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8일(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예수 성심
예수님 마음은 하느님 마음이다. 행동이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여주는 거처럼 예수님 삶이 하느님 마음을 보여준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자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마태 8,2-3). 복음은 아주 간단하게 보도했지만 그 당시 이는 큰 사건이다. 나병환자는 다른 사람들과는 물론이고 가족과도 떨어져 지내야 하는 접촉불가의 큰 죄인이었다. 그런 그가 율법의 경계를 넘어 예수님께 다가왔고, 그는 살았다.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르코 복음은 그를 보고 예수님이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그렇게 해주셨다고 한다(마르 1,41). 예수님 마음, 하느님 마음은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다. 맹자도 측은지심이 인(仁)의 시작이라고 했다. 연민은 하느님 마음을 참 많이 닮았다. 하느님 마음은 그 이상이겠지만 우리는 그 정도밖에 알아들을 수 없다. 분명 그 이상이라고 단지 믿을 뿐이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는 마음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아니 하느님을 만나도 모를 것 같다. 나는 하느님이 아니니까.
나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바랄 수밖에 없는 죄인이다. 죄는 사랑의 하느님과 나를 분리한다. 죄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죄짓지 않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왜 이럴까? 인간은 참으로 나약하다는 고백 말고는 다른 답을 찾지 못한다. 당신이 가장 공들여 만든 피조물인 사람에게 지극한 연민을 지니실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그 나병환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말고 사제에게 나은 몸을 보여 가족과 공동체의 품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그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 죄인을 위해서 당신 목숨을 내놓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도 나병의 원인을 잘 모른다. 지금은 그 누구도 그가 죄를 지어 나병에 걸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른다. 바오로 사도도 같은 고백을 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로마 7,15).” 학자들은 어렸을 때 받은 상처 때문이라고 한다.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수백 년 동안 지워지지 않는 거처럼 그 사건의 아픔과 교훈이 고스란히 내 안에서 나만의 삶의 법칙으로 자리 잡았다는 거다. 그러니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수백 번 들어도 잘 믿기지 않는다. 내 구원의 99.99%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다. 그 나머지 내 몫은 이 보잘것없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거다. 그 믿음이 예수 성심, 하느님의 연민과 닿게 한다. 그래서 나는 산다.
예수님, 주님의 성심으로, 주님의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의 마음으로 저를 인도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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