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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차지할 아름다운 땅(1)
신 8:1-10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신 8:1-10 / [이스라엘을 가르치시다]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명하는 모든 계명을 그대로 지켜 행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살아 남아서 번성하게 되고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그것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2)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난 40년 동안 저 광야에서 여러분을 인도해 주신 그 여정을 모두 돌아보십시오. 그 목적은 여러분의 고집을 꺾어 겸손하게 낮추어 놓는 한편, 여러분이 과연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인지 아닌지 여러분의 마음을 시험하여 알아보시려는데에 있었습니다. 3) 주께서 여러분의 고집을 꺾으실 때에 여러분을 굶주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여러분도 몰랐고 여러분의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주께서 여러분에게 먹여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주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치시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4) 지난 40년 동안 여러분의 옷이 해진 일이 없었고 여러분의 발도 부르튼 일이 없었습니다. 5) 여러분이 이 사실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옳게 가르치듯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가르치셨다는 사실입니다. 6) 그러므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르쳐 주시는 길로만 걸어가면서 주님을 경외함으로써 주님의 명령을 지키십시오. 7) [선물로 주시는 가나안 복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이제 여러분을 아름다운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땅에서든 들녘에서든 산지에서든 똑같이 깊은 곳에서 샘물과 시냇물들이 솟아날 것입니다. 8) 그곳은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열고 올리브 기름과 꿀이 나는 땅입니다. 9) 그 땅에서는 먹는데에도 부족한 것이 없고 어느것 하나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 땅의 돌에는 철이 들어 있고 어느 산에서나 구리를 캘 수 있습니다. 10) 여러분은 거기서 풍족하게 먹고 행복해지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아름다운 땅을 보며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광야에서 40년 동안 행하신 일을 기억하기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너희는 기억하라(1-5) 하나님은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이 지난 40년간 광야에서의 삶에서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배우길 바랐습니다. 이는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왜 광야에서 죽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는지를 깨닫고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가나안에 입성한 이후에 하나님의 품 안에서 떠나지 않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러하기 위하여서는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과 제사와 모든 도덕법과 의식법 등을 모두 지켜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한 옛 세대의 불순종의 결과는 지난 40년 동안 충분히 입증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단순히 복과 화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도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보상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진정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을 돌보신 것처럼 이스라엘을 기적적인 공급으로 돌보셨습니다. 또한 에덴에서 선악과를 통하여 아담을 테스트한 것처럼 광야에서 만나를 통하여서 이스라엘을 테스트하십니다.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6-10) 하나님께서 그들의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번성은 잠시 잠깐 잘 되는 것이 아닌 그 옛날 에덴을 떠올리게 하는 축복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한 이후 지금까지 광야의 길을 지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 때 하나님은 광야가 아닌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에덴에서 살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지만 인류 최초의 사람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낙원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정한 낙원의 회복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한 편에 있던 사람에게 낙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할 때 그 낙원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실재가 될 것입니다.
적용: 당신의 광야는 어디인가요? 당신의 선악과 또는 만나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을 기억하시며 기적적인 공급으로 돌보시고 계신 분이십니다.
성경은 애굽이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었는가에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 13:10) 나일 강에 흐르는 물 때문에 애굽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여호와의 동산 같은 곳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애굽에 기근이 들지 않는 이유입니다. 가나안에는 나일 강과 같은 강이 없습니다. 광야에서처럼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과 비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고 아니면 광야가 되는 것이 바로 가나안입니다.
< 설 교 >
광야를 걷게 하신 목적
신명기 8:11-20
서론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은 물론 구약시대에 맥추절이라고 하는 절기에 언어의 기원을 두고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구약의 일곱 절기를 그대로 다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어떤 교파는 구약의 일곱 절기를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은 정통기독교가 아닌 이단입니다. 구약의 일곱 절기는 다 복음의 모형이요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인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한해의 절반을 지나며 맥추감사절로, 또 한해를 마치고 나서 추수감사절로, 이렇게 일 년에 두 번 감사 절기를 지킵니다.
오늘은 신명기 8장 11절로 20절 말씀을 중심으로 ‘광야를 걷게 하신 목적’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출애굽의 사건들은 그것이 하나의 사건으로의 의미 보다는 우리의 구원 경험을 예표(typology)하는 것입니다. 애굽은 세상이고 바로왕은 마귀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넌 것은 마귀의 지배를 벗어나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금방 들어가지 않고 원래 열 하루면 갈 길에서 사십 년 동안 방황한 것은 영적인 훈련 과정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상징되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때로는 성공도 하고 때로는 실패도 하며 영적으로 성장해갔던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성장해가는 이 광야 과정의 목적과 목표는 뭐냐? 로마서 8장 29절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에 그 목적과 목표가 뚜렷이 제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로 미리 정하신 목적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나 타락해서 그 형상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형상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특징이 자기를 낮추시는 겸손함이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로 8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자기를 낮추시는 겸허함(humility)이 근본 원료가 되어서 예수님의 인격이요 형상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다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신명기 8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훈련의 모든 과정을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특별히 훈련의 목적을 요약한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려고 광야로 데려 가셨습니다. 그런데 복은 마침내 오는 것인데 선조건으로 먼저 낮추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복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 광야 훈련 전 과정의 목적입니다. 오늘은 광야란 무엇인가, 또 광야를 걷게 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는 방편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광야(Wilderness)는 무엇인가?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지대와 같은 땅을 광야라고 합니다. 광야에는 불뱀과 전갈과 같은 짐승만 있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없으며 기껏해야 나는 식물은 사람을 찌르는 가시나 찔레뿐으로 먹을 수도 없는 식물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사람이 살기에 아주 부적합한 곳입니다. 미국의 짐 베르크(Jim Berg)라고 하는 목사님은 광야(Wilderness)는 영어 W로 시작되므로 W로 시작되는 네 가지 단어로 그 특징을 표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방황하는 곳(Place of Wandering)입니다. 광야에서는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광야에서 방황을 하다가는 죽겠구나해서 모세에게 자꾸 애굽으로 되돌아가자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둘째, 부족한 곳(Place of Wanting)입니다. 광야에서는 물과 양식을 구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 마실 물과 음식도 구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이백만 명이 광야에서 사십년을 먹고 마셨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이백만 명을 먹이고 마시게 한 것입니다.
셋째, 전쟁하는 곳(Place of Warring)입니다. 가는 곳마다 친구는 없고 모두다 원수들뿐입니다. 일가친척인가해서 찾아가면 다 적이 되어 있습니다.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광야에서는 가만있으면 죽습니다. 전쟁에서 이겨야 사는 곳입니다.
넷째, 기다리는 곳(Place of Waiting)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은 누구하고 약속을 했는데 상대방이 늦어 10분만 기다리게 되어도 성질이 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떠날 때까지 기다려야 되었습니다. 광야는 기다림의 장소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광야는 방황의 장소요 부족한 장소요 전쟁해야 되는 장소요 한없이 기다려야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2. 광야를 걷게 하신 목적
그런데 하나님은 왜 택하시고 사랑하신 백성을 이렇게 험한 광야에서 40년이나 헤매고 다니게 하셨느냐? 목적이 있으시니까 그랬습니다. 신명기 8장에 2절, 3절, 16절에서 “너를 낮추시며”라는 구절이 3번이나 반복되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광야를 걷게 하신 목적입니다. 즉,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인 것입니다. 반석을 쳐야 물이 나오고 하나님이 물을 주셔야 물을 마시며 하나님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야 밥을 먹고 하나님이 메추라기 고기를 내려야 고기를 먹으며 하나님이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를 해 주셔야 갈 길을 알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내 힘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즉, 하나님을 떠나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한 가지 사실을 가르치시려고 하나님은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냐며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진리를 배우기도 어려웠고 또 속히 잊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20세 이상의 남자가 60만 명 이상이나 죽는 대가를 치르고 가까스로 이것을 배우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도로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에게 빠져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진리를 담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You can do nothing)는 것을 가르치려고 예수님이 요한복음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광야 40년을 걷게 하셨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떠나도 할 수 있는 게 많아. 예수님을 떠나도 나는 공부도 할 수 있고 직장도 가질 수 있으며 돈도 벌 수 있고 자식도 낳을 수 있으며 가정도 이룰 수 있고 잘 살 수 있어. 예수님 없이도 나는 잘 사는데 목사님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라는 사람은 아주 깨달음이 없는 사람이고 광야 40년을 가보지도 못한 사람이며 지금 애굽의 노예, 종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이고 구원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광야 40년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인생은 줄기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처럼 열매를 맺을 수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돈을 벌어 먹고 살지만 그것도 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 때문인데 이걸 가리켜 일반은혜 혹은 보통은혜(Common Grace)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도 햇빛과 비와 양식을 주십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 누구라도 다 하나님의 보통은혜를 입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죄를 짓고 자기 다리로 담장을 넘어갔고 건강해서 바람을 피우고 다닌다 할지라도 그 힘과 건강마저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자기 힘이 아닙니다. 이것을 가리켜 보통은혜라고 합니다. 이처럼 불신자들도 보통은혜를 받고 있는 거고 우리 신자들은 보통은혜에 더하여 구원받는 특별은총(Saving Grace)을 같이 받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특별은총을 못 받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일반은혜를 다 받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하나님 없이도 산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3. 목적을 이루시는 방편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낮추어 하나님을 섬기길 원하시는데 이런 목적을 이루시는 방편이 뭐냐? 신명기 8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기 위해 쓰신 방편 가운데 제일 중요한 도구가 만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8장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었고 16절 전반에는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만나는 출애굽기 16장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게 없다 하니 하나님이 광야지면에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만나가 하나님의 백성을 낮추기 위한 시험(test)이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얼마나 낮아졌나하는 것을 알아보는 시험이었다는 겁니다. 사람이 시험을 봐야 그 실력을 알 수 있습니다. 공부 잘하는 척 하고 있어도 시험 봐서 0점 맞는 학생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학생은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를 해도 집중력이 없어 아무것도 못합니다. 반면 공부 못하는 것처럼 놀고 다녀도 시험을 보면 100점 맞는 학생이 공부를 잘하는 학생입니다. 이런 학생은 늘 노는 거 같아도 자세히 보면 공부할 때 집중해서 잘합니다.
만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낮추어졌는가를 시험하는 겁니다. 만나는 두 가지 의미에서의 시험입니다.
첫째, 내 삶의 모든 자원은 그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믿느냐는 시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가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만나는 그들의 생명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만나를 먹을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오늘도 만나를 주셨구나. 이 만나가 없으면 나는 죽는데 이 만나로 말미암아 나는 사는구나. 내가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구나’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인간은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반기를 들 수가 없는 겁니다. 반기를 들어 만나가 그치면 굶어 죽는데 어떻게 반기를 듭니까?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심히 교만하고 사악한 언어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먹고 살고 호흡하는 것이 하나님 덕분이라는 시험에 0점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지금 먹고 살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 은혜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신자, 무식한 사람이라도 성경이 2,000년 동안 원수, 마귀, 마귀의 종들에게 무수한 공격을 받았다는 걸 압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원수, 마귀의 공격에도 살아남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며 성경이 가는 곳에는 사람들이 구원받고 문화와 지식이 발전하며 사회가 밝아지고 마귀, 귀신, 우상들이 떠나가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무지한 자가 뭘 안다고 성경을 공격합니까? 왜 성경을 공격하고 하나님을 공격하고 기독교를 공격하느냐?자기가 먹고 살고 있는 것이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 하나님이 자기에게 햇빛과 비와 물과 양식을 주고 지식과 건강도 주어 직장도 얻게 했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안 믿어지면 안 믿어진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신자라고 할지라도 마음속에는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 신이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신이 없이 어떻게 하늘에 태양이 뜹니까? 신이 없이 어떻게 하늘에 구름이 뜹니까? 신이 없이 어떻게 이 땅이 존재하고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이 걸어가도 무너지질 않습니까? 신이 없이 어떻게 공기가 있습니까? 신이 없이도 그런 게 다 저절로 있다는 자는 우둔한 자입니다.
야고보서 1장 16절로 17절 전반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모든 좋은 것은 빛들의 아버지께로 온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안 계시면 저가 그걸 어떻게 받습니까? 사도행전 17장 25절에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우리에게 헌금이나 물질을 내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나한테 뭘 줬다고 나보고 섬기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든 불신자든 생명과 호흡 그리고 만물을 친히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맥추감사주일에 신명기 8장을 설교하는 이유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 건강, 직업, 가정, 지식, 권위 이 모든 것은 100%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감사를 해야 된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함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나님은 맥추절이 되면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하나님이 모든 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일 년에 두 차례,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감사가 있어야 하나님은 더욱 감사할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만나의 시험은 내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100점,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0점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하나님 말씀의 규율대로 사용하느냐는 시험입니다. 만나는 아무렇게나 먹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만나의 규율(Regulation of Manna)이 있습니다. 만나는 하루에 나가서 한 오멜만 걷어야 됩니다. 내일 먹을 거 모래 먹을 거를 미리 걷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다음날 다 썩어버리고 냄새가 납니다. 하루 먹을 한 오멜만 걷고 다음날 아침까지 두면 안됩니다. 그리고 안식일 전날에는 두 오멜을 걷고 안식일에는 만나를 안 주겠다는 것이 만나의 규율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도 나가서 잔뜩 취합니다. 한 오멜을 갖다 숨겨놓고, 또 한 오멜을 갖다 숨겨놓고 해서 내일도 먹고 모래도 먹고 밤참도 먹고 사이사이도 먹고 이렇게 해야겠다 해서 실컷 남겨뒀는데 그 다음날 아침이 되니까 다 썩어서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못 먹게 되어 집안을 다 버리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안식일에 거두러 나갔다가 하나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공연히 모세에게 진노를 사고 야단만 맞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원들을 바르게 사용하는 규율을 주고 있는 겁니다. 돈은 좋은 겁니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돈은 좋은 수단이지만 돈을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돈을 사랑하고 쫓아가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또 돈을 의지해도 안됩니다. 어느날 다 날아갈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돈은 사랑해서도 안되고 의지해서도 안됩니다. 돈은 좀과 동록이 해하는 이 땅에 쌓아둬도 안되고 좀과 동록이 해하지 아니하는 하늘나라에 쌓아두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써야 됩니다. 또 시간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자원이므로 낭비하지 말고 기회를 잘 활용해서 사용해야 됩니다. 헌금도 할 수 있을 때 해야 됩니다. 어떤 분은 ‘내가 돈 많을 때 헌금할 걸 이제 다 망해가지고 하고 싶어도 할 수도 없다’고 후회합니다. 또 어떤 분은 병들어 가지고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주의 일이라도 조금 할걸’하고 후회합니다. 그러나 이런 뒤늦은 후회는 아무 쓸데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건강이 있을 때 기회를 살려서 사용해야 됩니다. 건강도 하나님이 주신 귀한 자원입니다. 이걸 가지고 우리 스스로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손으로 일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 드려 의의 병기로 쓰임 받도록 하라는 것이 규율입니다. 지식과 기술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사용해야 됩니다. 컴퓨터 인터넷 기술이 있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국가에 반역이나 하고 음란한 소리나 하며 인신공격이나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하나님이 주신 규율대로 쓰지 않으면 결국은 썩고 벌레가 생기며 냄새가 날 것입니다. 만나가 제 맛을 내려면 규칙대로 사용해야 됩니다. 그래야 단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첫째로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믿고, 둘째로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하나님의 규율대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두 가지 시험에서 수시로 실패를 합니다. 실패하는 경우는 세 가지 경우입니다.
첫째, 불평과 원망을 하는 자는 실패자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불평이 많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감사가 많습니다. 아침에 밥 한 그릇 먹는 것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밥을 앞에 놓고 투정하는 아이들은 몇 끼만 굶겨봐도 곧 감사하게 됩니다. 군대 가서 처음 훈련 받을 때 밥과 반찬이 마음에 안든다고 안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훈련을 받고 배가 고프게 되면 똑같은 밥과 반찬이 너무나 맛있어 집니다. 저는 가격이 비싼지는 않지만 아내가 만들어준 김치찌개를 먹을 때 그리고 자장면과 라면, 두부찌개 등을 먹으며 정말 맛있어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는 길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갈비뼈가 부러졌다고 해도 ‘척추가 안 부러지고 갈비뼈만 부러졌으니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저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성공자이고 불평하는 자는 실패자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자기 힘으로 얻은 것처럼 자만(boasting)하는 자는 실패자입니다. 본문 17절로 18절 전반에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이 먹고 살만하게 되면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합니다.그런데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 손으로 했어도 그 손의 능과 힘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신 겁니다. ‘내가 다 했도다. 내가 이루었도다.’하며 자만에 빠진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ignoring) 잊어버리는(forgetting) 자는 실패자입니다. 만나를 두 오멜, 세 오멜 거두고 있어서 하나님이 한 오멜만 거두라고 했는데 왜 그러냐고 하면 ‘아이고, 잊어버렸네.’라고 하는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고 있어서 왜 나왔냐고 하면 ‘아이고, 잊어버렸네.’라고 하는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리고 무시하는 사람은 실패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규율을 잘 기억하십시오. 마태복음 4장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승리하는 인생은 오직 감사, 오직 겸손, 오직 말씀입니다. 이 세 가지를 따르는 인생은 승리하는 인생이 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영원토록 광야만 걷게 하진 않으십니다. 40년이 지나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네가 짓지 아니한 집에 살 것이고 네가 심지 아니한 과일 나무의 과일을 먹을 것이며 네가 갈지 아니한 밭에서 농사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론
광야를 지나면 마침내 복이 옵니다. 그런데 광야를 지날 때 자신을 낮추는 걸 배워야 됩니다. 자신을 낮추는 걸 배우면 마침내 복이 옵니다. 모세도 광야 40년 양치는 목자훈련 이후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다윗도 광야에서 양을 치고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낮아지고 깨어지며 부서지는 훈련을 한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 빛나는 최고의 왕이 되었습니다. 침례요한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금식 기도를 하셨기 때문에 메시야로 공생애 사역을 성공하셨습니다. 이처럼 광야의 시험에서 승리하면 마침내 주시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그러므로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첫째로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셨다하고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둘째로 내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 말씀의 규율대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높이고 나는 낮추어 마침내 복을 받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기
신명기 8장 1-3, 14-16절 / 김병삼 목사
낮아질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우리 뒤에 무엇이 있고 앞에 무엇이 있느냐는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느냐에 비하면 작은 문제이다.” 이것은 랄프 왈도 에머슨의 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왜’라는 물음을 가지고 살고, 어떤 사람은 ‘어떻게’라는 물음을 가집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인데, ‘삶의 이유’를 묻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의 사람이고, ‘어떻게의 방법’을 찾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에 의존하는 방식의 사람인 경우를 자주 봅니다.
겸손은 인간을 가장 품위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과 같으며, 누군가의 조언을 듣고, 독선적이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가치는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받을 수 있는 성품이 될 때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성품의 기초로서 ‘신뢰’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자신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를 하게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따르는 성품의 기초가 바로 ‘겸손’이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충청도 이발소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외국인이 충청도에 가서 이발소에 들렸습니다. 이발소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는데, 충성도 이발사가 “왔씨요?”하고 인사를 합니다. 외국 사람은 이 말을 “What see you?"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 보이는 것이 거울이기에 이발사가 영어를 잘 하는 줄 알고 ”mirror"라고 영어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이발사는 이 말을 듣고는 외국사람 머리를 그대로 빡빡 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이를 어쩐대유”
혹시 여러분은 잘못 알아듣거나, 모르는 것임에도 아는 척하다가 낭패를 당한 경험이 없으신가요? 그런데 여러분, 무지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교만입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말도 그런 각도에서 생각해 봅니다. 인생의 방법을 찾다 보면 환경의 벽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삶을 결정하게 됩니다. 반면에 ‘왜’라는 물음은 존재의 의미를 묻는 것입니다. 즉 내 속에서 솟아나는 그 무엇, 내 삶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에서 출발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내 존재를 바라보는 출발점이 절망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가운데 ‘실존(實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 가운데서 실존을 발견하며, 칼 야스퍼스는 ‘난파(難破)’된 삶에서 실존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방법도 의존할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낮아져서 ‘겸손’의 성품 말고는 그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삶이 시작됩니다.
성경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 완성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다듬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의 성품이란, 완성품으로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품 훈련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마치 칼을 쓸 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칼을 맡기는 것과 같으며, 총을 쓸 줄 모르는 아이에게 총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품은 늘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는지 않는지 알려하심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께서 사십 년을 광야에서 걷게 하신 이유가 있구나! 우리를 낮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보시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게 하셨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모습을 너무나 명확하게 보고 계셨습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 되어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본성을 말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우리의 낮아짐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낮아짐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가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면 바로 겸손입니다. 40년 동안 철저하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낮추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광야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존재, 인간의 연약함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겸손함은 인간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축복의 땅, 가나안을 앞에 놓고 모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이 무엇입니까? 개역 성경에서는 민수기 8장 14절이 “두렵건대”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Living Bible에서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that is the time to watch out…” 이 말씀은 신명기 8장 처음부터 시작되는 구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던 그 땅을 얻게 될 때, 모든 것이 풍족하게 될 때, 더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어도 살 것 같은 세상이 될 때, 교만하여질 것을 염려하며 모세가 이 글을 기록한 것입니다.
교만의 가장 큰 위험이 무엇입니까? 본문 14절은 “여호와를 잊어버릴까”라고 기록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겸손한 때는 여호와를 기억하지만, 교만해지면 여호와를 잊어버릴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여호와를 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위대한 시편의 말씀은 시편 기자의 절망 가운데 피어난 아름다운 고백이었습니다. 시편 42편 1절에서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기록합니다.
여러분은 사슴의 갈급함을 아십니까? 옛날 근동지방의 사람들이 먼 길을 떠날 때는 사슴을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막 한가운데서 물을 찾아 헤맬 때, 물에 주린 사슴을 풀어놓으면 물 냄새를 맡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을 지경까지 이른 사슴이 사막에서 물을 찾아 달려가고 나면, 물을 먹지도 못하고 물 앞에서 폭 거꾸러져 죽습니다. 이것이 시편 기자가 보았던 사슴의 갈급함입니다. 이러한 갈급함 가운데서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갈급하며 만들어져 가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이 순간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존재,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나의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않는 존재, 그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 앞에서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서 있는 겸손함, 이것이 은혜를 아는 자의 성품입니다.
성품의 훈련 장 ‘광야’
우리가 오늘 본문 가운데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훈련의 장소가 ‘광야’였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8장 2절에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신명기 8장 15절에서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특징을 발견하게 됩니다. 광야는 ‘광대하고’, ‘위험한 곳’입니다. 광대하다는 것, 사방이 다 뚫려 있는 곳, 사방이 훤하게 보이는 곳, 위험이 닥쳐 올 때에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바라볼 수 없는 곳, 그래서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곳, 그곳이 광야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겸손을 배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모든 것을 포기한 곳에서 물이 나도록 하셨으며 만나를 경험하게 하셨고, 전쟁 가운데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고난 가운데 겸손과 순종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광야의 시간을 지나가고 있다면, 그 시간이 겸손을 배우는 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만이 여러분에게 유일한 소망이 되는 때에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제가 지난 카자흐스탄 선교를 가면서 한 권사님 부부를 보면서 참으로 감격스러웠습니다. 남편 권사님이 부인 권사님보다 더 열심히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유학을 가기 전 이매촌 동신 상가에서 사역하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때 정말 열심히 기도하던 두 여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동일하게 남편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만나 교회에서 기도제목이던 두 남편이 부인보다 더 신실한 사람들이 된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샘물을 내시는 분이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분명한 것은 광야의 훈련 기간은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훈련의 기간을 지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여러분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프리카의 부족은 기우제를 지내면 틀림없이 비가 온다고 말입니다. 그 이유가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리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이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여러분을 붙잡아 주는 가장 강력한 끈이 무엇입니까? 소망을 잃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2007년 여름 한국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한국의 지성이라고 불리는 전 문화부 장관인 이어령 씨가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온누리 교회에서 일본 선교를 위해 만든 ‘러브 소나타’ 행사 중의 하나인 동경 프린스 파크 호텔에서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철갑의 논리로 무장하고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글을 써왔던 사람,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어본 적이 없는 그가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그의 삶에서 ‘광야’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불 뱀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의 딸인 장민아 변호사가 오랫동안 암으로 투병하며 시력을 잃어버릴 위기에서, 그리고 자신의 손자가 자폐증에서 낫는 체험을 하며 하나님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는 인터뷰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망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기 파괴라는 극적인 것이 없이는 영성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세속적으로 편안한 사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죠. 이 땅에는 빛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둠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이 합쳐진 ‘그레이 존’(회색지대인 궁창)에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빛과 어둠을 알아야 인간 한계를 초월해 영성의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젊은 시절의 자진과 지금의 자진이 달라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는 스스로 옛날에 자신이 썼던 글과 지금 쓰는 글이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제 교만한 현자에서 따뜻하고 겸손한 현자가 된 것입니다.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라는 그의 시에 이 모든 것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하나님,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으니 절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좀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하나님,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 묻은 이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것으로 저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 속을 풍금처럼 울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 ‘광야’에 서 있는 분이 계십니까?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여러분의 힘이 되시고 해결자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곳 ‘광야’에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겸손의 유익이 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겸손하기를 원하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삶이란 내가 좋고 내게 쉽고 내게 당연한 대로 사는 게 아님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성품이라는 사실. 성품은 그분을 내 형상대로 바꾸는 게 아니라 내가 그분의 형상대로 바뀌는 것이라는 사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생활 방식에 나타나는 가치관과 기준이 하나님과 다르다면 우리는 자신이 정말 어떤 신을 따르고 있는가 재고해야 한다. 하나님인가, 그냥 신인가?“
그러면 겸손의 성품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신명기 8장 16절입니다.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께서 겸손의 성품을 만들어 가신 이유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겸손의 성품은 사실, 우리가 가진 옛 성품을 벗어버리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광야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자분 중에 매니큐어를 바르는 분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은 어떻게 바르시나요? 먼저 이전의 자국을 지워야 합니다. 가구를 새로 칠할 때, 먼저 있던 페인트를 지워야 합니다. 자동차에 새로운 색을 입히려면 녹슨 페인트를 먼저 벗겨 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겸손은 바로 우리의 옛 자아를 벗어버리는 것이기에 유익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겸손은 우리의 죄를 벗겨 내고 은혜로 덧입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합니다.
1.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존귀하게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혹시 여러분은 ‘두더지 잡기’라는 오락을 해 보셨나요? 머리를 들이밀고 나오는 놈들을 때리는 게임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높아지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를 하나님의 손으로 높여 주십니다.
우리 사회를 흔드는 ‘학력위조’가 무엇인가요? 바로 교만 아닙니까? 자신의 능력과 실력 이상을 과장하려는 인간의 욕구 말입니다. 겸손이 은혜를 아는 자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라는 말을 합니다. 교만은 덜 익은 사람들의 자기 과시입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왔습니다. 그런데 받고 보니까 별거 아닙니다. 목회를 하는데 필요한 것이 박사학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박사라는 것을 드러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학위를 받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목회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는 것이지, 학위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위 위조는 가지지 못한 자들의 complex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가진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 낮아진 자를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높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 높임입니다.
2.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잠언 11장 2절입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교만은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자는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겸손이 하나님 앞에 선 내가 부족함을 알기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라면, 교만은 하나님 앞에 서보지 못한 죄인이 잘난 척하며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존심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어떤 경제신문에 나온 자동차 판매 세일즈 왕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출근할 때, 신발 끈을 매며 자존심을 두고 간다.” 그는 세일즈를 하면서 자존심 상하는 일을 자주 경험한답니다. 자신이 준 명함을 가지고 밥을 먹고 이를 파는 사람도 있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렇게 생각을 했답니다. ‘저건 단순히 종이에 불과하다. 나는 자동차를 팔려고 여기 온 것이지, 내 자존심을 확인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설 때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자존심을 내세우고 확인받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내가 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나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보좌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나의 약함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기 위함입니다.
저는 큰 인물과 소심한 인물의 차이를 그렇게 구분합니다. 제가 만난 큰 사람은 어떤 사람과 만나도 이야기를 듣는 것에 집중합니다. 누구를 통해서도 배우려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쭙잖게 아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말을 합니다. 이게 교만한 자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 길을 묻는 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가 해야 할 것, 말해야 할 것, 그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는 겸손한 자의 특권입니다.
3.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부흥의 특권을 주십니다.
역대하 7장 14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부흥이 무엇입니까? 메마른 땅에서 샘물이 나는 것입니다. 이 땅의 황무함과 우상들을 부수고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우상에, 어떤 죄악에 빠져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들의 땅을 고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이라는 그릇 위에 소중한 축복을 부어 주시는 분입니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의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관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다면, 겸손하게 우리에게 맡겨준 것을 잘 사용하고 나눔이 축복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삶을 회복시키시며, 부흥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은 무릎을 꿇는 자의 몫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겸손의 성품을 가진 자의 특권이 무엇인지를 아셨습니까?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겸손은 우리가 붙잡고 있었던 모든 것을, 내가 주인 삶은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위대하신 분 앞에 나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품의 기초는 바로 신뢰와 겸손입니다...
우리의 훈련
신 8:1-6 / 박주락 목사
어느 가난한 농부의 아내가 자기의 딸이 도시에 가서 식모노릇을 해서 돈을 벌겠다고하자 딸이 집으로 보내줄 돈으로 땅과 가축을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딸을 도시로 보냈습니다. 소녀는 아름답고 영리했습니다. 그는 큰 도시에서 힘든일을 하지않고도 얼마든지 많은돈을 벌수 있다는 것을 제빨리 배웠습니다. 그래서 돈많은 남자들을 많이 끌어들였습니다. 이 남자에게서 저남자로 옮겨다니면서 보석과 자동차와 모피를 모으며 쾌락생활을 즐겼습니다. 이렇게 즐기며 살다보니 고향에 계신 어머니는 까맣게 잊고 말았습니다. 어느날 어머니가 생각이 낮자 마음이 아픈 그녀는 고향으로가는 기차를 타고 밤늦게 고향마을에 토착했습니다. 어머니가 계신집 대문앞에 다다른 그녀는 대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언제나 어머니가 대문을 꼭꼭 잠가두는 것을 알고있던 그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는 또한 방에 불이 환히 켜져 있었습니다.
딸이 집을 나간 10년의 세월동안 돌아올 딸을 기다리며 한번도 대문을 닫아잠근적이 없었고 밤에 불을 끄본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농부의 딸 처럼 세상에 정붙이고 살다가 정작 우리가 돌아가야할 곳 바라보아야할 곳을 잊어버리지나 않았는지 돌아보아야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가야할 고향이 있는 사람들을 크리스찬이라고 합니다. 지난주에는 한국교회의 대표격인 하용조 목사님께서 65세로 돌아가셨습니다.
누구나 이 땅위에 살다가 불원간 가게되는데, 예수 잘 믿으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기 훨씬 전부터 하늘의 수많은 별들은 변함없이 자기궤도를 지키면서 빛나고 있습니다.이 사실은 조금이라도 인식한 사람은 그 누군가가 이 대자연을 조종하고 있음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역사속에 나타난 수많은 영웅들의 흥망성쇠를 조용히 살펴보면서 역사 이면에서 그 눈군가가 조종하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렇습니다. 인생을 포함한 새상만사를 다스리는 그 누군가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 십니다.(행7:25-26) 헌데 이러한 하나님의 다스림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근원적인 힘임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을 신앙하는 우리에게 만사형통만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좌절과 낙심 그리고 환난을 만나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습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 이 문제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자녀로 양육하시기 위한 연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이란 축복의 땅을 주시기위해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을 곧장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이시지 않고 괴롭고 힘든 광야생활을 무려40년이나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사실상 광야 40년의 세월은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음에 분명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자녀로 양육하시기 위한 연단이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광야 40년 생활의 목적을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2절)라는 말로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의 고통을 통하여 저들의 교만을 제하시고 겸손하고도 거룩한 당신의 백성으로 성숙시키려 하셨던 것입니다(벧전1:7).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닥쳐오는 시련 또한 하나님의 이러한 목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광야 같은 시련기를 만났을 때 그 과정을 하나님의 간섭이라 여기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를 더욱 성숙시켜가야 하겠습니다(고후12:7). 그 누구도 광야와 같은 시련기를 거치지 않고서는 겸손하고도 강건한 성도가 되기 어렵습니다. 현대인들의 취약점은 고생없고 땀이없는 나날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음식도 거친 음식이 필요합니다. 땀흘리는 노동도 필요합니다. 다음주 교사 헌신예배를 시발로 여름행사가 시작되는대, 여러 가지 훈련을 통해 성숙한 신앙을 갖자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알고 좋은 하나님의 자녀로 훈련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은혜의 귀중함을 깨닫게 하는 도구
이스라엘은 40년의 광야 생활에서 그들 생존의 유일한 해답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실로 그들은 먹을 물과 음식이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그 모든 필요를 해결 받음으로써 오직 하나님만이 그들의 삶의 주인임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그들의 주식으로 취했던 ‘만나’는 일찍이 그 누구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으로서(3절) 인간의 생존과 하나님의 은혜와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즉, 인생들의 삶의 근거가 인간의 노력과 경험에 있지 않고 하나님 은혜에 있음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에게 부딪히는 시련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생의 기저로 여기게하려는 하나님의 섭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딪히는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마6:31)는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합시다. 아니 이 말씀을 굳게 믿어야합니다. 우리의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특히 약속하신바를 신뢰하지 못하는 약점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의 필요를 넉넉히 채우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고 깨달아 귀한 일꾼 되시기 바랍니다.
3. 관계를 돈독케 하기 위한 수단
절대 결핍의 장소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 굶어 죽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으며 떨어진 의복을 입은 사람도 없었고 발이 부르튼 사람도 없었습니다.
(3.4절). 이와 같은 사실은 결국 시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들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사모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배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극한 시련들을 경험하면서 자신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아들들임을 자각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5절 ; 히12:6).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때로는 평안한 삶으로 인도하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고통과 질곡의 현장으로 이끌기도 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시련을 주시는 것은 그들을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더욱 성숙한 인격으로 만드시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마치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매를 들듯이 말입니다(5절).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을 당할 때 그 시련을 통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읽을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로 합시다.
솔직히 내게 닥아오는 시련이 없었으면 하는게 모두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시련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아지게 됩니다. 아주 조그마한 차이입니다.
두 사람이 모두 대머리를 가진 사람이 화장실에서 만나 얼국을 씻으며 예기를 나눕니다.
낙관주의자 - 역시 대머리는 좋아 우리는 힘들게 머리를 빗질할 필요가 없거든! 그러자
비관주의자 - 하지만 우리는 씻어야할 얼굴이 너무 넓지않소!
금년에는 하도 비가 만이와서 제발 비 좀 그만오게 해 달라고 기청제를 드린곳도 있다고 합니다. 이제 비가 그치고 정말 더운맛을 볼날만 있는 것 같습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데로 더우면 더운데로 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습니다. 그 섭리대로 순종하며 긍적적으로 생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미세한 작은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죽음일 수도 있고 승리의 삶일 수도 있습니다. 승리하는 여름이 되시기를 주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억하라
신 8:1-8 / 박덕기 목사
오늘은 일 년 52 주 가운데서 마지막 주일인 송년 주일입니다. 우리의 언어 가운데 ‘마지막’이란 말은 매우 심각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해의 마지막이라든지, 생의 마지막이라든지 할 때에, 무엇인가 결단을 촉구하는 심각한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면 여기저기서 수많은 모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들 모여서 벌리는 모임을 가리켜 ‘망년회’라고 부릅니다. 망년회는 무엇을 하기 위한 모임입니까? 지난 한 해를 모두 잊어버리자는 모임입니다. 괴로웠던 일들, 서러웠던 일들을 다 잊어버리자는 것입니다. 한 해를 살아오며 잊어버리고 싶었던 일들을 말끔히 잊고서, 새 출발을 해보자는 뜻으로 망년회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망년회를 갖는다고 해서, 모든 게 다 잊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술기운이 감도는 시간은 어떨는지는 몰라도, 술에서 깨고 나면 문제는 그대로 있고, 마음은 여전히 괴로울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처럼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망년회 대신,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1. 받은바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무엇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여기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잊어버리기보다는 오히려 기억하고 감사드리기 위해, 우리들은 이렇게 모여서 송년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 년 동안의 광야생활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어쩌면 광야와도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 이해하고 교훈을 얻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할 수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광야 사십 년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들을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어떠한 은혜들입니까?
1)성막을 주신 은혜입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습니다.
2)불기둥과 구름 기둥의 은혜입니다.
200만이 넘는 대가족이 홍해를 건너 광야를 들어서기는 했지만, 광야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낮에는 기온이 4. 50 도로 상승하고,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져 내려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시원하게 해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따뜻하게 해주셨습니다. 그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 한 사람 열사병에 걸렸다는 기록도 없고, 감기 몸살에 걸렸다는 기록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3)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신 은혜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양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십 년 광야 생활에, 한 번도 어김없이 내려주신 하나님의 특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은 물론 처자식 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장사도, 농사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하나님께서 완전히 보장해 주셨던 기간이, 바로 광야 사십 년의 세월이었습니다.
4)생수를 주신 은혜입니다. ‘마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최초로 진을 친 곳인데, 그곳 물이 너무 쓰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한 나뭇가지를 물에 던져 수질을 변경시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갈한 목을 시원케 해주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림이란 곳에 당도했을 때, 거기에는 종려나무 칠십여 그루에 둘러싸인 물 샘이 열둘이나 있는 오아시스가 있어서, 시원하게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이란 곳에 이르러 마실 물이 없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반석에서 생수가 솟구치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5)의복을 주신 은혜입니다.
4절에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신 29:5절에는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였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신기한 옷들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기한 신들을 신고 다녔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유명 메이커 제품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갓난아이가 태어났을 때 옷을 입혔을 것입니다. 아이가 조금 자라면 그 발에 맞는 신발을 신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십 년을 자라가면서 우리 같으면 수십 벌의 옷을 갈아입었을 것이고, 수도 없이 많은 신발들을 갈아 신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옷은 사십 년 동안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신발은 해어지지 아니했다고 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금년 한 해가 거의 다 저물어 가는 오늘까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 왔습니까? 이 병마질고 재난 많은 세상에서, 지금까지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 과연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된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총인 것을 깨닫고 진심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 광야 길로 인도하신 목적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사십 년 동안이나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길을 인도하실 때에, 아무런 목적 없이 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2절 하반 절에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이는’이라고 함이 바로 목적을 말합니다.
1)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백성들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백성으로 훈련하기 위해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고, 그들에게 고난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서 사십년간이나 생활하는 동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조차,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께서는 사십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며, 해진 옷과 신발을 신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절대 결핍의 장소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굶지도 않았고, 신발이 없어 발이 부르트지도 않았습니다.
2)겸손한 사람들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까닭을 본문에서는 두 번씩이‘낮추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던 인간에게는 진정한 행복이 없습니다. 아담처럼 넘치는 풍요가 인간으로 하여금 방종하고 불순종하게 하고, 하나님을 잊고 교만하고 자랑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낮아져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만 흐르듯이, 하나님의 은혜도 겸손한 심령에만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난은 인간을 낮아지고 겸손하게 만들어, 나는 내 인생을 인도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구원하소서! 하고 기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 55:22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고 했고, 시 37:5-6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하나님께 맡기되, 온전히 맡겨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잘 아는 유명한 의사에게, 꾸준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사는 차갑게 거절했습니다. 자신은 유능하니까 무능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에게나 전도해서 위로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의사의 무지와 오만함에 크게 실망하고, 전도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런데 수년이 흐른 후, 그 의사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을 만난 그 의사는, 고개를 숙이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암에 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고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며 애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등 따뜻하고, 배부르고, 모든 것이 편안할 때는, 자기의 힘만을 믿고 교만하지만, 커다란 환난이 닥치면 교만이 박살나고 ‘자기’라는 우상이 산산조각 깨져버리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면, 먼저 ‘자기’라는 우상을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고,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자기가 신이 되고, 자기를 우상화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3)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를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2절에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는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것입니다. 고난은 아집을 깨뜨립니다. 고집불통의 마음도 고난 앞에서는 깨어집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일도 안 지키고, 십일조도 드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태풍이 몰아닥치면, 그의 아집이 깨어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지, 떡으로만 사는지, 복을 받기 위해서만 예수를 믿는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시험해 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로 하여금, 때로 광야와 같은 길을 걷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순종의 훈련인 것입니다. 높아지고 부유해지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순종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악하고 불순종하는 인생들을 고치기 위해서, 때로는 고난이라는 징계를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5-6절에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혹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라고 느껴지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사, 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고, 더 좋은 미래를 위해서 징계하시는 줄 알고,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징계와 연단을 통해서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말씀에 순종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풍족한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밥맛이 꿀맛인지 모르고, 고생 없이 받은 복은 사치하고 방탕하게 하지만, 연단 후에 받은 복은 감사하고 찬송하며,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하여 받은 복을 아름답게 쓰게 되는 것입니다.
4)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서 사십일 금식 기도를 하시고 시장하신 것을 알고, 돌덩이를 명하여 떡이 되게 하여 먹으라고 유혹을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하여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는 진리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때로 우리를 광야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 송년주일입니다. 불신 세상 사람들은 연말이 다가오면 갖가지 ‘망년회’ 모임에 바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때에, 오히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들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 년 동안의 광야생활 중,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들을 꼭 기억해야 했듯이, 금년 한 해 동안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 온 우리들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거처할 보금자리를 주시고, 영육 간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 금년 한 해 동안 형통한 일들이 있었다면, 절대로 내가 잘나서 그리된 양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된 것임을 알아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심정으로, 다가오는 새 해에 더욱 주님께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 한 해를 살아오며 인생의 거친 들에서 갖가지 시련을 당한 성도들이 있습니까? 그 같은 광야생활을 통하여 1)주님만 의지하게 하고 2)우리를 낮추어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3)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말씀에 순종하는지 여부를 시험하기 위해서 4)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함인 줄 알아서, 주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신앙과 인격이 아름답게 성화되어, 주님께 더 큰 복을 받고, 더욱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형통한 길로 인도해 주신 은혜든지, 광야 길로 인도해 주신 은혜든지, 모두가 다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과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총임을 확신하고 감사하시기 바라며, 그러한 성도들에게 더욱 복된 새 해를 선물로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신명기 8:1-20 / 오세원 목사
우리나라의 초중고 학생들에 대한 역사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여러 가지 문제가 야기되고 있는 가운데 역사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형성되고 있습니다. 현 박근해 정부가 역사교육을 필수로 하는 방안을 강구중에 있습니다. 역사는 이미 지난 세월의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성경을 읽으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어서 성경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왜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갖고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를 반문합니다. 성경은 구속사적으로 보고 읽고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을 구속사를 접어두고 읽는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못하고 한 나라, 즉 이스라엘의 역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사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민족을 구원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의 구원과 구원받은 자의 삶을 미리 보여준 것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구속사의 길을 올바르게 걷게 합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특히 우리나라의 역사가 이스라엘 역사와 유사점이 많습니다. 오늘은 우리나라가 일제 36년 식민지 생활을 끝내고 해방 된지 68주년이 되는 해로서 오늘은 광복기념주일로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우리가 구속을 당해보지 않고는 진정한 해방의 기쁨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작게는 일상생활에서 조금은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살이와 해방과 가나안 땅에서 삶과 또 타락과 하나님을 잊어버린 삶의 결과 바벨론 70년 포로생활, 그리고 다시 해방되어 잘 살다가 하나님을 저버린 결과 주후70년에 로마에 의해 나라없이 지내다가 1948년에 오늘의 이스라엘로 독립하여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느끼며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 사는 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험기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경외할 때는 그들의 삶이 아름다웠습니다. 복된 삶이었습니다. 그러다가도 하나님없이 잘 살 수 있다는 인간의 교만이 들어가 하나님보다 세상의 물질문명을 우선으로하는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길 때 하나님은 여지없이 그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민족이 잘사는 길은 무엇일까요? 지금 인류가 사는 길은 환경보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온 인류는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나라가 잘 사는 길은 무엇일까? 물론 지금 우리나라는 잘 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국가적으로는 우리나라가 굉장히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적어도 물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속적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살기 위해서, 아니 번성한 삶을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며 가나안을 차지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잘 살고 번성한 삶을 살면서도 가나안에 이르는 삶, 즉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된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열흘정도면 갈 수 있는 땅을 돌고 돌아 그렇게 된 이유를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절 말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40년 생활을 하게 하신 이유는,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을 겸손하게 낮추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낮춘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살 수 없음을 알게 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이라는 고백을 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돈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찬양을 불러야 합니다.
‘나는 갈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나의 모든 삶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와야 합니다. 혹시라도 성도 여러분 가운데 광야같은 삶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 계십니까? 그 광야길이 끝날것 같다가도 끝이나지 않고 길게만 느껴지는 분 계십니까? 왜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꺼?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겸손한 신앙고백을 듣고 싶어서 그렇게 하신다고 생각해 보신적은 없습니까?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잘 살수 있다고, 세상 줄만 잘 타면 출세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이제라도 늦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의 입술을 통해서 고백해야 합니다. 아무리 안될 조건을 다 갖춘 것 같아도 하나님이 역사하면 얼마든지 될 수 있음을 고백하는 신앙을 가질 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겸손한 마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광야같은 삶에서 벗어나 가나안으로 인도해주십니다.
두 번째는 믿음을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절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
우리가 마귀의 시험에는 넘어지면 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면 우리는 그 시험을 잘 통과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본토친척 아버지집을 떠나 지시할 땅으로 갔지만 그 다음 시험은 기근의 시험이었습니다. 그 시험은 사실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한 것이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혹시라도 사라가 예쁘게 생겨 애굽의 권력자가 아브라함 자기를 해치고 아내 사라를 차지하지 않을까하여 그렇게 했습니다. 얼마나 못난 가장입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시험이 있었으니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을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시험을 아주 잘 통과했습니다. 이삭이 제물로 바치는 모습을 보고서 이삭을 제물로 죽이려고 하는 그 순간에 여호와 이레로 주신 수풀에 뿔이 걸린 양 한 마리가 기다기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비로소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를 알려고 시험하십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주시는 시험, 믿음의 연단의 시험입니다.
혹시 성도 여러분, 가운데 지금의 삶이 광야생활이라고 느끼는 분 계십니까? 혹시라도 그런 분이 계시면 하나님이 지금 당신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광야생활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초지일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가를 시험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셋째, 광야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게 하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살아야함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그 자리를 이동하라고 할지를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굶어죽었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순종했을 때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상하리만큼 하나님이 나를 먹이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광야생활 40년 동안 이상한 것은 옷이 헤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40년동안 옷을 제대로 만들어 입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괜찮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호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가 광야생활을 하지만 그 삶이 지나놓고 보면 오히려 동경이 됩니다.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그때 옷이 헤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또 다른 이유가 나하 더 있습니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5-6절)
여기서 ‘징계함 같이’란 징계의 단어가 NIV영어성경에 보면 disciplines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훈련, 훈육, 기강, 징계등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교훈하고 견책하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단순한 징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며 그의 계명에 순종하도록 지도하는 모든 교육과정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생활의 고난과 역경은 하나님께서 마치 어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그들을 훈육하신 사랑의 매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광야생활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보다 더 큰 복을 주시려고 하나님을 잘 경외하게 하려고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를 통과하면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는가를 7절 이하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
하나님은 우리민족에게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의 삶처럼 우리나라가 일제 36년의 식민지 지배를 겪으면서 자유가 얼마나 중요하고, 나라가 얼마나 중요하며, 주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비싼 값을 치루고 얻은 역사적 산 교훈이었습니다. 당시에 나라의 주권을 잃었던 것은 사색당파싸움에 우리끼리 싸우는 민족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나라에 복음을 듣게 하시고 신앙을 갖게 하셔서 조국을 위하여 생명 걸고 싸울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을 양육시켜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충만케 하시어 이적과 기사가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해방을 주시어 이 나라 이 민족을 들어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해방후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 시켰습니다. 교회의 분열로 교파가 갈라지는 등의 문제와 서로 정죄하는 이전 투구하는 양상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독립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하나가 되어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나라가 오늘의 삶을 살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우리가 엄청난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정말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일성수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십일조생활을 통해 오늘의 물질적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열심히 기도운동을 하여 한국의 유명한 새벽기도는 어느 민족도 감히 흉내내기 어려운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갖고 지금까지 기도를 해옴으로써 수많은 이적과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런 엄청난 복을 받았으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10절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우리는 부지런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갖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지금까지 이렇게 잘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되돌아보면 1980년대까지는 그래도 신앙생활을 잘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높이 평가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오늘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7-9절 말씀처럼,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사실 초근목피로 살았던 우리 선조들, 봄만 되면 보리생산이 되기까지는 굶주림의 삶을 살았던 보릿고개,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야말로 풍성함 자체입니다.
문제는 이런 삶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것인가가 우리의 관심사항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성도들은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며 살 때, 즉 잘살고 번성한 삶을 살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뭔지 아세요?
여호와의 명령에 불순종하거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11절 말씀,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왜 교만에 빠지는지 아세요? 모든 누리는 삶이 자신들이 열심히 일했고 자기들이 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2-14절 말씀에서도 계속 우리의 약점을 말씀하면서 염려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지금까지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게 하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많은 이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우선은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끌어 내시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많은 이적과 기적을 보여주셨고 마지막에는 장자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재앙을 겪게 할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린 양의 피 공로로 죽음의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피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피를 흘리면 반드시 살 수 있습니다. 피를 흘리면 재앙을 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흘림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구속의 은혜를 받게 되지만 거기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우리의 삶에서 희생이 필요할 때 희생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죽음과 같은 고난을 피하게 해주십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경험해 보세요. 피의 댓가를 치루면 하나님은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물질의 피를 흘리면 반드시 갚아주십니다. 30배,60배,100배를 거두게 하십니다. 생명의 피를 흘린 곳에는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된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위험한 광야에서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될 때 쓴물을 단물로, 반석에서 물이 나게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만나를 먹이시고 메추라기도 먹이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해주신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주도면밀한 섭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오게 하신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재물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내가 한 것은 없습니다. 이점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재물을 모았을 때 자신이 열심히 일했고 안쓰고 알뜰하게 모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우리들에게 17-18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풍성한 삶을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약속하신 것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 가지 더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잃어버리면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19-20절 말씀, “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어떻습니까? 우리가 일제 36년의 식민지의 삶에서 해방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해방되기까지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복음이 이 땅에 심어지고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세우시사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셨고 그로 인하여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조국해방을 위해 헌신자들을 많이 세워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1,2차 세계전쟁을 통해서도 많은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피를 흘리게 하시고 그로 인하여 이 민족에게 엄청난 해방의 기쁨을 우리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오직 주님밖에 없음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여 주일성수와 십일조생활을 잘 해왔습니다. 그로 인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었음을 믿습니다. 소득이 2만불 시대를 넘어 3만불 시대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인구로 보면 세계 25번째이지만 경제규모로는 12번째입니다. 그러나 지급부터가 중요합니다. 해방의 기쁨을 누리면서 그동안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걱정하셨던 것처럼 우리나라가 그런 전철을 밟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주일성수에 생명 걸지 않습니다. 재적교인의 주일 낮 예배출석 참석율이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60%가 안됩니다. 십일조생활도 철저하지 못합니다. 정확하게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충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기도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원이 문을 닫고 수련장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기도모임, 부흥회를 가져도 성도들의 참여율이 현격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결국 우리의 삶을 퇴보케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걱정하며 주신 말씀을 듣고 정신차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으로 살아서 하나님이 주신다고 약속하신 복을 지속적으로 누리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나라가 그렇게 되도록 한국교회 성도들이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는 신앙이 지속되도록 전도하는 일에 생명걸기를 바랍니다.
일마나 걸으라
신명기 8:1-10 / 스테반황목사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의 여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그려 놓은 책입니다. 출애굽기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의 여정을 자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폭군 애굽왕 바로 밑에서 식민지로 있으면서 온갖 모욕과 조롱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괴로움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 구원하여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여주셨습니다.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왕 바로를 향해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유월(Passover)의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홍해가 앞에 가로놓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적으로 홍해가 갈라지고 그 홍해를 마른 땅 같이 건널 수 있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기쁨이 너무나 커서 찬송하며 소고를 치며 감사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의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기쁨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후, 홍해를 지나자마자 광야가 그들 앞에 놓여있는 것을 알고는 광야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불평하고 하나님을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광야를 통과시키는 하나님의 목적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을 훈련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훈련을 통해 온전하고 의젓한 천국 백성을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후 약속하신 풍성한 가나안 땅의 축복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주의 뜻을 거스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절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신명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별 설교를 합니다. 그는 이제 인생의 나그네 길을 마치고 조금 있으면 저 세상으로 갈 것입니다. 모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과 함께 인생을 걸어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신 8:1)
이 말을 마친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길로 인도하신 목적을 설명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2-3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광야 길로 인도하신 목적은 그들을 낮추시며 참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는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광야를 통하여 우리를 낮추시길 원하십니다. 겸손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내 스스로 교만하게 서 있지 않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순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매우 교만하여 스스로 낮아지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음 전체에 교만이 스며있기 때문에 겸손해지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그의 백성을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해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거기서 주의 백성들을 낮추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을 믿고 자만하였던 요셉을 노예와 죄수의 길을 걷게 하심으로써 겸손케 하셨습니다. 애굽의 황제가 될 수 있던 모세를 향해서는 그를 주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기 전에 살인자라는 죄수가 되게 하여 광야로 도피하게 하신 후 겸손케 하셨습니다. 거의 흠도 없는 다윗에게는 밧세바 사건을 허락하심으로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세상 지식과 철학, 그리고 율법에 통달하였던 바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흉칙한 그러한 가시를 허락하심으로 교만해지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를 절대로 사용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연약한 자, 부족한 사람, 가난한 사람에 상관없이 순수한 믿음의 사람을 사용하시지만, 교만한 자 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결단코 허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도하고 원하는 일들이 되어지지 않고, 나아가 사업에 실패 하고, 심지어 건강을 잃고, 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을 받으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배웁니다.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자신을 정직하게 점검하게 되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겸손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시는 첫째 이유는 우리를 겸손케 만드셔서 진정한 복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이 많은 광야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우리의 영혼에 참 만족이 없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광야의 기간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배가 부른 사람들은 영적인 기갈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세상적으로는 뭔가 있는 것 같지만, 영적으로는 천박해 집니다. 게으르고 건방지면, 고집과 위선과 자기 의와 교만이 가득하여 하나님 보시기에는 꼴 불견의 사람이 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참한 고통 속에 처하게되면 하나님의 음성은 큰 파도소리 같이 크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자녀가 병이 들고, 사업이 부도가 나고, 결혼 문제가 벽에 부딪쳤을 때,
특히, 스스로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들립니다. 스피커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큰 소리로 들립니다.
이때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면서, 예수께서 말씀으로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말씀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허망한 세상에서 나와 예수님을 믿을 때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을 한참 하다보니 날마다 일상적인 삶을 살게 되면서 점점 하나님의 말씀에 구미를 잃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광야를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한번 갈급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양식이 아니면 아무것도 채울 수 없는 심한 영적 기갈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우리를 주께로 돌아오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입니다.
드디어 주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엄청난 기적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은 만나의 기적입니다. 이 만나는 본문 3절을 보면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기적”입니다. 비록 육적으로는 풍성치 못한 기간이지만 그러나 믿음의 선조들조차 알지 못하던 하늘의 만나를 맛보게 되는 엄청한 축복의 장소가 광야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의 인구는 장정만 60만이요,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약 200만명이 넘었습니다. 이 모든 사람이 광야에서 음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 처음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염려하는 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내일 당장 이 광야에서 굶어 죽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음식을 제공하였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채워주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광야에서 매일 주시는 하늘의 만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재미난 것은 "만나"라는 음식은 안식일 전날이 아니면 하루 이상의 음식을 쌓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독안에 보관을 하여도 썩는 것이 만나였습니다. 욕심을 낼 수도 없고, 쌓아 놓을 수도 없는 것이 만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루 하루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는 기적이 만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의 기적을 베푸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 쌓아놓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옆 사람을 위하여 함께 거두어야 하는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기만을 위하여 사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이제 더욱 하나님 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가운데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는 그러한 성숙한 백성이 되어가는 과정이 광야의 만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려고 우리에게 광야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굶주리신 가운데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사탄의 유혹하였습니다.
“배가 지독하게 고픈데 이 돌로 떡을 만들어 떡으로 배를 채우라.”
주께서 이 때 오늘의 말씀 신명기 8장 3절을 인용하여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이와 같이 광야를 지나게 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잠깐있다 사라지는 떡을 위하여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신학 6년 기간 동안은 경제적으로 광야의 기간이었습니다.
아이가 셋 있었는데 직장을 내려놓고 신학을 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광야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6년 동안 경험한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하루 하루 만나를 보내시며 구체적으로 도우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제 개인에게 있어서도 그러한 광야의 기간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훈련의 기간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셋째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시는 목적은 우리가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내 자신의 무능함을 깨닫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체험으로 깨달아 알게 됩니다.
신명기 8장 15절을 보니,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다”라고 합니다.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이 광야입니다. 광야는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앞을 보아도 막막한 사막이요 뒤를 돌아보아도 막막한 돌짝 밭입니다. 옆을 보면 끝없는 가시 밭과 자갈 밭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이 닿는 곳까지 멀리 쳐다보아도 어디서 이 광야가 끝나는지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이러한 지겹고 고통스러운 삶이 끝까지 언제까지나 계속 되어질 것처럼 보이는 곳이 광야입니다. 따라서 그 누구라도 기력이 상실되며 소망을 상실하고 마침내 기대를 잃게 되어 포기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다윗도 이러한 상황을 경험하고 시편 38편을 썼습니다.(시 38:6-10).
이처럼 광야는 우리를 지치고 곤비케하고 낙담케하는 장소입니다. 만일 그곳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하면 절대로 걸을 수 없는 곳이며 계속해서 걸을수 없는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광야에서 주님의 도움과 능력과 위로의 필요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광야는 불뱀과 전갈이 있는 위험한 곳입니다. 만일 앞으로 조금만 발을 잘못 내디면 불뱀과 전갈에게 물리게 되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날카로운 독침을 준비하여 나를 쓰러뜨리려는 그러한 원수들이 수도 없이 많은 곳입니다. 마치 서커스의 줄을 타는 것처럼 위험한 상황입니다.
이때 주의 백성들은 광야에서의 위험을 느끼며 주님을 의뢰하게 됩니다. 더욱 주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게 되고, 주께서 친히 나의 발걸음을 하나 하나 인도하실 것을 간절히 소원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믿고 구하는 자를 보호하시고 그의 안전을 지켜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체험하며 오직 주 안에서만 안전을 느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인생의 광야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6절을 보니, 우리는 이러한 광야를 지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우리 인생 가운데서 가장 큰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인생 마치는 그날까지 주님 품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 경외함을 터득한 사람들은 사실 신앙에 있어서 모든 것을 다 배운 것과 다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함에 이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맘껏 사용하십니다. 맘껏 복을 베푸십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교만하거나 불신하거나 불순종하거나 원망하거나 미워하거나 좌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외라는 뜻은 깊은 마음으로 존경하며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고, 날마다 온갖 좋은 것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다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감사치도 아니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그 좋은 것들을 다 받아 누리면서도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지,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인간들은 가장 어리석으며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일들이 잘 풀리면 언제나 교만과 욕심과 쾌락과 권력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패망합니다. 이는 그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배은 망덕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를 지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소중하며,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광야의 연단 기간 동안에 주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그 영혼 속에 있는 죄성과 불순물들이 제거됩니다. 점점 거룩하여지며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갑니다. 그 동안 숨겨져 있었던 자신 속의 이기심, 정욕, 탐욕, 분노, 참지 못하는 마음, 교만함, 부정한 모든 것들을 보게 되면서, 이제 광야 가운데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주님께 드리게 되면서 정결하게 나옵니다.
광야의 극심한 상황을 통하여 우리는 참으로 내 자신이 어떠한 자인지를 깨닫게 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을 발견하면서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드디어 우리는 주님의 연단을 받아들이며 오히려 그 연단을 감사하게 됩니다.
주께서는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징계하셨는데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5-6절).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이 훈련의 목적입니다.
이처럼 광야는 네 가지의 훈련을 제공합니다. ‘겸손, 말씀으로 사는 삶,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 만을 의지하는 삶, 하나님 경외함’.
우리는 광야 훈련을 돌아보면서 그 훈련을 통하여 내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아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광야는 진정한 축복의 장소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 즈음 되면 이제는 심지어 광야 속에서라도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과 그분의 함께 하심을 체험하며 모든 환경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기간 동안 한 번도 연약하여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 증거가 4절입니다.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또한 15-16절입니다.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이러한 기적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기적 외에 가능하지 않은 일들입니다.
이제 연단의 목적인 여호와 경외함에 이른 사람들에게 주께서 상을 베푸십니다. 선물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7절 이하입니다.(신 8:7-10).
아름다운 가나안 땅!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맑은 샘물이 있습니다. 그곳은 더 이상 목마름과 갈증이 없는 곳입니다. 그곳은 결핍이 전혀 없이 자족과 만족이 차고 넘치는 곳입니다. 온갖 종류와 과실과 먹을 것이 풍성합니다. 배고픔과 염려가 없는 곳입니다. 거룩하고 청명합니다. 맑은 땅이며 기름진 곳입니다. 저주가 없습니다. 수고한 것의 열매가 백배 천배 만배로 맺혀지는 풍성한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찬양과 감사가 저절로 나오는 곳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천국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광야를 거치게 하며 그곳에서 훈련 받게 하시고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함에 이르면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명의 시인이 지은 “발자국”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다 아실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바닷가에서 주님과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살아왔던 여정들이 모래 위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인생 여정의 모래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한 사람의 발자국은 내 발자국이고 다른 발자국은 주님의 발자국이구나. 내가 인생을 살 때 늘 내 곁에서 나와 동행하신 주님이셨구나. 감사합니다. 주님”
그런데 인생의 이곳 저곳의 노정에서 한 사람의 발자국뿐이 없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생각해 보니, 그때는 병들었들 때, 대학에 낙방했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사랑하는 자에게 배신을 당하였을 때, 앞길을 모르고 방황할 때에, 참으로 어려웠을 때, 고통 중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주님께 질문합니다.
"주님! 내가 평안할 때는 주께서 나와 동행하는 삶을 사시더니, 내가 외로울 때, 고통 속에 있을 때, 병중에 있을 때, 어려움을 당할 때, 왜 그때는 나와 함께 하시지 않고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때 주께서 잔잔한 웃음 가운데 대답하십니다.
"사랑하는 친구야! 네가 평안할 때, 네 혼자의 힘으로 스스로 인생 길을 걸어갈 때, 나는 네 옆에서 걸어 주었다. 그러나 네가 병중에 있을 때, 네가 쓰러 졌을 때, 네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 네가 여자에게 차여 괴로울 때, 인생의 길을 걷고 싶지 않고 이불 속에 좌절하여 누워 있을 때, 네 스스로의 힘으로 더 이상 인생 길을 걸을 수 없을 때, 그때 나는 너를 안고, 그때 나는 너를 업고 걸었다. 저 한 사람의 발자욱은 너의 발자욱이 아니라 나의 발자국이란다.”
그렇습니다. 광야는 위험한 곳입니다. 뱀과 전갈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치고 쓰러 졌을 때, 헤메일 때,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안고 엎고 걸으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선포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 1:31).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외칩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맞서겠는가?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서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그 모든 것을 다 주시지 않겠는가. 그런데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하리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셨는데, 감히 누가 우리의 영혼을 찬탈할 수 있겠는가?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고 계시는 데, 감히 누가 그 위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낼 수 있는가? 환란인가 역경인가, 헐벗음이냐”
이 시간 십자가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는 광야가 그 어떤 험한 광야 길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 누구도 우리의 소망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잃지 않기 바랍니다. 환경을 보지 않기 바랍니다. 그 대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바랍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십니다. 성령께서 기도하십니다. 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켜주십니다. 도와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께서 여러분의 귓가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피 흘렸다. 너희를 위하여 다시 살아났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고 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한다. 심지어 너희가 지쳐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쓰러져 있을 때에도 나는 너를 위하여 눈물과 탄식으로 기도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선포하십니다.
“내가 내 영원한 독생하는 아들까지 네게 주었는데, 설마 너를 이유없이 광야에 두었겠느냐? 인내하고 참으려 나를 경외하라. 내가 지켜 주겠다. 도와주겠다. 모든 것을 주겠다. 믿음을 잃지 말거라.”
인생의 광야는 우리의 인생이 마치는 그날까지 광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분만을 의지한다면, 그분은 여러분을 안고 걸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업고 걸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반드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영원한 큰 복과 영광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기 바랍니다. 그분을 경외하기 바랍니다. 그후 이 광야 인생 속에서 승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큰 영광을 누리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종종신앙
신명기 8:1-6 사도행전 2:43-47 / 곽건용 목사
예수께서 부활하신지 50일 후 제자들이 성령을 충만하게 받은 오순절을 흔히들 교회의 생일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좀 더 범위를 넓혀서 교회를 ‘하나님의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한다면 교회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오래 됐습니다. 첫 교회는 출애굽 한 히브리 노예들의 공동체라고 하겠습니다.
고대 중동지역의 종교는 예외 없이 ‘종족종교’(tribal religion)였습니다. 곧 당시 종교는 자기 종족만을 위한 신을 믿었다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한 분 하나님, 보편적인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각 종족은 예외 없이 자기 종족을 위해 존재하는 신, 자기 종족 편을 들어주는 신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 시대에는 모두가 그랬습니다. 자기 종족의 경계를 넘어서서 모든 사람의 신이란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 머리에는 보편적인 신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구약성서도 그랬을까요? 그렇습니다. 구약성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도 종족신앙의 범위를 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도 야훼 하나님을 자기 종족만을 위한 신으로 믿었던 겁니다. 다른 종족들은 야훼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여겼기에 그들은 다른 종족에게 야훼를 믿으라고 권하거나 강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야훼신앙에는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야훼가 ‘노예들의 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고대 중동문화권에서 ‘노예들의 신’은 야훼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야훼 역시 이스라엘만을 위한 신이었고 그들을 편들어주는 신이긴 했지만 이스라엘은 왕, 귀족, 평민, 노예로 이루어진 계층사회가 아니라 전적으로 (해방된) 노예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고 야훼는 그런 노예들의 신이었다는 겁니다. 야훼가 편들었던 집단이 짐승보다 나을 게 없는 대접을 받았던 노예였던 겁니다.
이것은 대단한 파격이었습니다. 비록 야훼신앙이 종족신앙이긴 했지만 그 신앙을 가졌던 집단이 계층이 뚜렷하게 나눠져 있던 종족이 아니라 노예들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는 사실은 종족종교 안에서 대단한 파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을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엘리트 교육을 받은 모세의 인도 아래 해방시키셨던 겁니다. 모세가 죽을 뻔 했다가 이집트 공주에게 건져져서 왕궁에서 성장하면서 이집트 최고의 교육을 받았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성장한 후 자기가 히브리 노예의 자손임을 알게 되자 모세는 그들과 동질감을 갖게 됐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왕궁에서 나와 광야로 쫓겨났습니다. 만일 그가 이렇게 하지 않고 이집트 왕궁에서 남은 생을 보내기로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게 훨씬 더 쉽게 살아가는 길이었을 겁니다. 모세의 처지에서 그처럼 결단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 많지 않은 겁니다. 모세의 결단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땅 정복 아닌 공동체 건설
야훼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거기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는 오랫동안 살고 있던 종족들이 있었습니다. 가나안의 일곱 족속 말입니다. 야훼는 그들을 몰아내라고 명령했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리 명령했을까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거기서 호의호식하란 뜻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땅주인을 교체하려는 게 목적이었다면 야훼에게 새로운 게 없습니다. 갑이란 족속 대신 을이란 족속에게 땅을 주는 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겠습니까. 야훼의 목적은 단순히 땅주인을 교체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야훼가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켜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은 다른 족속의 압제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거기서 하나님의 계명에 기반을 둔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땠습니까? 야훼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공평하게 땅을 나눠 갖고 왕 없이 평등하게 2백년을 지냈습니다. 결국 그들은 다른 족속들처럼 왕을 세우고 그의 지배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말입니다. 왕을 달라는 백성들과 야훼 중간에서 중재역할을 했던 사무엘이 고통을 호소하자 야훼는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주어라. 그들은 네가 싫은 게 아니라 내가 싫어서 저러는 거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이스라엘은 다른 족속들과 똑같이 성전을 짓고 거기서 살진 짐승을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야훼에 대한 충성을 표현했습니다. 다른 족속들이 믿던 종족신앙과 다를 게 없어졌습니다. 이에 야훼는 계속해서 예언자들을 보내 당신이 뭘 원하는지, 야훼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야훼가 원하는 것은 실진 제물이 아니라고 외쳤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 야훼가 원하는 것이라 외쳤습니다. 이 점을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미가 예언자의 선포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6-8).
결국 이스라엘은 모든 걸 잃었습니다. 남은 것은 오로지 ‘땅’뿐이었습니다. 사실 땅도 잃어버렸지만 땅에 대한 집착은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 야훼가 그들에게 주신 게 땅만은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했던 가나안 땅에 대한 집착이 유독 강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지 못했는데 야훼가 주겠다고 약속한 ‘땅’이 ‘은유’(metaphor)였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물론 가나안은 물리적인 땅입니다. 야훼는 그 땅을 그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땅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음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 겁니다. ‘약속의 땅’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이 물리적인 땅일 뿐 아니라 은유적 의미를 갖는 땅, 곧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영적인 의미의 땅’이었던 겁니다. 해방된 노예들에게 남이 갖고 있던 땅을 주는 게 야훼의 목적이었다면 그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겠습니까. 그것이 출애굽의 목적이었다면 그것은 ‘선수교체’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다른 종족의 신앙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입니다.
야훼가 원한 것은 땅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다가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땅은 은유적 의미를 가졌던 겁니다. 물리적인 땅뿐 아니라 ‘가치’까지를 의미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야훼 안에 있는 가나안’을 찾았어야 했는데 ‘가나안 안에 있는 야훼’를 찾으려 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지적한 사람이 있었는데 전적으로 옳은 말이라 하겠습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셨던 것은 ‘당신 안에서’ 가나안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이라는 땅 안에 들어가서 거기 어딘가에 계시는 야훼를 찾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가나안 안에서 야훼를 찾으려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태가 벌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땅을 독점하겠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참혹한 살인극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축복의 독점이 아니라 축복의 통로 되기
요즘 팔레스타인 사태가 벌어니까 고대 이스라엘과 지금 이스라엘은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교적 진보적인 목사들과 학자들에 의해 이전 주장이 이루어지는데 저는 이게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이나 지금 이스라엘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야훼가 원하는 게 땅을 차지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가나안 족속을 도살했는데 지금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란 얘기입니다. 저는 이들이 왜 그렇게 주장하는지 압니다.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은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현대 이스라엘과 같지 않다고 주장함으로써 성서와 이스라엘을 옹호하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야훼가 원하는 것은 땅을 차지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 상황이 이렇게 됐을까요? 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요? 야훼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를 통해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는 ‘통로’로 삼았습니다. 모든 족속이 그를 ‘통해’ 복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특권’을 누리는 것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복을 독점하는 게 아니라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게 하는 복의 통로가 되는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와 다른 길을 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나라의 청사진이 어떤 것인지 세상에 보여줬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참여하는 ‘잔치’ 같은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가진 자든 못 가진 자든 비장애인이든 장애인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님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나라 복음이었습니다. 거기엔 어떤 자격이나 조건 같은 것이 없습니다.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회개해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회개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라는 거죠. 그럴듯합니다. 예수님도 회개하라고 외치셨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외친 회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입학시험’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이 두려워서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를 맛본 사람이 자기 과거를 부끄러워하고 참회하고 거기서 돌이키는 걸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회개와 다른 사람이나 종교가 내세우는 회개가 여기서 갈라집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과 같은 의미의 회개를 외치지는 않았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닥쳐온 심판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당시 세상에 보여준 것은 차별 없음과 장벽 무너뜨리기, 그리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형제자매 되기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임을 보여주는 표징이었습니다. 여기에 그 어떤 특권이나 독점 같은 것을 위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믿음은 비기독교인들은 누릴 수 없는 기독교인만의 특권이 아니었고 구원을 얻는 조건도 아니었습니다.
지금 교회 상황은 어떻습니까? 거칠게 요약하면 그동안 교회는 예수께서 무너뜨린 것들을 하나하나 다시 세워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교회에 차별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날 교회엔 갖가지 차별이 존재합니다. 남녀차별은 물론이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별, 성적 지향의 차이로 인한 차별 역시 말할 것도 없습니다. 또한 오늘날 교회 안에서 교인들은 진정 형제자매입니까? 그것은 오직 호칭으로만 남아 있는 게 아닐까요? 좋게 보려고 해도 오늘날 대부분 교회는 예수께서 무너뜨린 것들을 다시 세우는 집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집단은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집단은 예수의 교회가 아닙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고 싶습니다! 저는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정들을 다 안다고 해도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 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줄곧 교회 아닌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돌이키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교회 되기가 불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지 않습니까.
잠자고 있는 이타심 깨우기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이 삶을 움직이느냐, 삶이 생각을 움직이느냐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몸의 일부가 뜨거운 것에 닿으면 순간적으로 움츠립니다. 무엇이 갑작스레 눈앞에 다가오면 눈을 감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훈련을 통해 눈감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눈을 감습니다. 반사신경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반사신경은 사람이 오랫동안 진화해온 결과로 생겨나 유전시켜온 겁니다. 사람이 위험을 느꼈을 때 그걸 피하는 건 당연한 행동이란 얘기입니다. 위험 앞에서는 머뭇거릴 이유도 여유도 없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다른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사람이 보이는 행동은 반사신경의 지시와 반대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사람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대부분은 순간적으로 갈등합니다. 순간적이지만 자신의 안전과 상대방의 급박함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이런 경우 타인의 위험을 전적으로 외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개는 잠시라도 갈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어떤 사람은 타인의 위험을 모른 척 넘어가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위험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구하려 합니다. 후자도 자신에 대한 보호본능이 없을 리 없지만 그래도 움츠려들지 않고 남을 구하러 뛰어듭니다.
무엇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안전을 돌보지 않고 타인을 돕게 만들까요? 세월호 참사에도 남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남윤철, 최혜정, 이해봉 선생님은 학생들을 구하다 죽었습니다. 양온유, 김주아, 최덕하, 정차웅 학생도 친구를 구하다 꽃 같은 청춘을 마감했습니다.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내의 바람으로 도망칠 때 양대홍 사무장과 박지영 승무원은 승객을 구하다 목숨을 잃었고 김기웅, 정현선 커플도 같은 일을 하다가 목숨을 바쳤습니다.
‘강남좌파’라는 말이 있습니다. 강남에 사는 부자가 좌파성향을 갖고 있을 때 그를 강남좌파라고 부릅니다. 강남 사는 부자와 좌파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데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강남좌파는 많은 걸 가졌으면서 좌파성향을 가질까요? 왜 그들은 부자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염려하고 그들 입장을 옹호할까요? 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대주교라는 자리에 있었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고 편들다가 총 맞아 죽었을까요? 그러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는데 왜?
누구나 짐작하듯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입니다. 자기밖에 모른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기본적으로는 남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게 사람입니다. 생존을 위한 긴 진화과정에서 그렇게 발달해온 것이겠죠. 하지만 동시에 사람에게는 이타적인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손해를 무릅쓰고 남을 돕기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남을 구하기도 하는 게 사람입니다. 이런 성향은 어디서 생겼을까요?
이타적인 면이 무슨 돌연변이 같은 게 아니라 본래부터 사람 유전자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이타심이란 게 있다는 얘기죠. 저는 학문적으로 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지만 경험으로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타심이란 게 있지만 그것이 환경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한다는 거죠. 여기서 환경이란 탐욕을 키우는 이기적인 환경, 돈이면 모든 게 용납되는 물신주의적 환경을 가리킵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사람의 유전자 안에 있는 이타심이 기를 펴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잠자고 있는 이타심을 깨워주면 그것은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잠자는 이타심을 깨우는 일 말입니다. 물론 교회가 독단적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교회의 주님인 나사렛 예수께서 그런 일을 한다고 믿습니다. 교회는 이렇듯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물 주고 거름 줘서 이타심을 기르는 곳이고 그렇게 삶으로써 예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지요.
오늘 읽은 사도행전 2장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여줍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초대교회가 이런 모습을 오래도록 유지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 기간이 길지 않았더라도 초대교회는 이런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이 기억으로 남아 후대에 전해졌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로부터 시간적으로나 장소로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리네 유전자 어딘가에 그들의 업적이 기억으로 남아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번 가을에 하려고 준비하는 두 가지 행사가 또 하나의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는 행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광야생활이 주는 축복
신명기 8:1-3 / 이충섭 목사
한 젊은 화가가 자신의 작품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다고 스승에게 불평했습니다. "스승님, 저는 2-3일에 걸쳐서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데 그 작품을 팔려면 2-3년이 걸립니다."그러자 스승은 젊은 화가의 등을 토닥이면서 말했습니다. "이보게 한 작품을 2-3년에 걸쳐서 완성해보게. 그럼 2-3일만에 팔릴걸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의 40년은 낙심과 고통, 눈물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여정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이 숨어있습니다. 하나님이 광야길을 걷게 하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겸손하게 하시려고 광야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랜 노예생활로 인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오면 하나님과 지도자를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낮추셔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게 하시려고 광야의 길을 걷게하셨습니다.
본문 2-3절 말씀을 보면 두 번에 걸쳐 ‘너를 낮추시며’란 표현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고난을 통해서 낮추십니까? 그래야 진짜로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축복의 근원이고 교만은 만병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겸손해지기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주님은 스스로의 성품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2가지로 요약했습니다(마 11:29). 결국 온유함과 겸손함은 성도가 추구해야 할 최대 성품입니다. 그 성품이 없으면 하나님은 그 성품을 주시려고 때로 징계와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사람이 겸손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상처도 상처가 되지 않고, 실망도 실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그 마음이 복된 마음이 되겠습니까? 성도는 있어도 겸손하고 없어도 겸손해야 합니다. 있다고 해서 없는 자를 무시하는 교만도 없어야 하지만 없다고 해서 한이 맺혀서 있는 자를 무조건 비판하는 것도 교만도 없어야 합니다. 교만은 행복과 건강을 파괴하는 세균입니다. 교만은 고난을 초래하게 하지만 겸손은 고난을 물러가게 합니다. 결국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건강과 축복의 최대 비결이고 가장 소중한 삶의 지혜 중의 하나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온전히 순종하는지 보시려고 광야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동입니다. 또 온전한 순종이 하나님의 온전한 복을 받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역경 속에서도 의지적인 믿음으로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누리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왜 순종하라고 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삼고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축복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생명과 번성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1절). 말씀대로 될 것을 믿고 순종할 때 기적의 역사는 나타납니다. 결국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인정하고 순종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이제 주님 말씀이 들려지면 항상 “예!”하고 반응하십시오. 시간과 물질과 생명을 바치는 일에도 “예!”라고 반응하십시오. 이 세상에 가장 복된 사람은 말씀의 감동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먼저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서라면 아무 것도 아까운 것이 없어야 하고, 주님이 무엇을 원하든지 “아멘!” 하고 순종하십시오. 그때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셋째,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보면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시며 여러분과 여러분의 조상들이 전에 먹어 보지 못한 만나를 주어 먹게 하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것은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셨습니까? 전쟁놀이를 가르치려고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습니까? 아니면 담력훈련 시키려고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전여행하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먹고사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때, 만나가 새벽마다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 만나는 결코 자연의 소산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급해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만나는 매일 아침 하늘에서 내리던 음식이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가운데에서 어디를 바라보겠습니까? 하늘을 바라볼 것입니다. 땅에는 아무 것도 없고, 날마다 하늘에서 음식물이 쏟아지면 당연히 하나님만 의지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사방으로 완전히 둘러 쌓여 꽉 막혀 있고 뚫린 곳이라곤 하늘밖에 없다면, 여러분들은 어디를 보겠습니까? 당연히 하늘을 바라 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광야생활을 하게 함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가르칩니다. 물질을 통해서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가르칩니다. 건강을 잃게 하심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가르칩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가르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지도 거두지도 안했지만, 40년 동안 먹고 살았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의지할 때에, 주님이 주시는 축복 가운데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광야학교에 입학시키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도 마귀의 시험을 같은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시지 않는다면 다 죽습니다. 그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진정한 양식입니다. 고난을 통해 겸손과 순종을 배우고 생명력있는 말씀의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은 지금도 원하고 계십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십니다.(잠17:3) 무릇 광야의 길(징계)이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습니다(히12:11).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요23:10)
광야로 내보낸 자식은 콩나무가 되었고, 온실로 들여보낸 자식은 콩나물이 되었다는 시가 있습니다. 자식을 품 안에 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때로는 광야로 내보내 찬이슬 길도 걷게 해야 합니다. 젊은 시절의 시련과 도전은 인생의 좋은 보약입니다. 지금은 울어도 훗날에는 웃습니다.(시편 126:5)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5:13)
광야의 길은 우리를 겸손케 하며(대하33:12),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합니다.(신4:30) 광야의 길 뒤에는 상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벧전1:7) 그러므로 사람은 고난을 겪을 때마다, 그것이 참된 인간완성의 계기임을 알아야 합니다.(롬5:3-4, 벧전4: 12- 13)
광야 길을 기억하라
신명기 8:1-6 / 배진기 목사(안디옥교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 중의 하나가 망각과 기억입니다.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만 주
어졌다면 우리 인생은 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삶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이
있고 잊어버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것에 혼란을 가져와서 잊어야 할 것들을
기억하게 만들고 기억해야 할 일들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 버리
도록 유혹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오히려 오해하도록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기억하라고 명하신 것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
성들을 출애굽 시키면서 본문2절 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
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왜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까?
애굽에서 가나안은 걸어서 가도 사흘 길 뿐이 되지 않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곧바로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40년 동안 살기 어
려운 광야의 길로 인도 하셨을까요?
예레미야 애가3:33 에 보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
시로다." 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우리가 고생하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그 택하신 백성들을 광야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하나 뿐이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생명까지 내놓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왜 우리의 인
생길이 광야와 같아서 고난과 어려움이 많을까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천국
으로 바로 가게 하지 않으시고 광야 길로 인도하시는 데에는 하나님의 큰 뜻이 있습니다. 하나
님은 결코 그의 자녀 된 우리가 광야 길을 가므로 고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광야 길에
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낮추시므로 온전케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인도하셨다면 사흘 길에 지나지 않는 길입
니다. 그런데 그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내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2절,3절 에 반복해서 "너를 낮추시며"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기 위함이 광야 길을 허락하신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신명기8:16절 에도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라고 거듭 말씀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이 교만한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겸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면 우리는 언제나 온유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
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하십니다. 우리는 자연히 진노하
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시는 교만은 무엇이고, 겸손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잘된 줄 아는 것입니다. 반대로 겸손은 모든 것이 하
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하나님을 잊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
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5:10 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여기에 바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인정하는 바울의
겸손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겹쳐서 다가와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감사할
수 있는 심령이 바로 진정한 겸손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가 됩시다. "이것
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 명령하신 성찬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예식입니다.
둘째로, 순종하게 하심으로 온전케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케 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2절 하반부 를 보시기 바랍니다.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때때로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시험하십니다.
그 옛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만일 아브
라함에게 그러한 시험이 없었더라면,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
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
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광야에는 어려움과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있습니다. 광야에는 만
나와 메추라기가 있으며 반석에서 솟는 물이 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와 보호가 있
습니다. 옷이 헤지지 아니하고 신이 닳지 않는 하나님의 배려가 있습니다.
지금 힘든 광야 길을 걷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과 믿음이 얼마나 순수
하고 진실한지, 그것을 알아보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시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럴수록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힘들다, 못살겠다, 죽겠다!" 이런 생각들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살고, 번성하고, 차지하리라 이것이 순종하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떤 성도가 등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산에 오르다가 미끄러져서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바위 틈에서 자라는 나뭇가지를 잡을 수 있어서 허공에 매달리게 되었습니
다. 위를 보니 까마득한 정상에 구름만 감돌고 있었고 밑을 보니 험한 계곡에 바위 사이를 흐
르는 급류만 보입니다. 그는 위를 향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외쳤습니다. “나 좀 도와주세요.
위에 누구 없습니까?” 한참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구름 사이로 세미한 음성이 들
려왔습니다. “아들아! 두려워말라!”. “누구십니까? 나 좀 빨리 도와주세요”이때 구름 사이로
다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나는 네가 믿는 하나님이다. 너는 나를 믿고 잡고 있는 나뭇가지
를 놓아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 한참을 생각하던 이 성도는 외쳤답니다. “그 위에 또 다른
분은 없나요?”
여러분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 하십니까?
하나님은 이것을 확인하시기 원하십니다. 보통 때의 순종은 누구나 가능합니다. 평범한 환경
속의 순종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 속의 순종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길을 통해 우리의 순종여부를 측정해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순종의 백성
으로 만드셔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식인종이라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성찬의 명
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12 에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라고 분명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종교 다원주의와 종교 일치의 대타협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
로 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타협할 수 없는 구원의 조건에 철저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오직 예
수! 오직 십자가! 이것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의 조건입니다.
오늘 성찬을 나누면서 우리의 순종을 증명해 보입시다.
셋째로, 오직 말씀의 사람으로 만드심으로 온전케 하기를 원하십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
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아는 사람은 나를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
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그들
을 광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것을 바라보지 않도록 하나님은 광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다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셨던 것입
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좀 더 성숙한 모습이 되도록 훈련시키시고 연단시
키셔서 마침내는 그들에게 큰 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오직 하나의 규준을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직 말씀 중심의 사람이 됩시다.
그냥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인정하는 것은 신심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
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말씀을 믿고 영생의 양
식으로 삼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길가에서 과일을 파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성경을 읽고 있다가 손님이 온 것도 모
르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손님은 무신론자였습니다. 그 무신론자는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일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소녀가 성경을 읽고 있다고 하자 “누가 그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고 이야기해주었니?” 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저에게 말씀하시는데요” “뭐? 하나
님이 네게 말씀 하신다고? 말도 안돼. 네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보았다는 말이냐?” 그러자 소
녀가 물었습니다. “아저씨 누가 태양이 있다고 이야기해주던가요?” 아저씨가 대답했어요. “그것
은 당연한 것 아니니? 태양 바로 그 자체가 이야기해주는 것이지 자 봐라 우리가 태양 빛을
통해서 보고 태양의 따뜻함을 느끼고 있지 않니?” “그래요 아저씨 말씀이 옳아요. 아저씨가 태
양을 그렇게 보고 느끼듯이 저는 하나님을 그렇게 보고 느껴요”
여러분은 말씀의 빛과 열기를 이 소녀처럼 느끼며 살고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1:3 에 “이 예
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 성찬을 나누면서 오직 말씀의 은혜를 의지하여
살기를 결단합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던 하나님이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여 40년
을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인생의 광야 길로 인도하심에도 이
유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시험해 보시고 거기에 합당한 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적으
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성찬을 나누면서 우리를 광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는 백성들이 됩시다.
낮아집시다. 순종합시다. 말씀의 사람이 됩시다.
왜 광야 길을 걷게 하실까?
신 8:1-6 / 송기정 목사
어느 유명한 부부 배우가 이혼을 하면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 라는 말을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최무룡, 김지미).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한다는 것은 이상합니다. 그런데 사랑하기 때문에 고생을 시키는 경우가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고생을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광야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광야길을 걷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고생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광야 길 40년을 결코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광야 길을 걷게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백성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라며 광야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생각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광야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잘 기억하고 깨닫는 자라야 하나님께 복을 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왜 광야 길을 걷게 하실까?
우리를 낮추시며 시험하사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신명기 8:1-2의 말씀입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그 백성에게 그들이 마땅히 지켜 행해야 할 계명을 명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살고 번성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그것을 차지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직접 들어가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사십 년 동안이나 광야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을 낮추시며 시험하사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왜냐하면 겸손과 순종이 없으면 은혜와 축복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I Know how stubborn these people are. 신9:13)이었습니다. 하나님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성민’, 또는 ‘자기 기업의 백성’ 으로 기뻐하시고 택하신 것은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아서가 아니였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적은 민족인 이스라엘을 기뻐하시고 선택하신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그들을 사랑하심을 인하여 였으며, 다른 하나는 그들의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그들을 그 종 되었던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시고 인도해 내셨던 것입니다(신7:6-8).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이 곧은 백성은 이 모든 것을 마치 자기 손의 능력으로 된 것으로 자만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염려하였던 것이 바로 그 백성의 교만과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왜 사십 년 동안에 광야 길을 걷게 하셨는지 기억하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엠 알 디한(M.R.DeHAAN)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의사였는데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된 후 의사를 그만 둔 그는 첫 번째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일 년쯤 지나서 그 교회에서 쫒겨나고 말았습니다. 다혈질의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회의 때마다 참지 못하고 불같이 화를 냄으로 배척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설교도 잘하시고, 성경도 잘 가르치시는 분이었지만 두 번째 교회에서도 또 쫒겨 났습니다. 그는 자기의 성질 때문에 사람들과는 더 이상 일을 못하겠다고 생각하며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두 번씩이나 교회에서 쫒겨난 목사의 생활은 한 마디로 말해서 광야 길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격을 탓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성격 때문에 사람과는 함께 일을 못하니 마이크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라디오 방송으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라디오 성경교실’(Radio Bible Class)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발전해서 라디오 사역, TV 사역, 문서 출판 사역,「오늘의 양식」사역으로 3대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엠 알 디한 박사,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은혜로 생각한다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항상 무릎을 꿇게 됐고 ‘이 난폭한 성격을 고쳐주소서! 변화시켜주소서!’ 라며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60세가 되니 조금 부드러워졌습니다. 저의 약점인 성격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으나 이로 인해 오히려 겸손해졌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멘!
존 번연은 “모든 시험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든다” 라고 했습니다. 광야길의 시련과 시험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과 순종을 익히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야고보서 4:6-7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며,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에게 마귀를 대적할 수 있게 해주시는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광야 길을 걷게 하실까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겸손과 순종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많이 받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도 많이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2. 왜 광야 길을 걷게 하실까?
우리를 가르치시며 훈련하사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신명기 8:3-4의 말씀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낮추시고 시험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리게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물론 그들의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옷도 해어지지 않고 발도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가르치시며 훈련하사 그들로 하여금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믿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의 교육과 훈련이 없으면 은혜와 축복도 받을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였습니다(신8: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성민’, 또는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기뻐하시고 택하신 것은 그들이 다른 민족 보다 신앙심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수 없이 불신하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불신앙적인 민족인 이스라엘을 기뻐하시고 선택하신 것은 두 가지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그들을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경외하는 백성으로 만들기 위함이고 (신8:6), 다른 하나는 영원히 복을 받고 (신5:29)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6:24).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그들을 그 종 되었던 애굽 왕 바울의 손에서 속량하시고 인도해 내셨을뿐만 아니라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상 숭배에 익숙한 이 백성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염려하였던 것이 바로 그 백성의 불신앙과 우상 숭배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왜 사십 년 동안에 그들에게 광야 길을 걷게 하셨는지 기억하라고 역설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교회 김상복 원로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1939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가족과 함께 산정현 교회를 다녔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조만식 장로님 같은 분들의 순교 신앙을 보고 자란 그는 학교 조회 시간 때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서 있었으며, “자신의 영웅이 누군지 쓰라”는 문제의 답으로 ‘김일성 장군’이 아닌 ‘예수님’ 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일 성수 때문에 학교에서 매를 수 없이 맞기도 했습니다. 6.25 전쟁 때 부모님과 동생들을 두고 남하한 그는 온갖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인생 자체가 수 많은 마디가 매인 밧줄 같았습니다. 겨우 하나가 풀리면 또 다른 마디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서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마디는 결국 풀린다’ 는 인생의 지혜를 배웠습니다. 피난을 온 부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싶었습니다. 형님들은 “서울이 어디라고 네가 서울엘 간다는 거냐? 네가 서울에 아는 사람이 있냐? 아니면 돈이 있냐? 말도 안 된다!” 라고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렇지만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밤 기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로 향한 그는 차 안에서 하나님께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서울에 아는 사람도 없고 돈도 한 푼 없습니다. 저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하나님이 계시니, 하나님이 도와주세요, 하나님이 저 공부시켜주세요!”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는 경복고등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등록금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등록 마지막 날까지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분명히 그의 마음에 들려 왔습니다. “너 학교에 가서 돈 없다고 해라.” 그는 학교에 가서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 교무주임 등 7명의 학교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 가서 인사를 하고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평양에서 왔습니다. 부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이 고등학교에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등록금이 없습니다. 교장선생님, 저 공부하고 싶습니다. 공부시켜주십시오.”
결국 등록금을 면제 받고 공부를 계속하게 된 김상복 목사님의 광야 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그가 되었노라면서 「고난은 있어도 절망은 없다」는 책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사람의 일생에 어려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시련과 아픔이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고난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께 소리 높여 기도할 수 있는 기회와 동기가 되는 것이지요. 가난해도 괜찮고, 부모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은혜의 빛이 비칩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과정이 훗날 하나님의 종으로 쓰시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과 준비 과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난 후에는 하나님께 깊이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멘!
조지 뮬러는 “걱정의 시작은 믿음의 끝이며, 진정한 믿음의 시작은 걱정의 끝이다”라고 했습니다. 광야 길의 고난과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합니다. 신명기 8:5-6에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광야길을 걷게 하심으로 훈련시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지하게 하심으로 복을 받게 해주시는 줄 믿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광야 길을 걷게 하실까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의 훈련과 연단을 받음으로써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인생의 고난과 시련을 이기고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크게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왜 지난 사십 년 동안 광야 길을 걷게 하셨는지를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광야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의 동기는 사랑입니다. 광야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인격과 신앙의 훈련입니다. 그리고 광야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축복이며, 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 길을 걷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항상 되새기면서 광야 길에 친히 동행해주시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축복과 기적을 능히 체험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왜 광야인가?
신명기 8:1-10 / 김철한 목사(오목천교회)
이스라엘 백성은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게 된다. 그 땅은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이다. 신8:7~8을 보면 그 땅을 가리켜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고 하였다. 그 땅은 바로 가나안인데 신8: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고 하였다. 얼마나 멋진 옥토이며, 반드시 들어가야 할 땅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 여기 이 아름다운 땅에 대한 소개를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광야에 머물러 있다. 아직 그들의 광야 생활이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광야에 머물게 하시는가? 어차피 가나안 땅을 주실 하나님이신데 서둘러 주시지 않으시고 왜 광야에서 40년간 지내게 하시는가?
광야는 힘든 곳이다. 길도 보이지 않고 삶의 환경이 너무도 어려운 곳이다. 보이는 것은 누런 모래 바람과 모래 언덕과 모래로 이루어진 외로운 곳이다. 그야말로 파종할 곳, 씨 뿌릴 곳도 없다.마실 물도, 무화과도, 포도도, 석류도 없다. 광야는 없는 것 투성이다. 그런데 없는 것 투성이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곳이 광야이다. 그러므로 광야는 가나안과 다르다. 가나안에서 누리려는 것을 여기 광야에서 구하고 누리고 취하려고 하면 안된다. 광야는 오직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다. 살아남기 위해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고 작은 그늘에 감사하고 이슬에 감사하고 장막에 머물면서 감사한다. 광야는 죽을 수 밖에 없는 환경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는 여건들을 만난다는 것, 그것 때문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곳이다. 그 모든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의 은혜로, 도우심으로 살아남기 때문이다. 가령 광야에서의 로뎀나무, 광야에서의 이슬, 광야에서의 생수, 광야에서의 만나, 광야에서의 구름 기둥이 없었으면 목 말라 죽고, 머리가 뜨거워서 죽고, 배고파서 죽고, 낮의 해에 상해서 죽을 터인데 이 죽음의 광야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이 어려운 광야를 빨리 지나가게 하기는커녕 40년간 머물러 있게 하셨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자.
1. 광야는 하나님이 머물게 하시며 인도하신 곳이다. (신 8:2上)
신8:2上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에 머무는 것에 대해 ‘왜’라고 질문한다면 하나님이 광야를 걷게 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가 알다시피 출애굽을 한 히브리 백성들은 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 하루 길이었다고 신1:2에서 밝히고 있다. 직선 길로 나아가면 40년이 아니라 40일이면 충분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이 백성들을 하나님은 광야로 인도하시고 광야에서 40년간을 맴돌게 하셨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라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그러나 그 원망은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를 때 나오는 불평이다.
하나님은 광야의 시간을 마련하는데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우리는 ‘지금’이라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내일’이라 생각하고 계시고 우리는 ‘빨리 빨리’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천천히 천천히’라고 생각하신다. 우리는 한꺼번에 정상으로 도약되기를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부분적으로 조금씩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 그래서 광야를 40년간 맴돌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사실 출애굽 한 이 백성이 직선 거리로 단 번에 가나안으로 향하려면 블레셋 족속을 만나게 된다. 철기 문화의 꽃을 피우고 초생달 반도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 블레셋과 부딪히면 히브리 백성들은 완전히 좌절한다. 이제 노예 생활을 벗어나 홍해를 건넌 이들로 조직, 군대, 질서, 훈련 등이 전혀 갖춰지지 못한 이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군대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성장하도록 기다려야 하고 훈련이 끝날 때까지 블레셋을 만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래서 우회로 돌리고 광야로 들어가서 머물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아프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광야로 인도하는 것이 최선이기에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이다.
인생은 영적으로 말하면 광야 인생이다. 무엇이든지 내 맘대로 되지 않고 내가 가지고 싶어하는 것은 금방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광야가 있기에 광야에 머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된다. 오히려 삶에 광야가 없는 사람은 축복의 사람이 아니다. 고통의 광야, 외로움의 광야,모든 것이 부족한 광야, 생존도 어려운 광야, 그 광야에 머물므로 새 사람이 된다. 수 년전 아프리카 케냐로 단기선교를 떠난 한 청년이 소똥 집에 머물면서 새 사람이 되었다. 밥 한 술에 감사하고 물 한 모금에 감사하여 신학하러 영국으로 갔다. 이처럼 광야는 은혜를 알게 하는 곳이다.
광야를 원망하지 말자. 광야에 들어가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고 거기서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고 살아남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알면 눈물이 난다. 감사가 생긴다.
2. 광야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곳이다. (신 8:2下~3)
신8:2下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하였고, 신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의 목적,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히브리 백성들의 말씀에 대한 태도를 알려고 광야에 두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히브리 백성들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알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광야는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게 만드는 훈련소라는 말씀이다. 이처럼 광야는 목적이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는 곳이다.
① 교만을 꺾고 겸손히 낮추게 만드는 학교다.
광야 훈련소에 머물지 않으면 사람은 낮아지지 않는다. 고통과 괴로움 속에 머물 때 교만은 부러지고 하나님의 살려 주심을 구하는 겸손한 무릎이 된다.
② 마음과 신앙을 똑바르게 세우는 학교다.
광야 훈련소는 항상 시험이 있다. 네 마음이 하나님을 향했는지, 등을 돌렸는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던 것을 감사하고 있는지, 감사하는 것마저 원망하고 있는지, 광야의 고통과 괴로움으로 항상 내 마음을 달아본다. 가벼운지, 무거운지, 변덕스러운지, 진중한지를 시험한다. 마음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명령에 대해 소홀한지, 아니면 붙들고 의지하고 있는지 말씀에 대한 태도의 기울기를 놓고 시험한다.
광야 훈련소만큼 마음과 신앙을 시험하여 똑바르게 세우는 학교가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되려면 신학대학교를 졸업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믿음과 마음을 시험하고 연단하는 광야학교를 수료해야 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을 지냈기에 광야학교 조교가 되었다.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 광야에서 지냈기에, 바울이 아라비아 광야에서 지냈기에 영성 훈련의 조교가 되었다.그래서 자기 시대, 자기 백성의 가이드가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참된 음성을 듣고자 하는 이들은 광야로 갔다. 성 안토니가 수도원의 아버지인데 그 뒤를 따라 모든 영성가들이 사막으로 갔다. 우리도 광야학교를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목적 하에 훈련을 받고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
③ 말씀으로 사는 사람이 되게 하는 학교다.
사람은 광야 훈련소를 통과해야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알게 된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지, 음식을 구하고 떡을 구하듯이 말씀의 만나를 매일 먹고 살아야지 하는 단호한 결심이 서 있는 사람은 광야학교의 목적에 와 있는 사람이다. 결국 광야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나를 말씀의 사람으로 만들고 다듬는 학교다. 그러므로 광야에 던져진 인생의 고통을 감사하자.
3. 광야는 쌓는 곳이 아니고 지나가는 곳이다. (신 8:4)
신 8: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광야 40년, 참으로 긴 한 세대의 시간이다. 그 한 세대가 다 끝나는 시간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은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신다. 즉 40년이란 한 시대 동안에 쌓아올린 업적이나 성공의 탑을 말씀하지 않는다. 너는 광야를 지나가도록 보호를 받았고 은혜로 돌봄을 받았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함은 생존할 수 있다는 말이다. 광야의 시간들을 이기고 지나올 수 있었다는 말이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함은 광야에서 살아남았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광야는 걸어서 통과하는 곳이지 그 광야에서 무엇을 쌓아올리는 공적의 집을 짓고 성공의 집을 짓는 곳이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란 광야를 살고 있는데 이것을 모르고 자꾸 나의 성공과 업적을 쌓아올리려 한다. 그래서 광야를 주신 하나님의 인도를 거절한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신 8:9-11 / 장경준 목사
오늘의 본문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을 당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 때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을 들립니다.
1. 핵심을 다시 견고히 잡아라
흔히 어려움을 당하면 앞이 캄캄해 집니다. 나아갈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되고 하던 일의 기능이 마비 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어려움이란 실패를 수반하기만 할까요? 아닙니다. 성공의 동기가 되기도 합니다.
토마스 칼라일은 “어둠이 깊어지면 영원한 별들이 비친다”고 했습니다. 항해사는 동서남북을 분별 할 수 없는 망망대해에서 폭풍을 뚫고 목표를 지향해 나갑니다. 어려움을 당한 순간 그 곳에서 흔들리지 않는 삶의 목표를 잡으면 어려움을 이기게 됩니다.
어려움을 당한 가정, 직장, 사업 등에서 잡아야 할 목표는 무엇입니까? 어려움을 당 한 곳에서 그 중심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효과적으로 살아왔는가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삶의 모든 관계를 생산적으로 일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가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려움 가운데서 신앙적인 목표를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중심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며 교통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가치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을 위해 내 삶이 효과적으로 살아왔는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내 삶에 관계된 모든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을 위해 재정립 돼야 하지 않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작곡가 헨델은 건강이 매우 나빴습니다. 그는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급기야 재산을 모두 탕진하기에 이릅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남의 돈을 빌려 썼습니다. 그러나 건강도 찾지 못했고 돈도 갚지 못했습니다. 결국 반신불수의 비참한 상태로 헨델은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그는 불행했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헨델은 그 때 관념 속에만 계시던 하나님을 만났고 그가 남긴 불후의 명작인 <할렐루야>를 작곡한 곳도 바로 그 감옥입니다. 연주를 들으며 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폭풍우가 몰아닥치면, 즉시 예수를 쳐다보시지 바랍니다.
2. 어려운 상황에 대응하는 준비를 하라
성공이 아니 후퇴에 직면하게 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확한 판단을 취해야 합니다.
(어려움을 이기기 위한 충고)
1. 미리 겁내지 말고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하라/어둠이 깊어지면, 사람들은 별들을 볼 수 있다. -랄프 왈도 에머슨-
2. 머리를 사용하라. -생각하라.
3. 현실의 문제를 확대해석하지 말라. -사실만 보라.
4. 어려움을 시각화하라. -하나씩 분석하여 적어보라.
5. 지난 것은 접어두고 현 위치에서 문제를 파악하라.
조지 허버트란 사람은 “태풍은 참나무로 하여금 뿌리를 깊숙이 뻗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어려움은 더 견고한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는 기회입니다. 원인을 파악하고, 창조적 아이디어 창출하고, 문제를 제거하고, 긍정적 전환을 시도하십시오.
전환 성격을 잘 잡아야 합니다. 오늘을 충실하게 생활 하십시오. 결코 내일부터 시작하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작은 한 순간들이 쌓일 만큼 쌓여질 때에 새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믿으십시오. 계속 생각하고, 계속 믿고, 계속 일하고, 계속 기도 하십시오 . 울며 씨를 뿌리는 사람이 기쁨의 단을 거두게 됩니다.
만일 사전에 가능성 있는 모든 반대들을 제거하려면 아무 일도 시작하지 못할 것입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시면 시작하는 순간마다 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3. 협력적 시도를 행하라
한 통계에 의하면 어려움에서 벗어난 동기의 80.6%가 누군가의 도움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도움을 준 사람 가운데 75%는 이미 아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원하십니까? 그 성공의 여부는 사람관계에 있습니다. 이미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이 곧 어려움에서 자기를 벗어나게 할 사람입니다.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을 협렵적 관계로 바꾸는 일을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 주변 사람과의 새 목표를 정하시고 일보다 새 관계 형성에 힘을 쓰십시다. 변화된 자신의 뜻을 알리고, 새 관계 타협을 하고, 새 시도를 기꺼이 시작하십시오. 어려움이 거치기 시작 할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함께 더불어 일하는 일을 잘 합니다. 남을 유익하게 하십시오. 그 결과는 나를 돕는 것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더불어 함께 모두가 잘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이념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인류 공동체적인 사명에 강하게 잡힐수록 어려움을 극복하고 큰 인류적 성취를 합니다.
고민은 때로 우리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인생의 위대함은 절대로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올 때마다 다시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 어려움 속에 숨은 삶의 목표를 확인하십시오, 문제를 확인하고 대안을 세우십시오, 새로운 시도에 주저하지 마시고, 협력하여 모두가 잘 되는 헌신을 이루십시오... 어려움을 극복하고 모든 일이 잘 되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신 8:7-10 / 정인용 목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에 대한 약속을 해주셨지만, 그 땅에 대한 약속은 50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약속의 땅은 약속과 함께 바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400년 동안을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고 난 후에 주어졌으며, 거기다가 40년의 세월 동안 이스라엘은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에서 고난의 세월을 지낸 후에야 가나안 땅이 주어졌습니다. 그런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목이 곧고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먼저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후에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비로소 가나안 땅을 주신 것입니다. 그 가나안 땅을 가르쳐서 성경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이스라엘 땅은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땅은 작고, 보잘 것 없고, 쓸모 없는 척박한 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땅을 두고 구약성경에서는 축복받은 땅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현재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그 땅은 분명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생각할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성경에서는 그 땅을 가르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애굽에서 425년 동안이나 종살이를 하고, 또한 광야에서 40년 세월을 떠돌이 민족으로 살아온 그들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은 분명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해 왔습니까? 아브라함 이후로 그들은 한 평의 땅도 없이 사는 떠돌이 민족이었습니다. 땅이 없으니 정착하지 못하고 방랑하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사람이 죽어도 장사 지낼 땅 한 평조차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을래야 농사를 지을 땅이 없으니 양을 치면서 이곳 저곳을 방랑하는 유랑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광야라고 하는 곳을 우리는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광야에서 40년을 살아온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을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광야의 현실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 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신 8:15)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간조하다는 말은 물이 없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광야는 일교차가 심한 지역입니다. 낮에는 40도가 넘는 불볕 더위가 있는 곳입니다. 사람이 반바지를 입고 햇빛이 내리쪼이는 광야를 걸어가면 지면에서 올라오는 지열로 인해서 다리에 화상을 입게 되는 곳이 바로 광야인 것입니다. 광야는 밤이 되면 그 얼굴을 바꿉니다. 밤이 되면 광야는 기온이 급강하하여서 영하의 추위가 몰려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는 겉옷을 담보로 잡힌 사람이 있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율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면 얼어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들은 광야 40년의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더위와 추위에 시달려야 했겠습니까?
광야의 위험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광야에는 불 뱀과 전갈이 있는 곳입니다. 불뱀과 전갈은 맹독성을 품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한번 물리면 바로 죽고 맙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생활에서 제일 힘든 것은 먹을 것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무엇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얻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것입니다. 먹을 것을 구할 길이 없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광야는 [광대하고,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신 8:15)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은 더욱 컸던 것입니다.
그런 고생과 고난 속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낸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단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정착해서 살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 땅이 비옥한 땅이냐? 혹은 기름진 땅이냐? 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고난을 체험해 온 그들에게는 어떤 땅이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은 그 땅을 보고 너무 놀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민 13:27)]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가나안 땅은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아니었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척박한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500년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난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는 그 작고 보잘것없는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일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그 땅이 얼마나 척박한 땅이냐? 하는 것은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보면 잘 알게 됩니다. 오늘의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첫째로 이스라엘 땅은 물이 귀합니다.
성경의 말을 빌리면 이스라엘 땅은 간조한 땅입니다. 간조하다는 말은 물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물이 없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디에다가 관정을 해도 물이 흔하게 나오는 우리 나라의 형편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건물을 지으려고 땅을 조금만 파도 물이 솟아나서 건축을 하는데 방해를 받는 우리들로서는 물이 없다는 말을 당연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형편은 우리와는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우물이 몇 개 있느냐?] 우리에게는 매우 우스꽝스런 질문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우물은 단 한 개밖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는 그 샘의 이름을 [기혼샘]이라고 했습니다. 기혼 샘은 이스라엘에서 제일 중요한 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과 전쟁을 하면 제일 걱정되는 것이 바로 이 기혼 샘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샘은 예루살렘 성밖에 있었기 때문에 이 샘을 빼앗기면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이 없으니 전쟁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을 할 때마다 이스라엘은 이 샘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성밖에 있는 단 하나의 우물은 이스라엘의 생명줄이었습니다. 그 샘을 지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수많은 피를 흘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왕이 바로 히스기야 왕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예루살렘 성안에서부터 굴을 뚫어서 터널을 파 나갔습니다. 성안에서 성밖에 있는 기혼샘이 있는 곳까지 터널을 파서 연결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성 안에서도 터널을 이용하면 성 밖에 있는 물을 구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전쟁이 터져도 이 히스기야의 터널을 이용하여 성 밖에 있는 물을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이 터널을 만들었다고 해서 이 터널의 이름을 [히스기야의 터널]이라고 합니다.
그 만큼 이스라엘에게는 물이 귀중했습니다. 물은 생명과 같은 것인데 그 물이 너무나 귀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를 때에도 솔로몬은 바로 이 기혼 샘에 와서 기름부음을 받게 됩니다. 기혼샘 밖에는 물이 있는 곳이 없기 때문에 솔로몬은 이곳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예루살렘은 다른 방법으로 물을 끌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사정은 예전과 같지는 않지만 예전에는 바로 이 기혼샘이 예루살렘 사람들의 생명 샘이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에게는 물이 귀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한마디로 말하면 물을 구할 수 없는 간조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니 물을 구할 수 없는 땅이 어떻게 축복받은 땅이라 할 수 있으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로 이스라엘은 건조한 땅입니다.
얼마나 건조한 땅이냐? 다음의 이야기를 들으시면 이스라엘 땅이 얼마나 건조한 땅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원본은 없고 사본만 있습니다. 사본 중에서 제일 오래된 것이 사해 사본입니다. 사해 사본은 사해 근처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지요. 역사적으로 가장 고고학적인 가치가 있는 발견은 바로 이 사해 사본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해 사본은 얼마나 오래된 것이냐? 약 2000년 전의 것으로 봅니다. 이 사해 사본은 양피지에 기록되었습니다. 때문에 이 양피지가 우리 나라처럼 습기가 많은 지역에 있었다고 한다면 불과 얼마 되지 않아서 썩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는 사해 사본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해 사본은 1947년에 목동에 의해서 우연하게 사해 근처의 동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양피지에 쓰여진 성경 말씀이 어떻게 2000년 동안이나 보존이 가능했겠습니까? 기후가 건조한 땅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기후가 너무나도 건조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2000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습기로 인해서 썩지 아니하고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단적으로 그 지역이 얼마나 건조한 지역인가를 말해 주는 대목입니다. 처음 이 사해 사본이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가치를 몰랐습니다. 이 사해 사본을 발견한 목동은 그 사본을 가지고 가니까 사람들이 돈을 주고 사게 되는 것에 재미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목동은 돈을 더 받기 위해 사해 사본 두루마리를 여러 개로 나누어서 팔았습니다. 가져갈 때마다 돈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쪼가리를 내어서 팔았기 때문에 현재는 그것을 다시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는 사해 지역이 얼마나 건조한 지역이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건조하기 때문에 성경 사본인 사해 사본이 동굴 안에 있는 항아리에서 2000년 동안이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물이 귀하고 건조한 지역입니다. 이렇게 물이 없는 땅, 건조해서 먼지만 풀풀 거리는 땅을 어떻게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땅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의 땅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땅은 분명히 척박하고 보잘 것 없는 땅이었으며, 물이 없고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그렇게 보잘 것 없고 척박한 땅을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땅은 점차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3000년 전에,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땅을 바라보면서 그 땅을 가르쳐서 이르기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는데, 오늘날 실제로 이스라엘은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3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러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척박하고 쓸모 없는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 가고 있느냐? 먼저 이스라엘은 쓸모 없는 광야를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도 가장 건조하고, 나무가 없고, 물이 귀한 지역이 바로 남쪽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네겝 광야]입니다. 네겝 지역을 사막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땅은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네겝]이란 말은 황무지를 일컫는 말입니다. 네겝 지역은 이스라엘 전 국토의 25%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으로 이곳은 엄청나게 더운 지역입니다. 푸른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지역입니다. 모자를 쓰지 않거나 물을 가지지 않고, 이 지역에 들어가면, 일사병에 걸려서 죽을 수 밖에 없는 곳이 바로 이 네겝 지역입니다. 한마디로 이 지역은 쓸모없는 땅이요, 버려진 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48년에 이스라엘이 독립을 했을 때, 가장 강조한 것은 바로 이 네겝 지역을 개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미래는 네겝 황무지에 달려 있다}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네겝 황무지를 개간하느냐? 개간하지 못하느냐? 에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가 좌우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네겝지역을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황무지와 사막을 개발하는데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물이었습니다. 네겝 지역은 전혀 물을 구할 수 없는 지역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 물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고안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유일한 수원지는 바로 북쪽에 있는 갈릴리 호수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풍부한 물을 네겝 지역에까지 끌어들이는 계획을 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바다보다 해발이 낮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갈릴리 호수의 물을 대형 터빈으로 끌어올려서 그 물을 수로를 이용하여 네겝 지역까지 그 물을 끌어 드렸습니다. 그 수로의 길이가 무려 200km나 됩니다. 200km의 수로를 따라서 흘러간 물은 네겝 지역에 세워진 수많은 키부츠 농장에 공급되어 졌습니다. 물이 너무나도 귀하기 때문에 그 물은 링거를 통해서 식물의 뿌리마다 공급하는 새로운 농사법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도 물이 모자라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막과 황무지 땅 밑에 흐르고 있는 지하수까지 개발하게 됩니다. 사막 아래에서도 석유가 나오는 것처럼, 100M 이상의 땅 속에서 지하수를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홍해와 같은 바다 물에서 짠 기를 다 빼낸 다음에 물을 공급하는 방법까지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공급된 물을 가지고 네겝 지역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농사를 지어 보니까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농사가 너무나 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유를 물어 보니까 그 네겝 황무지는 토지 자체는 매우 비옥하다는 것입니다. 토지는 좋은 토지인데, 물이 없기 때문에 그 땅이 쓸모 없는 토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물을 대고 농사를 지어 보니까 농사가 엄청나게 잘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이 곳에 밀을 심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모작만 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의 경우는 일년 내내 더운 지역이기 때문에 3모작이 가능합니다. 여기에서 풍성한 밀을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네겝 지역은 버려진 땅이었는데, 이스라엘은 이 버려진 땅을 지금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밀농사를 한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적인 연구를 했습니다. 연구를 해보니까 이 네겝 지역의 토양에는 보리나 밀과 같은 곡식이 적당한 것이 아니라 과일 나무를 재배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이 네겝지역에서 온갖 과일을 재배합니다. 오늘도 이 네겝 지역에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과일이 출하됩니다. 심지어는 우리 나라 사람이 먹는 감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의 감은 꿀덩어리 같다는 것입니다. 건조한 지역에서 생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충분하게 햇빛을 받으니 당도가 매우 높은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이 네겝 지역에서는 오렌지, 바나나, 사과와 같은 종류의 아주 맛있는 과일들이 바로 이 네겝지역의 농장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 과일들은 잘 포장되어져서 유럽 각국에 수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네겝지역에서 생산된 과일은 욥바라는 항구를 통해서 유럽 지역에 수출됩니다. 욥바항구라고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바로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른 곳으로 도망가려고 했던 곳이지요. 그래서 외국으로 나가는 과일들은 욥바를 통해서 나가기 때문에 그 과일에는 {욥바}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됩니다. 이 마크를 달고 각종의 과일이 유럽 각국으로 팔려 나갑니다. 특이 이스라엘에서 재배되는 과일 가운데 오렌지는 아주 유명합니다. 이 오렌지가 바로 이 욥바를 통해서 유럽 일대로 팔려 나가는데, 유럽에서 제일 맛있는 오렌지를 찾으려면 {욥바} 오렌지를 찾으면 틀림없다고 합니다. 바로 이 과일이 쓸모 없다고 버려졌던 네겝 광야에서 재배된 과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또 다시 새로운 것을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꽃입니다. 꽂을 일년 내내 재배해서 최근에는 유럽 시장에 내다가 파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유럽 사람들이 아주 꽃을 좋아했습니다. 유럽 지역은 날씨와 기후가 좋지 않기 때문에 꽃을 보기를 즐겨 했습니다. 날씨가 좋지 않으니까 꽃을 보면서 마음의 위로를 얻었던 것입니다. 과거에는 [꽂]하면 네덜란드를 생각했습니다. 풍차가 돌아가고 꽃으로 둘러싸인 네덜란드라는 나라가 과거에는 유럽의 꽃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습니다.
그것이 1980년 중반에 와서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키운 꽃이 점점 시장을 확보해 나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1980년대 후반에는 유럽 지역의 꽃 시장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석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꽃이 바로 네겝 지역의 사막에서 재배된 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한 대로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나고, 장미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는 말씀이 오늘날에 와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런 쓸모 없는 네겝지역이 이제는 점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매우 놀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사실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함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하나님은 정확하게 지키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한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분임을 보게 됩니다.
오늘 성경 말씀 신명기 8:7-11절의 말씀은 30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주셨던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3000년 전에 이 말씀을 받았을 때에 이 말씀은 엄청난 축복의 말씀이었습니다. 외형적으로 보기에 가나안 땅은 척박한 땅이요, 쓸모 없는 땅이요, 버려진 땅이요, 희망이 없는 땅이었지만, 당장에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죽음의 고생을 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그 땅은 분명 축복의 땅처럼 보였습니다. 광야에서 너무나 고생을 하면서 고난에 처했던 그들에게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그 땅은 축복의 땅이었지만, 우리가 객관적으로 보기에 이스라엘 땅은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본문 말씀은 3000년이 지난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은 오늘의 역사 속에서 그 축복을 이루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하여금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놀랍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3000년 전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에 그대로 실현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전혀 쓸모 없는 땅 네겝 지역이 푸른 옥토로 바뀌고 각종 실과와 곡물이 가득한 곳으로 바뀌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3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고 있는 민족혼을 보이고 있습니다.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을 그들은 믿음과 신앙으로 극복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희망이 없으면, 희망을 만들었습니다. 광야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산이 놓여 있으면 터널을 만들어서 길을 뚫었습니다. 네겝과 같은 황무지, 전혀 쓸모 없는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꿈이 없는 곳에 꿈을 심어야 합니다. 비전이 없는 곳에 비전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희망이 없으면 희망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 위에 굳게 서서 그 약속을 굳게 믿고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의 꿈과 비전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오늘 교회의 주보를 보시면 알겠지만 이제 우리 교회는 새로운 일을 펼치려고 합니다. 설립 11주년을 맞이하는 2002년도에 장로를 피택하려고 합니다. 그 동안의 가은교회의 역사 속에서 원로장로이신 강영성장로님과 심홍택 장로님의 수고와 노고가 너무나 컸었습니다. 이상호 목사님의 수고 또한 매우 컸습니다. 성도들의 희생과 노력 또한 매우 지대했습니다. 이 분들을 통해서 기초가 모두 다져졌으니 이제는 이스라엘 민족들처럼 꿈과 비전이 있는 가나안 땅을 향해서 우리의 힘을 결집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번 기회에 우리 교회가 가나안 땅을 향해서 한 발자욱 앞으로 전진하는 귀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많은 교회들이 장로 피택의 문제 때문에 시험에 들고 어려움에 빠지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좀더 하나님 앞에 성숙한 모습으로 바로 설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공동 의회를 미리 공고하는 것은 우리가 이 중요한 일에 온 교인이 기도로써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당회는 이 문제를 심사숙고하면서 기도 중에 결정했습니다.
이스라엘 땅이 오늘날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기까지는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위대한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다음 주에 인물에 관한 말씀을 드리겠지만 우리 가은 교회도 이번 장로 피택을 통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회의 꿈과 희망에 한발 짝 다가서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의 은혜가 가나안 땅을 향해 힘차게 진군하는 모든 가은 교인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