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2일 시민권
신학을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 고학년 형제들과 대화하던 중에 한 형제가 나를 놀리느라고 그런 머리로 어떻게 이 어려운 신학을 공부하겠냐고 했다. 맞는 말이다. 신학은 철학보다 더 추상적인 학문이다. 자연과학은 실험이나 숫자로 자신의 이론과 주장을 증명해서 자연현상을 이해해 갈 수 있지만 신학은 증명이 되지 않는다. 어찌 보면 그저 주장만 있는 거 같아서 믿음을 강요받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사이비 종교는 기적을 조작하거나 미래의 벌로 위협을 하는 걸 거다.
그래서일까, 종교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으로 믿으면 되지, 뭐 그렇게 성당에 자주 가냐.’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믿음은 마음 어딘가에 있으니 맞고, 믿음에 따르는 삶이 없거나 증언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의미가 없으니 틀리다. 좋은 음악으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상담이나 치료센터에서 도움을 받으면 되지 굳이 거창하게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될 거다.
말 잔치 같은 신학에 회의가 들어 그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내 믿음에 대해 내 자신에게 묻기 시작했다. 신앙과 신학은 같지 않다. 신앙이 없어도 신학 공부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신앙이 하루하루 나의 일상 그리고 죽음과 무관하다면, 단지 마음의 평화와 감성적인 위로를 주는 것뿐이라면 신앙은 낭비고 사기다. 신앙에 회의가 들고 의심이 생길 때마다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주며 달래곤 했다. ‘수많은 성인이 너보다 똑똑하지 못해서 그렇게 바보 같이 살았겠니? 순교자들이 광신자이거나 박해자들에게 맞서 싸울 줄 몰라서 목숨을 내놓았겠니? 하느님이 출타 중이시거나 주무시느라고 그들의 기도를 못 들으셔서 그들을 죽음에서 구하지 못하셨겠니? 카리스마에 카리스마가 넘치는 능력자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을 피하지 않은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오늘 첫째 독서에서 풍요의 신인 바알을 섬기는 예언자들 450명이 비를 내려달라고 온종일 기도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에 엘리야의 청원에 하느님은 도랑에 흘러넘치는 물과 제물을 한 번에 다 태워 없애셨다. 하느님은 살아 계시다. 나에게 대박 나는 길을 알려주시거나, 병이 하룻밤에 낫는 기적을 만들어 주지 않으시지만, 하루하루 당신 계신 곳으로 나를 이끌어 가신다. 외국 사람이 한국 시민권을 얻기 위해 언어와 문화를 열심히 배우는 거처럼 하늘나라 시민권을 받기 위해 하루하루 조금씩 예수님을 배워 나간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지만 이 배움에는 분명한 끝이 있다. 그분 말씀은 세상 끝 날까지 한 자 한 획도 바뀌지 않을 것이고, 약속대로 나를 맞아주실 것이다. 그날은 내 배움이 완성되는 날이 아니라 더 이상 배우지 않아도 되고 의심과 고민으로 고통받지 않는 날이다.
예수님, 세상이 말하는 그런 기적일랑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나 보여주십시오. 제게는 더 굳건하고 깊고 순수한 믿음을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이 제 앞에 있어 저는 이 순례를 잘 마칠 수 있습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