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렝게티 진화론
신생대를 거쳐 온 대평원에는 오랫동안 질서가 유지되었다. 어느 날부턴가 대평원에는 밤낮없이 천둥이 치고 붉은 비가 내렸다. 여기저기 물웅덩이가 생기고 붉은 빗물이 고여갔다. 대평원의 짐승들은 붉은 물을 마시며 근근이 목숨을 이어갔다. 나무들은 잎을 떨구고 뾰족한 가시만 밀어 올렸다. 풀들은 초록을 잃고 붉은 싹을 내밀었다.
날렵한 네 다리로 초원을 내 달리던 얼룩말은 붉은 풀을 뜯더니 송곳니가 자라났고 갈기는 뾰족한 바늘로 덮여갔다. 무리가 곧 생존이던 얼룩말은 서로에게 으르렁거리며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영역을 구축해 갔다.
육중한 몸에 긴 코를 자랑하던 코끼리는 붉은 웅덩이에 진흙 목욕을 한 후 코는 점점 짧아지고 몸은 허약해져 갔다. 코가 자랑이던 코끼리는 납작코가 되어 평원 곳곳을 킁킁거리며 제병연명除病延命의 나날을 이어갔다.
백수의 왕이라 불리던 평원의 사자는 붉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다리가 길어지고 송곳니가 빠져나갔다. 포효와 위엄은 간데없고 무리 지어 다니면서 얼룩말의 눈치나 보며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목숨을 부지해 갔다.
8척 목에 긴 다리를 가진 기린은 나뭇가지 끝에 달린 뾰족한 가시를 날름거리며 먹더니 목과 다리가 점점 짧아졌다. 목이 곧 품격이던 기린은 짧은 네 다리로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며 무위도식無爲徒食의 생을 이어갔다.
20만 년이 지나고 대평원에 단비가 내렸다. 목숨을 부지한 짐승들의 일부는 두 다리를 가진 짐승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그들의 DNA는 여전히 대물림 되었다. 여전히 서로에게 으르렁거렸고 여전히 병마에 빌빌거렸으며 여전히 한 끼를 걱정하는 짐승으로 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난 놈은 여전히 놀고먹는 짐승들이었다.
펄럭이는 인사
냄비 속의 국물이 끓는다
면발이 슬픔처럼 풀어진다
뜨거운 국물을 여기서 다 퍼 날라야 하는데
청승을 앞에 두고 포장마차에 앉아
냄비 속의 뜨거운 국물을 바라보고만 있어
쫄깃한 면발은 흔들리는 이빨로 끊을 수 없어
끝을 모르는 바닥으로 내 달릴 때
깊은 바다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더 잠길 수 없는 구덩이가 파이고
너희가 맞춰 놓은 알람이 울릴 때
늦은 밤 허우적거리는 물고기가 생각날까
국물은 식을 줄 모르고 끓고
동아줄처럼 엉킨 면발은 바다에 던져지는데
국물은 바다가 되고
떨군 고개가 펄럭이는 인사를 받던 날
한 생의 깃발이 저렇게 펄럭인 적 있었나
왜 나는 요란한 기계음에 매일 눈을 뜨지
당겨도 올라오지 않는 태양은 어디로 갔지
두통이 출렁이는 동안
시름은 깊이를 모르고 심해를 헤엄치고
사직서를 앞에 두고 고개 떨굴 때
천막에서 멀어져가는 바닷소리
식어가는 국물을 다시 덥혀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펄럭이는 천막에 빌붙은 먹태와 인사하는 저녁
계간 『창작21』 2023. 겨울호.