 우리 체육관을 누가 만들어 놓았다.”
개미들에게는 브래지어가 체육관처럼 큰 지 모르지만 사람에게는 겨우 젖가슴 하나 가리는 것정도입니다. 시편기자는 말했습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
하나님은 우리가 크게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마음껏 크게 생각하여도 됩니다. 하나님은 못 할 것이 없으신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3. 육적인 것을 말하지 않고 영적인 것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 큰 사람은 육적인 것을 말하지 않고 영적인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부추, 마늘, 파, 수박, 참외가 먹고 싶다.”
“과거가 재미있었다.”
“애급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이 모두는 육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 잘 나가는 사람은 항상 영적인 것을 생각합니다.
2차대전 때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젊은 청년 한 명이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에게 군목이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죽어 가고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 대신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드리지요. 무엇이라고 쓸까요?”
청년이 말했습니다.
“어머니께 제가 기쁘게 죽었다고 써주세요. 조국을 위하여 싸우다가 당당하게 죽었다고 말해주세요.”
그리고 이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리고 편지 한 분에게 더 써주세요. 지금 교회학교에서 저를 가르쳐 주었던 선생님 얼굴이 떠오릅니다. 어렸을 적, 나에게 성경을 가르쳐준 분이지요. 그 분께는 제가 그리스도인으로 죽었다고 써주세요.”
이 말을 하고 그 청년은 눈을 감았습니다. 군목은 그 청년이 말하는 대로 편지 두 통을 써서 보냈습니다. 한 통은 어머니에게 그리고 한 통은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으로부터 회답이 왔습니다.
“편지를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사실 교회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그런데 별로 열매가 없고 지겨워서 한 달 전에 사표를 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편지를 받아보고 내가 한 일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교회학교 선생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무심코 가르치는 것같아도 씨가 뿌려져 죽을 때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육적으로 말하지 말고 영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노(魯)나라의 복부제가 신부라고 하는 마을에 원님으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을 추수 때였습니다. 제(齊)나라 군사가 이 마을에 쳐들어왔습니다. 들에는 곡식이 누렇게 익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말했습니다.
“저 아까운 곡식을 전부 원수한테 뺏기게 되었구나.”
주인이 중얼거렸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적이 쳐들어 오기 전에 내 것 남의 것 가릴 것 없이 아무나 가서 빨리 거둬 오는게 좋겠다.”
그러나 원님은 말리며 말했습니다.
“안 된다. 불을 질러라.”
원님은 부하를 동원하여 밭고 논에 모조리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전쟁 때나 평화의 때나 백성에게 남의 것 공짜로 가지는 버릇을 들여놓으면 나중에 이것을 고치는 데는 10년으로도 어렵다.”
원님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졌습니다. 자기가 노력한 것을 거두워야지 공짜로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불을 질러 버리는 편이 낫다고 여긴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나 밭 주인은 육적인 것만 보았지만 원님은 정신적인 것까지 볼 줄 알았습니다. 축복받은 사람은 육적인 것을 보지 않고 영적인 것을 볼 줄 압니다.
4. 상식을 말하지 않고 믿음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최고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상식적인 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명이온 데 주의 말씀이 일개월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21-22)
모세는 지금 땅위에 양과 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다에 있는 물고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엉뚱하게도 하늘에 있는 새들의 고기를 바람으로 몰아 주셨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 하는 곳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상식적인 분이 아니라 상식을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나는 신림에 있던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김 용기 장로님으로부터 새마을 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박 정희 대통령이 가나안 농군학교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 때 김 장로님은 대통령에게 훈련병이 먹는 음식을 그대로 대접하였습니다. 김치와 깍두기 그리고 된장찌개가 전부였습니다. 정말 먹기 힘든 음식이었습니다. 놀란 것은 대통령 보좌관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박 대통령 자신도 놀랐습니다. 그 때 박 대통령은 김 용기 장로님을 심상치 않은 사람으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가나안 농군학교를 도와 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상식을 초월하신 분이었습니다. 사랍들이 보지 못 하는 곳에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모세는 땅과 바다만 보았지만 하나님은 하늘을 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남다른 데가 있습니다.
1. 과거를 말하지 말고 미래를 말하는 사람입니다.
2. 크게 말하지 않고 더 크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3. 육적인 것을 말하지 않고 영적인 것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4. 상식을 말하지 않고 믿음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영국의 노부부가 근근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쟁중에 독일군의 공습으로 아름다운 집들이 파괴되고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와서 이 불행하게 된 노부부를 위로하였습니다.
“모두 타버렸군요! 참 안 됐습니다.” 이 때 노부부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잃어버리지 않았소! 위로에 감사드립니다. 아직까지 당신들이 남아 있습니다. 집을 지을 수 있는 터가 남아 있지 않소! 더구나 우리에게는 내일을 살 수 있는 건강이 남아 있소. 무엇보다 꿈이 남아 있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남아 있지 않소! 더 더구나 우리에게 날마다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 남아 있지 않소!” 하나님만 믿고 내일을 향해 굳굳히 나가십시오. 승리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민 11:16-23 / 김원효 목사
애급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가다가 그만 고기가 먹고 싶어졌습니다. 이때 “하나님, 고기가 먹고 싶어요. 고기 좀 주세요.” 하고 기도하면 될 것을 가지고 고기가 없다고 모세를 향하여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스트레스를 받아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내가 이 백성을 잉태하였습니까? 내가 이들을 낳았습니까?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이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가로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주여, 구하옵나니 즉시 나를 죽여 나로 이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11:11-15)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의 기도를 듣고 모세에게 대답합니다. “모세야, 너에게 임한 신을 70인의 장로들에게도 부어 주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지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내일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 것이라.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일만 먹을 뿐 아니라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개월간 먹게 하리라.”(민11:16-20)
그러자 모세가 이 말씀을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이 순간적인 의심이 들어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남자 보행자만 해도 60만 명이요, 거기에다 부녀자와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합치면 수백만 명이온데 이들을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시다니요?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민11:21-22)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합니다. “모세야,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민11:23) 여러분, 하나님의 손은 권능을 의미합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손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손입니다.
하나님이 손을 한번 내미시면 죽은 사람도 살아나고, 어떠한 문제도 풀어집니다. 하나님이 한번 손을 내밀면 온 세계가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애급에서 430년 간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킨 것도 하나님이 권능의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요. 홍해수를 가른 것도 하나님이 손을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손을 한번 움직이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모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모세는 일개월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며 “어찌하여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사오리까?” 하고 하나님께 반문하는 전혀 모세답지 않은 의심의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이 일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아주 쉬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람을 일으켜 바다에서 메추라기 떼를 몰아서 이스라엘 진영에 떨어뜨리니 하룻길 되는 지면 위에 90cm 가량 메추라기가 쌓이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캘거리 시내에 온통 90cm의 메추라기가 쌓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메추라기들은 너무 지쳐서 도망가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고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메추라기를 손으로 주워 모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메추라기를 잡기 위한 그물도 필요 없고, 특별한 기술도 필요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을 우리 인간들은 감히 생각하지 못하기에 때로는 모세처럼 순간적인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너는 왜 나를 믿지 못하느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지 않느냐? 그리고 너는 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냐?”
여러분,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을 통하여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수없이 고백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순간적인 의심이 들어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존심을 건드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미음이 떨어져 그만 낙심하고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때로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순간적인 의심이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더구나 인간의 힘이나 능으로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일을 기대할 때에는 더욱 큰 의심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세요. 하나님이 75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리라고 했는데 25년이 지난 100세가 되어서야 약속의 아들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사이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순간적인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내 사라가 아닌 사라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스마엘이란 아들을 낳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하나님께 약속의 자손을 얻는 믿음을 완전히 포기하고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내 집에서 길리운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창15:2-3) 즉 “하나님이 꼭 아내 사라를 통하여 자손을 주지 않아도 제 2의 방법, 즉 차선으로 대신합시다.“ 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의심으로 뭉개버리는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밤중에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이 많은 별들을 내가 만들었지 않느냐? 앞으로 너의 자손도 이와 같이 많아지리라.”(창15:5) 그러자 아브라함은 순간적인 의심을 떨쳐버리고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다시 믿자 하나님은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크게 기뻐하셨습니다.(창15:6) 그리고 결국 아브라함은 자신의 나이 100세에, 그리고 아내 사라의 나이 90세에 기적적으로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큰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 때로는 큰 의심의 파도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적인 의심의 파도를 이기지 못하면 신앙의 배는 파선하고 맙니다. 순간적인 의심을 쫓아내지 않으면 그 의심이 나를 점령하여 마침내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거나 끊어놓고 맙니다. 그러므로 큰 기적, 큰 축복을 얻으려면 순간적인 의심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비록 내 머리로 납득이 되지 않고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성경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솜씨를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추라기 떼를 보내어 일개월간 질리도록 고기를 먹게 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먹이시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좋은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고로 하나님께 좋은 것을 얻고 하나님의 솜씨와 기적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로는 순간적인 의심이 들어와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사오리까?” 하고 하나님께 반문하다가도 이러한 순간적인 의심을 단호히 물리치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을 많이 봅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즉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기적을 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시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손을 들어 기필코 저와 여러분에게 복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주신 하나님이 마침내 이스라엘 진영에 메추라기 떼를 보내신 것 같이 이곳에도 하나님의 백성들로 가득히 보내주실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결코 짧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은 결코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권능의 손을 내미신 하나님이 이곳 캘거리에 사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권능의 손을 내미십니다. 고로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기적이 일어납니다.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사59:1-2)
즉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에게 권능의 손을 내밀려고 해도 죄악의 담이 가로막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십시다. 나의 잘못을 고백하십시다.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아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요, 이 세상에서 가장아름다운 일이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권능의 손을 내미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신 첫 마디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즉 회개하면 지옥도 변하여 천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회개가 변화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회개치 아니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칼을 갈으시고 죽일 기계를 준비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외국 땅에서도 하나님의 솜씨, 하나님의 기적, 하나님의 역사를 반드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그래야 너와 내가 약속하신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우리는 순간적인 의심을 떨쳐냅니다. 다시 한 번 “주여, 제가 믿습니다.” 하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더 나아가 “주여, 제가 회개합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고백합니다. 아무쪼록 오늘도 정직하고 겸손하게 나아가는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이 각자에게 예비하신 좋은 것을 얻는 기적의 자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모세의 영적 침체
민 11:16 –23, 롬 8:38-39 / 이정익 목사
미국에서 기업 수천 개의 흥망성쇠를 연구한 연구기관이 있습니다. 연구하면서 한 가지 원리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브랏 법칙“입니다. 연구결과 30년전 100대 기업이 30년 후까지 생존한 기업은 14개뿐이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는 사이 또 100여개의 기업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흥망성쇠입니다. 이 말은 내일을 장담 못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잘 나가는 기업도 내일을 장담하지 못합니다. 오늘 성공한 인생도 내일도 성공하리라고 장담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유연성이 떨어지고 그 시대를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지혜가 부족하면 여지없이 탈락합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입니다. 언제나 기분이 업 되고 충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일은 고갈되고 침체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몇 주 동안 이런 영적 침체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먼저 모세의 영적 침체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모세는 출애굽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모세는 백성 앞에서 화려했습니다.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침체기를 맞습니다. 상상이나 할 일입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죽여주소서” 하고 넋두리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모세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세의 모습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군림하는 모세
모세가 애굽으로 가서 바로에게 우리 민족을 보내달라고 말합니다. 바로는 어림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 순순히 보내줄 바로가 아닙니다. 그래서 모세는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제압합니다. 바로는 꼼짝 못하고 모세에게 항복합니다.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이끌고 일사천리로 애굽을 탈출하게 됩니다. 그때 애굽인들도 감동받고 많이 따라나섰다고 했습니다. 모세 같은 권위가 우리에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모세는 지팡이 하나를 들고 다니며 그 지팡이로 가리키면 그곳에 불이 일어났습니다. 바위에서 생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바다가 갈라졌고 하늘에서 우박이 내렸습니다. 홍해 앞에 당도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 놓여있고 뒤에는 애굽군대가 추격해 오고 있습니다. 순간 모세가 손을 들자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무사히 백성들을 이끌고 건넙니다. 애굽군이 따라오다가 모두 물에 떠내려갑니다. 얼마나 통쾌한 모습입니까.
그 모습을 보고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모두 일어나 춤을 추며 노래를 부릅니다. 그때 얼마나 영적으로 충천했습니까. 그런 모세 앞에 백성 누가 도전을 하고 거역을 하겠습니까. 그때 모세가 실패할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안 되는 일입니다. 사람에게는 이런 때가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큰소리를 치고 언제나 자신감이 넘칩니다. 사업이 좀 잘되면 기고만장합니다. 그래서 큰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그의 앞에 실패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항상 성공만 하였습니까. 항상 승리만 있었습니까. 성경은 서 있을 때 조심하라고 말씀합니다. 자칫하면 다음 차례는 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계점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을 계속합니다. 시내광야를 지나 바란 광야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침체에 빠지는 모습이 민수기11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5절을 보면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받는 것을 보지 않게 하소서”하고 한탄합니다. 모세가 이렇게 한탄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백성들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라고 말씀합니다. 백성들이 원망했고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지친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은 공동체로 하여금 병들게 합니다. 지도자로 하여금 사기를 떨어뜨리게 합니다. 그리고 전진을 가로막는 걸림돌 역할을 합니다. 그때 누가 불평을 했는가 하면 4절을 보면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다른 인종은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이 내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형통하게 하실 때 애굽인들과 타 인종들이 그 모습을 부럽게 보고 느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함께 나왔습니다. 출애굽기12장38절을 보면 “수많은 잡족들이” 그랬는데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이 왜 불평을 했는가 하면 4절을 보면 “그들이 탐욕을 품었다“고 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4-5)하고 원망합니다. 그랬더니 4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도 울며 ...불평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 이스라엘 민족들 즉 잡족들이 충동질 하고 불평을 주도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라서 울며불며 고기를 달라고 불평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배가 고파서 불평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만나를 먹고 있을 때 고기를 달라고 불평하였습니다. 10절을 보면 “백성의 온 족족들이 각기 자기의 장막 문에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소수의 잡족들이 불평을 시작하니까 그 불평이 점점 확대되어 “나중에는 백성의 온 족속들이 자기 장막 문에서 울었다“고 했습니다.
데모하는 것을 보면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몇 명의 시위대가 시위를 시작합니다. 그러면 얼마 안가서 시위대가 시청 앞 광장을 메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모세가 보았습니다.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여기가 광야인 것도 모르고 고기를 달라고 불평하면서 울고 앉아있는 백성들이 무지하고 철없게 보였을 것입니다. 순간 모세가 힘을 잃습니다. 지칩니다. 사기를 잃습니다. 너무 힘겨운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한탄합니다. 11절을 보면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모세가 마침내 감정을 폭발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까지 백성들이 하는 짓을 보니 정이 떨어졌었는데 오늘 모습을 보니까 완전히 정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탈진합니다. 기진맥진 합니다. 모든 힘을 소진합니다. 만사가 귀찮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소연을 한 것입니다.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를 죽여 내가 고난당함을 보지 않게 하소서“(15). 그 말은 한마디로 “죽고 싶다”는 말입니다.
오늘 모세의 모습은 어제의 모습과 너무 다릅니다. 이것을 탈진이라고 합니다. 번 아웃되었습니다. “기름이 소진되었다” 그 말입니다. 부모들이 하나도 아니고 여러 아이가 한꺼번에 속을 썩일 때 하는 말이 “자식이 원수여”, “무자식 상팔자여”라고 말합니다. 욥이 “내가 태어났다고 모두 좋아하던 날 죽었더라면”하고 탄식합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의 도전을 받고 “내가 족하오니 죽여주소서!”하고 탄식합니다. 똑같은 말입니다. 사람의 일생은 항상 평온한 것이 아닙니다. 큰소리치면 안 됩니다. 조금 성공했다고 자만해도 안 됩니다. 모세의 그 권위, 기적, 능력, 애굽의 바로를 이기고 여기까지 백성을 끌고 옵니다. 모세는 권위 있는 강력한 지도자였습니다. 카리스마가 넘칩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불평 불만할 때 탈진합니다. 그리고 “죽여주소서”하고 하소연을 합니다. 사람은 이런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든지 큰 소리 치면 안 됩니다. 내가 언제 어떻게 될지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원인
모세의 영적 침체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과로와 격무 때문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능력을 소유한 사람일지라도 자기 능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혼자 일 못합니다. 하나님도 혼자 일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혼자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우리를 부르신 것이고 제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혼자 일했습니다. 혼자 권위적으로 일하고 나를 따르라고 호령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면 곧 한계가 오게 됩니다. 격무는 사람을 지치게 만듭니다. 오늘 혼자 일하는 스타일이 있습니다. 회사나 교회에서 일을 독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일하는 사람은 가장 서툰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입니다. 모세가 격무 때문에 한계에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능력 있는 지도자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일하며 움직이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우리들에게도 제자들에도 일을 맡겨 놓으시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능력을 주시고 감당하게 하십니다.
극복방안
그러면 모세는 그 침체를 어떻게 극복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해결방안이 3가지입니다. 하나는 업무 분담입니다. 16-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백성중 지도자 될 만한 사람 70명을 데리고 오라 내가 그들에게 영을 주어 네 짐을 담당하게 하리라“. 이것이 오늘날 장로제도의 시초입니다. “그들이 너를 도와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모세는 그 위기를 업무 분담으로 해결하게 합니다. 즉 백성들의 불평을 70명의 장로들이 함께 담당하여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동안 모세 혼자서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재판도 혼자 하였습니다. 그곳에 장정만 60만 명이 모였습니다. 일반인까지 포함하면 300만 명이나 되었을 것입니다. 가축들은 모래처럼 많았습니다. 울타리도 없이 300만 명이 모여 광야에서 하루 저녁 잠자고 나면 그동안에 무슨 일인들 없었겠습니까. 그러면 다음날 모세 혼자서 재판을 하였습니다. 뙤약볕에서 백성들은 길게 줄서 있었고 모세는 혼자 듣고 판결하였습니다. 일을 이렇게 혼자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몸과 마음과 영이 피곤해지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피곤해지면 짜증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모세가 불평불만을 듣게 됩니다. 모세는 그 순간 탈진하게 되고 침체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분담이 필요합니다. 집안 가사도 교회일도 기관 일도 서로 분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담에 참여자가 많은 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이것은 그 공동체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거기에 능률이 있습니다. 적당한 쉼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팔짱만 끼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또 뒤에서 불평불만을 많이 합니다. 고로 그 공동체가 약화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백성에게 응답하셨습니다. 18절을 보면 “고기를 실컷 한달 동안 먹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모세의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반가워서가 아니고 기대감에서도 아닙니다. 너무 하나님 말씀이 황당해서 입니다. 그래서 22절에서 말하기를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 즉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즉 족하리이까”하고 말합니다. 모세는 그 정황에서도 “왜 불가능한 말씀을 하십니까” 하고 항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이 장정만 60만 명인데 노약자 여자 아이들까지 하면 300만 명 이상이 될 것인데 무슨 재주로 그들에게 싫도록 코에서 고기냄새가 날 때 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피곤하고 짜증나고 탈진한 것입니다. 탈진이라는 말은 영적 침체라는 말입니다. 지금 모세의 귓전에는 백성들의 불평불만 소리만 들리고 있습니다. 물을 달라, 고기를 달라 아우성 소리만 듣고 있습니다. 지금 몸도 마음도 피곤에 지쳐 있는데 고기를 달라는 그 불평소리에 순간 질려버렸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만 마음속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어제의 기적, 어제의 감격과 놀라움과 은혜는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엊그제 있었던 출애굽의 기적이나 홍해를 건널 때 나타났던 기적들은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고 오늘 아침도 그것을 먹었습니다. 지금 불기둥과 구름기둥 밑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도 그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 또 기적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 순간 깜짝 놀라서 “왜 불가능한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하고 항변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영적으로 침체에 빠지면 인간적이 이렇게 됩니다. 그러다가 우리 앞에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엊그제의 기적, 미래의 소망도 다 잊게 됩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침체하게 되면 신앙의 눈이 멀게 됩니다. 오늘 가정에 큰 문제가 발생하면 감당하기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 주어진 현실은 훨씬 더 크게 보입니다. 더 무섭게 보입니다. 더 감당하기 어렵게 보입니다. 영적 침체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빨리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을 분담시키셨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고 쉼의 여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백성에게 고기를 먹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불평불만을 야기한 사람들의 징계입니다. 31절을 보면 하나님은 바람으로 바다의 메추라기를 끌어오십니다. 메추라기는 철새입니다. 그 지역은 철새 이동지역입니다. 하나님은 동남풍을 이용해서 철새들을 몰아오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룻길 즉 32km 정도의 넓은 지역에 두 큐빗 높이 즉 1m 높이로 쌓였다고 했습니다. 32절을 보면 “백성들이 메추라기를 주어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고 했고 33절을 보면 “고기가 아직 이사이에 있을 때에 진노하사 큰 재앙으로 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34절을 보면 “욕심을 낸 백성들을 거기에 장사지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모세에게 불평 불만한 것을 모세에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한 것으로 해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한 것으로 해석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문제를 징계로 마무리 하신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불평불만을 주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불평불만은 모세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섭게 책임을 물으신 것입니다. “아직 고기가 이사이에 있을 때에 진노하사 큰 재앙으로 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불평불만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평불만은 영을 병들게 합니다. 그리고 전염되게 합니다. 또 공동체와 지도자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누가 됩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또 사역은 즐겁게 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침체에 빠지면 이 즐거워야 할 사역이 고통의 사역이 됩니다. 하나님을 위한 사역이나 헌신은 즐거운 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영적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안의 영적 고갈을 막아야 합니다. 자동차의 기름이 바닥나기 전에 주유해야 합니다. 영적 은혜가 고갈되면 그때 일이 발생하면 감당을 못합니다. 오늘 현대의 신앙인들은 이 영적 탈진을 조심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의 탈진이 어디서 오는가 하면 업무의 과중에서 옵니다. 사람의 인체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무시하고 계속 과도하게 일하면 영적 탈진이 오게 됩니다.
문제는 영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충만한 상태는 사도바울의 경우입니다. 로마서8장38-39절을 보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아주 신나는 고백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의 줄에서 끊으리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것이 영적으로 정점에 있을 때 나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런 사람 앞에 무슨 장애물이 있겠습니까. 이런 충천하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민 11:16-23 / 변한규 목사
♬ 옛날 유대사람들은 자기나라 애굽 땅을 떠나 가나안에 갔다네 ♬ 유년주일학교에서 어린이들이 부르는 어린이 찬송 한 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출애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행진이 그렇게 평탄하지만은 아니했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왔고, 흉흉한 바다 홍해가 가로막히기도 했습니다. 광야의 굶주림, 견딜 수 없는 목마름, 그칠 줄 모르는 이방 족속의 전쟁 등, 그야말로 강 건너 강이요, 산 넘어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할 때마다 그들을 도우시는 큰손이 있었습니다. 넘어질 때에 일으켜주시고, 물에 빠졌을 때에 건져주시고, 목이 말랐을 때에 목마르지 않게 하시고, 배고플 때에 주리지 않게 하신 손입니다. 본문은 이 손을 여호와의 손이라고 했습니다. 출애굽 역사를 보면 여호와의 손이 바닷물을 가르고 원수들을 수장시키고 여호와의 손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의 백성들이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여호와의 손 역사이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바위를 쪼개서 생수를 쏟아 이스라엘의 갈한 목을 시원케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만나를 하늘로부터 내리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리지 않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찌했습니까? 여호와의 손에 대하여 감사할 것을 잊어버렸고 또 여호와의 손이 보여주었던 능력도 이적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배가 고팠을 때에 불평을 털어놓았고 지도자 모세까지 원망을 했습니다. 그들의 원망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배가 고팠을 때는 ‘애굽의 고기가마가 그리웁다’ 했고 목이 말랐을 때는 ‘애굽의 나일강으로 돌아가자’ 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사정없이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모세를 원망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로다. 그럴 때마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곤 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제하여 주소서.” 모세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이스라엘의 죄악을 용서해 달라고 애끓는 기도를 끊임없이 했습니다. 심지어는 “하늘 생명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도 좋사오니, 오 하나님이여! 이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한 것입니다. 본문 민수기 11장의 내용과도 흡사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고 가데스로 향하는 도중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잔뜩 욕심을 부렸습니다. 욕심이 무엇입니까? 분수에 넘치는 것이요, 정도에 지나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불평하면서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 욕심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려주신 일용할 양식, 이것은 그들에게 만족했던 것입니다. 하늘의 만나가 아침마다 그들의 장막 근처에 수북히 쌓이게 됐는데 불평이 왠말이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욕심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민 11:4-6), 이렇게 욕심을 부리며 불평을 쏟아 놓았습니다. 이 내용을 간추려보면 네 가지입니다. 첫째, 육식을 먹게 하라입니다. 만나만으로는 싫다, 그러니 고기를 먹게 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해물을 먹게 하라입니다. 여기 생선이란 말이 그 뜻입니다. 그들은 산 속에서, 광야에서 바다고기를 구한 것입니다. 셋째, 과실을 먹게 하라입니다. 외와 수박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어려운 환경인데도 불구하고 비타민을 먹게 하라, 냉장고에 넣은 시원한 과실을 먹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넷째, 자극적인 음식도 달라입니다. 부추와 마늘과 파가 그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먹지 못해서 정력과 기력이 감퇴되었다고 불평을 쏟아놓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만은 싫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11절 이하에 보면 내용이 이렇습니다. “하나님, 이스라엘백성으로 하여금 고기를 좀 먹게 하옵소서”, 그때의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냐, 네 말대로 고기를 먹게 하리라.” 그리고 말씀했습니다.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 일만 먹을 뿐 아니라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 개월 간을 먹게 하시리니”(19-20절). 그때에 모세는 어찌했습니까? 하나님께 반문을 했습니다. “백성의 보행자만도 육십만 명이나 되는데 그 수를 일 개월 동안이나 고기를 먹이신단 말씀입니까? 양떼와 소 떼를 다 잡아도 부족하고 바다에 있는 고기를 다 한 곳에 모아도 부족하겠습니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그리고 말씀했습니다.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이 시간 말씀의 주제입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줄어졌단 말이냐?, 하나님의 사랑이 식어졌다는 말이냐?, 하나님의 보호가 멀어졌다는 말이냐?’ 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물으십니다. 나의 기도에 응답이 없다고 낙망할 때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하십니다. 사업에 실패하고서 불안해하며 근심하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하십니다.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를 책망할 때에 주신 말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권능이 감퇴되었다는 말입니까? 반석을 쳐서 생수를 샘솟듯하게 하신 그 능력이 줄어졌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묻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8) 했는데 그 약속이 달라졌다는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했는데 잘못 기록된 말이란 것입니까?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약속하셨는데 예수님께서 그 약속을 어기셨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시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나의 하나님입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모세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다니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러니 여호와의 손이 짧아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구하는 자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하늘의 만나를 주시고 메추라기를 주십니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5). 사랑하는 성도여, 각자의 소원이 만족하게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성도의 삶이 독수리같이 새롭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하셨는데 정말 짧아질 수가 있습니까? 아니면은 아멘 하십시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사 50: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사 59:1)도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다고 원망하지 말고 먼저 내가 만든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은 이 담을 허는 시간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생의 손이 어떠합니까? 저마다 우리 손들을 한 번 만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강건한 이 손을 만지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마다 인생의 손들은 불쌍한 손이요, 병든 손이요, 피곤한 손이요, 약한 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이 붙잡아 주실 때에 누구의 손도 강한 손 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향하여 당부하십니다.
첫째 네 손을 대어라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막 5:28).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한 한 불쌍한 여자가 그의 손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그 병이 나을 줄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의 혈루증은 육체적으로 심한 고통을 앓게 했고, 사회적으로 부정한 인생 취급을 받게 했습니다. 이 여인의 손은 약한 손이요,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손입니다. 천대받은 손이요, 남존여비의 손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의 손은 믿음 손입니다. 그래서 약한 손 같으나 강한 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 여인은 믿음 손 때문에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병들고 버림받고 쇠약하고 보잘 것 없는 손이라도 여호와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강한 손 될 수 있습니다. 축복 받는 손 될 수 있습니다. 내 손으로는 나의 질병을 고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손으로는 능치 못할 것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의 손이 믿음 손 되어 질병에서 해방 받는 복된 시간이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네 손을 내밀라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막 3:5). 네 손을 내밀라, 누가 누구에게 주신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한편 손 마른 병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병자는 한 편 손을 쓸 수 없게 됐습니다. 피가 통하지를 않습니다. 쓸모 없게 됐습니다. 이름만 손이지 무용지물입니다. 그런데 병자가 이 병든 손을 예수님께 내밀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 마른 손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축복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손은 악수할 때에 사용합니다. 이때의 손은 사랑의 손이요, 교제의 손입니다. 손은 수고할 때에 사용합니다. 이때의 손은 봉사의 손이요, 구제의 손입니다. 손은 기도할 때에 사용합니다. 이때의 손은 기도의 손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여, 내 손 좀 보세요,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사랑의 손이 마르지는 아니했습니까? 나의 봉사의 손이, 구제의 손이 마르지는 아니했습니까? 나의 기도의 손이 마르지는 아니했습니까? 이 시간 내 병든 손, 예수님께 내미는 시간이기를 축원합니다.
갓난어린이가 핏덩어리로 태어나서 어떻게 자랍니까? 꼭 한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손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손이 핏덩어리를 안고 닦아주고 씻겨주고 젖꼭지를 물려주고 옷을 입혀주고 어루만져 주어서 무럭무럭 성장합니다. 누가 그 어린아이를 엄마의 손에서 빼앗을 수가 있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롬 8:35). 예수님의 손은 우리 모두에게 젖꼭지를 물려주신 손이요, 병들었을 때에 어루 만져주고 약을 먹여주신 손입니다. 넘어졌을 때에 붙잡아 주시고 일으켜 주신 손이요,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품어주는 손입니다. 그 예수님이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 여기 한편 손 마른 사람, 그가 농부였다면 쟁기를 잡고 밭 갈 수가 없었고, 그가 어부였다면 그물을 던져 고기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은혜로 고침을 받은 후에는 일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가 피아니스트였더라면 이제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되었고 그가 석공이었더라면 이제 석공소 간판 걸고 두 손으로 망치를 잡으며 돌을 깨고 다듬을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구경꾼 인생이 아닙니다. 노동자 인생입니다. 포도원같은 세상에 오전 9시에 태어났던지, 12시에 태어났던지, 일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군을 기다리는 포도원 동산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모두가 손 마른 자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예수님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사람은 어찌합니까?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착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보통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면 됐지 그 이상 무슨 일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했습니다. 성도는 빛노릇을 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했습니다. 성도는 소금노릇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손이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사랑, 봉사, 노동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4:11).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 128:2).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 10:4).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하나님께서 주신 손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한 일을 어떻게 많이 할꼬, 이것이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까? 심방할 때에 어떤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문턱에 부딪혀 넘어져서 고생하고 있는 할머니입니다. “할머니,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손이 빨리 나아서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일 안 했다고 이런 벌을 받나봐요”, 덧붙여 말했습니다.
독일 어느 작은 마을의 일입니다. 전쟁으로 파괴된 교회를 개축하는데 마당에 세운 예수님 동상도 상처를 입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이 달아났습니다. 당회에서 결의하고 없어진 예수님의 손을 만들어 붙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 손을 만들지 말라’는 음성입니다. 목사님은 곰곰이 생각하고 그 뜻을 깨달았습니다. 당회원 모두의 양해를 구하고 예수님 손 만드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대신 예수님의 동상 밑에다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동상의 예수님은 손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손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손이 예수님의 손을 대신하여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의 손이 예수님의 손을 대신하고 우리의 손이 예수님의 원하시는 선한 일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네 손을 올리라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출 17:11). 아말렉과 전쟁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승하고 손을 내리면 패했습니다. 모세의 손에 신통력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모세의 손이 요술쟁이 손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네 손을 들라는 말은 네가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었다는 말은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승리의 비결이 기도라는 뜻입니다. 여기 손을 든다는 말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항복합니다 뜻입니다. 총을 겨눈 사람 앞에서 두 손을 드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는 붙잡아 주소서 뜻입니다. 고난 당한 사람이 무인도에서 헬리콥터를 보고 손을 들어 구조를 청한 것과 같습니다. 셋째는 승리를 확신합니다 뜻입니다. 출전하는 선수가 반드시 이기고 돌아오겠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 V자를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또 승리했을 때에 손을 들고 만세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모세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믿음의 기도를 들였습니다. 또 모세는 기도할 때 하나님만 의지하고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게 하옵소서, 이것이 모세의 자주들인 기도입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을 방해하는 모든 것 아말렉이 아닙니까? 우리 모두는 기도 할 때 용기를 잃지 말고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낼 수 있다, 승리는 우리 것이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모세는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할 때 주머니에 손을 넣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팔짱을 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턱을 고이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가능하면 모세처럼 손을 들고 기도하면 더욱 은혜가 되어질 것입니다. 모세의 손은 기도하는 손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승리했고 내려가면 실패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하면 승리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말입니다. 기도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길이 뚫릴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축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아니하면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마귀를 추방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이적 만날 수 없습니다. 축복을 받아낼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물어야 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의 말대로 정말 하나님의 손이 짧아졌는가? 결코 아닙니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단 말인가? 그럴 수 없습니다. 현대의 교회는 아론과 훌이 없어도 그만인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만일 아론과 훌이 없었다면 모세의 기도가 중단되었을 것이요, 또 모세의 기도가 중단되었더라면 이스라엘에게 승리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어야 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아론이냐?, 누가 훌이냐? 믿음 있는 사람이면 아론될 수 있고 훌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외쳤습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온 성도가 지금 믿음으로,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만도 않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도 같은 질문을 주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세상은 고해와 같습니다. 어찌 풍랑이 없겠습니까? 풍랑을 만나서 우왕좌왕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사업에 실패하고 직장을 잃어버리고 낙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더러는 성공하고 기고만장할 때가 있고 부자가 되어 오만을 부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기도하는 성도 중에 더러는 응답이 없다고 자포자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건강문제, 자녀문제, 전도문제, 생활문제 등으로 염려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벧전 5:6-7). 열심히 기도하지 못하는 성도가 있고, 기도를 중단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기도는 하는데 묵념하고 고개를 드는 성도 있고, 형식으로 외식으로 고개를 숙였다가 드는 성도도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왜 기도가 그 모양이냐?
왜 성전을 건축합니까? 왜 성전에 나옵니까? 우리 성전 입구에 이 본문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사 56:7).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을 건축하고 기도하기 위해서 오늘도 성전에 나왔습니다. 물론 기도는 가정에서 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할 수 있고, 공원에서도 할 수 있고, 시장통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어디입니까? 성전이 아닙니까?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요,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24시간 기도소리가 끊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 세 번씩 성전을 찾았습니다. 제3시, 제6시, 제9시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성전을 찾았습니다. 성전에 나올 형편이 안될 때는 성전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아말렉을 물리칠 수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