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과 정수
제16차 정기 답사(안)
"주왕산 단풍 그리고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1. 답 사 일
: 2003년 10월 25-26일 (1박 2일)
2. 답사
장소 : 양반문화의
고장 안동 그리고 단풍이 물든 주왕산
3. 여행
일정 :
10/25일
(토)
07:20 압구정 현대백화점
공영주차장 집결
07:30 압구정 출발 (3호선 6번 출구: 민산관광)
(개별차량으로 오신
분들... 병산서원 합류)
11:00 병산서원 답사
12:00-13:00 점심식사...
병산민속식당... 안동 간고등어 (054-853-2589)
13:30-14:30 풍산 한지 공장 견학 및 한지 체험
(054-858-7007)
15:00-16:30 봉정사 답사
17:00-17:20 제비원 석불
18:00 안동예절학교 도착 (054-841-0511)
18:30-20:00 저녁식사 및 휴식
20:00-11:30 여흥의 시간. 퀴즈, 가수왕 뽑기 등등...
기대하시라...
11:50 꿈나라
10/26 (일)
05:00 기상
06:00-06:30 아침식사
07:00 안동 출발
08:30-12:00 주왕산 산행 (제3폭포까지... 평탄한
길임)
12:00-13:00 점심식사
13:30-14:30 주산지
14:50 정리 및 마감 인사 그리고 출발
21:00 서울 도착 예정
* 긴급 전화번호
이종원 016-219-6001
21C승리 016-322-9429
버섶 011-9551-0103
민산관광 김종석 기사님 016-745-5966
|
* 7세 미만 아이와 노약자는
답사 진행상 참가할 수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4. 답사
인원 : 버스 45명 /
개별차량 45명 (총 90명)
5. 이번
답사여행의 특징
가.
가을 단풍의 백미인 주왕산을 방문합니다. (제3폭포까지...)
주산지는 사진작가들이 꿈꾸는 곳이지요. 4계절을
인생에 비유,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을 그린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촬영장소이기도 합니다.
나. 토요일은 양반문화를 느낄 수 있는 안동지역
답사를 갑니다. (병산서원-봉정사-제비원석불)
특히 이번 답사에는 한지 공장을 견학하고 한지를
직접 만들어 보는 체험을 합니다.
다. 숙소는 안동예절학교로 정했습니다. 폐교를
개조한 곳인데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회원들과
여흥의 시간을 오래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재미있는 시간이 될 겁니다... 신규회원 환영
라. 산행이 4시간 있습니다. 노약자들은 신청을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마. 답사 퀴즈는 인기가 높지요. 이번에도 푸짐한
상품을 준비하겠습니다. 선물기증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바. 모놀가족들과 친교를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사. 1인이 3명 이상 신청할 수 없습니다. 많은
회원들이 골고루 참여하는 것을 원합니다.
아. 20여 장 분량의 자료집을 배포합니다.
자. 이번 답사 때는 날씨가 어떨런지요? 우비 300개를
준비했습니다. 비가 와도 걱정이 없습니다.
느낌이
가득한 답사를 위해 노력 하겠습니다.
카페
'모놀과 정수' (http://cafe.daum.net/monol4)
대장 이종원 (016-219-6001
ljhkhs44@hanmail.net)
참고) 미리 보는 답사
사진... 누르세요.
1) 주왕산과
주산지
2)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 - 병산서원
3) 풍산
한지 체험
4) 봉정사
/ 제비원석불 / 안동예절학교
|
개요
경상북도
북부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영양군.청송군,
서쪽은 예천군, 남쪽은 의성군, 북쪽은 영주시에
접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1517.74㎢ 이며 총인구가
`96년 현재 인구는 19만 4336명에 이른다. 1읍 13면 13동으로
되어 있으며 시청 소재지는 명륜동이다.
시 경계부는 산지로 되어 있고, 중앙은
저산성구릉지로 형성되어 있다. 시 동부의
낙동강을 따라 양안에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가
나타나며, 특히 서부의 풍산평야는 시내 최대의
평야로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역사
[고대]
3세기 중엽 이전에 신라의 영역에 들어가
고타야군이 설치되었으며 이후 신라 북부 지역의
중요 거점이 되어 757년(경덕왕16) 고창군으로
이름이 바뀌고, 식녕현(지금의 일직면). 고구현(지금의
의성군 북부). 일계현 등을 속현으로 하였다.
[고려] 후삼국 쟁패기에 이 지역은 후백제와
고려의 대립이 치열하였던 곳이며 고려가 이곳에서
승리하자 고창군은 안동부로 승격되었다. 그 뒤
영가군으로 개명되었다가 995년(성종14) 길주로
개편되어 자사가 임명되었고 1030년(현종21) 다시
안동부가 되었다. 그 뒤 1197년(명종27) 안동도호부로,
1204년(신종7) 안동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조선] 안동부는 1576년(선조9)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81년(선조14) 다시 부로 올려졌고,
1776년(영조52) 조정을 비방한 사건이 일어나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85년(정조9) 부로 올려졌다.
[근대] 1895년 23부제가 실시되자 안동부는 16개
군을 관할하였고, 1896년 안동군.예안군이 분리되어
경상북도에 속하였으며, 재산.소천.춘양.내성 등 4개
면이 봉화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예안군이
안동군에 편입되었고, 1931년 안동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현대] 1963년 안동읍이 시로 승격되어
안동시와 안동군으로 나누어졌다. 1995년 안동군과
안동시가 통합하여 안동시가 되었다.
▶ 문화 및 축제
안동 민속 축제는 10월에 열리는 민속문화행사이다.
주요 행사로는 하회별신굿 탈놀이, 차전놀이,
놋다리 밟기, 저전논매기, 등의 민속놀이와 예술
부문의 도산별시, 국악공연, 각종 전시회 등이 있다.
민속 - 하회별신굿 탈놀이.풋굿.차전놀이.불꽃놀이.화상놀이.화전
놀이.놋다리 밟기 등의 다양한 민속놀이가 있다. 이
중 별신굿은 하회리.수동리.마령리에서
거행되었는데, 탈춤과 함께 전해져 널리 알려져
있다. 별신굿은 3,5,10년마다 서낭신의 신탁으로
마을의 안녕을 비는 마을제이고 탈춤은 제의
일부로 서낭신을 즐겁게 해주는 행사이다. <하회별신굿>은
당내림.탈놀이.지신밟기.모의혼례.서낭제.허천거리굿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탈놀이만 복원되어
전수되고 있다. 한편 놋다리 밟기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에 이르렀을 때 공주가
강을 건너려하자 부녀자들이 물 속에 들어가 등을
구부려 공주가 무사히 등을 밟고 건너게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 밖에도 서당이 많았던 이
지역에서는 학동들이 임금놀이(어전놀이)와
원님놀이.서당놀이 등을 즐겼다.
▶ 동제
대부분의 자연촌락에서 서낭제 혹은 동제라고
부르는 제를 매년 한번씩 지내는데 제일은 대개
음력 1월 15일경이다.
▶ 특산물
안동소주, 하회탈, 안동사과, 안동산약, 안동고추,
안동한우가 유명하며, 대마를 재료로 만든
안동포가 널리 알려져 있다.
▶ 교통
중앙고속국도가 대구에서부터 연결되어
남북교통을 이어주고, 철도인 중앙선이 시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나가고 있으며, 마산-중강진간의
국도와 당진-영덕간의 국도가 교차하여 시내에
방사상으로 펴져있고, 많은 지방도가 연결되어
있어 매우 편리하다.
▶ 주요 관광지
안동하회마을, 민속박물관, 도산서원, 병산서원,
봉정사
|
병산서원 (屛山書院)
(Byong-San
Seo-Won, The Academy)
건축가: 정경세
소재: 경북 안동군 풍천면 하회리 병산 마을
연혁: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병산서원의 전신은 풍악서당으로 고려 공민왕이
안동 일대로 피난 왔을 때 왕의 후원으로 성장한
서원으로 풍산읍 소재지에 있어 풍산 류씨가문의
서당으로 유지되다가 1572년 류성룡이 지방관으로
역임하던 시절, 현재의 병산 서원자리로 이건
하였다. 임진난으로 불탄 서당을 1607년 다시
중건하였고, 1614년 사당인 존덕사를 건립하면서
서원으로 탈바꿈하였다. 1620년 서애의 위패가 안동
동쪽의 여강서원으로 옮겨졌다가 1629년 다시
모시게 된다. 사액서원으로 승격되기는 1850년대
이루어졌으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에도
보존되었다. 일제시대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졌으며 강당은 1921년 다시 지어졌고 사당은 1937년
다시 지어졌다.
안동에서 하회 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의 초입에서
왼쪽으로 난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가면
이윽고 덜컹대는 비포장도로가 나온다. 맞은
편에서 차라도 나올라치면 (그것도 버스일 때는
더욱) 난감해지는 길을, 속은 어떨지 모르지만
유장해 보이는 낙동강을 끼고 달리다 보면
병풍같이 생긴 산을 대하고 덩실 앉아있는
지붕들이 보인다. 바로 병산서원이다.
임진왜란 때의 명재상으로 유명한 류성룡을 기리며
그의 제자 정경세가 계획하고 시공한 건물로
소수서원, 도산서원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조선의
예학이 딱딱해지기 이전의 건강성을 지닌 초기
서원양식으로 지어졌다.
정면의 복례문을 통해 누다락인 만대루를 통해
교육영역인 입교당 마당으로 들어서면 진입이
시작된다. 복례문을 들어섰을 때 비로소 읽을 수
있도록 지면과 거의 평행을 이루고 있는 만대루의
현판을 보며 입교당 마당으로 들어선다.
(만대루는 정면이 7칸이나 되는 무척 긴 구성을
하고 있다. 강당의 역할을 수행하며 외부로부터
서원의 내부는 막아주고 내부로부터는 외부를
열어주는 이중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입교당 마당은 공간적으로는 병산서원의
주공간으로 사면이 건물로 폐쇄된 (입교당-동재-서재-만대루)
가장 서원적인 공간이다. 사당인 존덕사는 입교당
마당에서 동재와 입교당의 틈으로 유도되며
입교당의 뒤편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소수서원(주세붕이 건립한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으로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직시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과 도산서원을 거쳐
정착된 서원건축의 기본형식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의 예학이 후기로 접어들며 점점 경직되어
지형이나 공간구성에 있어 정신적인 원리원칙에만
치우치기 이전 형식으로 지형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건물간의 관계를 설정할 때의 융통성이
돋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변의 경관을 만대루를 통해
흡수하며 만대루는 낙동강과 병산을 담고 있는
시각적인 틀로 설정한 구성은 병산서원을 잊지
못하게 하는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병산서원의
터잡기
풍수지리학적으로 보면 밀개형터인 병산서원은
앞의 병산(안산)이 너무 높고 급해 강물은 빨리
흐르고, 땅의 기운이 쌓일 틈이 없이 계속 밀려
내려가므로 이런 터에서는 재물이 쌓일 틈이 없어
살림집의 입지로는 부적합하다고 한다.
그러나 빨리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진출해야하는
교육시설로는 안성맞춤의 터가 된다. 인적이
드물어 학문수양에 방해가 없으며 뛰어난 경관을
앞에 하여 꽉 짜인 서원의 규율과 공부로 인해 생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숨구멍이 트여 있는 그런
곳이기에 서원의 터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구성 및 특징
서원건축은 일반적으로 공부를 하기 위한 강당군,
제례를 수행하기 위한 사당군, 살림을 위한 주소의
3개의 기능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세 개의
기능군은 학풍에 따라 다양한 구성을 한다.
병산서원 전체 단면도
|
병산서원은
입교당을 중심으로 한 강당군과 입교당 마당에서
동재와 입교당의 사이를 통해 암시되고 유도되는
사당인 존덕사의 영역, 그리고 동재의 뒤편에
담으로 한정되고 등지고 있는 벽으로 엄격히
구별되는 일반 주택형식의 주소로 되어 있다.
이런 구성의 규범 위에서 병산서원은 몇 가지
숨겨놓은 요소를 통해 독특한 공간을 만들고 있다.
첫째로 입교당 마당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요소들인데 우리나라 예술의 특징 중 하나인
고도의 추상성과 그로 인해 발생되는 긴장과
이완의 반복적이고 변증법적인 통일수법이
병산서원에 적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목탑을 석탑으로 번안하였던 저 백제의
장인들의 정신이나, 끝간 데 없이 정밀하고 화려한
고려자기가 갑자기 추상적인 분청사기로 변화 과정
속에서 읽을 수 있는 우리 민족의 피속에 흐르는
추상화의 의지와, 담양의 소쇄원의 넓다 좁아지고,
밝다 어두워지고 하는 구성에서, 혹은 가야금
산조의 유장하다 휘몰아치는 그러다 다시 감아
내리는 구성에서 긴장과 이완의 미학이 병산서원에
있다.)
전면을 막아서는 전체 건물들의 부담스러움은
복례문을 통해 긴장이 되고 만대루의 루밑을 지날
때 고조된다. 그런 긴장감은 액자 안에서 갑자기
밝아지는 입교당 마당이 암시되다 입교당 마당으로
들어서며 완전히 발산된다는 그런 독특한 순환
형식을 만든다. 그런 구성 요소들은 전체를 통해
여러 번 반복된다. 입교당과 동재의 틈으로
암시되기도 하고 입교당 마루의 문을 통해 얼핏
암시되는 존덕사의 존재, 혹은 동재의 뒤로 난 담과
그 사이의 공간에 의해 분절된 주소는 담으로 각
영역들이 구분되고 엄격한 질서를 표현하지만
서로의 관계는 막힘이 없고 유기적이며 긴장과
이완의 틀 속에서 공존한다. 그리고 그런 요소들의
극점은 입교당의 마루에서 바라다 보이는 만대루를
통해 보이는 외경이다.
선적인
요소들(강당과 동서재 그리고 만대루의 마루)은
완벽하게 마당을 감싸 강학 공간의 경건성을
부여해주지만 경직된 경건성은 마당을 죽은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만대루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 만대루는 팽팽하게 감싸인 공간에
중성적인 매스로 설치되어 막히며 뚫리는 교학적
원리와 기능적 필요 사이에서 타협하게 했다.
마당을 감싸던 긴장감은 만대루를 통해 발산된다.
만대루는 외부에서는 안을 감싸고 막아서는 담으로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밖으로 시원스럽게 뚫려
있는 창이 된다. 그리고 기하학적으로 비대칭인
동서재의 배치를 통해 입교당 마당은 사각형이
아니라 약간 틀어진 사다리꼴의 형태가 되어
공간에 숨을 불어 넣어주며, 시선을 사당으로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만대루를 통해 입체적인
해결을 시도하며 동서재의 배치를 통해 평면적인
해결을 동시에 이루고 있는 것이다.
축소와 입교당 마당을 엄격하면서도 평온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원인은 적절히 구사된
스케일에서도 찾을 수 있다. 동재와 서재의 매우
축소된 규모는 높이가 철저하게 강당에 복속되며,
그 규모는 마당의 크기에 맞추어 조절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전면 만대루는 무한히 길게 느껴지도록
배열되어 있다.
연장,
유한과 무한의 스케일들이 교차되면서 강당 마당에
복합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대칭적인 동재와
서재는 기하학적으로는 대칭이 아니다. 강당과
서재는 직각의 관계를 유지하지만, 동재는 안으로
벌어진 채 놓여졌다. 또 서재와 강당은 모서리가
서로 물려있지만, 동재는 강당과 모서리가 떨어져
있다.
결과적으로 서재와 강당은 닫혀있는 관계지만,
동재와 강당 사이는 열려있는 관계를 맺는다. 물론
사람들의 동선을 강당 동쪽, 예의 사당 앞 마당으로
유인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강당군과 사당군의
관계는 두 마당의 공간적 연속으로 맺어진다.
우리나라의 옛날 건물들이 늘 그렇듯이 ‘이유
있는 비틀림이다’.
건축의 경관 구조
병산 서원이 서 있는 위치에 주목할만한 필요가
있다. 뒤편 완만한 花山과 앞의 절벽 屛山 사이에
놓여진 위치는 강변으로 근접하지도, 산으로
근접하지도 않는 매우 중간적인 위치를 점한다.
옆면에서 보면 화산 줄기가 끝나는 곳에서 마치
꽃잎의 수술과 같이 솟아있는 병산서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면에서 보면 기다란 루각
만대루가 서원 내부는 물론 뒷산의 모습까지
가리고 있다. 병산서원의 외관은 뒷 배경 없이 건축
단독의 외관을 갖는다. 이 자리에 만약 불교 사찰이
섰더라면, 뒷산과의 관계는 달라졌을 것이다. 많은
불교 사찰들은 바깥에서 이미 내부의 구성이
암시되며, 중요한 불전들은 뒤산에 중첩되어
일체화된 경관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불교건축들의 외형은 암시적이며
자연과의 일체를 꾀하고 있는 반면, 병산서원을
위시한 유교 건축들은 폐쇄적이며 인위적이다.
그러나 내부에서의 경관구조는 역전된다. 병산서원
내부에서 바라보면 외부의 자연 경관은 앞의
건물들과 중첩되면서 일체화된 경관으로
등장하지만, 사찰의 경우 조성된 마당과 앞의
건물들이 부각되는 반대의 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차이는 자연 환경과 건축물의 위치를 설정하는
차이에서 발생하며, 근본적으로는 유교와 불교라는
거대한 세계관과 자연관의 차이에 기인한다.
불교사원이나 궁궐건축은 진입하는 입구에서부터
건물들이 계속 중첩되는 장면들을 만나게 되고
최종적인 목표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대중적인
개방성 혹은 가시적인 권위성을 확보하는 것이 그
들 건축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반면 서원건축은
대중들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으며, 소수의 선택된
유학자들만의 건축이다. 그들은 내부에 소우주를
경영한다.
외부에서부터 진입축을 따라 내부로 진입하면서
대하는 장면들을 분석해보면 대문, 만대루, 강당,
사당 등의 독립된 건물만이 장면화될 뿐이다.
그러나 반대로 사당에서부터 출발하여 되돌아
나오면서 만나는 장면들은 앞 건물과 뒤 건물이,
건물군과 외부의 자연환경이 어우러지는 중첩적
장면들로 연속된다.
병산서원의 구조는 전적으로 내면적이며 외부
투시적이다.
병산서원
그리고 현대 한국 건축
Written by
임형남
몇
년 전부터 병산서원은 각종 매체를 통해
각광받는 전통 건축물이 되었다.
전통 건축물을 평가할 때 무조건 오래된 것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던 그간의 단견과 구습을
떨쳐버리고, 전통 건축에 대한 바른 평가가
시작되는구나 하는 점에서 무척 고무적인 일
이다. 그러나 병산서원이 그렇게 각광
받기까지의 경로가 건축사적인 위치나 건축적
완성도에 대한 가치설정보다는 건축가들이
자신의 작품 설명에 대한 인용을 위해 지극히
감상적인 견강부회로 예전에 소쇄원이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이론의 여지가 없는‘스타’가
된 것 아닌가 하여 씁쓸하기도 하다. (마치
블레이드 러너를 건축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만들었듯이 일종의 집단의식의
발로로서)
주로 거론되는 입교당 마루에서 본 만대루의 7폭
병풍과 그 안에 가두어진 병산과 낙동강의
경관을 보자. 그것은 한국건축이 갖고 있는
대표적인 정신이 아니라 심하게는 자연에
종속을 명하는 방자한 서구적인 자연관(?)이
작용하고 있는 듯 하다. 마치 우리의 전통
건축에 있는 현대 건축의 요소를 찾아내고
일종의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삼고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마저 들게 된다.
요즘, 바깥세상은 더럽고 소란스러우니까
바깥과 담을 쌓고 안으로 풍성한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독야청청하겠다는
개인주의적이며 세기말적인 징후가 건축가들
혹은 건축주들에게 너무 팽배해 있지 않나
하는 우려의 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건축에 반영되어‘닫혀있는 무뚝뚝한
외관 그리고 길고 지루한 벽들과 작은 창들’
이 유행처럼 번지고, 비판 없이 너도 나도
작업의 주된 모티브로 삼고 있으며, 심지어
그런 모티브를 통해 적조하고 아늑한 한국적인
공간이 재창조되고 있다고들 생각한다는
요지의 이야기이다. 그런 경향은 한국 건축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대 서구의
건축경향을 수용하면서 한국 전통 건축의 어떤
부분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복사하고,
확대하여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작업에
정체성을 부여하고, 나아가서는 작품에 대한
설명으로 차용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전통은 답습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발전적으로 계승해야 할 대상이다. 그리고
전통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바로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만나는 전통 혹은 문화적인 유산을
평가하고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병산서원은 - 당시의 시대적인 한계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누가 뭐라 해도 - 소수 엘리트
만을 위한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건축이었다.
그래서인지 병산서원을 만나면 예의 유기적인
기능구성이나 다차원적인 공간처리수법에
무릎을 치면서도 어딘지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곤 하였다. 그것은 바로 주변을 누르고
버티고 바깥을 내려다 보는 너무나도 당당한
그 모습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당당함이란 좋은 것이다.
숭례문의 당당한 기상이나 감은사에서
읽혀지는 기상 혹은 미륵사나 황룡사의
당당함과 같이 무언가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이상을 펼치려는 의지의 구현으로서의
당당함은 얼마든지 좋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별개로 단지 자신을 다른 계급과 구별시키고,
누군가에게 군림하려는 비뚤어진 엘리트
의식이나 선민의식의 발로로서의 당당함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런 점이 서원건축이
갖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이다. 그리고 분명
그런 시대는 갔다.
우리가 병산서원에서 계승해야 할 것은
바깥과는 닫고 혼자 만대루에 앉아 혹은
입교당 마루에 앉아 사람과 자연을 내려다보며
군림하려는 모습이 아니라, 지형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이나 규범을 크게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유기적인 구성을 위해 조금씩
변형을 가하는 자유로운 사고인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더럽고 소란스럽다 하여도
건축가는 최소한의 희망의 불씨를 감싸 안아야
하며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손을 잡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잊고
있는 건축가의 사회적인 역할이다. 자연과
조화롭고 싶어하고 닫고 가두는 것보다
열어놓고 풀기를 좋아하는 전통이 바로,
계승되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하고,
병산서원을 보며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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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鳳停寺)
봉정사(鳳停寺)는
천등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는 안동의 수찰(首刹)로서,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로 알려지고 있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대웅전, 화엄강당, 고금당 등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고찰(古刹)이다. 봉정사에 관한 기록은 6·25 때
사찰에 있던 경전과 사지(寺誌)가 불타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신라 신문왕 2년(682)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날린 종이봉이 이곳에 내려 앉아
여기에 절을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창건 후
의상은 이 절에 화엄강당을 짓고 신림(神琳) 등의
제자들에게 전법(傳法)하였다고 한다. 극락전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대덕이 창건한 후 조선시대까지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사찰 내에는 1972년 해체 보수 때 발견된 상량문에
고려 공민왕 12년 (1363)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우리 나라 최고의 목조 건물로 확인된 극락전과
조선시대에 건립된 대웅전, 화엄강당, 고금당 등이
있는데, 고려시대의 건물과 조선시대의
목조건물들이 나란히 있어 우리 나라 건축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밖에도 극락전 앞에는
고려시대에 건립한 아담한 모양의 삼층석탑이 있고
덕휘로, 요사 등의 건물이 있으며 영선암, 지조암
등의 부속 암자가 있다.
봉정사를 방문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주지스님의
안내로 대웅전의 불상과 탱화에 대한 설명을 듣고,
우리 나라 목조건축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극락전을 둘러보고 범종각 타종 모습, 만세루에서
북 치는 모습을 지켜보았으며, 주지스님이
一念萬年去(한번 좋은 생각은 만년을 간다)라고 쓴
족자와 안동시의 자매도시인 이천시장이 보내온
청자도자기를 선물로 받기도 했다.
1.
봉정사 대웅전 (鳳停寺 大雄殿)
안동시 서후면 태장2리에 있는 봉정사 대웅전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은 단층
팔작지붕과 다포(多包)집의 형태를 띠고 있다.
봉정사의 정전(正殿)으로 조선(朝鮮)초기(初期)의
건물로 추정된다. 주간(柱間)의 창문(窓門)이나
벽채 등 일부가 초창 후(初創 後) 변경되었으나
골격은 전형적인 다포양식(多包樣式)을 잘 갖추고
있다. 특히 공포의 힘있고 가식 없는 수법(手法)은
초기의 다포양식 특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조선초의 다포(多包)집 계통 건물로서는
남한지역에서는 몇 채 되지 않는 중요한 것으로
평가된다. 건물내부에서의 가구형식(架構形式)이나
세부 기법에서도 외부와 같이 단조로우면서 견실한
공법(工法)이 초기의 다포양식 특징들을 보이고
있다. 단청(丹靑)은 창건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고려적(高麗的) 요소를 지니고 있어 건물과
함께 중요한 회화자료(繪畵資料)로 주목되고 있다.
2. 봉정사 극락전(鳳停寺 極樂殿)
극락전은
가공석 및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규모로 지은 주심포계(柱心包系)
맞배지붕 건물이다. 근데 보수 전에는 정면에
세살창을 달았었는데, 보수하면서 중앙의 두짝
널문을, 양협칸에는 채광용 붙박이창을, 후면은
중앙 칸에만 널문을 달았다. 바닥도 마루였으나
복원하면서 전(塼:벽돌)을 깔았다.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목조가구가 그대로 노출되도록
하였는데, 가구의 꾸밈과 가공이 세련되고
아름답다. 전면의 개구부가 작기 때문에 내부는
무척 어둡게 되고 광창을 통해 전돌 바닥에
떨어지는 광선이 반사해서 불상을 비치게 된다.
불단 위에 가설된 닫집이 주목된다.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 양식에 많은
영향을 받은 건물로 여겨지고 있다. 기둥의
배흘림과 단조로우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내부
가구가 이 건물의 특징이며 부속 재료 하나하나가
모두 국보급이라 할 만큼 뛰어난 기법이 돋보인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목조건축(木造建築)
중 최고(最古)의 건물로 유명하다. 1972년에 실시한
보수공사(補修工事)때에 밝혀진 내용에 의하면,
건립 후 첫 수리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12년(1363)이며
그 뒤 조선 인조(仁祖) 3년(1625) 2차에 걸친 수리가
있었다. 원래는 대장전(大藏殿)이라 불렀으나 뒤에
극락전(極樂殿)이라 개칭한 것 같다. 기둥의 배흘림,
공포의 단조로운 짜임새, 내부가구(內部架構)의
고격(古格)함이 이 건물의 특징이며, 부재(部材)
하나하나가 모두 국보적(國寶的) 기법(技法)을
갖추고 있어 한층 더 지보적(至寶的) 존재라 할 수
있다.
3. 봉정사 화엄강당(鳳停寺 華嚴講堂)
봉정사 화엄강당은 대웅전과 극락전의 사이에
세워진 건물로, 1967년 6월 23일 보물 제448호로
지정되었다. 화엄강당(華嚴講堂)은 스님들이
불교학(佛敎學)을 공부하는 장소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온돌방 구조를 갖춘 강당(講堂)
건물이다. 이 건물의 연혁은 봉정사와 관련된
사적기록(事蹟記錄)을 살펴보아야 알 수 있다. 같은
경내(境內)에 있는 극락전(極樂殿)과 대웅전(大雄殿)은
『양법당중수기(兩法堂重修記)』 등에 따르면 17세기에
중수(重修)되었다. 이런 중요건물의 중수가 있을 때
스님들의 강학공간(講學空間)인 화엄강당도 함께
중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평면(平面)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 맞배지붕이며, 건물
내부는 남쪽 2칸이 부엌, 북쪽 4칸이 온돌방으로
되어 있으나, 1930년대에 『동양미술(東洋美術)』에
발표된 「천등산봉정사(天燈山鳳停寺)」의 자료에
의하면 당시 이 건물의 평면은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현재의 온돌방 뒤쪽으로 4칸의 마루가 깔려 있으며
부엌이 지금보다는 넓게 자리잡고 있다. 평면구성(平面構成)이
언제 오늘날처럼 바뀌었는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려우며 1930년대 이후로만 짐작될 뿐이다.
4. 봉정사 고금당(鳳停寺 古今堂)
봉정사 고금당은 1967년 6월 23일, 보물 제449호로
지정되었다. 고금당(古今堂)은 맞배지붕의
주심포계(柱心包系) 건물로서 집 이름으로 보아
원래는 불상(佛像)을 모시는 부속전각(附屬殿閣)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지금은 요사(寮舍)로 사용하고
있다. 1969년 해체복원(解體復元) 당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광해군(光海君) 8년(1616)에
중수(重修)한 사실이 있었으나, 건립연대(建立年代)는
확실하지 않다. 고금당의 남쪽에는 우화루(雨花樓)가
있어서 고금당의 남쪽 지붕이 우화루와 연결되고
그 아래쪽을 부엌으로 사용하였는데, 1969년 고금당(古今堂)과
화엄강당(華嚴講堂)을 해체하면서 우화루가
철거되었다. 1930년대에 『동양미술(東洋美術)』에
발표된 봉정사 배치도(配置圖)에 의하면 우화루는
정면 7칸, 측면 1칸 규모로써 대웅전(大雄殿) 영역(領域)과
구별되는 극락전(極樂殿) 영역의 문루(門樓)로
자리잡고 있다. 고금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규모임에도 다양한 건축기법(建築技法)을 사용,
치밀하게 구성되어 주목받고 있다.
5. 봉정사 삼층석탑(鳳停寺 三層石塔)
1984년 12월 9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되었다. 봉정사(鳳停寺)를 극락전(極樂殿)
영역과 대웅전(大雄殿) 영역(領域)으로 나누었을 때
이 탑은 고금당(古今堂)과 함께 극락전의 영역을
구성하고 있으며, 가람 배치나 조성 양식으로
보아서 건립 년대는 고려(高麗) 중엽(中葉)을
추정된다. 이중(二重) 기단(基壇)의 방형(方形)
석탑으로서 기단부(基壇部)에 비해 탑신부(塔身部)의
폭이 좁으며 각층 높이의 체감(遞減)이 적당한 반면,
폭의 체감율이 적고 옥개석(屋蓋石)도 높이에 비해
폭이 좁아 처마의 반전(反轉)이 약하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약간 둔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 일부는
남아 있지 않으며, 탑의 총 높이는 318cm이다.
소나무
그늘에 담긴 미학 - 봉정사 영산전
김봉렬
교수
이
시리즈는 우리의 불교사원에 대한 건축적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마련되었다. 흔히
불교건축이라 하면 수덕사 대웅전이나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은 목조 기와집 건물을 연상하게
된다. 물론 이들도 불교건축의 소중한
부분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들 건물만이 건축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건축이란 오히려 건물과
건물들로 이루어지는 전체적인 공간적 관계다.
부석사가 아름다운 것은 무량수전 건물 한 동
뿐 아니라 주변의 여러 건물들과 잘 조화된
관계, 더 나아가 웅대한 자연과 일체화된
석축과 건물들의 관계에서 오는 감동 때문이다.
이처럼 건축은 전체적이며 집합적이다. 건물은
건축의 부분일 뿐, 건축의 전체가 아니다. 특히
한국의 가람들에서 건물은 하나의 방에
불과하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불당이며, 산신각은 산신탱을 모신 작은
방이자 건물이다. 방을 보고 건축이라 하지
않듯이, 대웅전이나 산신각 건물을 건축이라고
보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건축은
공간적이며 입체적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고, 오로지 감흥과
분위기로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공간적 환경의 감동이 바로 건축의
힘임을 알게 될 때, 우리 가람건축의 가치는
더욱 승화될 것이다.
때로는 대자연과 건축의 호흡법을, 때로는
창살 하나에 담겨진 장인들의 숨결을 읽어야
한다.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에 있는 봉정사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목조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극락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추정하기로는 고려 중기인 12세기경에 건설된
것으로 학계의 인정을 받으니 벌써 900년의
세월이다.
기적적으로 보존된 이 건물의 구조미와 역사적
가치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지만,
순수하게 건축적으로 본다면, 그다지 완성도가
높은 건물이라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집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기둥들과
구조부재들은 매우 비경제적으로 보인다.
봉정사에는 극락전 외에도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의 것으로 여겨지는 대웅전,
조선중기의 승방인 고금당, 조선후기의 대방인
화엄강당 등 각 시대를 대표하는 건물들이
있어서 ‘살아있는 야외 목조건물 박물관’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 그러나 각 건물들의
시대적 차이는 전문가가 아니면 감지하기
어렵다.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주심포계-다포계-익공계의
전형적인 구조형식을 가진 건물들로
학술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지만,
일반인들의 눈에는 그저 나무 기둥 위에
기와지붕을 얹은 고만고만한 건물들로 보일
것이다.
건물들의
구조적, 건축사적 중요성보다 더 큰 봉정사의
매력은 천등산 줄기와 기막히게 얽혀있는
가람의 전체 구조일 것이다. 옆으로 길게
펼쳐진 능선에 기대어 앉은 가람은 좌우로 두
개의 마당을 만들며 역시 옆으로 길게
펼쳐진다. 가람은 산 중턱의 높은 곳에 평지를
만들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입구에서 입구
누각까지는 촘촘한 수많은 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계단의 폭 역시 옆으로
길게 펼쳐지기 때문에 급하다거나 위험스러운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시 봉정사 건축의 백미는 동쪽 능선
위에 자리잡은 작은 암자인 영선암이다. ㄷ자
모양의 승방건물로 감싼 마당에 작고 초라한
법당 두 동이 놓여있을 뿐이다. 건물의 질도 본
절인 봉정사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엉성하고 빈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선암은 한국건축이 이룩한 최고의 공간이며
건축임에 분명하다. 이제는 건축을 보는 눈을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화려한 색상에 두지
말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만들어지는 비어있는
공간에 둘 때다. 영선암의 경우 구체적으로
마당이다.
영선암의 마당은 아래 큰 마당과 위단의 작은
마당으로 이루어진다. 두 마당은 세단 정도의
계단으로 나누어져 있기는 하지만 워낙 작은
규모여서 한 눈에 잡힐 만큼 붙어있기도 하다.
자칫하면 붙은 것도 분리된 것도 아닌,
어정쩡하고 애매한 마당이 되었을 것을
영선암에서는 분리와 통합을 동시에 획득하고
있다. 두 마당 사이에는 바위가 하나 놓여있고
바위사이에 자란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얼핏보면 원래부터 있었던 자연물인 것
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인공적으로 그
자리에 심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소나무의
형태를 감상하기 보다는 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주목해야 한다.
이 그림자는 아래 큰 마당과 위 작은 마당의
연결점에 절묘한 그늘을 만들고, 그 그늘에
의해 두 마당은 서로 분리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림자는 어디까지나 허상이다. 따라서
두 마당은 관념적으로만 분리되며 실제로는
항상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이처럼 분리와
통합, 실상과 허상을 동시에 획득하는 장치가
작은 소나무 한 그루라니 놀랍지 않은가?
영선암은 90년대초 전세계 영화계의 각광을
받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로케
장소로서도 유명하다. 선(禪)적인 모티브를
주제로 삼은 이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배용균
감독은 전국의 사찰을 누볐다고 한다. 감독의
눈에도 영선암은 선적인 이미지와 명상의
분위기로 가득한 곳으로 보였을 것이다.
선사가 손을 들어 달을 가리킬 때, 미망의
제자들은 달을 쳐다보지 못하고 선사의
손가락만 본다고 했다. 봉정사 극락전의
건물에만 몰두하거나 영선암 건물의 초라함을
비웃는 것은 흡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쳐다보며 손가락이 길네 짧으네 평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영선암 마당의 한 그루 소나무
그림자를 보는 것은 바로 달의 위대함과
감동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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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원 석불
제비원 석불을 찾아 갔던 첫 답사 길을 난 아직
잊지 못한다.
79년 군입대를 앞두고 휴학 기간 중에 버스를 타고
가서 비를 맞으며 곁에 두고도 찾지 못해 맴돌다
친견한 석불의 미소, 나의 몸에 흐르는 땀과 비에
젖은 옷과 똑같이 석불 위에도 빗물이 땀처럼 두
볼에 흘러내리고 습의도 비에 젖어 있던 모습을...
이 길을 수 차례 통과만 하였다는 상감님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 촬영에 바쁘지만 난
내소사, 율곡사 등 사찰에 전해내려 오는 설화를
떠올리며 제비원의 연이 아가씨를 그리며 참으로
미남인 석불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院원 이란 지명은 예전에 교통요지에 있던
오늘날의 여관으로서 장호원, 조치원 등도 같은
의미이며 제비원은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가기
위해 조령, 죽령을 넘기 전 하루 머무는 곳이다.
제비원 석불과 관련으로 신라말 도선의 작품,
이여송의 난동으로 핏자국이 선명했다는 이야기
등도 흥미롭지만 고려를 개국한 태조가 황실의
권위와 정복지역의 백성을 위무하기 위해 조성된
거대석불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보며(물론
관촉사, 용미리 석불과 같이 왕건이 백성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관음보살로 조성했지만 지역의
주민들은 옛 왕조를 그리며 미륵이 하생하기를
염원하는 미륵불로 받아들여 은진미륵은 관음보살
이 분명하지만 미륵불로 불려진다), 제비원 석불은
분명 중품하생(?) 수인을 하고 있어 미륵불로
보인다.
하지만 제비원 석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민속에서 제비원을 성주(민속에서 집집마다 그
집의 부귀영화 평화를 지켜주는 신, 즉 집 지킴이)의
본향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번 답사기에서도
석불보다 성주의 본향을 왜? 제비원이라 할까? 라는
부제로 글을 쓸려고 일요일에
대구시립남부도서관을 뒤져도 예전에 읽었었던
안동대학교 임재해 교수의 글을 찾지 못하다가
교수님의 홈페이지에서 자료를 발견하여 기쁨을
가눌 길 없었지만 그 분의 글을 발췌하여 답사기를
쓰는 것은 글의 맛과 의미가 반감될까 두려워
임재해 교수님의 글을 모두 가져왔다.
사라져 가는, 잊혀진 우리 민속에서 성주의 의미를
되새김질 해보시길 빌면서...
우리
민족 신앙의 본향은 어디일까?
안동대학교 임재해
교수님이 월간 <샘터> 11월호(샘터사, 2002)에
기고한 글입니다.
종교
없는 민족도 있을까? 별난 민족이 아니면 모두
종교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질문이다.
종교는 인류 문화의 보편성을 갖춘 문화
현상인 동시에 인간과 자연 또는 인간과 신
사이의 의사소통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언어 행위를 하는
것처럼, 인간이 자연 또는 신과 소통하기
위하여 종교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점에서는 예사
동물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를 믿고 정신적으로 의지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불완전한 존재로서 인간의
결함이 신앙을 만들어내고 종교 문화를
형성하는 셈이다. 인간이 신처럼 완전하다면
굳이 종교를 만들어낼 까닭이 없으며, 비록
불완전한 존재라도 예사 동물처럼 지적
사고력과 상상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종교와
같은 정신문화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인간만이 누리는
문화로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중요한
문화적 장치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을 한국인답게 하는 문화적
장치로서 종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를 지닐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
고유의 신앙이라 할 수 있는 ‘무속(巫俗)’
또는 ‘무교(巫敎)’를 들 수 있다. 우리
민족의 건국 시조인 단군이 바로 나라 굿을
수행한 국무로서 큰무당이자 정치적
군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전통은 신라
남해왕대까지 수천 년 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굿 또는 무교를 우리 민족
종교로 인정하고 그렇게 대답한다고 하더라도
그 본향(本鄕, 메카)이 어디냐 하고 다시
물으면 얼른 대답하기 어렵다.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이나 불교의 성지 보드가야처럼
무교의 성지를 어디라고 제시할 만한 민족
종교의 성지가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의 범위를 민속
신앙으로 넓혀 생각하면 성지를 찾을 수 있다.
굿은 학자에 따라 시베리아 샤먼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인식되거나, 세계적으로
두루 나타나는 샤머니즘 신앙을 통해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민속 신앙 가운데서도 성주와
삼신 신앙은 우리 민족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널린 섬긴 역사적 전통과 함께 한반도 전역에
두루 전승되고 있어 민속 신앙인 동시에 우리
민족 신앙으로서 성격과 자질을 잘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성주신은 집을 지키고
보호하는 신으로서 조왕, 삼신, 터주 등 다른
집안 신들과 달리 대표성을 띠고 있다.
성주신은 집을 새로 지었거나 이사를 하였거나
또는 집안에 병자가 있어 재액이 생길 때
모시게 된다. 시월 상달에 농사를 지어 추수가
끝난 다음 햇곡으로 떡을 하고 무당을 불러
집안의 복을 비는 굿을 할 때 성주를 모시는데,
이때 가장의 생기, 복덕일을 가려 가족의
건강과 뜻한 바가 순조롭게 성취되기를 빈다.
이를 성주굿이라 한다. 이와 같이 성주를 매는
굿을 할 때는 3일 전 대문에 외로 꼰 새끼줄에
흰 종이와 소나무 가지를 꼽은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부정한 사람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온 가족이 정성을 들여 고사를 지낸다.
이때 대추, 밤, 곶감 등 색실과 정화수 그리고
떡은 백설기와 시루체떡을 만들어 안택이 끝난
다음 이웃과 고루 나누어 먹는다.
이러한 성주 신앙의 본향은 경상북도 안동의
‘제비원(고려시대부터 역원제도에 따라 원(院)이
있던 곳, 현재 안동시 이천동)’으로 상당히
구체화되어 있다. 안동 제비원이 바로 성주
신앙의 메카이자 우리 민족 종교의 성지인
것이다.
‘성주 본향이 어데메냐 /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가 본일러라 / 제비원에 솔씨 받아’ -
안동 지역 ‘성주풀이’ 부분
성주풀이는 성주굿을 할 때 무당이 부르는
일종의 무가이다. 다른 무가처럼 성주 무가라
하지 않고 ‘성주풀이’라 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성주풀이는 성주 신앙에
관계되는 ‘풀이’ 형식의 노래라는 뜻이자
집안에 성주신을 모시거나 성주에게 치성을
드릴 때 부르는 민요이기 때문이다. 풀이
형식의 노래는 본풀이 형식과 뒤풀이 형식이
있는데 본풀이는 사실상 신화의 순우리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성주풀이는 성주 신화에
해당되는 노래이다. 성주 치성이나 성주굿에서
부르는 성주풀이는 무당과 치성을 드리는
사람에 의해 신성시되는 믿음 속에서 노래
된다. 그것은 마치 단군신화가 고조선 건국의
신성성을 얘기하고, 주몽신화가 고구려 건국의
신성성을 보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고대 국가의 역사 서술이 건국
신화에서 시작되듯이 성주 신앙의 역사도 성주
신화(성주풀이)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주풀이에서 성주의 본향이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단군신화를
통해서 고조선의 건국을 이해하고 단군의
후예임을 인식하는 것처럼, 성주풀이를 통해서
성주신의 출현과 성주 신앙의 시작, 그리고
집안에서 섬기는 성주신의 정체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도 막연하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시 군과, 마을의 취락에 해당되는
모듬살이의 지명을 차례로 노래하여
합리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라 하는 지점은 추상적인
공간이 아니라 현재 지도상에 분명히 점을
찍을 수 있는, 실존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한편 성주 신앙의 성지로서 안동을 주목하는
근거는 안동 지역에서 전승되는
성주풀이에서만 성주의 본향이 안동
제비원이라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한반도 전역에서 성주풀이를 할 때 안동을
성주의 본향으로 노래한다는 사실이다.
‘성주나 본(本)이 어드매냐 / 경상도 안동땅의
제비나원이 본일넨데 / 제비원이다 솔씰 받아 /
서평 내평에 던졌더니 / 그 솔이 싹이 나…’ -
해주 지역 ‘성주굿’ 부분
‘성주 본향 본을 풀면 게 어디가 본이신고 /
안동주 천제비원에 할나산이 보이신가 /
할나산에 들으스니 대부동이 서 있난데…’ -
서울 지역 ‘황제풀이’ 부분
‘성주로다 성주로다 성주 근본이 어디맨고 /
경상도 안동땅에 제비원에 파른 솔씨는/ 물
안에 던졌더니 그 솔이 점점 자라나야…’ -
목포 지역 ’성주굿‘ 부분
‘성주 근본이 게 워딘가 /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의 솔씨받아’ - 광양 지역 씨끔굿 ‘성주’
부분
위의 자료에서 보듯이, 성주굿 무가에서
성주의 근본을 물으면 한결같이 안동 제비원이
본이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민속 신앙의
하나인 성주 신앙을 민족 신앙으로서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제 누가 우리 고유의
민족 신앙에 관해서 질문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면, 성주 신앙을 보기로 들어서 이것이
우리의 민족 신앙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깊어 가는 가을날, 서늘한 바람 한 줄기 벗
삼아 형형색색 물들어가는 단풍 길을 따라
우리 민족 신앙의 본향인 안동 제비원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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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 (周王山)
기암
주왕산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고개를 들어 보이는
것이 바로 이 기암으로 산에 들어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을 갖추고 있다. 주왕이 신라
마장군과 일전을 벌일 때 이 바위에 이엉을 두르고
쌀뜨물을 흘러 보내 적을 현혹시켰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 웅장한 자태는 주왕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대전사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였으며 고려 때
명승 나옹대사가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의 이름을
따 대전사(大典寺)라 불렀다고 전해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방사(周房寺)로 표기되어
있다. 보광전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02호이며
뒤편으로 보이는 산봉이 기암(旗岩)이다.
아들바위
기암에서 내부로 깊숙이 이어지는 길옆 냇가에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아들바위란 것이다.
왼팔로 던진 돌이 그 바위에 얹히게 되면 생남을
한다는 전설이 있어 호기심에서 누구나 한번씩
왼손으로 돌을 쥐고서는 바위 반대편에 돌아서서
양다리 사이로 던지고 지나간다. 그래서 그
바위에는 언제나 넘치도록 자갈이 쌓여져 있다.
봄이면 수달래가 아들바위를 스쳐가는 여울물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자하성
주왕이 패전한지 이미 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그 당시 주왕이 쌓았다는 30여 리의 자하성(紫霞城)
일부가 그 때를 입증하듯 이끼 낀 돌더미로 남아 칡
넝쿨 등이 얼크러진 덤불 속에 묻혀있다. 자하성은
대전사에서 동편으로 약 1km 지점에 있으며 주왕암
입구에 나한봉(羅漢峰)을 거쳐 가로막은 돌담이다.
이 성은 주왕이 신라군사를 막기 위해 쌓은 30여
리의 성이다.
주왕굴을 중심으로 사방을 방어할 수 있는
요새지였으니 그 성에는 돌문과 사창(司倉) 등이
있었으며 곳곳에 부서진 성지의 잔해가 지금도
남아 있어 관광객들의 마음을 숙연케 한다.
칡넝쿨을 헤치고 자하성 옛 터전을 오르면 한
여름의 무더위도 씻은 듯이 가셔지고 상쾌한
바람이 솔솔 불어 전신이 허공에 둥실 떠오르는
기분이 된다. 성숙하고도 아름다운 수목에서
내뿜는 향기와 이름 모를 산새소리에 마음 젖어
있노라면 절로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
석병암
자하성을 조금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나즈막한
산허리에 열두폭 병풍을 둘러 놓은 듯한 바위군이
따사로운 햇살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펼쳐진다.
자하성에 보금자리를 둔 산새들이 간혹 떼를 지어
석병산(石屛山)으로 가랑잎처럼 날아가는 정경을
바라보노라면 속세를 떠나 별천지에 온 느낌으로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주왕암
지하성 맞은편 계곡을 건너 약 1,000m 지점에 주왕암(周王庵)이
있다.
암자에 이르는 비탈진 길목에는 그 옛날 마장군의
발자욱이었다는 흔적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이
암자도 대전사와 함께 창건한 고찰이며, 주왕의
이름을 따서 대전도군(大典道君)이 암호를
지었다고 한다. 문간체인 가학루(駕鶴樓)는
주층누각으로 되어 있으며 이끼 낀 태양빛을
받으면서 걸어가면 절로 발길이 가벼워진다.
주왕굴
주왕암 뒤안길 오른편에 협곡이 있다. 파란 하늘이
아득히 내다 보이는 좁은 바위틈 길을 따라 30m쯤
들어가면 거대한 암벽에 부딪치게 된다. 약 50여m
되는 절벽 하단에 세로 5m, 가로 2m 정도의 동굴이
있는데 주왕이 마장군에게 쫓겨서 숨어 살았던
동굴이다. 깊이 2m 정도의 굴속 구석진 곳에는 탱화(부처님의
불상 그림)가 안치되어있고, 굴에 올라가는 길은
너무나 가파른 암벽이어서 쇠다리를 잡아야 올라갈
수 있는데, 절벽 정상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줄기의 포말로 인하여 오색 찬란한 무지개가
꿈처럼 서린다. 주왕이 천연의 요새인 이곳에서
대망의 꿈을 저버리지 않고 재기를 다짐하다가
마장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관음봉
관음봉(觀音峰)은 주왕암 뒷편에 있는 묘한
암봉으로, 그 생김새가 관음보살을 닮았다고 하여
관음봉이라 부른다. 소용돌이치듯 백팔번뇌가
쌓이고 구만리 장천을 찌를 듯이 우뚝 솟은 바위가
대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서 아름답고 숭고하기가
비할 데 없다.
이곳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의 역사가 있고 진리가 숨쉬고 있는
자랑스러운 옛 터전이다.
궁지
주왕암 뒷편 칡넝쿨이 휘어 잡고 가파른 산을
오르면 정상에 잔솔밭이 평화스럽게 모여 있는데,
이곳이 무열왕 6세손 김주원(강릉김씨의 시조)이
집을 짓고 공부를 했던 터전이라고 한다.산정은 약
50평 남짓한 평지로 이루어져 있고 아직도 이끼 낀
기왓장이 사방에 흩어져 있어 정말로 강릉김씨
시조가 이곳에 살았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훈풍을
마음껏 마시면서 운무에 쌓인 산경을 바라보면
향로봉, 촛대봉, 석가봉, 미륵봉, 지장봉 등
그외에도 만악천봉(萬岳千峰)이 쌓여져 있어
금강산 1만2천 봉을 연상케 하는 소금강(小金剛)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망월대
주왕암에서 급수대로 가는 중앙지점 왼편에
망월대가 있다. 4,5명이 앉을 정도로 편한 자리여서
이곳에서는 사면을 두루 살필 수 있고 드높은
하늘도 마음껏 바라볼 수 있다. 주왕암 협곡에서는
달을 바라볼 수 없어 대전도군과 백련낭자가 이
망월대 위에서 달을 보면서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급수대
급수대는 망월대에서 50m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신라37대
선덕왕이 후예가 없어서 무열왕 6대손인 상재
김주원을 38대왕으로 중대 및 각부 대신들이
추대하였는데 즉위 직전에 돌연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고자 내란을 일으킴으로 김주원이 왕위를
양보하고 석병산으로 은신하여 대궐을 건립한
곳이다. 대궐터는 급수대 정상이라고 전해지며
지금도 유적이 남아있다.
김주원이 대궐을 건립하여 은둔생활을 할 당시
산상에는 샘이 없었으므로 계곡의 물을 퍼올려서
식수로 하였으므로 급수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급수대앞 오솔길을 지나노라면 계곡쪽으로
기울어진 깎아지른 절벽이 금새 무너질듯하여 식은
땀조차 흐르게 된다.
학소대와 병풍바위
경사 90도의 가파른 절벽의 모습을 한 학소대(鶴巢臺)는
급수대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해방 전 이
정상지점에 청학 백학 한 쌍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일인(日人)포수가 백학을 쏘아 잡아 버린 후,
날마다 슬피 울면서 부근을 배회하던 청학마저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지금은 옛 보금자리만
남아있다. 또한 학소대 중간쯤에 수백 년 묵은
풍채가 좋은 회양목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것이 탐이 나서 톱을 허리에 차고 암벽을
오르다가 떨어져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이처럼 학소대는 애닯은 사연이 얽혀 있으며
주왕산의 경관을 한결 돋보이게 하는 기암이기도
하다. 오른쪽의 바위는 마치 병풍을 세운 듯하여
병풍바위라 부른다.
시루봉
시루봉은 그 생김새가 떡을 찌는 시루 같아서
시루봉이라 불리는데 밑바닥에서 불을 때면 연기가
시루봉 전체를 감싸면서 봉우리 위로 치솟는다고
한다.
옛날 어느 겨울철 도사가 이 바위 위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신선이 와서 불을 지펴 주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으며 멀리서 보면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보인다.
제 1 폭포
학소대를 조금 지나면 제1폭포 (일명: 선녀폭포)
입구가 보인다.
옛날에는
이 폭포에 다다르자면 쇠사슬을 붙잡고 겨우
오르내렸는데 대동아전쟁 무렵 내원에다
제탄전습소(製炭傳習所)를 설치하기 위하여 차도를
개설하느라고 그토록 아늑하고 신비하기
그지없었던 자연의 신비경을 훼손하여 버렸다.
폭포 주위는 암벽으로 둘러 싸여져서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며, 다만 그 정적을 깨뜨리는 것은
영원히 끊이지 않을 폭포소리 뿐이다. 그 물보라
속에는 항시 오색무지개가 어리고 있어 당장
이라도 선녀가 하강할 듯 절경을 이룬다. 소(沼)는
70평 남짓하게 이루어져서 물고기떼가 놀고 있으며
옛 전설에 의하면 소 깊이가 명주꾸리 하나를 다 풀
정도로 깊었다고 한다.
소(沼)가에는 깨끗한 자갈이 깔려있어 등산객들이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한다. 암벽
틈바구니에는 기화요초가 보석같이 아름답게 피어
있으며, 암벽사이로 트인 구만리 장천엔 구름이 뭐
그리 바쁜지 쏜살같이 지나간다. 폭포 바로 위에는
선녀탕과 구룡소가 있으며,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신선대로 간다고 한다. 산 아랫마을 상의리에
가뭄이 심할 때면 이곳에 와서 기우제를 지내면 3일
이내에 비가 왔다고 한다.
신선대
제1폭포 입구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외양이
늠름하고 위엄있는 암석이 우뚝 솟아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선대(神仙臺)이다.
이곳의 경관은 매우 아름다우며, 신선대 위에는
선녀들이 놀았다는 보금자리가 있다. 청명한
달밤이면 선녀들이 내려와 인접한 제1폭포 위에
있는 선녀탕에서 목욕을 하고 신선대 위에서 놀다
갔다고 한다.
제
2 폭포
제1폭포에서 2km 거리에 있다. 두 줄기로 이루어진 2단
폭포인데, 한줄기는 호박처럼 파인 곳에 일단
쉬었다가 다시 떨어진다. 유명한 조각가의
창작품같이 오묘한 미를 지녔다.
제 3 폭포
제1폭포에서 3km정도 거리에 제3폭포가 있다. 이
폭포도 2단 작용으로 그 규모가 주왕산 폭포 중에서
제일 대범하다. 폭포수는 계곡을 따라 제2폭포, 제 1폭포를
거쳐 주왕산 골짜기를 누비는데, 사시사철
끊임없는 나그네 길을 다람쥐와도 이야기하고
백련낭자가 꿈을 부르던 연화굴을 스치고 수달래(水丹花)도
곱게 가꾸면서 주방천을 흐른다. 또한 이곳은
심산유곡이어서 노송에는 항상 백로가 놀고 간다.
이 폭포에서 왼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화전민이
살았던 내원마을이 있는데, 내원산에서는 산삼이
있고 희귀한 약초가 자생하여 화전민들이 채취하여
시장에 판매하기도 했다. 지금도 4~5가구가 약초
등을 캐어서 생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다. 또한
희귀목이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연화봉
봉우리의 형체가 흡사 연꽃 같다고 하여 연화봉(蓮花峰)이라
부르며, 이곳에서도 대전사의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삼라만상이 고이 잠든 밤, 극락세계의 상징인 연꽃
속에 묻혀 사바세상의 번뇌를 잠시나마 잊고
싶거든 연화봉 정상에 올라보라. 몸과 마음이 절로
청정해짐을 느낄 수 있다.
연화굴
자하성 뒷편으로 해서 개울가를 거슬러 올라가면
잡목으로 둘러싸인 연화굴(蓮花窟)에 이른다.
굴이라고 해서 그리 깊지는 않지만 너비 3m, 높이 5m,
깊이 2m의 이 동굴 속에서 주왕의 군사들이
훈련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주왕의 딸 백련공주가
이곳에서 성불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연화굴을 통과하는 시원스럽고 맑은 계곡의
바람은 현대문물에 찌든 현대인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이곳에서 자하성과 무장굴 쪽을 바라보며 그
역사를 뒤돌아보면 그렇게도 허망하게 멸망해버린
자칭 천자 주왕의 원혼이 곳곳마다 서려있는 것
같다.
수달래
꽃 빛깔은 진달래와 비슷하나 약간 진한 편이며
특이한 것은 꽃잎 하나에 반드시 20여 개의 검붉은
반점이 있다. 예부터 늦은 봄에서 초여름 사이
주왕산 안 주방천에서는 아름다운 빛깔의 수달래가
꽃을 피우는 것을 놓고 이곳 주민들은 주왕산으로
도망온 주왕이 숨을 거두면서 흘린 피로 꽃이
생겨났다는 전설을 믿고 있다.
백련암
주왕산 대전사 건너편에 위치한 백련암은 주왕의
딸 백련의 이름을 따서 암호(庵號)를 지었다 하며,
암자 앞으로는 옥같이 맑은 계곡물이 사시로
흐르며 옛날에는 큰 종이 있어서 새벽마다 여명의
종소리가 하늘로 메아리쳐 온누리를 진리의 세계로
이끌었다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백련암에 살았다는
백련공주는 신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으나 그
신비한 기운만은 남아있다. 이 암자는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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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지 (注山池)
부동면
소재지(이전리)에서 2키로 지점의 저수지로 약 270년
전 경종 원년(1720)년에 준공. 길이 100m.넓이 50m.수심
8m의 1만여 평 아담한 호수로 주위의 울창한 고목과
함께 물속에 150년이 넘은 고목들이 자생하고 있어
풍치가 너무나 아름답다. 호수 속의 왕버들과
능수버들은 저수지를 만들기 전부터 깊은 산 속에
다량 자생하고 있었으며 주왕산 산자락의 울창한
나무와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신록이 푸른 봄은
봄대로, 여름에는 짙은 풀 그림자, 가을은 독특한
단풍의 그림자를 수면에 지니고 있어 어느 누구나
카메라만 가지면 작가가 된다. 하루 중 이른 새벽이
대기가 안정되어 사진 찍기가 좋으며 물안개라도
피어오르면 더욱 신비를 더해준다. 수면 위로 천상(天上)의
그림을 그려내는 곳, 사진 동호인들만 몰래 찾던 이
곳,
주산지는 언제 봐도 예쁘지만 왕버들이 생동하는 4월
중순∼5월 중순이 가장 좋다”며 “그때는
사진작가들이 새벽 풍광을 촬영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다”고 전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고목들이 20여 그루 가까이 있었지만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말라죽었다 한다. 봄.가을의
경치가 가장 좋으며 가뭄으로 밑둥을 보이면
실망하게 된다. 불과 길이 100m 폭 50m의 자그마한
연못. 그러나 이 연못에 마음이 끌려 자주 찾는
팬도 꽤 된다. 청송땅이 워낙 오지인 탓도 있지만
연못을 아끼는 사람들이 소문을 아끼는 바람에
그리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아 자연이 그대로
간직돼 있다. 저수지 제방 위에는 이공(李公) 성공(成功)의
송덕비가 있으며 비문에는 일장저수(壹障貯水),
류혜만인(流惠萬人), 불망천추(不忘千秋), 유일편갈(惟一片碣)의
글귀가 있다.
지금도 절골 계곡 안의 50여 명이 이 저수지물로
농사를 짓고 있다. (입장료를 받습니다)
주산지에 날씨가 좋고 바람이 없는 날에
물그림자가 있는 풍경을 보는 건 대단한 행운이라
한다.
주왕산
주산지 영화 촬영 명소로
청송
주왕산의 주산지(主山池)가 영화촬영장으로
거듭난다. 경북 봉화 출신으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나쁜 남자'로 본상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은 20일 주왕산 주산지의 사계를
배경으로 한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 촬영에 들어갔다. 이 영화는 한 스님의
일대기를 주산지 사계절의 변화에 맞춰 득도의
경지에 다다르는 과정을 담은 작품. 사계절은
△봄=동자승 5∼7세, △여름=소년승 16∼17세, △가을=수도승
28세, △겨울=장년승 57세, △다시 봄=노승 80세
등으로 표현된다.
영화 세트장은 주산지 수면 중앙에 띄운 68평(가로16m×세로14m,
하중40t)의 바지선에 10평(가로6.3m×세로5m)
규모의 대웅전(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와가)을 중심으로 지어졌다.
영화 촬영이 시작됨에 따라 청송군은 촬영장
관광객 증가에 대비해 100대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과 간이화장실, 농산물 간이판매장,
안내간판 등을 설치하는 한편 진입도로와
주차장 등을 포장했다.
청송군 관광문화담당은 "주산지 영화
촬영장을 찾는 관광객이 하루 1천여 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시설 정비, 민박촌 지정, 업소
친절교육 등 대비책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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